'2016/07/02'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7.02 방언의 은사

가난했던 어린 시절 집 근처 5분 거리에는 기차 길과 야산이 있어 자주 동네 아이들과 산에 올라가 ‘칡뿌리’와 ‘쑥’을 캐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개떡’을 먹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야산에 올라가 개떡을 먹으면서 저 멀리 덜컹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비쩍 마른 ‘똥개’ 두세 마리가 나와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쉬지 않고 짖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나이에 늘 궁금했던 것은 “개들은 왜 기차만 지나가면 짖어 되는 것일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가 개들이 짖는 소리 때문에 기차를 세운 적이 없었습니다.  워낙 기차소리가 커서인지 아니면 너무 빨라서인지 개가 짖어 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달렸지 개들이 짖는다고 해서 기차를 멈추는 정신 나간 기관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도 달리는 기차를 보고 개처럼 짖어대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누군가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글을 쓰거나 ‘방언무용론’을 강력하게 주장할 때, 만약 하나님이 주신 방언의 은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개 짖는 소리에 놀라 기차를 세우는 줏대가 없는 사람일 것이고(사 26:3), 마음이 한결같고 은사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은 무슨 소리를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방언기도를 할 것입니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키고 난 뒤 목욕물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부모가 없듯이 방언에 몇 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고 해서 방언 자체를 포기하거나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교훈하면서(고전 14:39),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당부하고 있는데(고전 14:40),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경건’ ‘조심’ ‘절제’ 만을 강조한다면 교회는 “성령이 없는 죽은 정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정통’, 분명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복음적인 사람들 각자에게도 가장 큰 위험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죽은 정통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합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딤후 3:5).  사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듯이 예배를 거의 장례(?)식 수준으로 경건하게 아니면 예비군 훈련이나 정신교육 받듯이 드렸는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한 느낌과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 없이 드려질 때 생기는 심각한 영적질병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빌 3:3).

 

Lloyd Jones는 『성령세례』에서 고린도교회가 은사문제로 혼란해진 것을 핑계로 현대교회가 은사문제를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에 대해 책망을 하면서 현대교회는 은사의 혼란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은사가 나타나지 않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교회가 이런 역동성 없이 마치 공동묘지의 적막함과 같은 고요가 지배하고 있다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조심’과 ‘경건’이 지나쳐서 ‘죽은 정통’ 신앙이 되는 것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이런 문제를 놓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세 장을 할애하여 성령의 은사들과 은사 활용의 가장 큰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하면서 비록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약 1:17), 사랑 안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고전 12:4-7), 이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가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10).  여기서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신약에 등장하는 전문 용어인데 이것은 학습을 통하여 습득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Gordon Fee가 말한 것처럼 성령으로 감동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고전 12:11)로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영에서 시작하는 것으로(고전 14:14), 다른 일상적인 언어사용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더 감정적일 수도 있고 덜 감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 말하기가 엑스터시적인 현상이거나 절제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은 초대교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때로는 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방언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갖도록 도와주었는데(고전 14장), 그의 교훈은 오늘날 방언을 둘러싸고 일부 교회들에서 생기는 혼란을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이 방언에 대해 Gordon Fee는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  그리고 “성령충만 하면 반드시 방언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증거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지만, 사실 성경의 증거와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가 힘든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성령의 감동과 능력이 나타나도 때로는 방언을 말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나(행 10:45-46),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방언하고 예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행 19:6), 이들이 다 방언을 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고, 어쩌면 일부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고 대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들의 일상적인 모국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언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방언하는 것이 반드시 성령충만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4절의 경우에서 성령충만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구원받을 때 신자가 조용히 성령을 받는 것(고전 12:3)과 달리 성령께서 신자의 사명 감당을 위해 능력으로 임하실 때에는(눅 24:49), 가시적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행 4:31).  사실 성령의 ‘내주사역’과 ‘능력사역’을 이해한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닌데 Lloyd Jones는 이것을 ‘일반사역’과 ‘특수사역’ 혹은 ‘간접사역’과 ‘직접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성경은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예수님의 말씀과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전 14:1)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즉 모든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 14:39).  따라서 성령은 신자들 각자에게 교회 유익을 위해 서로 다른 은사들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고(고전 12:7), 무엇보다도 교회 전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엡 4:12),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사용되도록 힘써야 하고(롬 12:5-13), 만일 신자들이 공동체에서 특정 은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신령한 은사들을 받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고후 1:11).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엡 4:7),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엡 4:7, 약 1:17).  여기에는 물론 방언의 은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 방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언에 있어 두 가지 위험성  (0) 2016.10.08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  (0) 2016.08.20
방언기도의 능력  (0) 2016.04.02
방언기도를 포기한 사람  (0) 2016.01.09
방언은 인간의 언어인가?  (0) 2015.11.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