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순종하심과 죽으심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하고 참되고 충분하게 만족시키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셨을 만족을 보증인에게서 받으시되 자기의 독생자를 그 보증으로 예비하셔서 그의 의를 그들에게 돌리시게 하셨다. 또 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고 또 그 믿음도 또한 그의 선물이고 보면 그들을 의롭다 칭함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일 뿐이다(롬 5:8-11, 8:22, 3:24, 25; 딤전 2:5-6, 히 10:10, 7:22, 마 20:28, 단 9:24, 26, 사 53:4-6, 10-12, 벧전 1:18-19, 고후 5:21, 엡 1:7, 2:8).

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즉 구약의 제사가 예표하고 있었던 단 한 번의 드림으로 영구한 효력을 지닌 ‘그리스도의 피’다(롬 3:25, 히 9:1-14).  여기에는 부활도 포함된다(롬 4:25).  우리는 동전 양면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기보다는 오직 십자가만을 강조함으로써 칭의의 더 넓은 컨텍스트(Context)를 놓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새 창조의 첫 열매인 영화라는 주제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칭의의 종말론적 연결과 성령의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 탁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 앞으로 끌려가셨다(요 18:19-24, 마 26:57).  이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으로 끌려갔다가(요 18:29) 헤롯에게 보내지고(눅 23:7) 다시 빌라도에게로 돌아와(눅 23:11-12)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종교 재판과 로마 법정의 재판을 거친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십자가에서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마 27:46)은 빈 무덤에서 그의 아들에 대한 무죄 선언으로 바뀐다(행 2:24).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본질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분명해졌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자신의 완전한 권리와 지위를 회복하시고 영광을 얻으셨다(빌 2:9-11).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롬 8:11) 그 성령으로 예수가 의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선포한다(딤전 3:16).  Richard Gaffin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의롭게 하셨다”(God justified Jesus).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된’(고전 15:17) 것처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칭의는 예수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싶다.

‘토라’(Torah)에는 ‘성문 토라’(Written Torah)와 ‘구전 토라’(Oral Torah)가 있다.  유대교에서 ‘의’(義)는 주로 구두 전달에 기인한 서기관 전통에서 설명하는 대로의 모세 율법, 즉 ‘구전 토라’에의 순응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었다.  유대교는 인간이 율법에 대한 흠 없는 순종을 요구하거나 온전히 순응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인간의 선한 공로가 과실(過失)을 능가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인간의 죄(롬 3:9)와 인간의 의(롬 10:3)를 양자 간에 저울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관점에서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입증되는 것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롬 2:13).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순종은 완전한 것이며 인간이 이를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완전 무결하게 준수할 때만 가능하다.  한 마디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모두 해당한다(레 18:5, 약 1:22-25).  그러나 유대교도 타락한 인간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성향 때문(렘 17:9)에 율법에 완전하게 순응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다른 곳에서 의를 구하고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이 죄에 대해 인간을 함구(緘口)하게 만든다는 바울의 논지는 입에 저주와 독설이 가득한 모든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롬 3:10-18)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들이라는 것이다(롬 3:23).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의 유죄성을 성립시키는 것은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의 정도가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본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롬 5:12).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대로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롬 3:20, 갈 2:16).  범법함으로 인해 주어진 율법(갈 3:19)은 죄를 깨닫게 하고(롬 5:13)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며(갈 3:24), 죄 있는 인간에게 정죄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고(롬 7:7), 의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서운 심판을 초래한다(롬 4:15).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율법의 설명을 통해 규명되기 때문이다(롬 3:20).  율법 그 자체는 의롭고 선하지만(롬 7:12)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고(롬 7:7) 자신의 죄악성을 알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롬 7:8-11).

그러므로 칭의의 기초와 근거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의 속죄적 희생 제사를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롬 3:24-25, 갈 3:13).  이 희생적인 죽음은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대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현현이며(요 1:14), 칭의를 확보해 주는 확실하고 유일한 근거이다(롬 3:25).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도 요한은 말한다.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2), 바울 역시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9).  다시 말해 우리가 받은 칭의 근거는 우리의 선한 행실도, 우리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도, 심지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행위도 아니다.  그 근거와 토대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히 9:12)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히 10:19)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빌 2:8).

Calvin은 이러한 희생적인 죽음에 대해 칭의의 질료적 원인’(causa materialis)을 그리스도에게만 확고히 둔다. ‘질료적 원인’이란 Aristotle가 주장한 것으로 사물을 형성하기 위한 네 가지 원인설 즉, 질료인(material cause), 형상인(formal cause), 작용인(efficient cause), 목적인(final cause)을 말하는 것으로, 그 가운데서 하나인 목적하는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뜻한다.  쉽게 말해 의(righteousness)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바탕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를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공로적’과 ‘도구적’을 더해 6중 원인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칭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신학적 주제로 해석하는 훌륭한 도구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구원의 질료(質料)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그는 칭의가 왜 질료적 원인이 되는가에 대해 답변한다. “질료인(質料因)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얻으셨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의의 전가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한 그리스도의 의만이 칭의의 유일한 질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은 칭의의 질료적 원인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질료인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킴으로 획득한 온전한 의다.  『에베소서 주석』에서 다시 한번 확고히 말한다.  “구원의 질료적 원인은 그리스도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Calvin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칭의의 질료적 원인의 핵심임을 강조하면서, 로마서 3장과 5장 주석에서도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절대적인 순종만이 의로 간주된다. 만일 이처럼 완전무결한 성결에 이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에게는 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필요가 있다. 이는 의로우신 그분만이 우리에게 그 자신의 의를 전가시켜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진술할 경우· · · 이 의는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 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전가 교리가 필수적 요소임을 주장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 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 ·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려 하심이라(갈 4:4-6).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 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논하는 바와 같이(롬 4장) 행위가 없어도 의를 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Calvin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여전히 논쟁의 중심으로 남아 있지만, 문제는 그런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마저 없는 것처럼 기(氣)를 쓰며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사 53:11)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로마서 3장 23-26절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이 구절에서 나오는 고전적인 신학 용어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의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았다. Leon Morris와 논쟁을 벌였던 Charles Harold Dodd는 화목 제물(propitiation) 대신 속죄 제물(expiation)로 해석했다.  영어 개역 표준판 성경(RSV)은 Dodd의 견해처럼 ‘속죄 제물’로 번역한 반면 KJV은 ‘화목 제물’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대신 받으셨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 죄를 범한 백성들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드려진 대리 희생 제물(substitutionary sacrifice)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피는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피로 인하여’(롬 3:25), ‘예수의 피를 힘입어’(히 10:19)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엡 1:7), 즉 그의 대속적 죽음은 화해의 수단을 제공하며(롬 5:10) 이를 토대로 인간에게 칭의가 값없이 거저 주어진다(히 10:14).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관계적인 것만큼이나 법적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은 사랑의 행위일 뿐 아니라(롬 5:8)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보여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롬 3:25).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들에게 죄에 상응하는 심판을 내리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의로우신 정당한 방법으로 죄를 다루셨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넘어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가 십자가 위에서 발생했다는 뜻이다(갈 3:13).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할 의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모든 죄인들을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는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인 것처럼(롬 6:23) 죄인이 당연히 받아야 할 보응이기 때문이다(겔 18:4).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이 진노로 죄인을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하신다 하더라도 그분의 의는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누가 생명의 주권자를 대적할 수 있는가?(롬 9:19).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로 죄인을 사망의 운명에서 건져내기 위해 죄를 위한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제물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은 늘 죽음(구약에서는 짐승의 희생)이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영단번(once for all) 죄를 처리하셨다(히 7:27, 9:12, 26, 10:10).  오직 이 근거 위에서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간과하실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행위란 윤리적으로 무죄하신 그리스도(히 4:15)께 죄에 상응하는 죄책을 씌워 징벌을 요구하시고(요 1:29) 그에 걸맞는 십자가의 죽음을 내리신 것이었다(행 2:23).  그가 인간이기는 하였지만(빌 2:8) 그리스도의 죽음(행 5:30)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었다(요일 3:5).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악성에 관한 법정적 차원의 자발적인 것(요 10:17-18)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불공평의 사례로 남았을 것이다.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2:5) 하나님이 현재 죄인들에게 사죄를 선언하실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이 사죄 선언이 그분의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있는 것(롬 3:25)은 그리스도에게 죄책을 씌우고(요 1:29) 죄의 형벌을 가하심으로(사 53:6) ‘의’(고후 5:21)와 ‘사랑’(롬 5:8)을 동시에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충족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윤리적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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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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