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장로교에서 교리 표준 문서(Westminster Standards)로 받아들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써, 그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보아 받아주시는 것인데, 이는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믿음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전적인 만족 때문이다” 

인간 구원의 계기가 되어(요일 2: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엡 2:3)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칭의의 근거와 토대라면 각 사람에게 의롭다 하심을 유효화시키는 수단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서 밝힌 것처럼 오직 ‘믿음’이다(롬 4:5, 5:1).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데, 이는 믿음에 항상 수반하는 다른 은혜나 그 열매인 선행 때문이 아니며, 믿음의 은혜나 그 행위가 칭의를 위해 그에게 전가되는 방식도 아니고, 단지 믿음은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 적용하는 방편일 뿐이다”(갈 3:2, 2:16, 롬 3:28, 10:10, 빌 3:9). 

간혹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된다는 뜻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주장은 상당히 영리하고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만 칭의를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지만 죄가 없다는 판사의 판결을 받게 되는 법정적인 용어이다(신 25:1, 롬 8:1-2).  조금 풀어서 말하면 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실제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신 누군가가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 죄로부터 풀려났다는 뜻이다(마 20:28).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롬 5:9).  인간의 선한 행실과 공로와는 전혀 상관없다(딛 3:7).  따라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롬 4:1-5). 

바울에게 있어 영원한 현주소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주소 안에 이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는 특별한 보배가 있는데(고전 1:21) 그것이 의(義)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는 기원이 하나님이고(롬 3:21) 방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롬 3:27).  믿음(무조건적인 신뢰)는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정해진 방법이다.  그것은 자기 수양이나 절제, 신앙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빌 3:9).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롬 3:28).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 11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바울이 언급한 이 주제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은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닐뿐더러, 이것은 선지자들의 글에 나타나며 유대인 신자들에게도 익숙한 개념이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으며(롬 5:8), 그 대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롬 4:5).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될 때 결코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법이 없다(롬 5:6).  우리는 늘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사랑하는 것이다(롬 5:10).  이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롬 3:2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by faith from first to last, NIV)라는 표현(롬 1:17)은 원문에서 문자적으로 ‘믿음에서부터 믿음에까지’(from faith to faith)로 번역된 것을 의역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향해’(through faith for faith, NRSV)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from first to last, NIV) 즉, 삶 전체를 통해 진행되는 계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믿음에서 나는 것이다. 

구속에 관한 위대한 논증에서도 바울은 믿음의 역할을 반복적으로 역설한다(롬 3:21-31).  믿음은 인간에게 정죄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율법의 행위와 대립적인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사용한 표현인 ‘하나님의 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짜리 의가 아닌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을 강조하면서, 거기에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율법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인 것은 확실하지만(롬 7:7-9), 율법대로 살아야 얻는 그 의는 인간의 역량을 벗어난 것이었다(갈 2:16).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수단이 실제적으로 이제 주어졌다고 확신한다.   이 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4). 

칭의에 있어 믿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오직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즉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신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롬 4:25) 십자가 위에서 이룩하신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롬 3:28).  인간이 가진 의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바울은 어떤가?(빌 3:4).  그는 교육과 국적, 가족 배경, 유산, 정통, 활동 그리고 도덕성에 대해 대단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후 11-12장, 갈 1:13-24).  심지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이며, 바리새인으로서 수많은 규칙과 전통에 덧붙여 구약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율법의 의식상 의로움과 법적인 기준에 대해 바울은 결함이 없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당당하게 ‘나를 본받으라’고 명한다(빌 3:17, 고전 4:16, 11:1).  이렇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울은 자기의 강점들을 열거한 후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러나’라는 짧은 한마디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빌 3:7-9).  그러면서 바울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믿음에 근거하여-NRSV)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하나님은 죄를 위한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제물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신다(롬 3:25).  동시에 자신이 아들을 통해 성취하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롬 3:26).  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바울은 앞서 ‘율법 외에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고 언급했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성경을 통해서 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 국가의 위대한 족장이었던 아브라함을 첫 예로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당대에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역사상 독특한 역할을 맡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의로웠기 때문에 조상들이 비축해 놓은 의를 그의 후손들이 의지할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지적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지만(창 15:6) 그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가 행위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할례 이전인가 이후인가?  바울은 즉시 대답한다.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롬 4:10).  믿음은 할례보다 앞서고 할례를 초월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그를 부르시고, 창세기 15장에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그 후 창세기 17장에서 ‘언약의 표징’인 할례 의식을 주셨다(창 17:11).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라함이 나이가 팔십육 세였고(창 16:16) 이스마엘이 출생한 지 13년 후, 그의 나이  99세 때 할례 명령이 주어졌고(창 17:9-14)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았다(창 17:24-25).  15장과 17장의 시간적 간격은 최소한 십사 년이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먼저 의롭다 함을 받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받은 할례는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친 것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게 하고 나아가 할례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롬 4:11-12).  따라서 칭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롬 3:30).

만일 의롭다 하심이 행위에 의해 얻는 것이라면(롬 2:13)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갈 2:16)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여기에 유대교의 오류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다르게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들은 할례 받은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다(요 8:33).  하지만 그들의 잘못은 율법을 오용하였다(롬 2:17-29).  즉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성을 들여다 보고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자기 의의 토대로 삼았던 것이다(롬 7장).  더 심각한 것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의 노예이기에 율법을 지킬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롬 7장)과 실제로 율법을 행하지 못하여 이방인과 함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롬 2:1-3:20).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한도를 전혀 몰랐고, 그 의가 어떻게 성취되며 그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롬 3-6장).  그렇다고 새로운 어떤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빗나간 열심 하나로 율법과 의식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들이 볼 때 율법 순종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믿기 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평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빌 3:6).  그들은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에 더 이상 복종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고, 기만적인 망상 속에서 인간적인 행위에 계속 의존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들은 행위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다(롬 10:3).  결국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어떤 자랑과 자기 과신으로 귀결되었다(롬 2:17). 

기독교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유일한 종교다.  물론 선한 행실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것은 바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논증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이다.  바울의 논증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롬 3:31)라는 어구(語句)를 최소한 7번 이상 사용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면서(롬 3:24)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롬 3:27).  죄인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인간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롬 3:27, 4:2).      

그렇다면 선한 행위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선한 행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정한 것이며(약 2:14-26), 이 믿음을 통해 구원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즉 선한 행위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믿음을 부여하시지만(빌 1:29) 신자는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음에도 계속 순종함으로 행해야 한다(빌 2:12-13).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수단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는 행위, 즉 인간적인 자랑(공로, 노력, 선한 행실)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다(롬 3:27).  하나님은 회색지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가? 아니면 율법의 행위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랑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사람이 의롭게 됩니까? 율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것입니까?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롬 3:27, 쉬운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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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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