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을 향해 많은 망언들을 쏟아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뽑으라면 일본의 대표적 극우인사 하시모토 도루(はしもと とおる)가 오사카 시청에서 기자 회견을 할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총탄이 오가는 중에 정신적으로 흥분된 강자 집단에게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위안부 제도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도 알 수 있다. 왜 일본의 종군 위안부 제도만 문제가 되느냐. 위안부제도는 세계 각국이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군에게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영원히 못을 박는 막말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로 했다!  ‘표준어국어대사전’에 보면 이런 망언(妄言)을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말함”이라고 나와 있고, ‘우리말샘’이라는 개방형 사전에서는 “이치에 어긋나게 함부로 말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단어와 비슷한 말로 사용되는 ‘망발’, ‘헛소리’, ‘허튼소리’라는 말이 사전에 나옵니다.  ‘망언제조기’라고 부르는 하시모토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음대로 지껄리는 망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계열과 쌍벽을 이루는 네덜란드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했다는 신학자 입에서 망발을 쏟아낸다면 이것은 조금 문제가 다를 것입니다.   

 

믿음에 선행(先行)하는 것으로 ‘회개’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 Wesley Calvin과 대조적이지만 선행적 은총과 영화롭게 하는 은혜는 사람의 호응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역사하시는 것으로 믿었는데, 이 점으로 보아 그는 구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출발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그의 수많은 설교집에 기록되어 있듯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했고, 이러한 은혜를 언제나 그리스도의 대속과 연관시켜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성질은 선하게 만들어졌으며 만일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쉽게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창조자에 의하여 주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원죄와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 그리고 세례 등을 부정한 펠라기우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부정하는 이단으로 정죄된 펠라기우스주의와 다를 뿐 아니라 인간이 어느 때나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와도 다르게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공로나 선행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Wesley Calvin은 공통의 견해를 견지했지만, 그러나 Calvin과 차이점을 보인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작용하시느냐에서 Wesley는 의견를 달리합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Calvin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이중예정, 즉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하여 선택과 유기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오직 택자만을 위한 특별구속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그의 설교 ‘Free Grace’ 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구원하기로 정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한하는 것은 전도생활에 큰 지장과 모순을 초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구원이 수동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반율법주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에 있어 Wesley의 입장은 Calvin과 같이 하지만, 다만 그가 Calvin이 강조한 이중예정과 제한속죄를 반대하면서 구원에 있어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는 주권적이라는 점에서는 Calvin의 신학과 일치하지만, 그러나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이 Calvin처럼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점에서 Calvin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 목사들은 극단적으로 치닫는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거나 신학적 편향성을 갖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관점의 신학적 기반을 기준으로 서로 견해가 다른 각 교리적 입장의 강점과 약점을 바르게 평가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서철원 교수는 웨슬리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도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이런 망발을 쏟아냈습니다.  “신학에 관한한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이분의 노망끼 섞인 망령된 주장은 Harry G. Frankfurt가 쓴 책 제목처럼 “On Bullshit”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Wesley의 신앙을 가진 사람 모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고 이단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림 받고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이냐는 것입니다.  남침례교 신학교수 Chad Owen Brand 말을 인용한다면 “개혁주의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약간의 해석 차이를 가지고 한 집안 형제를 집 밖으로 쫓아내려는 사람”이 먼저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죄값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벤뎅이 소갈딱지 같이 앞뒤가 꽉 막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악취를 풍기는 소가 하품할 정도의 신학을 가지고 타교단 신학과 목사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개혁주의와 웨슬리 신학을 공부했지만 칼빈주의도, 웨슬리주의도 아닌 그냥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목사로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을 비방하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치고 말로가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을 다른 형제를 비판하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그 비판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 앞에서 겸손한 척 외식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와 실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없이 입으로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나팔 부는 겉과 속이 다른 박제(剝製) 신앙을 가진 개혁주의자들은 주님이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심기가 불편하고 비위가 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당사자가 망언에 대한 직접적인 공개 사과없이 바지(?)목사 정이철을 내세워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인품을 갖춘 신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갖춘 분이라면 찌를 것이 없겠지만 가지고 있는 신학이허당’이라 한국 속담에 나와 있는 말처럼 못 먹는 늙은 감 한 번 찔러 봤습니다.  앞으로 공격적인 글에 대해서는 예의와 존중과 인격을 내려 놓고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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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즉 “하나님이 완전하게 주관하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자유가 있으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모두 인정하고 믿는 반면 실제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하나를 유난하게 강조하면서 다른 하나를 심하게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나 목사들은 '하나님 결정설’, ‘하나님 능력제한설’, ‘하나님 전지설’, ‘하나님 지식제한설’ 파로 나누어집니다.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가?”라는 ‘성도의 견인’에 대한 문제 역시 고전적 칼빈주의와 온건적 칼빈주의의 해석이 다르고, 웨슬리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개혁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인간의 책임과 죄의 정복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 사역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개혁주의적 관점, 웨슬리주의적 관점, 루터주의적 관점, 오순절주의적 관점,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나누어집니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은 어떻게 일하시며 믿는 자의 삶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세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서도 개혁주의, 오순절주의, 웨슬리주의, 은사주의, 카톨리주의가 서로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이 구원하고자 사람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이 얼마나 선한지 나쁜지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성격과 행위에 관계없이 자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구원할 자를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은 그분의 주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를 성령을 통해 얻고, 그분의 은혜로 끝까지 견인하는 가운데 성화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구원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하나님의 의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기 위해 구원할 자들을 영원 전에 택하신것을 시작으로 해서 때가 되어 예정된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새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거룩의 온전함에 이르도록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선택받은 사람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완전하게 타락한 생활을 할 수 없고, 비록 죄의 부패한 요소가 남아 있어 때로는 방황하며 죄에 빠질수는 있지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회복되고 성화되어 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칼빈주의는 인간의 선택과 행위를 개인의 구원에 있어 결정적으로 만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는 다르지만 이들에게 있어 약점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논리적 모순이 뚜렸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창세 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택함받은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리라는 걸 미리 아신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누가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자인지 알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믿을 자를 선택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자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선행 은총을 주어 하나님을 믿도록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람이 그 속죄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효과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인간이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고 그 구원을 받지 못한 책임은 성령의 부르심을 끝까지 거부한 인간의 선택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칼빈주의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도의 견인’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라는 말로 인해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방종의 삶을 경계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 알미니안주의입니다.  솔직하게 칼빈주의자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도르트 회의)하였고, 지금도 이들을 사악한 이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알미니안주의가 침례교단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한 시대에 당나귀처럼 쓰임을 받았던 Billy Graham이나 평신도 설교자 D. L. Moody 같은 탁월한 사역자들을 배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더 mystery한 것은 한국에 있는 수많은 장로 교단들이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시하면서도 Graham이나 Moody를 따르는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웨슬리주의는 양쪽 진영인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가운데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사실 Wesley의 수많은 설교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의 신학의 핵심은 바로 ‘구원론’에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화론 중심의 구원론입니다. 그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구분하는 Calvin과 달리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자들을 은혜의 말씀으로 부르시고(외적 부르심), 성령으로 말씀을 적용하도록 하신다고 주장하였는데(내적 부르심), 이 두 가지 일반적 소명과 유효적 소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을 강조한 Wesley는 인간의 죄 문제를 강조하는 면에 있어 어느 학파들 못지 않게 강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 영향은 온 인류에게 미쳐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으로 보는 가운데 영아도 원죄를 물려 받은 죄인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Wesley의 신앙에 대해 감리교의 역사가 중 한 사람이며 Derbyshire, Cliff 대학 학장인 A. Skevington Wood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웠던 sols gratia(오직 은총) sola fide(오직 믿음)만의 표어가 메아리쳤다.  물론 치매(?)끼가 발동하는 사람들 중에 심각한 ‘언어장애’로 인해 Wesley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고 해서 그가 마치 인본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궤변을 늘어놓지만, 이것은 Wesley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무지의 소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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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박사가 정이철 목사에게 보낸 글>

요한 웨슬리는 믿음으로 칭의 받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웨슬리는 믿음은 칭의의 한 조건이고,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선행이라고 합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칭의 받으려면 먼저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고 믿기로 작정하면 성령이 중생시키신다고 말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 믿기로 작정하면 중생의 역사가 나타는데 그와 동시에 사랑의 선행을 해서 성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성화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행은혜 곧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일반은혜와 자유의지가 협력하여 성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완전성화’를 이루면 그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완전성화는 현생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또한 완전성화도 잃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완전성화는 선행을 함으로도 이루지만 또한 금욕과 금식과 고행으로 이룹니다.  그리하여 완전 성화에 도달하면 죄를 완전히 벗어나고 또 의롭게 되므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자유의지가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일반은혜와 협력하여 완전성화를 이루고 그 완전성화로 칭의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고, 받아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예정은 불가능하고 그런 예정은 하나님의 의, 사랑, 종교의 근본을 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이루셨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구원이고 신자는 그것을 내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일은 자유의지가 선행은혜와 협력해서 이룹니다.  아담의 타락, 즉 원죄는 인간의 의지에 별 영향이 없어서 일반은혜와 협력해서 구원과 칭의를 다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웨슬리의 종교사상은 자연주의 방향으로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구원은혜의 주권적인 역사는 전적으로 부정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선행을 한다고 하였는데, 웨슬리는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사역은 이루었어도,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은 전적으로 내가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사상을 요약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학에 관한한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펠라기우스를 에큐메니칼 공회의가 이단으로 정죄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점을 남겼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에 대해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의 완전성화 주장만 부정하였지, 이단으로는 정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약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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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적정한 임상 연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의사들에 의하면 노인성 우울증과 치매는 구분하기 힘들고, 치매에서 우울증은 흔하게 동반되는 증상인 동시에 우울증이 치매의 원인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이 병이 오래동안 지속되면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뇌세포가 손상되면서 기억력, 학습능력, 언어능력, 사고력, 판단력이 감소되고, 기억력의 장애와 함께 실어증과 집행기능의 장애를 수반하기 때문에 다양한 검사와 면담을 통해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문제는 일반 사람이 아닌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치매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빌리면 치매 환자의 약 40%에서 우울증이 관찰되고 지적능력이 장애가 심하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런 치매 증세가 심각한 사람들 중에 기억장애의 심화로 인해 표현 상실과 이해력 저하로 엉뚱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 말을 다시 인용한다면 치매의 증상인 인지적장애증상, 기억력장애, 언어장애, 지남력장애와 정신행동증상인 망상, 환각, 오인, 우울증, 불안증세, 성격변화의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배웠던 것을 망각하는기억력 장애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횡설수설하며 질문을 해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하는 언어장애’, 그리고 시간과 사람과 장소에 관한 파악력이 저하되어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가까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남력장애의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Wesley 신학을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고 그의 서적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거나 혹은 서너 권 정도 읽은 것을 가지고 John Wesley의 생애와 신학 전체를 안다고 나불거리는 것은 한국 속담으로 말하면 섬 무당이 사람을 잡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정말 궁금한 것은 서철원 교수가 말하대로 Wesley믿음으로 칭의 받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한 적이 있는가?” 더 나아가 “Wesley의 교리와 신학이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한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Wesley의 구원론의 가장 초기의 완성된 요약을 잘 보여주는 설교는 로마서 45절 말씀인데, 이 본문으로부터의 칭의 관한 구전 설교들의 journal에 나타난 첫 번째 기록은 1738 528일에 대한 것이고(Long Acre Street in London에서), 후기 목록들은 1742 68 Epworth에서 설교하기(그의 아버지 묘비에서) 까지 최소한 8번 이상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제목은 ‘Justification by Faith’(믿음에 의한 의롭다 하심)인데 10장이 넘는 그의 설교를 간략하게 핵심적인 것을 요약하면칭의(의인)의 성서적인 명백한 견해는 사면이요 죄의 용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화목제물 즉, 아들의 보혈로 인하여 지난날의 지은 모든 죄들을 용서함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는 그의 영혼을 희생제물로 삼으셨고 죄인들을 위해 그의 피를 부으셨습니다. 오직 단 한 번의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덟 번째 나는 Epworth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를 충분하게 강조했다.”  

 

Wesley는 칭의 교리가 성립되는 근거로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의()를 들며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는 그의 위대하고 놀라운 자비와 은혜, 그리스도에게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킨 대속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참되고도 살아 있는 믿음,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Works 361.f).  조금 더 그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Rotherham에서 설교하고 1765년 소책자로 처음 출판되었던 에베소서 28절 말씀에 근거한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성서적 구원의 길)이라는 설교에서는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천명했습니다.  칭의(의인)라는 말은 용서와 같은 말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취하는 값, 즉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입니다. 다시말해 이 값(칭의의 근거)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다 쏟는데 까지 행하셨고 고통을 당하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입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성령으로 납니다.” 더 나아가 1739 429일에는 로마서 832절 말씀을 가지고 ‘Free Grace’(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란 제목으로 설교할 때도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 하나님의 은혜를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결단코 사람에게 있는 능력이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며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값이 내어주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만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인 동시에 잘못된 성경해석을 막아내는 방패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데, 치매 증상이 있는 사람처럼 신학을 잘못 배우면 성경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보다는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정신행동증상의 하나인 성격변화와 망상으로 인해 쉽게 화를 내거나 남을 공격하기 위한 난폭한 행동을 나타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는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논쟁만 일삼는 허접한 신학을 가지고 언제나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Wesley의 교리와 신학이 펠라기우스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 이단으로 단정해도 무리가 없다는 거의 치매 증상의 말기인 기억망각속에서 떠들어 됩니다.  솔직하게 말해 Wesley를 이단으로 매도한 서철원 교수가 한국의 신학자라고 말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 개나소가 신학자되는 판인데, 이것도 기독교계의 수치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이고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을 추종하는 정신나간 목사들이 많다는 것이 기이(奇異)한 현상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안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말할 수 없을지언정(딤전 1:15), 무지한 후배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바울이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주의를 준 것 같이 무익한 논쟁을 피하고 ‘믿는 자의 본이 되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딤전 4:13), Mentor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는 가운데 올바른 충고를 주어야 하는데, 얼마나 사탄에게 충동질을 당했으면 망령(妄靈)된 궤변을 늘어 놓아 같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분쟁과 논쟁이 일어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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