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부인하지만(갈 3:10), 또 다른 본문에서는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먼저 로마서 2장에 기록된 바울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은 놀랍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로마서 1장 18-3장 20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서 2장 6절에서 바울은 로마서 2장 6-11절 전체에 대한 논제, 즉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주장을 펼친다. 7-10절은 이 진술의 의미를 교차대구구조로 풀어낸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영생과 전혀 무관한 ‘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다시 말해 7절은 ‘영생’이 사람의 행함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순종의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로마서 2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 주제이지만(고후 11:15, 엡 2:11, 딤후 2:21, 4:14, 딛 1:16, 3:8, 14),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갈라디아서에만 집중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은혜의 복음을 다룬다. 바울은 ‘의’ 및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갈 2:16, 3:2, 5, 10). 하지만 바울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는 선한 행위의 토대이자 기초이다(고전 15:10). 잘 알려진 표현을 의역하자면 오직 믿음은 믿음이 혼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갈 5:6).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갈 5:18), 성령으로 살며(갈 5:25), 성령의 위하여 심고(갈 6:8),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갈 5:22-23).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는 종말론적 심판과 멸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최종적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보다 더 확실한 진술은 없다(갈 5:19-21).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자율적 행위나 인간의 미덕에 의해 발생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성령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행위가 영생에 필수적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성령을 위하여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 즉,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갈 6:8).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울 자신이 선포하는 은혜의 복음을 악화시킨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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