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정통의 3대 핵심 교리는 삼위일체론(동일본질론)과 기독론(신인양성론)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다.  Martin Luther는 이신칭의 교리를 가리켜 “복음의 심장, 즉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 이 구절은 종교 개혁을 탄생시킨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지금도 다양한 전통과 견해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쟁이 일어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을 했을 때,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 일까?   

오늘날의 현실은 전통적인 바울 신학의 칭의 개념을 둘러싼 이해가 바울 신학의 새 관점(NPP) 학파의 등장으로 인해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신학계에서는 이 주제를 가지고 전쟁이 아닌 전쟁, 쓸데없는 신학 대전(大戰)을 벌여 왔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각 교단을 배경으로 하는 좋지 못한 전통과 신학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있다.  성경을 바라보는 이러한 안경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성경적 정합성과 적합성을 확보하거나 치밀하게 추구하는 안경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안경들이 신학적 사고의 틀 안에 갇혀 그때마다 서로 다르게 반응하며 어떤 견해도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부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오직 자신들만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것처럼 교조주의적 심각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러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현대판 산헤드린 공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주석가들은 칭의(롬 4:1-5)와 행위(약 2:14-26)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별히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제기되는 칭의에서 행위가 갖는 역할에 관한 논의는 신약성서의 여러 핵심 본문의 의미에 관한 주해 논쟁으로 압축된다.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칭의의 행위적 측면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말한 그 행위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2장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으로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들 사이에 언약을 상징하는(창 17:9-14) 참된 할례에 관한 정의(롬 2:17-29절)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3절)라는 바울의 진술이다.    

주석가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Michael Bird가 말한 것처럼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음을 확증하지만(레 18:5, 약 1:22-25) 이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롬 3:20, 갈 2:16).  반면에 성령의 능력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다는 사람들은 이 해석을 로마서 8장 3-4절에 명시된 내용이 지금 로마서 2장에서 이미 진행 중이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자들이 비판하는 N.T. Wright의 책을 읽어보면 성령의 인도함 받는 그 행위가 최후의 실제 기반임을 수용하는 듯하다.  

만약 여기서 묘사되는 이방인들(롬 2:14, 25-27)이 성령의 인도함 따라 율법의 요구를 실제로 이루어 가는 신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롬 13:8-13, 갈 6:2) 우리는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롬 2:26)라는 구절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롬 5:19)처럼 경건치 아니한 자가 받는 정죄가 하나님 앞에서 사실이라면(롬 2:1-8), 율법을 행한 자를 위한 칭의도 반드시 실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Michael F. Bird는 믿음으로 율법을 실제로 행하는 이방 신자에 관한 로마서 2장 14-16, 25-27절 기준으로 2장 13절을 읽으면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구절이 가설적 진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우리가 로마서를 읽어나가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사실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 가장 불편하고 성가신 것 중 하나가 있다면 James Dunn의 말처럼 새 관점이 마지막 심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롬 4:3)과 야고보의 행위에 따른 심판(약 2:14-26)이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것은 항상 충돌을 야기시켰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믿음’(faith alone, NIV, RSV)이 나타나는 유일한 곳은 야고보서 2장 24절이다.  문제는 야고보가 그 구절에서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거부한다.  야고보가 이렇게 주장한다는 점에서 바울과의 긴장이 첨예한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바울이 그랬듯이 야고보 역시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똑같이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행함(약 2:21)을 그 입증하는 본보기로 활용한다.  이것은 야고보가 아브라함처럼 의를 얻기 위해서는 행위(이삭을 받침)가 실제로 중요하다는 취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행위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력히 권고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위를 쌓는 행동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성경을 살펴보면 이들의 모순된 주장이 사라진다.   

이러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헬라 교부 John Chrysostom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언급했다.  Calvin 역시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제기된 차이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독교강요』에서 Chrysostom과 비스름 하게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즉, 행위로 구원받지는 않지만 행위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에 의미는 행함이 결코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선한 행위는 신자가 고백하는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칭의의 열매라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엡 2:8)이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롬 6:12-16).  이 말의 의미는 칭의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지만(빌 3:9), 심판은 열매를 맺는 순종의 삶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히 6:7-8).  내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 자처럼 보이는가?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두 구절 문맥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불신자가 아닌 신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의 관점에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판결 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롬 2:5-11, 고전 3:10-15, 고후 11:15, 골 3:25).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의 행위가 심판을 받는 것이지(전 12:14, 계 20:13) 그들의 죄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골 2:13-15).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육신의 몸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직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롬 14:12, 벧전 4:5).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가외(加外)의 노력을 촉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골 1:10),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도 착한 일(선한 행위)을 하기 원했으며(고후 9:8) 그러한 행위에 대한 상(賞)이 있음을 상기시켰다(고전 3:14, 9:24-25, 빌 3:14, 골 3:24).  바울이 보기에 온전한 구원이란 고린도전서 15장 2절 말씀처럼 어느 정도의 신실함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갈 6:8, 골 1:23)에, 그는 자신의 개종자(改宗者)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경계를 풀지 말 것을 경고했다(고전 3:17, 10:12, 고후 12:21, 13:5, 갈 5:4, 6:7-8, 골 1:22-23).  신자의 윤리적 책임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과 양자택일에 의한 투쟁에 근거한다.  이 말은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으며(롬 8:11) 그 거주하는 하나님의 영(롬 8:14)에 의해 ‘이미’(already)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고후 5:17) 그 사람은 ‘아직’(not yet) 육을 따라 살 수 있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요일 2:15).  피 흘리기까지 육신의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히 12:4).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멸망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고전 10:1-12).   

성경은 여러 곳에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마 7:21-23).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강한 어조로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써 몸의 행실을 죽으면 살리니’(12-13절).  이 말의 핵심적인 의미는 양자의 영이 신자 안에 거하는 것(롬 8:15)과 신자가 능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사는 것(롬 8:14)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말씀은 어떤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첫 번째 엄중한 경고에 이어 두 번째 경고다.  ’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9).  이들은 외관상으로는 신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해석(eisegesis)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구절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경고이지 불신자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마 5:20).  새로운 신분이 자동적으로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고전 10:12).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칭의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진리인가?  George Eldon Ladd의 말을 인용하면 바울과 그 시대의 유대교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에 대한 평가가 확정되는 마지막 날의 심판이 있을 종말론적인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종말론적 심판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와’(요 5:29) 의인들은 무죄 선언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며 악인들은 정죄를 받아 최후의 형벌에 떨어진다. 

칭의의 종말론적 성격은 바리새인들이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것으로 매도(罵倒) 했을 때, 마지막 날에 ‘언어의 남용’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신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이 종말론적 성격은 바울이 로마 신자들에게 던진 수사학적 질문 속에서도 분명하게 엿보인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리라’(롬 8:33-39).  여기서 바울의 말은 종말론적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둔 것이다(고전 3:10-15).  베드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직고 하게 될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다고 경고한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날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롬 2:5), 우리와 창조주의 그 최후의 만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히 9:27).  하나님의 심판은 편견 없이(골 3:25) 치우침이 없이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어질 것이고(롬 2:5, 고후 11:15), 최종 심판은 인격에 근거하여 시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해 해명해야 하기 때문이다(욥 34:11, 시 62:12, 잠 24:12, 렘 17:10, 32:19, 마 17:27, 계 20:12, 22:12).  신자가 삶 가운데 실제로 행한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갈 6:7).  다시 말해 마지막 심판의 날은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온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심판을 받는 날이다(갈 6:8).

그러나 전통적 개혁주의 칭의론을 내세우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는 미래적 실재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John Piper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칭의’라는 용어는 이 세대의 마지막이 아니라 일반 법정에서 발생하는 일을 지칭한다”  그는 이어서 “신약 성경의 신학적 의미에서, 칭의는 더욱더 칭의의 미래적 실재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Piper도 복음주의 목회자답게 미래적 시제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까운 미래’, 혹은 ‘인접한 미래’, 또는 ‘즉각적인 미래’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최종적이고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칭의의 법정 이해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은 바울 서신의 용법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서만 보면 Piper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칭의의 미래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구절들은 그 외에도 몇 군데 더 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자기가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마 12:37, 표준새번역). 

그러나 바울 복음의 핵심은 이 종말론적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역사 속에서 이미 발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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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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