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밝힌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에 담긴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시내산 율법도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구속사적 논증도 들어 있다. 하지만 바울의 논증에 의하면 이러한 제사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히 10:1). 왜냐하면 이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는 최종적인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이다(히 9:26). 따라서 이 저주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갈 3:13). 만약 누군가 자신을 율법 아래 두고 구원을 위해 할례를 의존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다(갈 5:2-4).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온다(갈 3:11-12). 바울은 할례와 율법 아래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철저히 반대한다(갈 4:21). 왜 이렇게 반대하는가? 율법은 죄를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더 증가시키기 때문이다(롬 5:20). 다시 말해 율법 아래 사는 자들(갈 3:23, 4:4, 5, 21, 5:18)은 저주아래 있고(갈 3:10), 죄 아래 있으며(갈 3:22), 초등교사 아래 있고(갈 3:25),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는 자들이다(갈 4:3).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다(갈 3:8, 11, 24).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갈 3:13).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다(갈 1:14). 중간 지대란 없다.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지 않으면 율법을 통해 얻는다(갈 2:21). 칭의를 위해 율법의 길을 선택한 자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십자가를 보는 눈을 상실한다(갈 3:1).
무엇보다도 할례에 의존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거리낌을 거부하는 것이다(갈 5:11). 왜냐하면 할례는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갈 1:5)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반면(갈 6:14),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한다(갈 6:12-13). 요지가 무엇인가? 칭의는 결코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없고,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지도 않을뿐더러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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