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신학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사 전체에 걸쳐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 왔던 이 질문을 놓고 오랫동안 논의하여 왔다.  어떤 사람은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는 삶이 바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우리를 딱딱한 신학(theology)과 메마른 용어학(terminology)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신자가 하나님과 맺을 수 있는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관계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 양자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의 신학과 사상에서 이 두 주제는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바울 서신의 문학적 절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의 복음에 대한 가장 웅대한 진술이자 기독교 선언을 담고 있는 책이다.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로마의 신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여 자신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로마서 첫장에 나오는 ‘서간체 선언문’은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쓴 부분이다(롬 1:1-7).  바울은 시작 부분에서부터 로마서의 표어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즉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롬 1:16).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일 뿐 바울이나 그 밖의 다른 누구를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종교가 아니다(롬 1:2).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사 53장, 단 7장).  예수님도 구약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요 5:39, 눅 24:25-27, 44-46).  진정한 복음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고전 15: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이렇게 서간체 선언문이 끝나고 로마서 1장 8-17절에는 ‘서언’(序言)이 나오는데, 이 역시 주의 깊게 쓰여진 부분이며 깊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간절히 바라기까지 했다(15절).  서신의 중심 논지는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 시작된다.  바울은 그토록 로마 선교에 열정을 보이는 이유를 제시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서언을 마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  그리고 서언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 바울은 앞서 기록한 내용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학문적으로 대단히 논란의 여지가 많은 용어 하나를 내놓는다. 바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 즉 ‘하나님의 의’이다(롬 1:17, 3:5, 22, 4:3, 9:30, 10:3).

바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하게 하신 복음(벧전 1:10-11), 즉 선지자들이 열심히 찾고 깊이 연구했던 성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 1:14)과 부활(고전 15:6)과 승천(행 1:11)에 관한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른다(고전 1:18, 24).  그 이유는 복음 안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롬 1:17).  여기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의’(God’s righteousness)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의’라는 뜻일 수 있다.  바울은 두 정의를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의 한 측면이며, 그분의 행동 기준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묘사다.  이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from God, NIV)는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부여하시는 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배경이나 과거의 행위에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다(갈 3:28).  구원하는 믿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골 3:1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이 구절의 정확한 단어는 아마도 ‘구별’(distinction, NRSV) 일 것이다.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유일한 요구사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방법, 즉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엡 2:8).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롬 10:12).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롬 3:22).  그러므로 로마서의 서간체 선언문과 서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복음은 돌같이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영적 다이너마이트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왜냐하면 복음 안에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계획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분의 의의 계시이자(롬 3:21)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의 희생(히 9:12)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마 20:28, 갈 1:4).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로마서에 많이 나타나는 ‘의’(義)에 관한 표현들이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의’라는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바울의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시편(시 7:17, 71:15-16)과 이사야(사 45:19, 46:12-13) 그리고 복음서(마 6:3)와 야고보서(약 1:20, 약 2:23)에도 ‘의’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려진 용어를 로마의 신자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문제는 바울이 압축적이고 논리적이며 잘 짜여진 기독교 신학의 이 개념들을 어떤 뜻으로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와 관련된 어휘(語彙)들이 로마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를 뜻하는 단어는 33회가 나오며, ‘의로운’을 뜻하는 단어는 7회, 의롭다 함은 5회, 의롭다 하심은 2회, 그리고 ‘의롭게 하다’는 15회 정도 나타난다.  여기서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 (dikaioo)는 보통 ‘의롭게 하다’로 번역되는데, 이 동사와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는 ‘차다크’(tsadaq)이다.  조금 더 정확한 의미에서는 ‘의롭다고 선포하다’ 혹은 ‘의롭다고 선언(인정)하다’이다.  이는 하나님이 동사의 행동을 이루어 가시는 주체(主體)로 소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사가 능동태(active voice)로 사용되는 경우 하나님이 동사의 직접적인 주어로 나타나고 있으며(롬 3:26, 4:5, 8:30) 수동태(Passive voice)로 사용되는 경우 하나님을 동사의 행위자로 직접 거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 혹은 신학적 수동태(theological passive)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롬 2:13, 3:4, 4:2, 5:1, 6:7, 8:30).  즉 로마서의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점에 있어 학자들의 견해가 일반적으로 일치한다.

‘의’(righteousness)는 로마서의 중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이며 장엄한 주제이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의’의 교리는 유대교적 시각, 즉 구약적 배경으로 하여 보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구약적이고 유대교적 시각에 의하면 오직 의인만이 하나님께 속한 세계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Septuagint, LXX)에서는 ‘의’에 관련된 어휘(語彙)가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의를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운 구원의 행위와 관련하여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죄인에게 주어지는 법적인 무죄 선언인 구원의 선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의는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사 차다크는 주어진 규범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특히 히브리어 히필(Hiphil) 형에서는 이 동사가 ‘의롭다고 선언하다’, ‘의롭다 칭하다’, ‘의롭다고 인정하다’ 등 법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출 23:7, 신 25:1, 왕상 8:32, 역하 6:23, 욥 27:5, 잠 17:25, 사 5:23, 렘 3:11).  E. P. Sanders는 동사 차다크는 칼(qal) 형태에서 보통 ‘법정에서 결백해지다’ (to be cleared in court)를 의미하고, 히브리어 성서에서 히필 동사 히츠디크(hitsdik)는 일반적으로 율법을 기준으로 옳은 사람을 위한 사법적 선언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의롭다고 선언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디카이오오’는 특성상 틀림없이 법정적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롬 3:20-28)를 논함에 있어 의롭다(롬 4:2)는 용어를 사법적이고 법정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예가 많았다(롬 5:1, 9, 18, 6:7, 8:30, 33).  대다수의 복음주의 성경 학자들 심지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N.T. Wright 역시 그 동사가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적인 선언을 뜻한다고 본다. Norman Henry Snaith는 이 기본적 의미에 대해 『The Distinctive Ideas of Old Testament』에서 이런 정의를 내린다. “인간들과 사물이 순응해야 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표준, 그리고 인간과 사물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다” 의로운 사람은 주어진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히브리어 동사 차다크는 의와 관련된 다양한 구약 용어의 기본이 된다.  논쟁이 일어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개념적 상황에서 차다크 언어를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많은 학자가 구약의 의에 개념을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적 신실함에 기반을 둔 관계적 용어로 이해했다.  이것은 윤리적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적 관계의 충실(忠實)을 뜻하는 기본적 용어로 관계적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 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관계에 대한 충실성(忠實性)을 기술할 때 사용될 수도 있지만(창 38:26, 삼상 26:23, 삼하 4:11) 커다란 신학적 의의를 지닌 단어로 변하기도 한다.

결국 차다크는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대해 정하신 기준인 동시에 규범이다.  즉 자신이 맺고 있는 어떤 인격적인 관계에 의해 자기에게 주어진 요구를 철저하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적 표준을 충족시키는 자이며(레 18:4-5),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롬 2:13).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부분은 차다크의 표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관해 정하신 표준과 규범에 부합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개념이 통치자(시 145:13) 입법자(약 4:12) 세상에 대한 심판자(욥 21:22, 전 12:14)로 부상되고 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인 주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5, 우리말 성경).  결국 차다크의 배경은 신학(神學)인 것이다(창 18:25).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종종 인간을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유능한 재판관과 같은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시 9:4, 33:5, 렘 11:20).  하나님께 의롭다고 판결을 받는 자는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았다.  더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그분에게 올바른 자가 되었다(사 46:12-13, 61:10).  Martin Luther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효력이 있는 의’라고 정의했다.  이런 차다크의 개념은 법률적 의미 혹은 법정적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죄 없는 자를 석방하고 죄 있는 자를 정죄하면서 논쟁을 재판하는 것이 인간 재판관의 직무인 것처럼(신 25:1)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과 달리 의로운 사람은 재판에 있어 무죄(無罪) 선언을 받고 재판관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복 있는 자이다(시 32:2).  반면에 정죄를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사람이다(롬 1:18).  독일 신학자 Walther Eichrodt는 이것이 이 용어의 일차적 개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trans. J. A. Baker, Vol. 2』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적용될 때 그 개념은 작아지고 거의 법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된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의’(義)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George Eldon Ladd가 말했듯이 랍비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완전하고 흠 없는 순종을 요구하신다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두 가지 열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는 선을 향한 열망과 다른 하나는 악을 향한 열망이 그것이다.  의로운 사람이란 선한 충동을 높여주고 악한 충동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의 선한 행위가 악한 행위를 능가하게 만드는 자이다.  그래서 때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입지가 전능자께서 행하시는 평가손익(評價損益)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구약학 교수인 William Oscar Emil Oesterley는 『The religion and worship of the synagogue』에서 하나님의 회계 장부에서 매일 대차 계정((貸借計定)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차액 균형이 대변(貸邊) 즉 선한 행위들인 토라 연구에 집중하고 자선을 베풀며 자비의 행위로 기울어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반면에 차변(借邊), 즉 악행으로 기울면 그 사람은 정죄를 당한다.  유대 종교 학자 George Foot Moore의 말을 인용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인간들을 행위에 따라서 엄격하게 보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균형성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루터파와 개혁파 학자들은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저울질하는 조잡한 법정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의’(義) 교리는 어떠한가?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그의 확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재판관이 악인을 정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롭다고 하거나 사면한다면 이는 그 자신이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은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뜻이었다(잠 17:15).  불경건한 자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정죄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재판관이실 경우 ‘경건치 아니한 자’가 의롭다고 판결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롬 4:5).  Michael S. Horton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악한 자를 의롭다 칭하신다는 이 주장은 오늘날까지 사도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에 엄청난 논란을 가져왔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며, 의롭기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의 표준을 떠받드는 것(시 145:17) 즉 의로운 자에게는 의롭다고 선언하고 죄 있는 자를 정죄하는 것이었다(왕상 8:32).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로우심을 보여 주셨다고 단언한다(롬 3:26).  하나님은 죄를 위한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유지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이런 무죄 선언은 인간에게 정죄 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율법 행위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다시 한번 그는 강조한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달이라 할지라도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니며 별조차도 깨끗하지 못하고(욥 25:5) 천사들마저 허물이 있다(욥 4:18).  하물며 그분 앞에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서 다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되었을 것입니다’(갈 2:21, 현대어 성경).

'바울이 말한 ‘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의의 놀라운 결과  (0) 2021.11.06
칭의를 유효화시키는 수단  (1) 2021.10.23
칭의의 유일한 근거  (0) 2021.10.09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칭의  (0) 2021.10.01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  (0) 2021.09.2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