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사역자'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8.01.20 예언사역의 남용
  2. 2017.09.23 예언사역자
  3. 2017.06.03 참된 예언
  4. 2017.03.25 거짓된 예언
  5. 2017.01.28 게하시 사역

처음 치유사역을 시작할 때에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8살 정도의 어린 딸을 데리고 집회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는 자신의 딸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 정상인과 다르게 척추가 S자로 휘어지고 틀어져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에게 무서운 병으로 통하는 척추측만증’(scoliosis)이라고 알려주면서 고침 받기를 원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 젊은 부부의 심정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처럼 간절하고 애절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딸이 건강하게 고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빌립보서 25절의 말씀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긍휼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여야 하는데(14:14), 이제 시작하는 초짜가 무슨 대단한 치유사역자가 된 것처럼 느닷없이 사람들 앞에서 그 젊은 부부를 향하여 죄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얼굴 색이 달라지면서 꼭 나에게 이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딸의 병을 고침 받으러 왔지, 당신에게 죄를 지적받으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날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지만 젊은 부부의 어린 딸은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과거의 일이지만 그때 당시 치유사역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한 가운데서 나의 육적인 본성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미명 아래 영적사역을 남용했던 사건입니다.    

 

Montanus가 개인이 받은 사적인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자신의 해석한 것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을 일삼는 소견머리가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들 못지 않게 예언사역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남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예언( 13:2)이나 성경해석을 가지고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허락받은 것 같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발언과 책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왕상 22:5-28).  사실 하나님께서 어떤 영적 활동을 허락하시거나 장려하게 되면 모든 사역자는 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하는 성령충만한 사역자이든 아니면 메마른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목회자이든 혹은 예언을 하는 사역자이거나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역자이든지 간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본성적으로 이런 기회를 남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합법적인 성령의 은사들을 이용해 사역을 남용하는 일을 바로 잡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고전 12-14, 12:3-13, 4:7-16).  문제는 예언사역자들 중에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들었던 그 음성을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가운데(고전 14:29),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공개적으로 죄를 언급하는 예언사역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언자들이 그렇게 행했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5:1-16)과 박수 엘루마의 죄를 언급하면서(13:4-12), 사람들 앞에서 죄를 지적합니다.  사실 범죄한 장로들은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아야 하고(딤전 5:20), 고린도교회와 같이 음행 죄를 치리할 때에는 공개적으로 해야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고전 5:1-13).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특별한 경우에만 신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했지 일반적으로는 죄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설득했습니다(18:15-17).  즉 장로가 범죄한 경우에 교회는 확고한 증거를 가진 두 세 사람이 증거하지 않는 한 그 장로에 대한 고발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딤전 5:19), 예언사역자는 자신이 받은 개인적인 계시를 근거로 하여 어떤 사람에 대하여 죄가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물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 일을 감당할 정도로 성숙하고 신뢰성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사역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있다면 주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특별한 죄가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죄를 언급하기를  원하시는지 먼저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사역은 신자를 돕는데 있기 때문(고전 14:3)에 죄 가운데 있는 형제의 죄를 은밀하게 다루는 가운데서 이들이 회개하기 전이나 후에도 그것을 비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예언사역자들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9:1, 삼상 10:18)이나성령이 말씀하시길’( 21:11)이라는 표현을 첫 머리에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들은 음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신하며 정당화 하려는 남들이 갖지 못한 기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메시지를 전단했을 때 만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거짓으로 판명된다면 그것을 들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거나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 외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언사역에 대한 시끄러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해 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남용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성경을 남용할 경우도 있지만 만일 이런 주장을 택할 경우 남용할 대상이 오직 성경 하나에 국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골치 아픈 환상이나( 10:9-23), 주관적인 꿈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23:13-28).  그러나 이러한 정리된 접근방식을 선택할 때의 문제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communication을 닮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37).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 특히 예언사역을 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의존하다 보면 특별한 함정(물질, 이성, 신비주의, 이단, 사이비 교주될 가능성)에 빠질 수 있고, 받은 예언의 은사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크게 사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촌의 박태선처럼 타락할 가능성이 그만큼 클 수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처음 시작과 달리 예언, 혹은 치유사역을 하면 할수록 돈에 길들여질 경우 발람(벧후 2:15-16)이나 가룟유다( 26:14-16)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더 어긋날 경우 심지어 교인들을 부자로 만든다는 미명하에 주식과 부동산 시장, 그리고 경제에 관한 예언을 하기도 하는데( 23:16-17), 그러면 귀중한 예언사역은 점치는 것에 불과하고 그 황당한 예언은 우연히 맞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주님으로부터 온 말씀(음성)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개인의 경제적인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시고(고전 14:3),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부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44:21).  이런 예언을 하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5:31).  사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분별해 내는 것이고(고전 12:10), 무엇보다도 사역자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높은데 마음을 품고 방심하면 이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고전 10:12).  참으로 미스테리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예언사역을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 두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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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사역자

예언사역자 2017. 9. 23. 12:02

하나님께서는 종종 인간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데( 18:1-2), 이로 인해 그분을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 같이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13:16).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지 않는다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인간이 과연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18-25).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시는 것입니다( 35:15, 21:33-36).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면 자신의 생각이나 평소의 행동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자신에게서 나올 때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인데(고전 14:29), 그 방법으로는 세상의 생각의 옳고 그름을 가려낼 수 있는 성경말씀(딤후 3:15-17)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 어떠한 열매를 맺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7:15-23).  솔직히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방법들 역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즉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은 이러한 방법들을 악용한 발람처럼 자기의 욕심과 만족을 채우는데 얼마든지 남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벧후 2:15-16).

 

예를 들어 한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예언사역자들 중에 끝에 가서 타락하는 경우들을 간혹 보게 되는데, 비판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좋지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분별 없이 그 사람이 거짓예언자라고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자로 한 때 쓰임을 받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 같이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103-14-16).  다시 말해 하나님이 한 때 쓰시는 당나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고( 22:28), 하나님 손에 붙잡혀 쓰이는 도구들을 너무 신령한 사람으로 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경험하고도 후에 큰 낙오를 하는 선지자들이 나오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7-11)과 홍해를 가르고( 14:13-16),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었지만( 33:11), 말년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20:10-12),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광야를 떠돌다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가운데 죽었습니다( 34:1-5).  엘리야 역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기도하여(왕상 18:36-38), 기적을 일으키는 큰 역사를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죽이러 오는 이세벨을 보고 두려워하여 도망갔던 적이 있었습니다(왕상 19:1-4).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어떤 놀라운 영적인 경험이나 체험도 믿음을 가지고 매일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신앙생활과 대체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당나귀처럼 쓰임 받는 사역자들 역시 언제든지 범죄 하기 쉬운 인간이기에 대단한 것처럼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5).

 

오늘날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들 중 가장 영적이고 신비로운 경험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고전 12:10), 문제는 이러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영적인 경험의 신비로움에 넋이 나가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여겨 Todd BentleyPaul Cain같이 하나님은 뒷전이 되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영적인 계시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더 중시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고 맡기신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 1:18)을 잘못 관리하는 악하고 탐욕스러운 사역자가 되어(벧후 2:1), 자기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이들까지도 현혹시키는 타락한 예언사역자로 전략할 것입니다( 24:24).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언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거룩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8:32), 무엇보다도 이러한 메시지를 받고 전하는 사역자라면 먼저 그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있는 자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시고 그것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 안에 모든 사람들(고전 12:7)로 하여금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기를 원하고 계시지만(고전 14:3), 만에 하나 예언사역자가 이것을 빌미로 돈에 미친 발람의 길을 걷는다거나( 11), 한 때 쓰임을 받다 타락한 유다에서 온 선지자처럼 행한다면 시작은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그 끝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왕상 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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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언

예언사역자 2017. 6. 3. 12:18

처음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할 때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사모했던 은사(고전 14:1)는 ‘치유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였습니다(고전 12:9-10).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서적들을 수백 권 이상을 탐독하며 책을 읽고 연구하는 가운데 내용들이 너무 추상적이고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이 없어, 읽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은사 집회를 참석하는 가운데 눈으로 보고 몸과 마음으로 섭렵하기를 원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없었기에, 사실 서너 번 걸쳐 먼 곳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집회에 참석을 해보았고 짧게는 2-3시간, 길게는 10시간 이상을 운전하는 가운데 다양한 은사 집회들을 여러 번 참석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중 Global Awakening 사역자인 Randy Clark 집회와 아프리카 복음전도자인 Reinhard Bonnke가 강사로 참석한 선교 집회, 그리고 Dallas Seminary 구약학 교수였던 Jack Deere 목사의 세미나를 들으면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이들의 균형 잡힌 사역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성령의 사역자들, 물론 이들을 판단하실 분은 예수님이시지만(롬 14:4), 이들에게서는 복음에 관한 예수님의 증거보다는 ‘치유’와 ‘예언’, 그리고 은혜 받은 ‘간증’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열 명중 여덟 명은 복음보다는 표적과 기사에 많은 시간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된 예언’이란 예언 사역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계 19:10)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바르게 쓰임을 받았던 성경에 기록된 예언사역자들은 언제나 모세와 같이 주님의 영광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출 33:18).  만약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떠한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이 스스로의 힘과 경건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만을 바라보도록 인도했습니다(행 3:12).  예를 들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마 11:13)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면서(막 1:2),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는 가장 하찮은 종으로 여기면서(막 1:7),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어야 하며(요 3:29),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가운데 자신을 일절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마 3:11).  세례 요한이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을 열렬히 추종하는 자들에게(마 3:5),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주지시켰고, 사람들의 관심을 오직 예수님에게로 돌리게 하였습니다(요 3:26-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9-11). 이렇듯 세례 요한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온전히 받쳐진 반면에 오늘날 예언사역자들이 실수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보다는 거창한 ‘예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예언과는 정반대가 되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사역자들이 저지르는 또 다른 실수 중에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거나 또는 자신이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인데,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유명하다는 예언사역자들 중에 백 퍼센트 정확한 예언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예언을 분별하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14:29), 신약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과 달리(출 9:1, 민 22:38, 신 18:19, 삼상 10:18, 겔 33:7), 얼마든지 실수하거나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4:1).  얼마 전 어떤 사람의 글을 읽다가 의구심이 생긴 적이 있었는데, 그의 글에 의하면 자신은 오랫동안 주님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면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을 진리의 말씀으로 검증하고 그 검증된 대언은 정확성에 있어 단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솔직히 이러한 궤변은 신약에서 말하는 예언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물고 뜯고 싸울 수 있는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는데(고전 13:9), 이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연약함과 죄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롬 7:17-25),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언사역 안에서 진정한 삶의 열매가 없거나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는 것입니다(마 7:15-23).


단언하건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상처와 영적교만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로가 되지 않는다면 예언사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거나 그 다듬어지지 않는 예언을 통해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D. A. Carson은 구약 선지자가 참된 예언자로 인정되면(삼상 3:19), 그 예언의 내용에 대해서 점검하는 일은 없지만(민 22:38), 신약의 예언자는 그 예언의 내용을 조심스럽게 점검받아야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살후 5:20-22), 만약 누군가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중에 자신만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일단은 요주의 인물로 경계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요일 4:1).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든지 아니면 메시지의 느낌을 받든지 간에 예언에는 불순물이 섞일 수 있는데(살전 5:20-22),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묻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언사역자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하나님이 주시는 느낌으로 잘못을 범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신령한 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 사람을 신뢰하지만, 만약 예언자가 실수를 한다면 자신이 예언한 것에 대해 신뢰성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기 때문에 쉽게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 ‘사이비’, ‘신비주의’, ‘교주’로 가는 첩경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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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예언

예언사역자 2017. 3. 25. 12:03

로마서 11장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선물을 거두시거나 부르심을 물리치지는 않지만, 이 주어진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와 같이 은사를 받더라도(눅 9:1), 결국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행 1:18, 25), 은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사무엘 외에 아무도 알 수 없었는데(삼상 16:1), 그 이유는 그가 계속 왕위를 가지고 있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고(삼상 18:6), 여전히 영예와 명성을 누렸기 때문에 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삼상 16:14).  충격적이었던 것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길을 가던 중에도 예언을 했는데(삼상 19:22-24), 분명 그는 다윗에 대한 미움과 질투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삼상 18:29), 그가 가진 은사는 그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삶속에서 위선자의 모습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있어 얼마든지 은사가 발휘될 수도 있다는 것인데, R. T. Kendall은 성공회 목사소름끼치는 무서운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신다 해도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들의 90퍼센트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빈 공간’(God-shaped vacuum) 존재한다고 믿었던 뛰어난 과학자이며 기독교인 Blaise Pascal“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서 악을 행할 때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악을 행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사울 왕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에 들려는 태도는(삼상 15:24), 말씀(마 23:2)과 기도사역뿐만 아니라(마 6:5), 예언사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에스겔서에 보면 허탄한 묵시(거짓된 환상)아첨하는 복술(잘못된 예언)이 병행하여 등장하는데(겔 12:24), 당시 이스라엘의 거짓선지자들은 영적분별력이 없는 백성들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속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렘 28장),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예언은 그분의 약속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렘 14:13).  그러면서 이들은 백성들에게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예언을 남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예언을 했고(렘 14:14), 그분의 임박한 진노 대신에 평화만을 선포했지만(렘 23:16-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낸 참선지자들의 경고가 결국 입증될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허탄한 묵시와 아첨하는 복술이 이스라엘에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예언사역자가 구약의 거짓선지자처럼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려 한다면, 그는 결국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은 거짓된 예언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겔 13:2).


사실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는 잘못된 욕망을 가진 예언사역자가 사람들의 죄를 못 본체 하고 헛된 위로를 주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애 2:14, 슥 10:2), 여기서 가장 좋지 못한 경우를 찾아본다면 아마 거짓선지자들의 대표격인 시드기야처럼 사탄의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될 때입니다(왕상 22:5-28).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악령의 도구로 사용되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마 23:15), 더 심각한 것은 예언하는 사람 중에 한 결 같이 본인 스스로는 시드기야처럼 정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왕상 22:11).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벨릭스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죄를 지적하는 말씀(행 24:25)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거짓예언을 권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예언자에게 진리를 말하지 말고 자신들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라고 압력을 행사할 때(사 30:10), 특히 거짓예언자는 영적분별력을 상실한 자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거짓된 예언을 할 수 있고(렘 23:16), 그것을 듣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거짓예언자가 쏟아내는 허황되고 황당한 잘못된 예언을 받아들입니다(렘 5:31).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지 않은 거짓예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하고(렘 28:15), 그것을 듣는 사람들 역시 망령되고 쓸데없는 무익한 예언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딤후 4:4).


이렇게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꾸며낸 거짓된 예언은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나오는데(고전 14:29),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이지만(행 17:1-2),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많은 잘못된 예언들을 통해 적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임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살후 2:1-2).  사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 주의 날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살전 4-5장), 거짓교사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만들어낸 거짓예언에 심히 흔들리고 있었는데(살전 2:2-3), 바울은 이러한 교인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예언)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확고한 진리위에 견고히 서서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말 것을 명령하면서(살전 2:2), 주의 날이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현상을 인용하여 강조합니다(살후 2:3).  하나는 ‘배도하는 일’(마 24:11, 딤전 4:1), 즉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악의 세력의 출현과 다른 하나는 역사 속에서 사단의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요일 2:18),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누구인지 해석하기는 힘들지만 그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거짓된 가르침(예언)과 예언의 은사가 남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이런 문제를 알고 첫 번째 편지를 통해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살전 5:20-21).


이렇듯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짓예언자는 내면은 발람의 DNA를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마 7:15), 성경에 나와 있는 고린도전서 14장3절 말씀을 악용하여 축복을 구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6)라고 하신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본다면 이스라엘 왕 아합 당시의 왕실 선지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의 귀에 즐거운 거짓예언을 일삼은 대가로 부를 누리며 칭찬을 들었습니다(왕상 18:19).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사람을 칭찬하거나 아첨하기 쉽지만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갈 1:10).  솔직하게 말해 거짓예언자(마 24:24)나 삯군목사(요 10:12)는 항상 그들의 간사한 행위를 인하여 칭찬을 받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사실이지만(겔 34:1-3), 하나님이 보낸 진정한 사역자는 그분의 공의를 선포함으로써 핍박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마 5:11-12, 요 15:18-20).  따라서 누군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그들의 마음에 들려는 욕망이 있다면 그는 돈에 눈먼 발람처럼 거짓예언자일 가능성이 많고(벧후 2:15), 더 나아가 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약 3:1).  아마도 그는 가룟유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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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하시 사역

예언사역자 2017. 1. 28. 12:12

석가모니는 사람이 스스로 욕심을 없앨 수 있게 한다는 ‘팔정도’(Eightfold Path)라는 제도를 만들어 냈는데, 이 팔정도를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에 이르게 되고 죽음과 환생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허설(虛說)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끝없는 지옥의 무저갱과 같아서 아무리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욕심을 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만 지나온 과거 역사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돈이 많아 삶의 행복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비참한 삶으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 근래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인간이 돈에 중독되거나 맛을 들리면 나라 전체도 말아먹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이 불신자라면 이해가 되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집사 직분을 받아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지옥에 갈 수는 있겠지만(눅 6:46-49), 가장 큰 원인을 찾아본다면 아마 가룟유다(마 26:15)나 바리새인(눅 16:14)처럼 돈에 환장하거나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에서 떠난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딤전 6:10).  이렇게 돈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한결 같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그분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막 7:6).


구약성경에 보면 메소포타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이며(신 23:4), 술사인 발람은(수 13:22), 히브리인이 아닌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을 부추겼던 사람인데(민 25:1-3), 돈을 지나치게 밝히고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모압 왕 발락에게 자신의 예언을 팔아먹은 대표적인 파렴치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16).  사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 광야 사십년 간은 엄청난 훈련을 받는 기간이었지만(민 14:33),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일곱 족속보다(신 7:1), 더 무서운 적이 있었다면 그가 바로 술사 발람이었는데(수 13:22), 돈에 미친 이 사람이 얼마나 심한 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끼쳤는가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무서운 계책으로 인해(민 31:16), 싯딤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자들의 미인계에 속아 간음하다가 거의 멸망당할 뻔 했습니다(민 25:1).  결국 염병이 퍼져 하루아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고(민 25:9),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음행을 저지르기 위해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를 창으로 찔러죽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민 25:7-9).  사실 발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영감을 받는 이방 선지자이지만 돈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해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유 11절).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역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이용하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언사역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금전적인 것이 개입되는 것인데, 가령 그것이 예언(고전 12:10), 치유(고전 12:9), 기름부음(고후 1:21)이든 간에 거기에는 항상 돈(회비)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산상수훈 ‘강해설교’를 하실 때(마 5-7장), 아니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주기 위해 ‘치유집회’를 열었을 때(행 3:1-10), 더 나아가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안수하여 그들이 방언을 받고 예언을 하는 ‘은사전이 집회’를 했지만(행 19:6), 이들이 돈을 받고 성령집회나 세미나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말씀 세미나’, 그리고 ‘제자훈련 세미나’나 ‘성령 컨퍼런스’와 같은 집회를 열 때 당연한 것처럼 회비를 받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합니다(고전 9:18, 고후 11:7).  무엇보다도 사역자들은 발람같이 돈에 미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교묘하게 이용하지 말아야 하고(벧후 2:15-16), 미가 선지자가 외치는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미 3:5).  이 말의 의미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도덕적, 정신적 향상보다는 한조각의 떡(물질)을 위해 백성들을 속여 번영과 구원을 예언하였고(렘 6:13), 자신들의 잇속만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헛된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렘 5:31).


사실 돈 때문에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예언사역자들만이 아니기에 미가는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친다.’라고 불평했는데(미 3:11), 이 말은 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할 재판관이 뇌물을 받아 판결을 하고(사 1:23, 미 7:3),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는 제사장은 돈을 위하여 설교를 하고(렘 5:31, 6:13), 백성들이 죄악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해야할 선지자들 역시 돈의 맛을 알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점쟁이가 점을 치듯이 거짓으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겔 22:25).  이것은 비단 구약시대의 사역자들만이 아니라 신약시대 교회사역자들 역시 이러한 유혹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교회 안에 돈 많은 부자들에게 편애를 행한 것인데(약 2:1-4),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Paul Cain은 이러한 것을 열왕기하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게하시 사역’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왕하20-27), 솔직히 이런 죄에 빠질 가능성이 가장 많은 사역자가 있다면 바로 치유나 예언을 행하는 사람들이고, 물론 목사나 신학자도 포함되어 있지만(약 3:1),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특히 예언과 치유사역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행하고서도 지옥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마 7:22),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마 24:24).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역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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