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칭의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로마서 5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칭의의 첫 번째 결과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모든 죄책과 죄를 사면받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롬 5:1).  화평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반목이 없고 죄가 우리와 그분 사이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다(1절).  하나님과 우리의 화평은 관계적인 것만큼이나 법적이다. 

여기에 동반되는 또 한 가지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화해(和睦)이다.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이 문단에서 볼 때 칭의를 받은 신자들의 주된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다.  화목된 자들은 한때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골 1:21-22).  이들은 두 단계를 거쳐 화목케 되었다.  먼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심으로 화목을 향한 첫걸음을 옮기셨다(고후 5:19).  그 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하신 역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고후 5:20).  화목은 신자와 하나님 간의 반목을 제거하고 일치를 이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다른 번역본들과 다르게 흠정역 성경은 ‘화목’(Reconciliation)을 속죄(atonement)로 번역한다.  하지만 헬라어 단어는 <카탈라게>이다(롬 5:11, 11:15, 고후 5:18-19).  이 용어의 어원적 뜻은 양자 간에  불편했던 관계 혹은 좋지 못한 상태를 다시 회복시켜 온전한 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간에 적대적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자기희생적 사역의 결과(롬 3:25)인 화해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교리이다(롬 5:10).  칭의는 입법자이자 재판관이신 하나님(약 4:12)과 그를 믿는 백성간에 객관적 관계이다.  모든 적대성과 불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제거되었다(엡 2:11-18).  이제 남은 것은 사랑과 용서라는 상호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융화되어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의 자연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완전히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화평의 반의어는 적대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주관적 특성이 아니라 어떤 상호 관계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즉 새로운 관계가 수립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살게 된다는 뜻이다.  화평과 화해가 객관적 상호 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은 로마서 5장 10절의 진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화해 역시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되었을 때에’(골 1:2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대적 상태가 존재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골 1:22).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벧전 1:18-19).  이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화해를 위한 조건을 만족시켰기 때문이다(롬 3:25-26).  그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해서(롬 5:11),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사 53:5) 평강의 왕(사 9:6)이라는 칭호대로 삶을 사셨다(엡 2:14, 골 1:20).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양심의 평정(平靜)은 칭의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다(요 20:21, 엡 2:14, 골 1:20).  이것이 결국 화평을 낳는다(롬 14:17-19).  따라서 화해에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길이다(골 1:20). 

칭의의 두 번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로마서 5장 17절에 나와 있듯이 바울은 생명을 종말론적 축복으로 보고 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생명 안에서의 왕 노릇은 James Denney가 『St. Paul’s Epistle to the Romans, in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에서 말한 것처럼 종말론적인 메시아 왕국 안에서의 삶이다.  이것은 사망이 없는 생명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계 21:4), 그리스도의 왕권을 공유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벧전 2:9, 계 1:6, 5:10), 그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전 6:2, 15:23, 눅 12:32, 22:28-30, 계 20:4, 단 7:18, 22, 27).   

이 점은 로마서 5장 18절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두 대리자(agent)인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되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아담의 죄는 인류에게 저주를 가져왔지만(롬 5:12), 그리스도의 죄 없는 희생, 바울의 말대로 하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다’(새번역).  여기서 ‘생명’을 직역하면 ‘생명의 칭의’이다.  이 문구의 의미는 생명에 이르게 하고 생명을 낳는 칭의, 즉 ‘무죄 선언’이다(롬 4:6-8).  그러므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한다(롬 5:21). 

영생은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인 메시아 왕국의 삶이라 하더라도 현재 지상에서 영적 삶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0).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논란이 되는 이 구절은 성도의 영적 상태인 이중적 상황, 즉 죽어가는 몸과 살아 있는 영을 언급하고 있다.  주석가들은 KJV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영’이란 단어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RSV는 ‘너희 영들’이라고 번역하지만 이 단어의 원문은 단수이다.  John Stott의 말을 빌리면 육체적으로 죽어야 하는 운명 가운데서도 우리의 영은 산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시키면서 우리의 몸이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죽을 운명이 되었다고 말한다(롬 5:14, 창 3:19).  반면에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롬 5:15-18, 21), 즉 그분이 우리를 위해 확보해 주신 의로운 지위 때문에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이 말은 인간 영의 소생과 칭의가 불가분리적이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왕국이 도래하기 전에는 영생에 함축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체험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맛(?)만 보는 것이다.

칭의의 마지막 결과는 성도로서 영위하는 삶과 관계가 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리라’(롬 6:20).  바울은 죄의 종이 됨은 의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죄의 종으로 있을 때 경험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중립적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롬 6:18).  문맥으로부터 여기서 ‘의’(디카이오쉬네)는 법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죄된 욕망과 이기적인 습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의로운 삶의 종이 되었다.  즉,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선언되고(롬 3:21-22),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의로 시작된다(롬 3:28).  이 거룩은 우리의 전체 삶의 과정에 걸쳐서 얻어지며(엡 4:15-16),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분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다(엡 4:12-13).  이러한 성령의 열매 맺는 삶(갈 5:22-23)의 최종 목표는 영원한 생명이다(롬 6:22).    

사도 바울은 ‘의에 대하여 자유한’ 이 상태를 6장 19절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규명된다.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21절에서도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  성도는 몸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죄로 인하여 몸은 여전히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히 9:27).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롬 8:11).  이 성령은 우리 몸의 미래 부활의 보증이 된다(요 11:24-26).  즉 우리 몸의 궁극적 운명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이다(고전 15:12-19).  바울은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하나님의 성령(엡 4:30)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율법을 이행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이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롬 5:1)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부활 생명에 동참하게 되었다(롬 6:4).  이는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롬 8:4).  여기서 ‘행한다’(live, NIV)로 번역된 단어(peripatousin)는 ‘걷는 것’(walking)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평생에 걸친 과정임을 말해 준다. 

보충설명이 조금 필요한 것 같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두 종류의 순종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육신의 차원에 머무는 율법에의 순종(할례를 행하는 것)은 반대하지만(갈 5:1-6)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한 순종은 찬성하고 있다(갈 5:25).  후자만이 율법을 이룰 수 있다.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갈 5:22-23).  성령은 율법이 우리에게 외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우리가 행할 수 있도록 내적으로 능력을 주신다(갈 5:16, 25).  우리가 영을 좇아 살 때 실제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바울의 말대로 하면 이 방법만이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하는 바가 완성된다(롬 8:4, 표준 새번역). 

사랑은 율법의 근본이다(갈 5:14).  바울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행하면 어떻게 이 율법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 율법을 인용한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롬 13:9)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인 상호 관계에 관한 모든 법을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한 구절로 요약한다.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9-10).  예수님은 사랑의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부담스럽거나 지킬 수 없을 만큼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요일 5:3).

율법이 행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겔 36:26), 인간의 존재를 새로운 창조물로(고후 5:17),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마 22:37).  그러나 이 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가능해졌다(롬 8:2).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빌 4:13).  단지 마태복음 12장 22-37절에 나오는 지옥의 판결을 피하지 못하는 독사의 새끼들(마 23:33)인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슬프게 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90여 회 이상 등장하는 ‘디카이오쉬네’의 이런 윤리적 용법은 법적인 무죄 선언으로서의 의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한글 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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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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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장로교에서 교리 표준 문서(Westminster Standards)로 받아들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써, 그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보아 받아주시는 것인데, 이는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믿음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전적인 만족 때문이다” 

인간 구원의 계기가 되어(요일 2: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엡 2:3)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칭의의 근거와 토대라면 각 사람에게 의롭다 하심을 유효화시키는 수단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서 밝힌 것처럼 오직 ‘믿음’이다(롬 4:5, 5:1).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데, 이는 믿음에 항상 수반하는 다른 은혜나 그 열매인 선행 때문이 아니며, 믿음의 은혜나 그 행위가 칭의를 위해 그에게 전가되는 방식도 아니고, 단지 믿음은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 적용하는 방편일 뿐이다”(갈 3:2, 2:16, 롬 3:28, 10:10, 빌 3:9). 

간혹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된다는 뜻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주장은 상당히 영리하고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만 칭의를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지만 죄가 없다는 판사의 판결을 받게 되는 법정적인 용어이다(신 25:1, 롬 8:1-2).  조금 풀어서 말하면 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실제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신 누군가가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 죄로부터 풀려났다는 뜻이다(마 20:28).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롬 5:9).  인간의 선한 행실과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다(딛 3:7).  따라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롬 4:1-5). 

바울에게 있어 영원한 현주소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주소 안에 이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특별한 보배가 있는데(고전 1:21) 그것이 의(義)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는 기원이 하나님이고(롬 3:21) 방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롬 3:27).  믿음(무조건적인 신뢰)는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정해진 방법이다.  그것은 자기 수양이나 절제, 신앙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빌 3:9).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롬 3:28).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 11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바울이 언급한 이 주제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은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닐뿐더러, 이것은 선지자들의 글에 나타나며 유대인 신자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으며(롬 5:8), 그 대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롬 4:5).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될 때 결코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법이 없다(롬 5:6).  우리는 늘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사랑하는 것이다(롬 5:10).  이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롬 3:2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by faith from first to last, NIV)라는 표현(롬 1:17)은 원문에서 문자적으로 ‘믿음에서부터 믿음에까지’(from faith to faith)로 번역된 것을 의역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향해’(through faith for faith, NRSV)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from first to last, NIV) 즉, 삶 전체를 통해 진행되는 계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믿음에서 나는 것이다. 

구속에 관한 위대한 논증에서도 바울은 믿음의 역할을 반복적으로 역설한다(롬 3:21-31).  믿음은 인간에게 정죄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와 대립적인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사용한 표현인 ‘하나님의 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짜리 의가 아닌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을 강조하면서, 거기에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율법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것은 확실하지만(롬 7:7-9), 율법대로 살아야 얻는 그 의는 인간의 역량을 벗어난 것이었다(갈 2:16).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수단이 실제적으로 이제 주어졌다고 확신한다.   이 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4). 

칭의에 있어 믿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오직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즉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신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롬 4:25) 십자가 위에서 이룩하신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롬 3:28).  인간이 가진 의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바울은 어떤가?(빌 3:4).  그는 교육과 국적, 가족 배경, 유산, 정통, 활동 그리고 도덕성에 대해 대단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후 11-12장, 갈 1:13-24).  심지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이며, 바리새인으로서 수많은 규칙과 전통에 덧붙여 구약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율법의 의식상 의로움과 법적인 기준에 대해 바울은 결함이 없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당당하게 ‘나를 본받으라’고 명한다(빌 3:17, 고전 4:16, 11:1).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울은 자기의 강점들을 열거한 후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러나’라는 짧은 한마디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빌 3:7-9).  그러면서 바울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믿음에 근거하여-NRSV)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하나님은 죄를 위한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제물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신다(롬 3:25).  동시에 자신이 아들을 통해 성취하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롬 3:26).  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바울은 앞서 ‘율법 외에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고 언급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성경을 통해서 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 국가의 위대한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을 첫 예로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당대에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역사상 독특한 역할을 맡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의로웠기 때문에 조상들이 비축해 놓은 의를 그의 후손들이 의지할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지적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지만(창 15:6)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가 행위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할례 이전인가 이후인가?  바울은 즉시 대답한다.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롬 4:10).  믿음은 할례보다 앞서고 할례를 초월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그를 부르시고, 창세기 15장에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그 후 창세기 17장에서 ‘언약의 표징’인 할례 의식을 주셨다(창 17:11).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라함이 나이가 팔십육 세였고(창 16:16) 이스마엘이 출생한 지 13년 후, 그의 나이  99세 때 할례 명령이 주어졌고(창 17:9-14)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다(창 17:24-25).  15장과 17장의 시간적 간격은 최소한 십사 년이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먼저 의롭다 함을 받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받은 할례는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친 것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게 하고 나아가 할례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롬 4:11-12).  따라서 칭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롬 3:30).

만일 의롭다 하심이 행위에 의해 얻는 것이라면(롬 2:13)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갈 2:16)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여기에 유대교의 오류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다르게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들은 할례 받은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다(요 8:33).  하지만 그들의 잘못은 율법을 오용하였다(롬 2:17-29).  즉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성을 들여다 보고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자기 의의 토대로 삼았던 것이다(롬 7장).  더 심각한 것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의 노예이기에 율법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롬 7장)과 실제로 율법을 행하지 못하여 이방인과 함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롬 2:1-3:20).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한도를 전혀 몰랐고, 그 의가 어떻게 성취되며 그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롬 3-6장).  그렇다고 새로운 어떤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빗나간 열심 하나로 율법과 의식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들이 볼 때 율법 순종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믿기 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평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빌 3:6).  그들은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에 더 이상 복종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고, 기만적인 망상 속에서 인간적인 행위에 계속 의존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들은 행위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다(롬 10:3).  결국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어떤 자랑과 자기 과신으로 귀결되었다(롬 2:17). 

기독교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유일한 종교다.  물론 선한 행실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것은 바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논증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이다.  바울의 논증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롬 3:31)라는 어구(語句)를 최소한 7번 이상 사용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면서(롬 3:24)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롬 3:27).  죄인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인간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롬 3:27, 4:2).      

그렇다면 선한 행위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선한 행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정한 것이며(약 2:14-26), 이 믿음을 통해 구원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즉 선한 행위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믿음을 부여하시지만(빌 1:29) 신자는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음에도 계속 순종함으로 행해야 한다(빌 2:12-13).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수단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는 행위, 즉 인간적인 자랑(공로, 노력, 선한 행실)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다(롬 3:27).  하나님은 회색지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가? 아니면 율법의 행위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사람이 의롭게 됩니까? 율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것입니까?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롬 3:27, 쉬운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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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순종하심과 죽으심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하고 참되고 충분하게 만족시키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셨을 만족을 보증인에게서 받으시되 자기의 독생자를 그 보증으로 예비하셔서 그의 의를 그들에게 돌리시게 하셨다. 또 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고 또 그 믿음도 또한 그의 선물이고 보면 그들을 의롭다 칭함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일 뿐이다(롬 5:8-11, 8:22, 3:24, 25; 딤전 2:5-6, 히 10:10, 7:22, 마 20:28, 단 9:24, 26, 사 53:4-6, 10-12, 벧전 1:18-19, 고후 5:21, 엡 1:7, 2:8).

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즉 구약의 제사가 예표하고 있었던 단 한 번의 드림으로 영구한 효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피’다(롬 3:25, 히 9:1-14).  여기에는 부활도 포함된다(롬 4:25).  우리는 동전 양면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기보다는 오직 십자가만을 강조함으로써 칭의의 더 넓은 컨텍스트(Context)를 놓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새 창조의 첫 열매인 영화라는 주제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칭의의 종말론적 연결과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 탁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 앞으로 끌려가셨다(요 18:19-24, 마 26:57).  이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으로 끌려갔다가(요 18:29) 헤롯에게 보내지고(눅 23:7) 다시 빌라도에게로 돌아와(눅 23:11-12)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종교 재판과 로마 법정의 재판을 거친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십자가에서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마 27:46)은 빈 무덤에서 그의 아들에 대한 무죄 선언으로 바뀐다(행 2:24).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본질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자신의 완전한 권리와 지위를 회복하시고 영광을 얻으셨다(빌 2:9-11).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롬 8:11) 그 성령으로 예수가 의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선포한다(딤전 3:16).  Richard Gaffin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의롭게 하셨다”(God justified Jesus).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된’(고전 15:17) 것처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칭의는 예수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싶다.

‘토라’(Torah)에는 ‘성문 토라’(Written Torah)와 ‘구전 토라’(Oral Torah)가 있다.  유대교에서 ‘의’(義)는 주로 구두 전달에 기인한 서기관 전통에서 설명하는 대로의 모세 율법, 즉 ‘구전 토라’에의 순응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었다.  유대교는 인간이 율법에 대한 흠 없는 순종을 요구하거나 온전히 순응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인간의 선한 공로가 과실(過失)을 능가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인간의 죄(롬 3:9)와 인간의 의(롬 10:3)를 양자 간에 저울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관점에서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입증되는 것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롬 2:13).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순종은 완전한 것이며 인간이 이를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완전 무결하게 준수할 때만 가능하다.  한 마디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모두 해당한다(레 18:5, 약 1:22-25).  그러나 유대교도 타락한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성향 때문(렘 17:9)에 율법에 완전하게 순응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다른 곳에서 의를 구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이 죄에 대해 인간을 함구(緘口)하게 만든다는 바울의 논지는 입에 저주와 독설이 가득한 모든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롬 3:10-18)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들이라는 것이다(롬 3:23).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의 유죄성을 성립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의 정도가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본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롬 5:12).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대로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롬 3:20, 갈 2:16).  범법함으로 인해 주어진 율법(갈 3:19)은 죄를 깨닫게 하고(롬 5:13)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며(갈 3:24), 죄 있는 인간에게 정죄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고(롬 7:7), 의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다(롬 4:15).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율법의 설명을 통해 규명되기 때문이다(롬 3:20).  율법 그 자체는 의롭고 선하지만(롬 7:12)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고(롬 7:7) 자신의 죄악성을 알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롬 7:8-11).

그러므로 칭의의 기초와 근거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의 속죄적 희생 제사를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롬 3:24-25, 갈 3:13).  이 희생적인 죽음은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대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현현이며(요 1:14), 칭의를 확보해 주는 확실하고 유일한 근거이다(롬 3:25).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2), 바울 역시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9).  다시 말해 우리가 받은 칭의 근거는 우리의 선한 행실도, 우리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도, 심지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행위도 아니다.  그 근거와 토대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히 9:12)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히 10:19)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빌 2:8).

Calvin은 이러한 희생적인 죽음에 대해 칭의의 질료적 원인’(causa materialis)을 그리스도에게만 확고히 둔다. ‘질료적 원인’이란 Aristotle가 주장한 것으로 사물을 형성하기 위한 네 가지 원인설 즉, 질료인(material cause), 형상인(formal cause), 작용인(efficient cause), 목적인(final cause)을 말하는 것으로, 그 가운데서 하나인 목적하는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뜻한다.  쉽게 말해 의(righteousness)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바탕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를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공로적’과 ‘도구적’을 더해 6중 원인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칭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신학적 주제로 해석하는 훌륭한 도구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구원의 질료(質料)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그는 칭의가 왜 질료적 원인이 되는가에 대해 답변한다. “질료인(質料因)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얻으셨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의의 전가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한 그리스도의 의만이 칭의의 유일한 질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은 칭의의 질료적 원인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질료인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킴으로 획득한 온전한 의다.  『에베소서 주석』에서 다시 한번 확고히 말한다.  “구원의 질료적 원인은 그리스도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Calvin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칭의의 질료적 원인의 핵심임을 강조하면서, 로마서 3장과 5장 주석에서도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만이 의로 간주된다. 만일 이처럼 완전무결한 성결에 이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에게는 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필요가 있다. 이는 의로우신 그분만이 우리에게 그 자신의 의를 전가시켜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진술할 경우· · · 이 의는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 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 교리가 필수적 요소임을 주장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 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 ·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려 하심이라(갈 4:4-6).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 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논하는 바와 같이(롬 4장) 행위가 없어도 의를 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Calvin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여전히 논쟁의 중심으로 남아 있지만, 문제는 그런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마저 없는 것처럼 기(氣)를 쓰며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사 53:11)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로마서 3장 23-26절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이 구절에서 나오는 고전적인 신학 용어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의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았다. Leon Morris와 논쟁을 벌였던 Charles Harold Dodd는 화목 제물(propitiation) 대신 속죄 제물(expiation)로 해석했다.  영어 개역 표준판 성경(RSV)은 Dodd의 견해처럼 ‘속죄 제물’로 번역한 반면 KJV은 ‘화목 제물’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대신 받으셨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 죄를 범한 백성들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드려진 대리 희생 제물(substitutionary sacrifice)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피는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피로 인하여’(롬 3:25), ‘예수의 피를 힘입어’(히 10:19)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엡 1:7), 즉 그의 대속적 죽음은 화해의 수단을 제공하며(롬 5:10) 이를 토대로 인간에게 칭의가 값없이 거저 주어진다(히 10:14).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관계적인 것만큼이나 법적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은 사랑의 행위일 뿐 아니라(롬 5:8)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보여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롬 3:25).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들에게 죄에 상응하는 심판을 내리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의로우신 정당한 방법으로 죄를 다루셨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넘어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가 십자가 위에서 발생했다는 뜻이다(갈 3:13).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할 의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모든 죄인들을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는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인 것처럼(롬 6:23) 죄인이 당연히 받아야 할 보응이기 때문이다(겔 18:4).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이 진노로 죄인을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하신다 하더라도 그분의 의는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누가 생명의 주권자를 대적할 수 있는가?(롬 9:19).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로 죄인을 사망의 운명에서 건져내기 위해 죄를 위한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제물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늘 죽음(구약에서는 짐승의 희생)이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영단번(once for all) 죄를 처리하셨다(히 7:27, 9:12, 26, 10:10).  오직 이 근거 위에서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간과하실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행위란 윤리적으로 무죄하신 그리스도(히 4:15)께 죄에 상응하는 죄책을 씌워 징벌을 요구하시고(요 1:29) 그에 걸맞는 십자가의 죽음을 내리신 것이었다(행 2:23).  그가 인간이기는 하였지만(빌 2:8) 그리스도의 죽음(행 5:30)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었다(요일 3:5).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악성에 관한 법정적 차원의 자발적인 것(요 10:17-18)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불공평의 사례로 남았을 것이다.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2:5) 하나님이 현재 죄인들에게 사죄를 선언하실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이 사죄 선언이 그분의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있는 것(롬 3:25)은 그리스도에게 죄책을 씌우고(요 1:29) 죄의 형벌을 가하심으로(사 53:6) ‘의’(고후 5:21)와 ‘사랑’(롬 5:8)을 동시에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충족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윤리적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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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정통의 3대 핵심 교리는 삼위일체론(동일본질론)과 기독론(신인양성론)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다.  Martin Luther는 이신칭의 교리를 가리켜 “복음의 심장, 즉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 이 구절은 종교 개혁을 탄생시킨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지금도 다양한 전통과 견해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쟁이 일어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을 했을 때,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 일까?   

오늘날의 현실은 전통적인 바울 신학의 칭의 개념을 둘러싼 이해가 바울 신학의 새 관점(NPP) 학파의 등장으로 인해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신학계에서는 이 주제를 가지고 전쟁이 아닌 전쟁, 쓸데없는 신학 대전(大戰)을 벌여 왔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각 교단을 배경으로 하는 좋지 못한 전통과 신학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있다.  성경을 바라보는 이러한 안경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성경적 정합성과 적합성을 확보하거나 치밀하게 추구하는 안경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안경들이 신학적 사고의 틀 안에 갇혀 그때마다 서로 다르게 반응하며 어떤 견해도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부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오직 자신들만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것처럼 교조주의적 심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러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현대판 산헤드린 공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주석가들은 칭의(롬 4:1-5)와 행위(약 2:14-26)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별히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제기되는 칭의에서 행위가 갖는 역할에 관한 논의는 신약성서의 여러 핵심 본문의 의미에 관한 주해 논쟁으로 압축된다.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칭의의 행위적 측면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말한 그 행위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2장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으로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들 사이에 언약을 상징하는(창 17:9-14) 참된 할례에 관한 정의(롬 2:17-29절)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3절)라는 바울의 진술이다.    

주석가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Michael Bird가 말한 것처럼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음을 확증하지만(레 18:5, 약 1:22-25) 이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롬 3:20, 갈 2:16).  반면에 성령의 능력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 해석을 로마서 8장 3-4절에 명시된 내용이 지금 로마서 2장에서 이미 진행 중이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들이 비판하는 N.T. Wright의 책을 읽어보면 성령의 인도함 받는 그 행위가 최후의 실제 기반임을 수용하는 듯하다.  

만약 여기서 묘사되는 이방인들(롬 2:14, 25-27)이 성령의 인도함 따라 율법의 요구를 실제로 이루어 가는 신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롬 13:8-13, 갈 6:2) 우리는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롬 2:26)라는 구절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롬 5:19)처럼 경건치 아니한 자가 받는 정죄가 하나님 앞에서 사실이라면(롬 2:1-8), 율법을 행한 자를 위한 칭의도 반드시 실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Michael F. Bird는 믿음으로 율법을 실제로 행하는 이방 신자에 관한 로마서 2장 14-16, 25-27절 기준으로 2장 13절을 읽으면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구절이 가설적 진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로마서를 읽어나가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사실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 가장 불편하고 성가신 것 중 하나가 있다면 James Dunn의 말처럼 새 관점이 마지막 심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롬 4:3)과 야고보의 행위에 따른 심판(약 2:14-26)이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것은 항상 충돌을 야기시켰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믿음’(faith alone, NIV, RSV)이 나타나는 유일한 곳은 야고보서 2장 24절이다.  문제는 야고보가 그 구절에서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거부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주장한다는 점에서 바울과의 긴장이 첨예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바울이 그랬듯이 야고보 역시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똑같이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행함(약 2:21)을 그 입증하는 본보기로 활용한다.  이것은 야고보가 아브라함처럼 의를 얻기 위해서는 행위(이삭을 받침)가 실제로 중요하다는 취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행위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력히 권고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위를 쌓는 행동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성경을 살펴보면 이들의 모순된 주장이 사라진다.   

이러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헬라 교부 John Chrysostom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언급했다.  Calvin 역시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제기된 차이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독교강요』에서 Chrysostom과 비스름 하게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즉, 행위로 구원받지는 않지만 행위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에 의미는 행함이 결코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선한 행위는 신자가 고백하는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칭의의 열매라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엡 2:8)이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롬 6:12-16).  이 말의 의미는 칭의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지만(빌 3:9), 심판은 열매를 맺는 순종의 삶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히 6:7-8).  내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 자처럼 보이는가?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두 구절 문맥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불신자가 아닌 신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의 관점에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판결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롬 2:5-11, 고전 3:10-15, 고후 11:15, 골 3:25).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의 행위가 심판을 받는 것이지(전 12:14, 계 20:13) 그들의 죄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골 2:13-15).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육신의 몸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직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롬 14:12, 벧전 4:5).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가외(加外)의 노력을 촉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골 1:10),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도 착한 일(선한 행위)을 하기 원했으며(고후 9:8) 그러한 행위에 대한 상(賞)이 있음을 상기시켰다(고전 3:14, 9:24-25, 빌 3:14, 골 3:24).  바울이 보기에 온전한 구원이란 고린도전서 15장 2절 말씀처럼 어느 정도의 신실함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갈 6:8, 골 1:23)에, 그는 자신의 개종자(改宗者)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경계를 풀지 말 것을 경고했다(고전 3:17, 10:12, 고후 12:21, 13:5, 갈 5:4, 6:7-8, 골 1:22-23).  신자의 윤리적 책임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과 양자택일에 의한 투쟁에 근거한다.  이 말은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으며(롬 8:11) 그 거주하는 하나님의 영(롬 8:14)에 의해 ‘이미’(already)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고후 5:17) 그 사람은 ‘아직’(not yet) 육을 따라 살 수 있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요일 2:15).  피 흘리기까지 육신의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히 12:4).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고전 10:1-12).   

성경은 여러 곳에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마 7:21-23).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강한 어조로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살리니’(12-13절).  이 말의 핵심적인 의미는 양자의 영이 신자 안에 거하는 것(롬 8:15)과 신자가 능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사는 것(롬 8:14)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말씀은 어떤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첫 번째 엄중한 경고에 이어 두 번째 경고다.  ’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9).  이들은 외관상으로는 신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해석(eisegesis)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구절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경고이지 불신자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마 5:20).  새로운 신분이 자동적으로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고전 10:12).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칭의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진리인가?  George Eldon Ladd의 말을 인용하면 바울과 그 시대의 유대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 대한 평가가 확정되는 마지막 날의 심판이 있을 종말론적인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종말론적 심판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와’(요 5:29) 의인들은 무죄 선언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며 악인들은 정죄를 받아 최후의 형벌에 떨어진다. 

칭의의 종말론적 성격은 바리새인들이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것으로 매도(罵倒) 했을 때, 마지막 날에 ‘언어의 남용’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신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이 종말론적 성격은 바울이 로마 신자들에게 던진 수사학적 질문 속에서도 분명하게 엿보인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리라’(롬 8:33-39).  여기서 바울의 말은 종말론적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둔 것이다(고전 3:10-15).  베드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직고 하게 될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다고 경고한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날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롬 2:5), 우리와 창조주의 그 최후의 만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히 9:27).  하나님의 심판은 편견 없이(골 3:25) 치우침이 없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어질 것이고(롬 2:5, 고후 11:15), 최종 심판은 인격에 근거하여 시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해 해명해야 하기 때문이다(욥 34:11, 시 62:12, 잠 24:12, 렘 17:10, 32:19, 마 17:27, 계 20:12, 22:12).  신자가 삶 가운데 실제로 행한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갈 6:7).  다시 말해 마지막 심판의 날은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심판을 받는 날이다(갈 6:8).

그러나 전통적 개혁주의 칭의론을 내세우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는 미래적 실재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John Piper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칭의’라는 용어는 이 세대의 마지막이 아니라 일반 법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지칭한다”  그는 이어서 “신약 성경의 신학적 의미에서, 칭의는 더욱더 칭의의 미래적 실재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Piper도 복음주의 목회자답게 미래적 시제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까운 미래’, 혹은 ‘인접한 미래’, 또는 ‘즉각적인 미래’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최종적이고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칭의의 법정 이해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바울 서신의 용법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서만 보면 Piper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칭의의 미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구절들은 그 외에도 몇 군데 더 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마 12:37, 표준새번역). 

그러나 바울 복음의 핵심은 이 종말론적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역사 속에서 이미 발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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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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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9년 넘게 로마서를 설교했고, 로마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John Piper.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율법적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강조한 종교라는 것을 주장한 E. P. Sanders와 James D. G. Dunn의 새 관점을 이어받아 칭의를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로 나누어 해석한 N.T. Wright.  오래전 두 사람의 칭의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이미 학계에서 알려진 것처럼 Wright의 압승(?)으로 끝났다.  탁월한 성경 석의 실력을 거침없이 보여준 Wright의 저서 『Justification』은 신학적이고 변증적이며 석의적인 책인 반면, Piper 저서 『The Future of Justification』은 Wright가 제시한 칭의론의 핵심 문제를 정확하게 반박하기 위해 변론서 격으로 썼지만 주석적 근거가 빈약했다. 

오늘날 칭의론의 문제가 해석학적으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James K. Beilby가 말한 것처럼 수 세기 동안 치러진 이 논쟁의 배경에는 다양한 무리의 신학적, 문화적, 경험적, 인식론적 전제와 가정으로부터 제기된 여러 가지 방법론적과 학문적 균열이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같은 복음주의 안에서도 성경의 권위와 역사적 정통에 똑같이 충실한 신학자와 목사들 조차도 주해적이고 신학적인 패러다임의 작용 때문에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때가 많다.  진정 성경의 말씀은 언제나 해석이 가능한가?  같은 집안내서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어떻게 칭의 교리를 설명하는지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들이 신학을 하는 방법론을 알 수 있다.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종교 개혁 이후의 개신교 전통에서 법정적/전가적 해석학이 지배적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자기 해석적 명료성의 재발견에 있다는 것을 늘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 외에는 아무것도 귀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정경적인 고백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신학에 동의하는 모든 신학자와 목사들이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어떤 건전하고 복음주의 신학에도 설명되지 않는 남은 부분과 영역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 교리가 언제나 논쟁적 양상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어느 특정한 학파의 신앙고백이 가장 ‘정경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신학적 입장들은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다른 입장을 성급하게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적인 칭의론을 가장 장 요약한 진술 중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서 발견된다.  “의롭다 하심이란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인데,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자기 목전에 그들을 의로운 자들로 여기시고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행한 어떤 일로 인한 것도 아니나. 오로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완전한 대속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저희에게 전가시키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다(롬 3:22, 24, 25, 3:22, 24, 25, 27, 28, 5:17-19; 고후 5:19, 21; 딛3:5, 7; 엡 1:7; 행 10:43; 갈 2:16; 빌 3:9).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판결은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한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심각하게 범하였다고, 그 계명 중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고(롬 3:9-10) 나를 정죄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딛 3:4-5)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롬 3:24, 엡 2:8) 마치 내가 죄지은 적이 없고 죄인이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순종하셨듯이, 마치 내가 완전하게 순종했던 것처럼(롬 4:24-25, 고후 5:2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의로움과 거룩함을(롬 4:3-5(창세기 15:6), 고후 5:17-19, 요일 2:1-2)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3:18, 행 16:30-31). 

위에 두 문장을 요약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한 믿음만이 우리가 결코 죄지은 적이 없이 그 계명을 완벽하게 지킨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칭의의 필수적 요소임을 밝힌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비슷한 요점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루터파 신앙고백서』, 그리고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칭의의 기본 개념을 판결을 내리는 행위 즉, 법정적 선언(forensic declaration)으로 정의를 내린다.  이 문제를 가지고 Jonathan Edwards는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에서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칭의 하기 위해서는 의의 전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칭의란 법정적/선언적 용어이며 판결의 활동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 좋지 못한 악평을 받아 왔다.  그 실례로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파문을 선언한 로마 가톨릭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면상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많은 의화(義化)에 관한 법규들 가운데 파문을 통해 정죄한 칭의 교리는 다음과 같다.  “만일 누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오직 죄의 사함에 의해서만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화하는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호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11조).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자들과 다르게 구원의 과정에 있어 인간의 자유가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공식적인 견해에 의하면 칭의란 죄 용서함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성화와 갱신, 즉 거룩함이라는 관점에서도 신자들의 내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칭의가 성화와 분리할 수 없지만 구별된다고 가르쳤다. 

영국의 성서 학자 William Sanday과 Arthur Cayley Headlam은 『Romans,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에서 법정적 개념에 대한 논리적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칭의의 법정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칭의를 어떤 허구(虛構)나 가상(hypothetical)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칭의는 신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마치 의로운 것처럼 대우받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마치 그가 죄인이 아닌 의인인 것처럼 그를 대우하시기 때문에 신자의 삶은 어떤 픽션(fiction)에 가까운 기원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의롭다고 간주되는 사람은 실제로 의롭지 않으며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경건치 아니한 범죄자이다(롬 4:5).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차다크(의롭다)의 개념은 하나님께 적용될 때 기본적으로 법률적인 양상을 띤다.  인간이 의롭다는 것은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신적 선언, 즉 그분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글에서도 이 법률적 차원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첫째는 의로움/칭의가 전가(轉嫁)와 상호 교환할 수 있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칭함이 율법의 행위와 전혀 별개임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인용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의로 여기셨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을 어떻게 취급하시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다른 번역은 ‘간주하다’(count) 혹은 ‘평가하다’(reckon)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주체와 올바른 언약 관계 안예 계시기 위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의가 아브라함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신 것이다. 

여기서 칭의는 선한 행실과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으며(롬 4:5),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일한 것이 없는 행위와 인격이 경건치 아니할 때였다(롬 4:6).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의 언약을 받기 전에 어떻게 의롭다고 불렸는지를 보여 준다.  하지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하란 출신 이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를 구원한 것이 할례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롬 4:3).  그러므로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롬 4:22).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의로운 인격, 혹은 의로운 행위가 일절 없다.  즉 일해서 번 공로의 보상이 아니라 값없이 받은 신적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엡 2:8).  

두 번째 증거는 정죄가 칭의의 반의어로 사용된다는 점인데, 이 역시 명확하게 사법적인 개념이다(요 3:17-18, 롬 5:16-17, 8:1, 33-34, 고후 3:9).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6).  여기서 정죄란 인격이나 행위의 죄악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 위에 내려진 심판이며(롬 5:16), 그 결과 아담과 전 인류는 정죄를 받았다(롬 5:17).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재판관이 내린 유죄 판결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택하다’라는 단어는 ‘elect’란 단어처럼 헬라어와 라틴어에서 영어로 의역(意譯)되었다.  성경에서 택함은 특정한 목적이나 운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하시는 것을 가리킨다(롬 9:10-13).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분이며 또한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신 재판장이시다.  사탄이 우리를 송사할 때 우리의 대변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변론하시기 위해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다(롬 8:34).  그 결과 아무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고소할 수 없게 된다(사 50:8-9).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시면 그 사람은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롬 8:1).  ‘누가 정죄하리요’(34절). 미래 시제를 담고 있는 이 질문은 신적인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죄에 대한 그 어떤 고소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칭의가 법적 허구를 내포하고 있다는 Sanday와 Headlam의 주장은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다.  Jonathan Edwards는 『Sermon on Romans』에서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실제로 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실제와 유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합당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칭의의 법정적 의로움, 즉 신적 재판장에 의해 선언된 판결은 실질적인 의로움이다(고전 6:11, 갈 2:16-17, 3:8, 11, 24, 딛 3:7).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주관적인 윤리적 상태만큼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허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죄인을 의로운 것처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분 앞에 실질적으로 의로워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롬 5:6)인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롬 5:8) 죄인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때(고후 5:17), 이런 관계에 의거해 우리는 외적으로 의롭다고 여기게 하는 어떤 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의로워진다.  Edwards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칭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허구가 아닌 실제로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계속해서 서로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를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을 위한 구원을 뜻한다고 설명하기 시작한다(17절).  그 이유는 이 구원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from God)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 성경에 의존하고 있다(사 46:12-13, KJV, NASB; 61:10).  문제는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것이 주격적 속격인지(하나님께/to 속한 의) 목적격적 속격인지(하나님으로부터/from 오는 의), 또한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속성인지 아닌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한 부류는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성품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른 부류는 자기 백성을 위해 구원하시는 그분의 행동 기준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부류는 십자가의 속죄의 희생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의로운 상태라고 주장한다.  칭의 교리는 언제나 논쟁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 다루기 힘들 만큼 많은 문헌이 씌어졌고, 그 논쟁을 체계화하거나 요약하는 것조차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다음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처음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 사이의 상호관계를 주목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양자는 ‘나타나는’(being revealed)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진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일반 계시로서의 역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며, 그 죄는 인간의 엄청난 부패와 타락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시기 때문에 죄를 묵인하실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속성이 아니며 인간의 분노와 같은 어떤 격정이나 억제하기 어려운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헬라적 개념에 나타난 유해한 요소들이 많은 잡신들의 분노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의로운 심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거룩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원한과 악의와 복수하려는 열망을 가진 불의한 인간처럼 결코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Charles Kingsley Barret은 “진노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이 어떻게 느끼시는가를 인간에게 말해주는 어떠한 종류의 기분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죄와 죄인들을 향해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악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없다.  악은 언제나 그분의 진노를 불러들인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떠난 자연 상태의 인간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좇아 사는 모든 인간을 ‘진노의 자녀’라고 말한다(엡 2:3).  이 말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지칭하는 유대인들의 관용구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정확히 표현해 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 역시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바라보시는 방식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38-39절에서 죄의 용서와 의를 동의어로 사용한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즉 죄의 용서함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랑받는 자녀이다(롬 5:1).  George Eldon Ladd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믿음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가 그분의 ‘의’인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이 말한 로마서 10장 3절에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 즉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의와 대립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성취되며 그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지를 몰랐다.  대신 자기 의를 세우는데 힘썼다.  그들은 율법과 의식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고 싶어 했다.  그들이 이 같이 행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셨던 말씀, 즉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는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을 그들이 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롬 4:3)라는 주어진 말씀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John Piper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를 소유한 것으로 여기신다. · · ·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며 율법의 완전한 성취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가한 것일 뿐만 아니라· · ·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그의 의를 소유한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정통은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이 신자에게 ‘전가’(imputation) 된다는 용어를 통해 칭의를 설명한다.  우리는 로마서 4장 4-5절을 통해 전가가 바울의 논증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분명히 삯이 고용인(雇用人)으로부터 피고용인(被雇用人)에게 이전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선한 행실이나 악한 행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롬 3:22).  Martin Luther는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의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롬 3:19-31).  요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자력으로 획득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다.  Calvin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의로운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우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후 5:21, 현대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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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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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신학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사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 왔던 이 질문을 놓고 오랫동안 논의하여 왔다.  어떤 사람은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삶이 바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우리를 딱딱한 신학(theology)과 메마른 용어학(terminology)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신자가 하나님과 맺을 수 있는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관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 양자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의 신학과 사상에서 이 두 주제는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바울 서신의 문학적 절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의 복음에 대한 가장 웅대한 진술이자 기독교 선언을 담고 있는 책이다.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로마의 신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여 자신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로마서 첫장에 나오는 ‘서간체 선언문’은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쓴 부분이다(롬 1:1-7).  바울은 시작 부분에서부터 로마서의 표어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즉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롬 1:16).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일 뿐 바울이나 그 밖의 다른 누구를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종교가 아니다(롬 1:2).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사 53장, 단 7장).  예수님도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요 5:39, 눅 24:25-27, 44-46).  진정한 복음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고전 15: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이렇게 서간체 선언문이 끝나고 로마서 1장 8-17절에는 ‘서언’(序言)이 나오는데, 이 역시 주의 깊게 쓰여진 부분이며 깊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간절히 바라기까지 했다(15절).  서신의 중심 논지는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 시작된다.  바울은 그토록 로마 선교에 열정을 보이는 이유를 제시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서언을 마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  그리고 서언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 바울은 앞서 기록한 내용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학문적으로 대단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용어 하나를 내놓는다. 바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 즉 ‘하나님의 의’이다(롬 1:17, 3:5, 22, 4:3, 9:30, 10:3).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하게 하신 복음(벧전 1:10-11), 즉 선지자들이 열심히 찾고 깊이 연구했던 성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 1:14)과 부활(고전 15:6)과 승천(행 1:11)에 관한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른다(고전 1:18, 24).  그 이유는 복음 안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롬 1:17).  여기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의’(God’s righteousness)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의’라는 뜻일 수 있다.  바울은 두 정의를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의 한 측면이며, 그분의 행동 기준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묘사다.  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from God, NIV)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부여하시는 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배경이나 과거의 행위에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다(갈 3:28).  구원하는 믿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골 3:1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이 구절의 정확한 단어는 아마도 ‘구별’(distinction, NRSV) 일 것이다.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유일한 요구사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방법, 즉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엡 2:8).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롬 10:12).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롬 3:22).  그러므로 로마서의 서간체 선언문과 서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복음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영적 다이너마이트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왜냐하면 복음 안에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계획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분의 의의 계시이자(롬 3:21)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의 희생(히 9:12)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마 20:28, 갈 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로마서에 많이 나타나는 ‘의’(義)에 관한 표현들이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의’라는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바울의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시편(시 7:17, 71:15-16)과 이사야(사 45:19, 46:12-13) 그리고 복음서(마 6:3)와 야고보서(약 1:20, 약 2:23)에도 ‘의’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려진 용어를 로마의 신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문제는 바울이 압축적이고 논리적이며 잘 짜여진 기독교 신학의 이 개념들을 어떤 뜻으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와 관련된 어휘(語彙)들이 로마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를 뜻하는 단어는 33회가 나오며, ‘의로운’을 뜻하는 단어는 7회, 의롭다 함은 5회, 의롭다 하심은 2회, 그리고 ‘의롭게 하다’는 15회 정도 나타난다.  여기서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 (dikaioo)는 보통 ‘의롭게 하다’로 번역되는데, 이 동사와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는 ‘차다크’(tsadaq)이다.  조금 더 정확한 의미에서는 ‘의롭다고 선포하다’ 혹은 ‘의롭다고 선언(인정)하다’이다.  이는 하나님이 동사의 행동을 이루어 가시는 주체(主體)로 소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사가 능동태(active voice)로 사용되는 경우 하나님이 동사의 직접적인 주어로 나타나고 있으며(롬 3:26, 4:5, 8:30) 수동태(Passive voice)로 사용되는 경우 하나님을 동사의 행위자로 직접 거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 혹은 신학적 수동태(theological passive)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롬 2:13, 3:4, 4:2, 5:1, 6:7, 8:30).  즉 로마서의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점에 있어 학자들의 견해가 일반적으로 일치한다.

‘의’(righteousness)는 로마서의 중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이며 장엄한 주제이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의’의 교리는 유대교적 시각, 즉 구약적 배경으로 하여 보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구약적이고 유대교적 시각에 의하면 오직 의인만이 하나님께 속한 세계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Septuagint, LXX)에서는 ‘의’에 관련된 어휘(語彙)가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의를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운 구원의 행위와 관련하여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죄인에게 주어지는 법적인 무죄 선언인 구원의 선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의는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사 차다크는 주어진 규범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특히 히브리어 히필(Hiphil) 형에서는 이 동사가 ‘의롭다고 선언하다’, ‘의롭다 칭하다’, ‘의롭다고 인정하다’ 등 법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출 23:7, 신 25:1, 왕상 8:32, 역하 6:23, 욥 27:5, 잠 17:25, 사 5:23, 렘 3:11).  E. P. Sanders는 동사 차다크는 칼(qal) 형태에서 보통 ‘법정에서 결백해지다’ (to be cleared in court)를 의미하고, 히브리어 성서에서 히필 동사 히츠디크(hitsdik)는 일반적으로 율법을 기준으로 옳은 사람을 위한 사법적 선언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의롭다고 선언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디카이오오’는 특성상 틀림없이 법정적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롬 3:20-28)를 논함에 있어 의롭다(롬 4:2)는 용어를 사법적이고 법정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예가 많았다(롬 5:1, 9, 18, 6:7, 8:30, 33).  대다수의 복음주의 성경 학자들 심지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N.T. Wright 역시 그 동사가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적인 선언을 뜻한다고 본다. Norman Henry Snaith는 이 기본적 의미에 대해 『The Distinctive Ideas of Old Testament』에서 이런 정의를 내린다. “인간들과 사물이 순응해야 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표준, 그리고 인간과 사물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다” 의로운 사람은 주어진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히브리어 동사 차다크는 의와 관련된 다양한 구약 용어의 기본이 된다.  논쟁이 일어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개념적 상황에서 차다크 언어를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많은 학자가 구약의 의에 개념을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신실함에 기반을 둔 관계적 용어로 이해했다.  이것은 윤리적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적 관계의 충실(忠實)을 뜻하는 기본적 용어로 관계적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 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관계에 대한 충실성(忠實性)을 기술할 때 사용될 수도 있지만(창 38:26, 삼상 26:23, 삼하 4:11) 커다란 신학적 의의를 지닌 단어로 변하기도 한다.

결국 차다크는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대해 정하신 기준인 동시에 규범이다.  즉 자신이 맺고 있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에 의해 자기에게 주어진 요구를 철저하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적 표준을 충족시키는 자이며(레 18:4-5),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롬 2:13).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부분은 차다크의 표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관해 정하신 표준과 규범에 부합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통치자(시 145:13) 입법자(약 4:12) 세상에 대한 심판자(욥 21:22, 전 12:14)로 부상되고 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인 주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5, 우리말 성경).  결국 차다크의 배경은 신학(神學)인 것이다(창 18:25).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종종 인간을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유능한 재판관과 같은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시 9:4, 33:5, 렘 11:20).  하나님께 의롭다고 판결을 받는 자는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  더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그분에게 올바른 자가 되었다(사 46:12-13, 61:10).  Martin Luther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효력이 있는 의’라고 정의했다.  이런 차다크의 개념은 법률적 의미 혹은 법정적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죄 없는 자를 석방하고 죄 있는 자를 정죄하면서 논쟁을 재판하는 것이 인간 재판관의 직무인 것처럼(신 25:1)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과 달리 의로운 사람은 재판에 있어 무죄(無罪) 선언을 받고 재판관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복 있는 자이다(시 32:2).  반면에 정죄를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사람이다(롬 1:18).  독일 신학자 Walther Eichrodt는 이것이 이 용어의 일차적 개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trans. J. A. Baker, Vol. 2』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적용될 때 그 개념은 작아지고 거의 법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된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의’(義)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George Eldon Ladd가 말했듯이 랍비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흠 없는 순종을 요구하신다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두 가지 열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선을 향한 열망과 다른 하나는 악을 향한 열망이 그것이다.  의로운 사람이란 선한 충동을 높여주고 악한 충동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를 능가하게 만드는 자이다.  그래서 때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입지가 전능자께서 행하시는 평가손익(評價損益)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구약학 교수인 William Oscar Emil Oesterley는 『The religion and worship of the synagogue』에서 하나님의 회계 장부에서 매일 대차 계정((貸借計定)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차액 균형이 대변(貸邊) 즉 선한 행위들인 토라 연구에 집중하고 자선을 베풀며 자비의 행위로 기울어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반면에 차변(借邊), 즉 악행으로 기울면 그 사람은 정죄를 당한다.  유대 종교 학자 George Foot Moore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인간들을 행위에 따라서 엄격하게 보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균형성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루터파와 개혁파 학자들은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저울질하는 조잡한 법정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의’(義) 교리는 어떠한가?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그의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재판관이 악인을 정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롭다고 하거나 사면한다면 이는 그 자신이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은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뜻이었다(잠 17:15).  불경건한 자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정죄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재판관이실 경우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다고 판결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롬 4:5).  Michael S. Horton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악한 자를 의롭다 칭하신다는 이 주장은 오늘날까지 사도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에 엄청난 논란을 가져왔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며, 의롭기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의 표준을 떠받드는 것(시 145:17) 즉 의로운 자에게는 의롭다고 선언하고 죄 있는 자를 정죄하는 것이었다(왕상 8:32).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로우심을 보여 주셨다고 단언한다(롬 3:26).  하나님은 죄를 위한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이런 무죄 선언은 인간에게 정죄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율법 행위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다시 한번 그는 강조한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달이라 할지라도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니며 별조차도 깨끗하지 못하고(욥 25:5) 천사들마저 허물이 있다(욥 4:18).  하물며 그분 앞에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서 다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되었을 것입니다’(갈 2:21, 현대어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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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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