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과의 영적전쟁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많은 기도의 뒷받침이 필요한데(막 9:29), 우리는 무모하게 혼자 싸우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 특히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기도의 후원으로 그리스도 앞에서의 사역을 계속해 나아가야 할뿐만 아니라 사역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영적인 스승을 갖는 일은(마 10:24), 또 하나의 중요한 후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과 교회 전통과 제도의 영향으로 인해 사역을 행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독립할 만큼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인데 아마 이것은 지나친 자만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령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흔히 부지불식간에 모든 사역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이나 착각에 빠져들곤 하지만 실제로 사역을 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사탄의 공격목표가 되는 일이 많으므로 영적으로 같이 기도할 수 있거나 협력 사역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한 법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이러한 사역에 종사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치유 받아야 할 상처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일뿐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이 더욱 더 건강해질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고 나아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격려와 축복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갖도록 배워 왔으므로 자신이 그러한 태도에 주목하는 일에 대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스스로 어떤 유익을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의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지나칠 정도로 무비판적이고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이런 사람에게는 ‘치유’(행 19:11-12)와 ‘초자연적인 역사’(막 16:20), 그리고 ‘지식의 말씀’(고전 12:8)과 ‘방언’(고전 14:39), 그리고 ‘예언’(고전 14:1)이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에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은 모방의 천재라는 것을 알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강신술을 심취했던 Raphael Gasson“사단은 극히 교묘한 방법으로 성령의 은사를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 거짓으로 모방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성경에서도 이것에 대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케 하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말합니다(마 24:24).  따라서 우리가 어느 정도 비판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쉽사리 미혹에 빠지기 때문에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하는 것은(요일 4:1), 바로 이런 분야에서의 분별력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표방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마 7:21-23).

 

따라서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가 필요하고(고전 12:10), 또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을 연구하는 데에도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어느 정도의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한편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게 입증되는 표적과 기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막 16:20, 행 4:14-16).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신다면 어떤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확한 이야기들, 예를 들면 간증이나 초자연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어떤 확인이나 검증 없이 믿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더라도 진실 되고 주의 깊은 태도를 가지고 분별하는 것이 낫고 그것에 관련된 모든 측면들을 자세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살전 5:19-22).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은 회의주의자 도마와 같이 비록 의심을 품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고 반면 진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요 20:24-29).  즉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행하신 일을 보면서도 믿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던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행 7:51), 바리새인들처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요 9장).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고 신비로운 일이며(요 3:8), 그 사역에 수반되는 거의 모든 사건들마다 새롭게 무엇인가 배울 어떤 것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현재 어떤 역사를 일으키실 것인가에 관한 호기심이고 그분의 역사에 대한 믿음과 통찰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매일 기대하고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는 『신앙감정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실로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과 매우 신비롭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스스로의 방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령 하나님께서는 현재에도 여러 가지 역사를 이루고 계시며(히 13:8), 특히 이러저러한 삶의 어려움으로 고통당하거나 육체의 질병과 영적으로 주님과의 관계의 단절로 인한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해 더더욱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길 원하시고 계실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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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그들이 복음을 위한 싸움이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것이 다른 복음주의자들보다 일찍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병 고침과 귀신을 쫓는 일, 성령의 표적과 기사, 그리고 열정적인 예배와 영적싸움으로써의 기도 등을 지극히 정상적인 기독교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복음 전파에는 왕도가 없기 때문에 각 교회나 각 개인에게 필요한 효과적인 것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르헨티나 침례교 목사인 알베르토가 말했듯이 “전도란 곧 치열한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특히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도가 무슨 치열한 영적전쟁이야! 옆집 아줌마 그냥 예수 초청 잔치에 데리고 오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 팔년 동안 귀신들려 고통을 당한 여자처럼(눅 13:10-16), 사단에게 일생 동안 잡혀 있는 영혼들을(히 2:15),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일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기도, 즉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기도 없이는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단은 피조물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불 못에 던져 심판받을 존재이지만(계 20:10), 그렇다고 해서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성경은 사단을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 ‘이 세상 임금’으로(요 12:31), 표현하고 있고, 사도 요한도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요일 5:19), 사단은 실제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지금도 강력한 능력을 행사한다고 볼 때(살후 2: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세상과 우리의 영혼까지 장악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강력한 사단의 진을 파하셨고(요일 3:8),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골 2:15).  사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시작된 그분의 공생애는 처음부터 전략적 수준의 영적싸움이었고(마 4:1), 최고 수준의 능력으로 사단을 대적하신 예수님은 사탄과 이 세상을 향하여 영적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요 16:11).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삼위일체 중 제2위의 하나님이시지만(마 3:16-17), 사단과의 능력대결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이(요 1:1), 싸우신 것이 아니라 인간되신 그분이(빌 2:7-8), 마귀를 이기셨다는 것입니다(마 4:1-11).  Colin Brown 박사는 이것을 가리켜 『That You May Believe: Miracles and Faith Then and Now』에서 "성령 기독론"이라고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 하셨다는 것입니다(마 12:28, 행 10:38).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분명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라고 말씀하셨듯이(눅 10:19),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행할 수 있는 신학적, 영적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요 14:12).  물론 이것은 이론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주님처럼 행할 수 있는가 또 행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까지가 가능한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사단아 내가 너를 묶노라”고 명령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기도한 대로 사단이 묶임을 당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단의 최후는 무저갱 속으로서의 심판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계 20:1-2).  그러므로 “사단아 내가 너를 묶노라”고 명령할 때에 그 적용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사단과 직접 대결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낮은 수준의 악한 영들, 곧 귀신들과 대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엡 6:12).  간략하게 말하면 일반적으로 더러운 귀신들을(막 3;11), 내어 쫓는 수준의 싸움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행 16:18),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으나(막 16:17),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과의(엡 2;2), 직접적인 대면에는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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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고전이 된 『Quiet Talks on Prayer』에서 S.D. Gordon은 “실제적인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향력을 끼치거나 그분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과 그의 졸개인 악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주님과 함께 그분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귀신들과의 영적싸움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하나님께 참여함으로써 사단과 귀신들을 무찌르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사악한 영들을 무찌를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4:6).  솔직히 오늘날 목회자와 신자들이 세상과 거룩하게 구별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 산다고는 하지만(고후 2:15), 천국에 갈 때까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들이고(요일 1:8-10), 누군가가 마음을 상하게 하면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이 말한 것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짐승 한 마리”의 정체가 들어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이길 만한 힘도 없고( 4:23), 특히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에서는 제자들처럼 묵사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9:14-29).  쉽게 말하면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성경구절을 줄줄이 인용하여 귀신들의 세력을 대적하지만 그것을 이길만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은데( 4:18-19), 문제는 성경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역자들이 언제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고 만약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라면 초대교회 제자들이나( 3:1-10), 평신도 빌립 집사처럼( 8:4-13), 아니면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의 능력과(고전 2:4),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5:39), 복음을 통해 타락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1:16), 그 말씀을 통해 영혼뿐 아니라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것과( 8:8), 귀신들의 세력에서 놓여남을 받는 것과 같이( 8:16), 육체도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요삼 2).  그래서 예수님의 지상사역에서 영혼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2:5),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9:21), 육체의 질병과( 1:32-34), 마귀에게 눌려( 10:38),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8:36).  이렇듯 우리 사역의 모델은 예수님이기에 그분의 삶에서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11:4-5, 1:21-27),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서로 조화를 이룬 것처럼( 28:18, 11:29), 제자들의 삶과 사역에서 마찬가지로( 4:29-30),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고전 12:4-11), 등한시 하고 말씀만을 강조하는 것은 균형 잡히지 않는 목회 사역이라고 볼 수 있고 사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일하신 직접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고 실제로 바울 서신에 맨 처음 등장하는 성령에 대한 언급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된 것은 단지 바울이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복음 증거에는 성령이 능력으로 함께 하셨고 이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이에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살전 1:5).  또한 고린도전서 24절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증거한 설교 내용에(고전 1:18-25), 설득력 있는 지혜와 수사는 없으나 그럼에도 그 증거가 지혜나 수사보다 훨씬 더 효력이 있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로마서1518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복음 증거가 ‘말’로만이 아닌 ‘행위’로 이루어 진 것이며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적적인 것들이 복음 증거에 뒤따르지 않거나( 16:20), 둘 중 어느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식의 ‘양자택일’로 생각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이 두 가지 능력이 그에게는 당연히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1:29).

 

영적전투에서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Dick Bernal은 “하늘의 악의 영들을 다루는데 있어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우리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고( 4:13), 성공적으로 마귀를 대적하려면( 6:11), 반드시 행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과 그분을 가까이 하는 것, 그리고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4:7-8).  물론 이 효과적인 영적싸움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진리의 말씀과 개인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6:14-17),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인데(벧전 1:15-16),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요일 2:3).  사실 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룩함을 얻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거룩함이 없이 귀신들과 영적싸움을 치르게 된다면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처럼 벌거벗고 뛰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고( 19:13-16),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처럼 소리만 지르다가 끝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9:17-19,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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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패배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2:15).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에 대해 영적으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만약 그들이 이미 패배했다면 십자가상에서 하신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요?  물론 어떤 일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에(13:12), 가감할 수는 없고 그분의 희생은 단번에 드려진 것으로( 10:10), 사탄이 패배를 당했다는( 10:18),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스스로를 씻어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즉, 하나님 나라는 이곳에 있고 우리가 그 일부분이며( 17:21),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그 나라가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기에 피 흘리기까지 영적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습니다( 12:4). 다시 말해서 복음이 세상 가운데 퍼져감에 따라 계속 악의 세력이 축소되고 또 사탄은 이미 패배한 자에 불과하지만( 4:1-11),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어찌 되었든지 그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6:10-13), 영적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고후 13:5),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6:5), 왕 되신 그분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4:16),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8:15).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요일 3:1),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이고( 2:8), 우리가 능력을 받는 것 역시 그분의 은총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8:32).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를 성령의 수중에 맡겨 주셨고( 14:16), 제자들과 우리들을 너무 신뢰하신 나머지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부르셨으며 요한복음 1515절에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좇아 주님을 닮아가야만 하고(벧전 2:21), 그분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하여야 하며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4:12).

 

이 문제를 놓고 무디의 동역자이며 성서학자인 R.A 토레이는 『What the Bible Teaches』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타고난 신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써 거룩한 사역을 위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분은 능력이라는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조건 아래 있었다”  사실 성령의 은사인 ‘지식의 말씀’을(고전 12:8), 알기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고 사역을 행하셨던 것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설명밖에 할 수가 없었는데( 9:4, 12:25, 4:17-18), 그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있고 그 행하신 기적들을 주님의 “신성”의 증거로 설명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것을 모르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에( 9:16, 21, 8:45), 대하여는 적당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어떻게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2:8), 아무 것도 이야기를 해 준적이 없는 것들을( 1:48, 19:5, 4:18), 알고 계셨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예수님처럼 성령과 능력을 받으면( 10:38),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리라고 약속하신 그 어떤 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4:13).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 이러한 주장을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며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지니고 계셨지만 우리는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기 위해 신적인 특권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고 말하며( 2:6-11), 물론 어떤 신비스러운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신적인 속성을 완전히 유지하신 것만은 사실이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자신의 사역을 본받기를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기 전까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셨고( 6:3), 세례를 받으신 후에도( 3:16), 스스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었으며( 5:30),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따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5:19), 다만 그분의 인성이 죄가 전혀 없으시다는 점에서( 4:15), 원래부터 우리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에 대해(벧전 2:21),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놀라운 특권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1:12), 성령충만한 가운데 자신을 본받으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분께서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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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주의 교단에 소속되어 목회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말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그 말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인들에게 말씀만을 강조해오던 터라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은사를 접목시킨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회고해 보았을 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라는 갈등과 고민을 몇 년을 거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목회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면서 금식기도에 들어갔는데 첫날에는 주님은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뜨거운 체험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이번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원에 들어온지 23일째 되는 날 주님은 나에게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집에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놓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날 그 자매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아무런 영적싸움에 경험이 없는 나에게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아직 내 적수가 되지 못해”  그날 나는 식음 땀을 흘리며 그 영적싸움에서 완전히 묵사발 당함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성경은 온 세상은 악한 자안에 처해 있으며(요일5:19),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서(딤후 2:3), 적진 안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기에(딤전 6:12), 군사인 우리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며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지만(딤후 2:4),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수 24:15, 마 7:13-14), 싸움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적이 승리하리라고 판단한 나머지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감으로써 지휘관 대신 예수님께 불복종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전투에 임하여 행동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아기 예수를 죽으려했던 사탄의 시도로부터(마 2:13), 광야에서의 유혹에 이르기까지(눅 4:1-2),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끌어 갔던 사탄의 공격에 관한 기록을 통해(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9장), 복음서는 우리가 반드시 대적해야만할 적이 항상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사도들 역시 그러한 체험과 기록을 사도행전에서 남기고 있으며(행 13:4-12, 16:16-34), 특히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에베소서 6장은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러한 전투가 적진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단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으며(요 14:30),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있고(요일 5:19), 에덴동산에서 이 세상에 대한 권세를 일시적으로 아담으로부터 사탄에게로 넘어가게 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눅 4:5-8),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께 대하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당연히 그분의 군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제복을 입혀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엡 6:10-13), 우리는 민간인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할 것처럼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딤후 2:3-4).  그런데 만약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처럼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대하여 충성스럽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바울이 우리를 경기에 있어 운동선수에 비유한 것처럼(딤후 2:5), 우리로 하여금 적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과(벧전 5:8), 동시에 적이 사용하는 속임수가 어떤 것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The Agape Road』의 저자 Bob Mumford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성경의 결론을 통해 누가 승리하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롬 8:37), 우리는 이런 영적전투에 대해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전투에 임할 수 있어야 하며(약 4:7),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하거나 치유되거나 아니면 육체적, 정서적, 영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마귀의 지배로부터 풀려난다면 사탄의 세력들은 격퇴당하고 그의 영토가 주님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눅 13:10-17).  오늘날 사탄은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맹수와 같기에(계 12:12), 돈에 약한 가룟유다나(요 13:2, 26-30), 발람같이(벧후 2:15-16), 아니면 세상을 사랑한 데마처럼(딤후 2:10, 몬 24절), 취약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사람을 사탄은 미친 듯이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비록 두려움 없이 자신감에 차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높은데 마음을 두거나(롬 12:16), 대단한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잠 16:18), 늘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해야 하고(엡 6:18), 항상 성령충만한 준비된 상태를 갖추고 있어야만 영적전투에서 패배를 당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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