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12:3), 간혹 그리스도인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구절은 생각하면(요일 4:19),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1:17).  그러나 Peter Wagner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는 주고 또 다른 지체에게는 주지 않는 그런 의미의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이유는 만약 사랑이 은사라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6-8, 고린도전서 12:8-10, 29-30, 에베소서 411절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에 이것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덴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다음 바로 뒤이어 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더욱 큰 은사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에 이어 13장에 사랑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을더 큰 은사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말한 은사가 단수가 아니라 은사들’, 즉 복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절에서 강조한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더 큰’(meijon)이란 동일한 단어를 145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크고 더 유익한 은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더 크다라는 개념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제한규정에 지배받는 개념으로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은사의 목적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도록 권면한 다음 하반절에서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더 큰 은사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제일 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rit』에서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최고의 은사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성령의 최고의 열매인 사랑을 제쳐놓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사랑을제일 좋은 길로 제시한 것이다. 사랑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한 은사가 아니라 그 중요성 면에서 이런저런 카리스마를 전적으로 앞서는 총괄적으로 감싸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의도는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보면 모든 신자의 삶을 특징지어주게 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하는데 있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바울은 은사 면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한 제일 좋은 길을 사랑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7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미 이상적 혼합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는데 있어 은사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무질서했던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혼란스러운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고전 3:3).  이들의 문제는 은사가 아닌 열매에 있었습니다.  즉 열매가 없는 은사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J. I. Packer는 이 문제를 가지고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인식해야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퓨리탄 학자 John Owen이 말한 대로 은혜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참된 신지식이 가져오는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 5:22-23)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면서 전자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도 은혜는 거의 가지지 못할 수 있는데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와 같이 진정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은혜는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삶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Packer의 말을 요약하면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 사랑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은사에 관한 구절과 열매에 관한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물론이고, 로마서 126-8절의 은사 목록 다음 구절에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고 있고( 12:9-10), 에베소서 4장의 경우에도 16절에서 은사의 목록이 마쳐지고 그 다음 구절부터 열매의 대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2절에 가서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49절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강조합니다.  즉 모든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에 기초를 두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Charles Stanley 역시 고린도전서를 주해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있어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아무 유익이 없듯이(고전 13:1-3), 만약 교회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공기가 빠진 타이어와 같아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불행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영적은사를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을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15:16),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헌신은 그 열매를 통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7:19).  이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역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벧후 1:8), 만약 어떤 사역자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5:22-23),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은사는 무언가 잘못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적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논한 13장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졌지만(4:12),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고전 13:2).  즉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사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1:17).  이처럼 사랑이 은사를 행하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은사보다 더 귀한제일 좋은 길로 바울은 제시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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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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