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0년 후반에 홍콩에서 재키를 만났다.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씀을 들었는데 쉼 없이 방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다소 불편했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마침 홍콩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그녀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재키는 자신이 홍콩 거리에서 헤로인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그녀의 전도법이었다.  그리고 헤로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  홍콩 시가 재키가 선교사역을 할 수 있도록 넓은 땅을 주었다. 그들은 길거리의 마약중독자들을 성공적으로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재키라는 것을 인정했다.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중 소수의 사람들이 옛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고 헤로인 중독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었다.  그들은 건강을 회복하여 직업을 갖고 선한 일을 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약 중독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 놀라운 재키의 사역은 방언을 통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비판했던 것을 보호해야하는 이유였다.  방언은 이상한 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간증은 1956년 2월 운전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하게 즉홍적으로 방언이 터지는 일을 체험한 R. T. Kendall 목사의 고백입니다.

 

Gordon Fee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영적싸움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에 더 온전하게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유 20절), 사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에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하는 기도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고전 14:15).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말’,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 유익한 것은 먼저 고넬료 가정처럼 이전에 알지 못했던 깊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행 10:46), 또한 로마서 8장26절의 말씀에서 방언기도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방언기도는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해 주시고(롬 8:27), 영적전쟁에 있어 성령께서 방언기도를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는데(엡 6:18), 무엇보다도 이 은사의 또 다른 가치를 찾는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귀중한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4).  물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은사의 목적(고전 12:7)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고전 14:12, 26), 어떤 은사도 개인의 건덕을 위해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명백하게 말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을 세우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숙지해야 할 것은 모든 은사는 어떤 식으로든 은사의 사용자에게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고전 12:7), 이것이 자기 교화(敎化)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하는 것(딤후 3:14)은 이단적 교리들을 잘 대처하고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딤후 2:15),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 3:17).  즉,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가 더 성숙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더 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벧후 1:5-7).  만약 이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행 17:11).  다시 말해 기독교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동들(전도, 기도, 봉사, 선교, 예배, 찬양, 성경공부, 등등)은 자기 교화의 효과적인 수단이고 더 나아가 방언기도를 통한 자기 교화도 마귀의 주술에 걸려 헛소리 하거나 잘못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동의 유익이라는 사실은 각각의 은사 현상이 다른 이차적인 효과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방언의 사용을 장려했던 것입니다(고전 14:5).

 

그리고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4장4절에서 사용된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NLT에서는 ‘strengthened’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고, BBE에서는 'may do good', GWT에서는 ‘grow', 그 외에 수많은 번역본에서는 ‘build up’이라는 단어보다는 ‘edifie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원어에서는 ‘덕’이라는 말이 없지만, 이 헬라어 동사로 쓰인 ‘오이코도메오’는 근본적으로 ‘짓다’ 혹은 ‘세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번역하면 “방언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헬라어 단어를 ‘교화(敎化)하다’ 혹은 ‘강화(强化)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신앙성장에 유익을 위해 영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사고 능력이 아닌 영의 교화로 영적으로 강하고 믿음이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유다서 20절의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방언)를 통해 개인의 삶에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 중에 유익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약 1:17), 한 마디로 개인의 영적성장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집을 짓듯이 자신을 건축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워진다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가 간접적으로라도 필연적으로 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4:12-14).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 ‘모퉁이의 머릿돌’(눅 20:17)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의 의미는 돌 하나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엡 2:2-22), 예수님이 사용하신 은유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킵니다(시 118:22).  마찬가지로 은사는 각 사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진 선물이지만(약 1:17), 문제는 은사 받은 사람이 자신이 먼저 바로 세워지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엡 4:12-16).  얼마 전 어느 여성이 전쟁이 난다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맞지 않았고 오히려 격려를 받고 위로받은 것이 아니라(고전 14:3), 미혹의 영에게 충동질을 받아 사람들을 이리저리 방황을 시켰습니다.  왜 이런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분별력 없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9).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은사가 성령의 의해 계발되고 성숙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이 여성은 처음 받은 은사가 받는 순간 완벽하게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한 문제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은사를 남용한 것입니다.  사실 성숙하고 노련한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수 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처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여성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인지, 귀신의 속삭임인지, 성령의 내적인 감동인지 분별없이 받아들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은사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 사람(목사를 포함해서)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딤전 3:6).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아마 덕을 세우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분쟁만 일으키지 않아도 다행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눅 22:32), 사실 믿음이 없는 그가 갈대처럼 흔들릴 때 다른 형제들을 세워주지 못했고 심지어 칼을 들고 설치거나(막 14:47), 입으로 저주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마 26:69-75).  쉽게 말해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기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교인의 한 부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련을 겪은 후에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한 것처럼(실제로 베드로전서는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권면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음) 은사 받은 사람 역시 먼저 자신을 세우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언기도를 충실하게 했던 사람은 그 신앙의 년도에 따라 교회 안에 덕을 많이 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적게 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은사는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딤후 1:6), 은사 받은 사람의 실수를 가지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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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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