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치유사역을 시작할 때에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8살 정도의 어린 딸을 데리고 집회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자신의 딸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 정상인과 다르게 척추가 S자로 휘어지고 틀어져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에게 무서운 병으로 통하는 척추측만증’(scoliosis)이라고 알려주면서 고침 받기를 원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 젊은 부부의 심정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처럼 간절하고 애절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딸이 건강하게 고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빌립보서 25절의 말씀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긍휼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여야 하는데(14:14), 이제 시작하는 초짜가 무슨 대단한 치유사역자가 된 것처럼 느닷없이 사람들 앞에서 그 젊은 부부를 향하여 죄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얼굴 색이 달라지면서 꼭 나에게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딸의 병을 고침 받으러 왔지, 당신에게 죄를 지적받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날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지만 젊은 부부의 어린 딸은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의 일이지만 그때 당시 치유사역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한 가운데서 나의 육적인 본성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미명 아래 영적사역을 남용했던 사건입니다.    

 

Montanus가 개인이 받은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자신의 해석한 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을 일삼는 소견머리가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들 못지 않게 예언사역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남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예언( 13:2)이나 성경해석을 가지고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받은 것 같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발언과 책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왕상 22:5-28).  사실 하나님께서 어떤 영적 활동을 허락하시거나 장려하게 되면 모든 사역자는 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하는 성령충만한 사역자이든 아니면 메마른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목회자이든 혹은 예언을 하는 사역자이거나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역자이든지 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본성적으로 이런 기회를 남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합법적인 성령의 은사들을 이용해 사역을 남용하는 일을 바로 잡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고전 12-14, 12:3-13, 4:7-16).  문제는 예언사역자들 중에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들었던 그 음성을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가운데(고전 14:29),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공개적으로 죄를 언급하는 예언사역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언자들이 그렇게 행했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5:1-16)과 박수 엘루마의 죄를 언급하면서(13:4-12), 사람들 앞에서 죄를 지적합니다.  사실 범죄한 장로들은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하고(딤전 5:20), 고린도교회와 같이 음행 죄를 치리할 때에는 공개적으로 해야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고전 5:1-13).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특별한 경우에만 신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했지 일반적으로는 죄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설득했습니다(18:15-17).  즉 장로가 범죄한 경우에 교회는 확고한 증거를 가진 두 세 사람이 증거하지 않는 한 그 장로에 대한 고발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딤전 5:19), 예언사역자는 자신이 받은 개인적인 계시를 근거로 하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죄가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물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 일을 감당할 정도로 성숙하고 신뢰성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사역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특별한 죄가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죄를 언급하기를  원하시는지 먼저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사역은 신자를 돕는데 있기 때문(고전 14:3)에 죄 가운데 있는 형제의 죄를 은밀하게 다루는 가운데서 이들이 회개하기 전이나 후에도 그것을 비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예언사역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9:1, 삼상 10:18)이나성령이 말씀하시길’( 21:11)이라는 표현을 첫 머리에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들은 음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하며 정당화 하려는 남들이 갖지 못한 기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메시지를 전단했을 때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을 들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거나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 외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언사역에 대한 시끄러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해 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남용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성경을 남용할 경우도 있지만 만일 이런 주장을 택할 경우 남용할 대상이 오직 성경 하나에 국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골치 아픈 환상이나( 10:9-23), 주관적인 꿈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23:13-28).  그러나 이러한 정리된 접근방식을 선택할 때의 문제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communication을 닮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37).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 특히 예언사역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의존하다 보면 특별한 함정(물질, 이성, 신비주의, 이단, 사이비 교주될 가능성)에 빠질 수 있고, 받은 예언의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크게 사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촌의 박태선처럼 타락할 가능성이 그만큼 클 수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처음 시작과 달리 예언, 혹은 치유사역을 하면 할수록 돈에 길들여질 경우 발람(벧후 2:15-16)이나 가룟유다( 26:14-16)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더 어긋날 경우 심지어 교인들을 부자로 만든다는 미명하에 주식과 부동산 시장, 그리고 경제에 관한 예언을 하기도 하는데( 23:16-17), 그러면 귀중한 예언사역은 점치는 것에 불과하고 그 황당한 예언은 우연히 맞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음성)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의 경제적인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시고(고전 14:3),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부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44:21).  이런 예언을 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5:31).  사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분별해 내는 것이고(고전 12:10), 무엇보다도 사역자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높은데 마음을 품고 방심하면 이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고전 10:12).  참으로 미스테리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예언사역을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 두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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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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