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한 문제'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1.06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2. 2017.10.14 온전한 것이 올 때
  3. 2017.08.12 성령을 받은 증거
  4. 2017.05.06 금단의 열매, 선악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12:3), 간혹 그리스도인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구절은 생각하면(요일 4:19),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1:17).  그러나 Peter Wagner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는 주고 또 다른 지체에게는 주지 않는 그런 의미의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이유는 만약 사랑이 은사라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6-8, 고린도전서 12:8-10, 29-30, 에베소서 411절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에 이것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덴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다음 바로 뒤이어 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더욱 큰 은사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씀에 이어 13장에 사랑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을더 큰 은사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말한 은사가 단수가 아니라 은사들’, 즉 복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절에서 강조한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더 큰’(meijon)이란 동일한 단어를 145절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크고 더 유익한 은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더 크다라는 개념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제한규정에 지배받는 개념으로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은사의 목적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도록 권면한 다음 하반절에서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더 큰 은사들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제일 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rit』에서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최고의 은사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성령의 최고의 열매인 사랑을 제쳐놓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사랑을제일 좋은 길로 제시한 것이다. 사랑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한 은사가 아니라 그 중요성 면에서 이런저런 카리스마를 전적으로 앞서는 총괄적으로 감싸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의도는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보면 모든 신자의 삶을 특징지어주게 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하는데 있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바울은 은사 면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한 제일 좋은 길을 사랑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7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미 이상적 혼합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는데 있어 은사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무질서했던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혼란스러운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고전 3:3).  이들의 문제는 은사가 아닌 열매에 있었습니다.  즉 열매가 없는 은사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J. I. Packer는 이 문제를 가지고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인식해야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퓨리탄 학자 John Owen이 말한 대로 은혜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참된 신지식이 가져오는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 5:22-23)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면서 전자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도 은혜는 거의 가지지 못할 수 있는데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와 같이 진정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은혜는 전혀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삶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Packer의 말을 요약하면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 사랑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은사에 관한 구절과 열매에 관한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물론이고, 로마서 126-8절의 은사 목록 다음 구절에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고 있고( 12:9-10), 에베소서 4장의 경우에도 16절에서 은사의 목록이 마쳐지고 그 다음 구절부터 열매의 대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2절에 가서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49절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강조합니다.  즉 모든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랑에 기초를 두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Charles Stanley 역시 고린도전서를 주해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있어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아무 유익이 없듯이(고전 13:1-3), 만약 교회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공기가 빠진 타이어와 같아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불행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영적은사를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있을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15:16),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헌신은 그 열매를 통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7:19).  이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역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벧후 1:8), 만약 어떤 사역자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5:22-23),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은사는 무언가 잘못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적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논한 13장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졌지만(4:12),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고전 13:2).  즉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사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1:17).  이처럼 사랑이 은사를 행하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은사보다 더 귀한제일 좋은 길로 바울은 제시했던 것입니다.  

'난해한 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전한 것이 올 때  (0) 2017.10.14
성령을 받은 증거  (0) 2017.08.12
금단의 열매, 선악과  (0) 2017.05.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바울은 교회 내에서 은사의 다양성에 대해 육체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2-31), 그의 요점은 한 육체의 모든 지체들이 몸의 건강을 위하여 모두 필요한 것처럼 모든 은사들은 교회의 건강을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면서(고전 12:7),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들을 주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시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고린도교회 신자들과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은사들이 교회를 성숙하게 세워 나아가는 데 있어 귀중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4:11-13).  또한 바울은 단순한 암시를 넘어 성령의 은사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면서 현재 예언(고전 12:10)과 방언(고전 12:10), 그리고 지식(고전 12:8)은 부분적이고 불안전하지만(고전 13:8-9), 온전한 것이 와서 그것들을 대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고전 13:10).  그러면서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장성한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생각과 말을 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들면서(고전 13:11), 현재 우리의 지식과 이해는 직접적이지 못하고 불완전하지만 언젠가는 완전해지고 직접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3:12).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사들은 교회를 충분하고 완전한 완성으로 이끌기 위하여 주어졌고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치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논쟁이 되는 구절인 ‘온전한 것이 올 때’란 언제이냐는 것입니다(고전 13:10).  이것에 대해 Robert L. Reymond는 성령의 은사계속설은 계시 은사들의 중지라는 장로교 교리와 배치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 『What about Continuing Revelations and Miracles in the Presbyterian Church Today』에서 온전한 것은 계시과정의 결과인 신약정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만들어 내는 ’완성된 계시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성숙하고 불안전의 단계에서 사용했던 계시의 수단들인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중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Richard Gaffin은 계시 은사의 종결을 주장하지만 고린도전서 13 8-13절에 대한 해석에서는 Reymond와 다른 입장을 취하였는데, 그는 『Perspective on Pentecost』에서 ‘온전한 것’과 ‘그 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온전한 것을 신약정경의 완성을 가리킨다는 입장은 성경 주해상 신비성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면서 예언과 방언의 중지 시기는 이 본문에 관한한 “하나의 열려진 문제”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이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Gaffin이지만, 만약 그의 말처럼 ‘온전한 것이 올 때’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면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들은 그 때에야 중단될 것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그 때까지는 이 은사들이 교회 시대를 통해 지속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D. A. Carson 역시 ‘온전한 것’을 재림과 직결하면서 이것을 정경완성과 연관시키는 해석에 대해 『Showing the Spirit: A Theological Exposition of 1 Corinthians, 12-14 』에서 다음과 같이 정당한 비판을 가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것을 성경기록의 종료와 관련하여 생각할 것을 기대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구절이다. 바울은 ‘그 때’에 전지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의 지식은 하나님이 현재 자기를 아는 지식을 닮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의 것이 될 때에는 예언, 지식, 방언 등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거울로 보는 것과 대면하여 보는 것은 70인경에서는 거의 ‘신현’에 대한 공식이므로( 32:30, 6:22),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재림으로 도래될 새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정경 이전의 교회의 미숙과 정경 이후 교회의 성숙을 11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유아와 성인으로 대비하는 것은 역사적인 넌센스다.  이렇게 볼 때  Gordon Fee가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CNT』에서 말한대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최종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 시점에는 현시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은사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정경 종료와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 현시대적 본질을 가진 은사들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을 신약성경 정경의 완성으로 보는 입장을 고집한다면 그 문맥에서 바울의 의도와 상충될 것이고, 만일 주후 90년경을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이 기록된 때로 본다면 성경 저술의 완성은 바울이 주후 55년 고린도전서를 기록하고 나서 약 35년 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Wayne Grudem의 말을 인용 한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설득력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은 떨어지지 아니할 줄로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35년 이상 지속될 줄을 알기 때문이다.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맥을 보면 바울은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을 비교하면서 사랑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 진정으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바울의 지식과 경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벧전 1:8).  Lloyd Jones도 『Prove All Things』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볼 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는 당신과 내가 진리에 관해 우리가 바울을 포함한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거나 월등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입장을 묘사하는 유일한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해 있지만( 17:9),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그는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죄의 흔적과 사망과 아픈 것을 제거하실 것이고( 21:4),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여기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로( 32:30, 33:11, 5:4, 34:10, 6:22, 20:35), 예수님을 대면하여 보게 될 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고(요일 3:2), ‘그 때에는’은 10절에서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자들은 예수님처럼 전지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보나 오해 없이 주님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 영적인 은사들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되고 활용되며 교회의 유익(고전 12:7)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4:12),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과 13, 그리고 14장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만 필요하고(고전 13:10), 그 이후에는 쓸모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간추려 요약하면 사도시대가 끝났고 신약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이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26:64), 온전치 못한 것들인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난해한 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0) 2018.01.06
성령을 받은 증거  (0) 2017.08.12
금단의 열매, 선악과  (0) 2017.05.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나는 출석하던 교회의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생활을 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좋다는 말만 들었지 왜 성령을 받아야만 하고 성령을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얼마 후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성령이 충만한 사역자를 초청하여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광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경회 같은 말씀 집회가 먼저 끝나고 난 후 초청한 강사를 통해 성령받을 사람들은 교회 목사관으로 모이라는 말에 어떤 아는 분과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초초한 마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오랜 세월이 지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씩 목사관에 들어가 기도를 받고 뒷문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지, 또 성령을 받을 때 어떠한 느낌이나 일(현상)이 일어나는지 초신자인 나로서는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와서 안내하는 집사님을 따라 목사관으로 들어가 그 사역자를 통해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두 눈을 지그시 짓누르는 것이엇습니다.

신앙이 초보인 나로서는 남들도 다 그렇게 받는 줄만을 알았고 무엇보다도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속된 말로 ‘눈깔 찌르는 안수’가 성경에 나오는 정상적인 안수인줄만 알았습니다.  사실 한 번도 안수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 시간이 호기심과 긴장감이 넘치는 시간이었지만 그가 선 상태가 아닌 드러누운 상태에서 눈에 티슈 한 장을 덮고 손가락으로 처음에는 서서히 나중에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더니 세게 눌러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빛이 보인다고 말하자 그 사역자가 그것이 ‘성령의 불’이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교회 신자들이 그렇게 받기 원했던 성령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안수기도를 해주신 그 강사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솔직히 그 당시 눈은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성령을 받았다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거울에 비추어진 내 눈을 보니 많이 충혈 되어 있었고 손으로  살짝 만지기만 해도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다음날 아침 호기심이 많은 나는 거울 앞에 서서 그 사역자가 하던 대로 내 눈을 손가락으로 처음에 지그시 나중에는 강하게 눌러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놀라운 빛, 그 사이비 사역자가 말한 가짜 성령의 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이상하게 누르면 누를수록 눈은 아팠지만 그 빛은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먼저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은 방언을 해야 만이 성령 받은 것으로 주장하면서 오순절날 성령이 임할 때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을 성경적으로 제시합니다(행 2:4).  또한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뜻을 가진 퀘이커 교도들처럼 ‘몸에 진동’을 느끼거나 떠는 사람, 혹은 기도를 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 하는 것을 통해 성령을 받으면 몸에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하고(겔 1:28, 단 10:7-10, 계 1:17), ‘환상’을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베드로가 성령받기 전에는 환상을 보지 못했지만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에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본 것을 내세우기도 합니다(행 10:9-16).  더 나아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행 8:14-17)과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내세우면서(행 19:6), 만약 누군가 ‘불의 종’, ‘능력의 종’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은 사람은 이미 그를 통해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험상 이런 것들은 성령을 받은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불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역사가 있어야만 성령이 역사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왕상 19:11-12).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요 14:16),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 오면(요 15:26),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요 16:8).  따라서 성령 받은 첫 번째 증거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는 것’인데, 이것은 어두움 속에서는 바른 사물을 볼 수 없듯이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인줄을 전혀 모르고 방탕하며 살다가(롬 3:11-12), 하나님 아버지의 이끌림을 받고(요 6:44), 빛 되신 그분의 부르심을 통해(롬 8:30),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고 애통해 한다면(마 5:4), 그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갈 1:14),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딤전 1:13).  그러나 다메섹에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난 후(행 9:3, 22:11, 26:13),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딤전 1:15), 성령은 죄로 병든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 세울 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엡 2:1)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출 3:1-5, 사 6:1-5, 눅 5:8).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세리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날마다(마 6:12),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지만(눅 8:18:13),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롬 3:9-18).

성령 받은 두 번째 증거는 ‘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요 16:8),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으로 모를 수밖에 없고(요 5:39),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마 11:27)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원의 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요 1:29), 그분에  대해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성령 받은 후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설교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마 1:21), 대속의 죽음(히 9:12), 부활(막 16:6), 승천(행 1:11), 재림(마 25:31)과 심판(계 21:11-15)에 대해 확실히 알고 증거 했습니다(행 2:14-36).  사실 베드로는 세상적으로 배운 것은 없지만(행 4:13), 예수님에 대해서만큼은 ‘명약관화’하게 된 것처럼 성령을 받으면 세상지식에는 무지할지라도 그분에 대해서는 아는 지식이 생기고(빌 3:8), 성령을 받지 못하면 니고데모처럼 세상 교육은 많이 받아 해박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요 3:10).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바울은 성령 받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도 했지만 (딤전 1:15), 다른 한편으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확신을 가지기도 했습니다(롬 8:31-39). 이렇듯 성령을 받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고(고후 13:5), 성령을 받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는데, 그것은 성령은 내 죄에 대해 ‘검사’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변호인’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롬 8:14-16).

성령 받은 마지막 증거는 ‘심판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요 16:8), 요한복음에 보면 사탄을 세상 임금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14:30), 여기서 사탄의 역사는 두 가지로 외부적인 역사와 내부적인 역사로 나타납니다.  먼저 성령이 오시면 사탄은 외부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주님은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의 치열한 논쟁에서 사탄을 집 주인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마 12:24_29).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고(막 2:17), 그 죄인이 사탄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려면 먼저 집 주인이 되는 사탄을 결박해야 하는데(요일 3:8), 이러한 외부적인 사탄의 역사를 성령이 오심으로 심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눅 10:17-20).  그리고 내부적인 심판은 성령 받기 전의 내 마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엡 2:2),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면서 일평생 종노릇하는 가운데 살았지만(히 2:14-15),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행 2:38), 사탄이 쫓겨났기에 두려움과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평안(요 14:27)과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요 16:22).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성령의 은사(고전 12장)와 상관없이 성령을 받으면 가장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고(눅 18:13-14),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며(행 4:12), 내 마음을 다스리는 분이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이미 그는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갈 4:6).

'난해한 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0) 2018.01.06
온전한 것이 올 때  (0) 2017.10.14
금단의 열매, 선악과  (0) 2017.05.06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오늘날 사회적으로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사회 환경이 아무리 험해도 그런 죄에 물들지 않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외부의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외부적 죄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당했으나 자유의지가 동의하지 아니할 때 죄가 성립되지 않은 것처럼(창 39:9), 인간은 자유로이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Augustine은 최초의 인간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역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죄를 짓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성이 처음부터 아담 속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죄를 지을 가능성과 짓지 않을 가능성만이 아담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했을 때 아담은 그것을 거부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윗처럼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삼하 11:1-5).  조금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벌써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이고(창 3:6), 그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미 그분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따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창 1:31),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들의 세계에도 그때에는 악한 마귀나 타락한 천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 타락의 동기를 제공한 사단의 등장이 창세기 3장1절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전에도 죄는 마귀의 타락으로 인하여 천사들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첫 번째 죄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지은 죄였고(창 3:1-19), 이들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여러 가지 면에서 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들에게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창 2:17),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고(창 3:4), 이에 대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의심하면서 그 말씀이 진실한 것인지를 시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 옳은가?”라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지만(창 2:16-17), 뱀은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속였을 때 그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창 3:5-6).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본분에 대한 질문으로 아담과 하와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언제나 그분을 창조주로 섬겨야 했지만(사 43:7), 아담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도록 창조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창조하셨다면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고 기계적 존재로 인조 인간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의 수준에 넘어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창 1:27),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사 1:18-20), 또한 본능으로 살아가는 이성이 없는 동물과 다르게(유 1:10),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피조물로서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창 4:6-9).  개혁주의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책임을 선악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 아담에게 돌리는데(롬 5:12), 이 문제에 대하여 탁월한 조직신학자 William G. T. Shedd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는 무한한 의지(하나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유한한 의지(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죄는 불안전한 것인데 완전한데서는 불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한 시험의 도구 이전에, 선악과가 죄의 근원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남용에 있는 것으로 죄의 책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시 51:5).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창 1:26-28), 결코 인간을 무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고(마 6:27), 비록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피조물이고(욥 10:9),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고(창 2:15-17), 이것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창 3:17).  따라서 선악과는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고(욥 4:17-21), 피조물인 인간이 넘어가서는 안 될 한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있어야할 이상적인 관계, 즉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신 27:26).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고 그분만이 주권적 입장과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딤전 1:17).  이렇게 본다면 선악과는 결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거나 덫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질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선악과는 피조물인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참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표지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신 28장).


이 선악과에 대해 Chares Hodge는 “행위 언약의 조건은 단순히 아담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잘 지킨다면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리라’는 말씀처럼(레 18:5),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될 것이지만(롬 10:5, 갈 3:12), 만약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정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롬 6:23).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을 기계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고 무엇보다도 아담이 도덕적 인격자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에 대한 자의적 순종을 발휘할 수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사 1:19-20).  Calvin 역시 “금단의 나무는 순종을 시험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그에게 주어진 도덕적 자유를 주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라고 한 사실을 볼 때(호 6: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세운 언약의 상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3:11).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오고 또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롬 5:15), 금단의 열매, 선악과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명백한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것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난해한 문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0) 2018.01.06
온전한 것이 올 때  (0) 2017.10.14
성령을 받은 증거  (0) 2017.08.12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