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 Bruce는『열 두 제자 훈련』에서 “하나님의 일에 뛰어 들어 열매를 남긴 위대한 사역자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고난의 인물들인 까닭이다. 세상의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는 것은 도덕적 위대함과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대가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주신 특권 중 하나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필수적이고(요 15:18-20),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세상으로부터 고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요 16:1-3).  그리고 사도 바울이 쓴 신약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도에게는 ‘특징’과 ‘표징’들이 있는데(마 10:1, 막 6:7, 행 2:43, 5:12, 6:6, 8:14-17, 19:6, 고전 12:12), 이러한 특징과 표징들은 다른 하나님의 사역자들 중에 사도는 아니지만 소유할 수 있으며 만약 사도라고 하면서 이런 특징과 표징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고후 11장).  따라서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에게든 해당하는 어떤 일반적인 특별한 특징과 표징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데(눅 9:1-11),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도(계 2:2), 이러한 특징이나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사도의 표징들에 대해(행 5:12), 바울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 표징은 사도의 ‘고난’으로(고전 4:9-13, 고후 4:7-12), 이 고난당하는 목적은 고린도후서 4장7절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고후 6:3-10), 그 어느 누구도 질그릇 같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 질그릇을 사용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하여(딤후 2:20-21),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오해받는 것과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고후 12:7).  다시 말해 이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위대함을 통해(벧후 1:16-18), 사람들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행 3:12), 이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사도들이 단지 인간이고 나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고후 12:9-10).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따르면(행 14:22), 고난과 박해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도들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며(고후 11:23-33),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참 사도로서 고난의 흔적이 없거나 사람들을 통해 대접 받기만을 좋아한다면 사도라는 말을 삼가 해야 하고(갈 6:17), 성경에 보면 죽을 것 같은 고난을(고후 1:8-9), 사도들은 누구나 경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요 21:18).

 

두 번째 표징은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엡 3:1-6)과 ‘경건의 비밀’(딤전 3:16), 그리고 ‘이스라엘 회심에 대한 비밀’(롬 11:25-32)을 보는 거룩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바울은 그가 사람들에게는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들었다고 말합니다(고후 12:1-4, 7).  세 번째 표징은 사도의 흠 없는 ‘성결성’이고(고후 1:12, 2:17, 4:2), 네 번째 표징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표적’과 ‘기사’들이 따랐는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것임을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고(눅 24:49, 행 1:8), 이것은 열두 명(행 2:43, 5:12)과 이후에 나온 사도들의 사역에도 가득했습니다(행 14:3, 15:12, 롬 15:19, 고후 12:12).  물론 표적과 기사는 사도 사역의 표징이지만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도 그러한 사역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막 16:17-20).  마지막으로 사도의 권위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귀신과 모든 질병을 물리칠 권위가 주어졌는데(마 10:1, 막 3:15, 6:7, 눅 9:1), 이 권위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칠십 인을 보내실 때 그 권위가 그들에게도 주어졌고(눅 10:19), 마가복음 9장38-41절에 언급된 익명의 사람에게도 분명히 귀신들을 꾸짖고 물리칠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위에 열거한 사도적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직임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이상의 것들이 참된 사도들의 표징이었다면 그것을 모방한 거짓사도들이(계 2:2), 초대교회처럼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는 한 가지 매우 단순한 방법은 참된 사도는 건전한 성경적 기초, 즉 하나님의 말씀 위에 새 일을 개척해 나가고 삶의 열매가 있으며(마 7:20),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엡 2:20), 반면에 거짓사도는 분열, 분쟁,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허물어뜨리고 어지럽게 만듭니다(딤전 4:1-3).  Gordon Lindsay는 참된 사도사역에 대해 『Apostles, Prophets and Governments』에서 “진정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겸손함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임을 공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하는 역사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역의 직임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도 사도의 사역을 행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사도의 사역을 행하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인정받게 됨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John Eckhardt 역시 『The Ministry Anointing of the Apostle』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도라면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 은사가 분명히 나타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참된 사도는 다른 사역의 은사들 위에 군림을 하지 않을뿐더러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검증된 다른 복음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복종시키는데(갈 2:1-2),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행 9:26), 적어도 17년 이상 사역에 몸담아 오고 있었습니다(갈 1:18, 2:1).  쉽게 말하면 바울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회 초보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전파한 것에 대해 여전히 명성 있고 견고한 믿음의 사역자들과 의논하는 겸손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갈 2:2).  만일 바울이 자신이 받은 계시를 검증받고자 사역자들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면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 말씀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롬 14:4),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인데(고전 14:29), 만약에 판단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거짓사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와(갈 1:12), 사도로서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올바르고 성경적으로 건전한가를 판단받기 원했던 것이고(행 17:11), 그것이 바울이 사역에 오래 몸담아 옴으로 이미 많은 경험을 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나누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자신들을 은사중단론자로 여겨 1세기 교회 가운데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가 끝났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점에서 그 사용이 중단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사도를 속사도시대의 직임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문용어로 보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 사도적 사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나 사도 직함은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초대교회의 근간을 이룬 사도직임은 종료되었지만 사도의 은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여전히 계속 부어지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도에 대해 많은 논쟁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거짓사도가 있었다는 것은(고후 11:13-14), 오늘날도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사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롬 11:13, 고전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의 명칭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나타나는 ‘표징’과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면서 위에 열거한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칭 사도’일 수밖에 없고(계 2:2), 그 열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7:15-18).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도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엡 4:11-12), 그렇다고 아무나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논쟁거리 > 사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의 부르심과 권위  (0) 2014.11.08
몇 명의 사도들이 있는가?  (0) 2014.08.30
오늘날에도 사도들이 있는가?  (0) 2014.06.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을 ‘사도’라고 부르는데(마 10:2), 이 사도라는 명칭은 문자적으로 ‘사자’(빌 2:25)와 ‘사신’(고후 5:20)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요 13:23)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복음서 기자들은 이들의 사역을 설명할 때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막 6:12), 복음서에 나오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80퍼센트 이상은 오직 이 열 두 명의 사도들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었습니다(눅 9: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사도’라는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셨는데, 예를 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직접 대면한 바울과(행 9장),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포함시키셨습니다(행 14:14, 고전 15:7, 갈 1:19, 살전 2:6).  먼저 사도적 직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사람에 의해 확증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사람들 모두는 선지자이거나 교사이지만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선지자처럼 환상과 계시를(민 12:6), 받았다는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면에 바울은 계시를 받아(엡 3:3), 신약성경 거의반 정도를 기록한 것을 볼 때에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갈 1:11-12).  즉, 바울은 선지자겸 교사이고(딤후 1:11),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라는 것을 말해주는데(행 15:35), 이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의 범위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령께서 따로 세워 보내심을 받을 때까지 아직 사도적 직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음 구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을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즉, 성경은 그들이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고(행 13:2-3),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첫 번째 선교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르는데(행 14:14), 이것은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함으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엡 1:4), 하나님께서 사도의 직임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26: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사람들의 안수와 예언을 통해 사도적 사역에 부름 받은 것을 확증 받았던 것입니다. Kenneth E. Hagin는 이 사도적 부르심에 대해 『He Gave Gifts Unto Me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내가 지금 부르는(I am calling)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불러 시킨(I have called)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는데(행 13:2), 그것은 ‘과거시제’이다”  환언하면 안디옥 교회에서 사람들을 통해 받은 안수는 단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삶에 계획해 놓으신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단순한 확증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오늘날처럼 교회의 공식적인 인증을 거치거나 사람들의 예언을 통하여 소명을 받고 사역의 직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직임을 받은 사도는 우선적으로 말씀의 설교자이며(막 16:15), 가르치는 교사인데(행 2:42),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처음부터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딤전 2:7, 딤후 1:11).  다시 말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갈 2:7-9),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먼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행 9:15).  사실 사도의 주된 사역이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이지(행 4:33), 교회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 사도적 직임과 관련하여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거나(계 2:2), 아니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조정자이며 분쟁 해결자이고 심지어 ‘영적권위’라는 말까지 쉽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은 교회를 조종하거나 지배한다고 나와 있지 않으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동안에 오직 교회에 대해 영적인 감독만 했고(행 16:4), 예루살렘교회나 다른 어떤 교회도 감독하지 않았으며 일단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독권을 이양해 주기만 했습니다(행 20:28).  우리가 서신서를 통해 아는 것처럼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가 질문을 해오면 그것에 대해 바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을 뿐 그들을 조종하거나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James. D. G. Dunn은 이 문제에 대해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에서 “바울은 그들 대적하는 사람들도 인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명령 투의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베푸는 대부분의 가르침은 명령이라기보다는 ‘권유’이며 그는 개심자들이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권위주의자가 하는 방식대로 자기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그는 자기 권위의 효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고전 5:3-5, 고후 2:6-8). 그가 사도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자신이 위임받은 사역에서 야기된 문제에 국한되는데 예를 들어 주님의 말씀에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순종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경우에는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 때조차 권위적인 태도를 삼가고 있다”(고전 7:25, 40).  물론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비중 있게 생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갈 2장), 더 나아가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여겨(롬 1:5, 갈 1:1),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잘못된 교리와 교회의 질서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거짓 사도’들처럼(고후 11:1-15),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논쟁거리 > 사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의 특징과 표징  (0) 2015.03.28
몇 명의 사도들이 있는가?  (0) 2014.08.30
오늘날에도 사도들이 있는가?  (0) 2014.06.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에 보면 사도에 대해 네 가지로 분류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물론 ‘사도’라는 단어를 놓고 어떤 서열로 분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도에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라고 해서 다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경은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고(히 3:1), 여기서 ‘사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보냄을 받은 사람’(요 3:17), 또는 ‘위임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며 주님은 모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머리 위에 계십니다(엡 1:22).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골 1:18), 공생애 사역에서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사 61:1), 가져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막 1:38), 위임을 받은 자였습니다(눅 4:18-19).  또한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실 때 자신을 ‘선지자’라고 칭하시기도 하셨고(마 13:57, 눅 4:24, 요 4:44,, 행 7:37), ‘복음 전도자’의 직임에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마 1:2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으며(요 10:11, 히 13:20, 벧전 2:25), 동시에 교사이기도 하셨습니다(마 5:1-2, 9:35, 막 1:21-22).  따라서 예수님은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가장 높은 서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골 1:15-18).

 

두 번째는 어린양의 사도들로서 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계 21:14), 이 어린양의 사도는 오직 열두 명뿐이고(마 10:2-4), 예수님을 따랐던 이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두 번째 서열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행 1:21),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합니다(행 1:22).  이러한 자격을 가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신약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사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20).  어떤 사람들은 맛디아가 아니라(행 1:23),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서 자격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적에 중생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분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도 아니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행 9장), 그를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났습니다(고전 15:8).  그러므로 어린양의 사도들은 맛디아를 뽑으므로 끝났지만(행 1:26), 또 다른 사도의 직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들 외에 더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15:5-9).

 

세 번째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서열로 이들 역시 신약 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두 번째 사도들처럼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야 합니다(엡 2:20).  왜냐하면 신약 성경의 복음이 이들에게 계시되었고(갈 1:16), 특히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았고(갈 1:12),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기에(엡 3:3-5), 더 이상 오늘날 교회의 기초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갈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을 뿐더러(계 22:18-19), 오늘날 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권위와 똑같은 서열을 받은 사도와 선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오늘날 누구든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보면 사도의 자격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나바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행 14:14).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에 속한 사도들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라는 단어는 지금보다 초대교회 시대에 더 폭넓게 사용된 것만은 사실인데 문제는 오늘날 그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라는(눅 6:13), 헬라어는 앞서 말했듯이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의 ‘아포스돌로스’로부터 번역된 말이지만(막 3:13-15),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별한 대표’나 ‘특별한 사자’라는 뜻으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사자로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해 말하는데(빌 2:25), 여기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아포스돌로스’입니다.  비록 바울은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로 부르고는 있지만 그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도의 직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즉, 그에게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대표자’로서 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를 보내는 것처럼(고후 8:23), ‘회중의 대표’로 위임받아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아니었고 신약 성경의 기초를 놓지도 않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어떤 모임에 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는 것처럼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사역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13:16), 또는 ‘대표자’(고후 8:23)라고 볼 수 있고 성경 어디에도 그가 바울처럼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적 직임의 완전한 활동범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롬 10:15),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선교사가 한 도시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도시에 파송된 모든 목사가 다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만약 어떤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처럼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행 13:4), 그는 네 번째 서열에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참으로 성령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가 있다면 그들이 바로 사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사역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2:42).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는데(행 13-20장), 오늘날 진정한 선교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역, 즉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시작하고 세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네 번째 서열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Wayne Grudem은 오늘날도 효과적인 개척자들/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용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 그리고 삶과 사역자의 열매입니다(마 7:20).  만약 이런 표징들이 없다면 그는 사도직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고(고후 12:12), 진정으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겸손함이 있는데 오늘날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이 실수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이 보내심을 받은 네 번째 서열의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도들이 어디엔가 있습니다.

'논쟁거리 > 사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의 특징과 표징  (0) 2015.03.28
사도의 부르심과 권위  (0) 2014.11.08
오늘날에도 사도들이 있는가?  (0) 2014.06.21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캐나다 출신 부흥강사인 Todd Bentley가 Florida Lakeland에서 “사도 임명식” 받는 장면을 2008년에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Peter Wager를 비롯해서 그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인 Rick Joyner, Che Ahn, Bill Johnson, John Arnott, Chuck Pierce 외 다수의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특이하게 본 것은 여성 선지자로 알려진 Stacy Campbell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언하는 장면과 Bentley의 안수를 통해 Che Ahn 부부가 쓰러져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들이었는데 물론 이런 경우에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고 또한 쓰러져서 떤다고 해서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과 같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 John Wesley, George Whitefield, Charles Finney와 같은 사람들이 집회할 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한 것은 John Stott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들에게 행해진 임명식이 과연 성령께서 직접 지시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세우는 것처럼 했느냐는 것입니다(행 1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역자의 열매로(마 7:15-20), Bentley는 본 부인과 이혼하고 함께 사역을 했던 아시아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실 지금도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 없고 다른 직임, 즉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엡 4:11-12).  다시 말해 이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될까요?  바로 뒷 절에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라고 말합니다(엡 4:13).  환언하면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10).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로 구성된 주님의 몸으로(엡 4: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벧전 2:2).  결코 우리들 중에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은 없고(엡 4:15), 주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자라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벧후 3:18),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친히(엡 4:7-10), 특별한 사역자들을(고전 12:28),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영적 성장의 목표, 즉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에 다섯 가지 직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들은 본래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임명하신(막 3:13), 열두 명의 제자들이지만(마 10:2),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마 26:15), 맛디아가 제비뽑기로 선택되는데(행 1:26), 이 열두 명은 유일한 사람들이고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새 예루살렘 성벽 열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사도들이며(계 21:14).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행 1:21-22),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역을 했습니다(엡 2:20).  반면 또 다른 사도들이 있었는데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보내셨는데 그 중에 바울(롬 1:1, 행 22:4),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야고보(갈 1:19, 2:9), 그리고 본문에 많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롬 16:7), 사람들을 추가시킴으로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얼마든지 추가하실 수 있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서는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란 용어를 놓고 George Peters는 『A Theology of Church Growth』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회의 초기 사역에서 사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는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인정된다. 오직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불리며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도들’이나 ‘교회의 사도들’로 불린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 여러 사도들이 나오지만(마 10:1-4, 갈 1:1), 그 어떤 구분만큼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입니다(롬 16:7, 고후 8:23, 빌 2:25).  John Stott도 일차적인 의미에서 열 두 제자(눅 6:12-13)와 바울과 같은 계승자(갈 1:1)는 오늘날 존재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서로 ‘사도’라고 추겨 세우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사도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사도된 사람들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Peter Wagner는 이 문제를 놓고『교회의 지각 변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신사도개혁운동의 최고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사도에 대한 점검 문제를 자주 제기하곤 했는데 일관성 있는 확실한 대답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다는 것으로 Wagner 자신도 사도의 증명과 점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쟁거리 > 사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의 특징과 표징  (0) 2015.03.28
사도의 부르심과 권위  (0) 2014.11.08
몇 명의 사도들이 있는가?  (0) 2014.08.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