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9년 넘게 로마서를 설교했고, 로마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John Piper.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율법적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강조한 종교라는 것을 주장한 E. P. Sanders와 James D. G. Dunn의 새 관점을 이어받아 칭의를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로 나누어 해석한 N.T. Wright.  오래전 두 사람의 칭의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이미 학계에서 알려진 것처럼 Wright의 압승(?)으로 끝났다.  탁월한 성경 석의 실력을 거침없이 보여준 Wright의 저서 『Justification』은 신학적이고 변증적이며 석의적인 책인 반면, Piper 저서 『The Future of Justification』은 Wright가 제시한 칭의론의 핵심 문제를 정확하게 반박하기 위해 변론서 격으로 썼지만 주석적 근거가 빈약했다. 

오늘날 칭의론의 문제가 해석학적으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James K. Beilby가 말한 것처럼 수 세기 동안 치러진 이 논쟁의 배경에는 다양한 무리의 신학적, 문화적, 경험적, 인식론적 전제와 가정으로부터 제기된 여러 가지 방법론적과 학문적 균열이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같은 복음주의 안에서도 성경의 권위와 역사적 정통에 똑같이 충실한 신학자와 목사들 조차도 주해적이고 신학적인 패러다임의 작용 때문에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때가 많다.  진정 성경의 말씀은 언제나 해석이 가능한가?  같은 집안내서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어떻게 칭의 교리를 설명하는지를 바라보면 우리는 그들이 신학을 하는 방법론을 알 수 있다.  한 가지만큼 확실한 것은 종교 개혁 이후의 개신교 전통에서 법정적/전가적 해석학이 지배적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자기 해석적 명료성의 재발견에 있다는 것을 늘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 외에는 아무것도 귀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정경적인 고백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신학에 동의하는 모든 신학자와 목사들이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어떤 건전하고 복음주의 신학에도 설명되지 않는 남은 부분과 영역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 교리가 언제나 논쟁적 양상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어느 특정한 학파의 신앙고백이 가장 ‘정경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신학적 입장들은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다른 입장을 성급하게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복음적인 칭의론을 가장 장 요약한 진술 중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서 발견된다.  “의롭다 하심이란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인데,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자기 목전에 그들을 의로운 자들로 여기시고 받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행한 어떤 일로 인한 것도 아니나. 오로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완전한 대속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저희에게 전가시키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다(롬 3:22, 24, 25, 3:22, 24, 25, 27, 28, 5:17-19; 고후 5:19, 21; 딛3:5, 7; 엡 1:7; 행 10:43; 갈 2:16; 빌 3:9).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판결은 우리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한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심각하게 범하였다고, 그 계명 중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고(롬 3:9-10) 나를 정죄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딛 3:4-5)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롬 3:24, 엡 2:8) 마치 내가 죄지은 적이 없고 죄인이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순종하셨듯이, 마치 내가 완전하게 순종했던 것처럼(롬 4:24-25, 고후 5:2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 의로움과 거룩함을(롬 4:3-5(창세기 15:6), 고후 5:17-19, 요일 2:1-2)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3:18, 행 16:30-31). 

위에 두 문장을 요약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한 믿음만이 우리가 결코 죄지은 적이 없이 그 계명을 완벽하게 지킨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칭의의 필수적 요소임을 밝힌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 비슷한 요점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루터파 신앙고백서』, 그리고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칭의의 기본 개념을 판결을 내리는 행위 즉, 법정적 선언(forensic declaration)으로 정의를 내린다.  이 문제를 가지고 Jonathan Edwards는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에서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칭의 하기 위해서는 의의 전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칭의란 법정적/선언적 용어이며 판결의 활동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 좋지 못한 악평을 받아 왔다.  그 실례로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파문을 선언한 로마 가톨릭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면상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그 많은 의화(義化)에 관한 법규들 가운데 파문을 통해 정죄한 칭의 교리는 다음과 같다.  “만일 누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오직 죄의 사함에 의해서만 의화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우리를 의화하는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호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11조).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자들과 다르게 구원의 과정에 있어 인간의 자유가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공식적인 견해에 의하면 칭의란 죄 용서함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성화와 갱신, 즉 거룩함이라는 관점에서도 신자들의 내적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칭의가 성화와 분리할 수 없지만 구별된다고 가르쳤다. 

영국의 성서 학자 William Sanday과 Arthur Cayley Headlam은 『Romans,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에서 법정적 개념에 대한 논리적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칭의의 법정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칭의를 어떤 허구(虛構)나 가상(hypothetical)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칭의는 신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마치 의로운 것처럼 대우받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마치 그가 죄인이 아닌 의인인 것처럼 그를 대우하시기 때문에 신자의 삶은 어떤 픽션(fiction)에 가까운 기원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의롭다고 간주되는 사람은 실제로 의롭지 않으며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경건치 아니한 범죄자이다(롬 4:5).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차다크(의롭다)의 개념은 하나님께 적용될 때 기본적으로 법률적인 양상을 띤다.  인간이 의롭다는 것은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신적 선언, 즉 그분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글에서도 이 법률적 차원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첫째는 의로움/칭의가 전가(轉嫁)와 상호 교환할 수 있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칭함이 율법의 행위와 전혀 별개임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인용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 구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의로 여기셨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을 어떻게 취급하시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다른 번역은 ‘간주하다’(count) 혹은 ‘평가하다’(reckon)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주체와 올바른 언약 관계 안예 계시기 위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의가 아브라함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신 것이다. 

여기서 칭의는 선한 행실과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으며(롬 4:5),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일한 것이 없는 행위와 인격이 경건치 아니할 때였다(롬 4:6).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의 언약을 받기 전에 어떻게 의롭다고 불렸는지를 보여 준다.  하지만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하란 출신 이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를 구원한 것이 할례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롬 4:3).  그러므로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롬 4:22).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의로운 인격, 혹은 의로운 행위가 일절 없다.  즉 일해서 번 공로의 보상이 아니라 값없이 받은 신적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엡 2:8).  

두 번째 증거는 정죄가 칭의의 반의어로 사용된다는 점인데, 이 역시 명확하게 사법적인 개념이다(요 3:17-18, 롬 5:16-17, 8:1, 33-34, 고후 3:9).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6).  여기서 정죄란 인격이나 행위의 죄악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 위에 내려진 심판이며(롬 5:16), 그 결과 아담과 전 인류는 정죄를 받았다(롬 5:17).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재판관이 내린 유죄 판결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택하다’라는 단어는 ‘elect’란 단어처럼 헬라어와 라틴어에서 영어로 의역(意譯)되었다.  성경에서 택함은 특정한 목적이나 운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하시는 것을 가리킨다(롬 9:10-13).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신 분이며 또한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신 재판장이시다.  사탄이 우리를 송사할 때 우리의 대변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변론하시기 위해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다(롬 8:34).  그 결과 아무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고소할 수 없게 된다(사 50:8-9).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시면 그 사람은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롬 8:1).  ‘누가 정죄하리요’(34절). 미래 시제를 담고 있는 이 질문은 신적인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죄에 대한 그 어떤 고소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칭의가 법적 허구를 내포하고 있다는 Sanday와 Headlam의 주장은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다.  Jonathan Edwards는 『Sermon on Romans』에서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실제로 그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실제와 유익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합당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칭의의 법정적 의로움, 즉 신적 재판장에 의해 선언된 판결은 실질적인 의로움이다(고전 6:11, 갈 2:16-17, 3:8, 11, 24, 딛 3:7).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주관적인 윤리적 상태만큼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허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죄인을 의로운 것처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분 앞에 실질적으로 의로워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롬 5:6)인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롬 5:8) 죄인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때(고후 5:17), 이런 관계에 의거해 우리는 외적으로 의롭다고 여기게 하는 어떤 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의로워진다.  Edwards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칭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허구가 아닌 실제로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계속해서 서로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를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자들을 위한 구원을 뜻한다고 설명하기 시작한다(17절).  그 이유는 이 구원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from God)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 성경에 의존하고 있다(사 46:12-13, KJV, NASB; 61:10).  문제는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것이 주격적 속격인지(하나님께/to 속한 의) 목적격적 속격인지(하나님으로부터/from 오는 의), 또한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속성인지 아닌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한 부류는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성품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른 부류는 자기 백성을 위해 구원하시는 그분의 행동 기준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부류는 십자가의 속죄의 희생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의로운 상태라고 주장한다.  칭의 교리는 언제나 논쟁적 양상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 다루기 힘들 만큼 많은 문헌이 씌어졌고, 그 논쟁을 체계화하거나 요약하는 것조차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다음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처음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 사이의 상호관계를 주목하여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양자는 ‘나타나는’(being revealed)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진노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일반 계시로서의 역사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며, 그 죄는 인간의 엄청난 부패와 타락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시기 때문에 죄를 묵인하실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속성이 아니며 인간의 분노와 같은 어떤 격정이나 억제하기 어려운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헬라적 개념에 나타난 유해한 요소들이 많은 잡신들의 분노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의로운 심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거룩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원한과 악의와 복수하려는 열망을 가진 불의한 인간처럼 결코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Charles Kingsley Barret은 “진노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이 어떻게 느끼시는가를 인간에게 말해주는 어떠한 종류의 기분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죄와 죄인들을 향해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악 외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없다.  악은 언제나 그분의 진노를 불러들인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떠난 자연 상태의 인간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좇아 사는 모든 인간을 ‘진노의 자녀’라고 말한다(엡 2:3).  이 말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지칭하는 유대인들의 관용구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정확히 표현해 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 역시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바라보시는 방식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38-39절에서 죄의 용서와 의를 동의어로 사용한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즉 죄의 용서함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랑받는 자녀이다(롬 5:1).  George Eldon Ladd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믿음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상태가 그분의 ‘의’인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이 말한 로마서 10장 3절에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 즉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의와 대립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성취되며 그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지를 몰랐다.  대신 자기 의를 세우는데 힘썼다.  그들은 율법과 의식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고 싶어 했다.  그들이 이 같이 행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셨던 말씀, 즉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는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을 그들이 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롬 4:3)라는 주어진 말씀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John Piper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를 소유한 것으로 여기신다. · · ·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며 율법의 완전한 성취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가한 것일 뿐만 아니라· · ·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그의 의를 소유한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정통은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이 신자에게 ‘전가’(imputation) 된다는 용어를 통해 칭의를 설명한다.  우리는 로마서 4장 4-5절을 통해 전가가 바울의 논증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분명히 삯이 고용인(雇用人)으로부터 피고용인(被雇用人)에게 이전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선한 행실이나 악한 행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롬 3:22).  Martin Luther는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의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롬 3:19-31).  요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자력으로 획득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다.  Calvin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의로운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대신 지우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고후 5:21, 현대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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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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