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을 향해 많은 망언들을 쏟아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뽑으라면 일본의 대표적 극우인사 하시모토 도루(はしもと とおる)가 오사카 시청에서 기자 회견을 할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총탄이 오가는 중에 정신적으로 흥분된 강자 집단에게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위안부 제도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도 알 수 있다. 왜 일본의 종군 위안부 제도만 문제가 되느냐. 위안부제도는 세계 각국이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군에게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영원히 못을 박는 막말 한 마디를 남깁니다.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로 했다!  ‘표준어국어대사전’에 보면 이런 망언(妄言)을 “이치나 사리에 맞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말함”이라고 나와 있고, ‘우리말샘’이라는 개방형 사전에서는 “이치에 어긋나게 함부로 말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 단어와 비슷한 말로 사용되는 ‘망발’, ‘헛소리’, ‘허튼소리’라는 말이 사전에 나옵니다.  ‘망언제조기’라고 부르는 하시모토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음대로 지껄리는 망발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계열과 쌍벽을 이루는 네덜란드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했다는 신학자 입에서 망발을 쏟아낸다면 이것은 조금 문제가 다를 것입니다.   

 

믿음에 선행(先行)하는 것으로 ‘회개’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 Wesley Calvin과 대조적이지만 선행적 은총과 영화롭게 하는 은혜는 사람의 호응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홀로 역사하시는 것으로 믿었는데, 이 점으로 보아 그는 구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그 출발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그의 수많은 설교집에 기록되어 있듯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했고, 이러한 은혜를 언제나 그리스도의 대속과 연관시켜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성질은 선하게 만들어졌으며 만일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쉽게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창조자에 의하여 주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원죄와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 그리고 세례 등을 부정한 펠라기우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부정하는 이단으로 정죄된 펠라기우스주의와 다를 뿐 아니라 인간이 어느 때나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와도 다르게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발생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공로나 선행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Wesley Calvin은 공통의 견해를 견지했지만, 그러나 Calvin과 차이점을 보인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어떻게 작용하시느냐에서 Wesley는 의견를 달리합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Calvin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이중예정, 즉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하여 선택과 유기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오직 택자만을 위한 특별구속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Wesley는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그의 설교 ‘Free Grace’ 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구원하기로 정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한하는 것은 전도생활에 큰 지장과 모순을 초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구원이 수동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반율법주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죄론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구원론에 있어 Wesley의 입장은 Calvin과 같이 하지만, 다만 그가 Calvin이 강조한 이중예정과 제한속죄를 반대하면서 구원에 있어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통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역사는 주권적이라는 점에서는 Calvin의 신학과 일치하지만, 그러나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선행은총이 Calvin처럼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점에서 Calvin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 목사들은 극단적으로 치닫는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거나 신학적 편향성을 갖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관점의 신학적 기반을 기준으로 서로 견해가 다른 각 교리적 입장의 강점과 약점을 바르게 평가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서철원 교수는 웨슬리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으면서도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이런 망발을 쏟아냈습니다.  “신학에 관한한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이분의 노망끼 섞인 망령된 주장은 Harry G. Frankfurt가 쓴 책 제목처럼 “On Bullshit”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Wesley의 신앙을 가진 사람 모두는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고 이단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림 받고 지옥에 떨어질 영혼들이냐는 것입니다.  남침례교 신학교수 Chad Owen Brand 말을 인용한다면 “개혁주의 전통을 공유하면서도 약간의 해석 차이를 가지고 한 집안 형제를 집 밖으로 쫓아내려는 사람”이 먼저 주님으로부터 혹독한 죄값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사들은 벤뎅이 소갈딱지 같이 앞뒤가 꽉 막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악취를 풍기는 소가 하품할 정도의 신학을 가지고 타교단 신학과 목사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개혁주의와 웨슬리 신학을 공부했지만 칼빈주의도, 웨슬리주의도 아닌 그냥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목사로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을 비방하고 중상모략을 일삼는 사람치고 말로가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을 다른 형제를 비판하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그 비판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 앞에서 겸손한 척 외식하면서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와 실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없이 입으로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나팔 부는 겉과 속이 다른 박제(剝製) 신앙을 가진 개혁주의자들은 주님이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 꼼꼼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심기가 불편하고 비위가 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당사자가 망언에 대한 직접적인 공개 사과없이 바지(?)목사 정이철을 내세워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인품을 갖춘 신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인격적으로 잘 갖춘 분이라면 찌를 것이 없겠지만 가지고 있는 신학이허당’이라 한국 속담에 나와 있는 말처럼 못 먹는 늙은 감 한 번 찔러 봤습니다.  앞으로 공격적인 글에 대해서는 예의와 존중과 인격을 내려 놓고 글을 쓰겠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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