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실제로 비유가 아니라 예수께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한 은유(metaphor)다.  마태는 인자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심판을 위하여 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먼저 예수님은 양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그리고 염소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마 25:41-42).

이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평행구절들을 기초로 하여 본문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비유적인 요소들은 단지 목자, 양들, 염소들, 그리고 양들과 염소들의 실제적인 구분뿐이다.  이 본문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가?  죄 사함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리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에게 베푸는 자비도 없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대한 흔적도 나타나 있지 않다.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 본문은 개혁주의 신학 노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골칫덩어리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천만하게도 바울과 Augustine, 그리고 Luther의 신학에 반대하는 ‘행위에 의한 칭의’처럼 위험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Graig Keener는 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은 이 심판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행위의 역할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런데 마태복음 25장뿐만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 성경 구절 역시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생명과 정죄 둘 중 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지역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는 것을 알기 원했다(롬 2:5-7).  이 구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엡 2:8-10),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행한대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계 20:13).  진실을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해 ‘해명’(解明)을 해야 한다(욥 34:11, 시 61:12, 잠 24:12, 렘 17:10, 마 16:27, 계 20:12). 

만약 ‘무익한 말’(마 12:36)이 마지막 날에 심판에 근거가 된다면, 우리가 삶 가운데 실제로 행한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근거가 된다(고후 5:10).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에스겔 33장 30-33절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치우침이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주어질 것이다(고후 5:10).       

야고보 역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여기서 야고보는 독자를 ‘형제’로 부르는데, 이들은 곧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분명히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  하나는 신랄하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심판을 받는 것이고(마 12:36), 다른 하나는 오래 참으며 원망하지 않고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야고보가 결코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아직 미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심판과정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는 분명히 여기서 심판의 최종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심판의 결과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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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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