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  Miroslov Volf가 말한 것처럼 본문에 대해 어떤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다양성(Multifacetedness)과 통일성(Unity), 그리고 다의성(Polysemy/Multiple Meanings)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가진 신학은 한 마디로 ‘영혼을 죽이는 독선적인 신학’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신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모든 신학(오순절, 성결교, 감리교, 침례교)들, 특히 ‘성령론’에 대한 것은 이들 보기에 한 마디로 잘못된 신학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다양한 역사들을 귀신들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일삼는 자들을 향해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oul는 말한다.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Calvin을 원숭이처럼 흉내 내는 것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왜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배제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앞세우거나 또는 자신의 견해를 밀고 나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나 평판에 상처를 주려고 악한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자를 현대판 바리새인으로 부르고 싶다(요 11:47-53).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진을 치고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약 3:14-16).  영적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우리는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16:23).  

이런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자신이 어느 특정 신학으로 무장되어 있느냐가 아니고, 균형 잡힌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신학이란 신적인 것을 깊이 연구하고 숙고한 결과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개혁주의 신학은 거의 ‘꼰대’에 가깝다.  신학이 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강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제네바에서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반대파들을 숙청한 논쟁적인 인물, Calvin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고백이다.  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본질적인 문제로 논쟁을 많이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만난 개혁주의 신학 교수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지금의 칼빈주의자들처럼 천방지축 날뛰거나 허접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촉새같이 나불거리지 않았다.  공부하면서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이들은 정통 개혁주의자들로서 요즘 짝퉁 칼빈주의자들처럼 개소리로 작렬(炸裂) 하지 않았다.  하수(下手)가 아닌 진짜 ‘고수’(高手)들이었다.  

하수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만이 옳다고 우겨대는 못된 기질이 있어 변론과 언쟁을 좋아한다(딤전 6:4).  이것이 확증편향적 사고방식과 교조주의적 성향으로 중무장된 ‘꼰대’ 신학의 특징이다.  후안무치’(厚顔無恥)에 가까운 이런 부류의 사람을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부른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이런 자에게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점이 있다.  눈에 띌 만큼 개인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병적으로 강해 자신만이 가장 의롭고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만이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한다고 확신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정신과 의사는 약물과 정신치료가 필요한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부른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마 5:13-16), 이들은 ‘칼빈’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골빈’ 짓들(신학적 논쟁)만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J. I. Packer는 『Keep in the Step with the Spirit』에서 성령 은사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교리’와 ‘도덕’을 제시한다.  먼저 교리적 테스트는 요한일서 4장 2-3절과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근거를 둔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것이 결국 속죄의 죽음과 직결)을 인정하는 것과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가에 대한 여부이다.  도덕적 테스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요일 2:4, 3:9-10, 17, 24, 4:7-13, 20-21, 5:1-3). 

만약 우리들 중에 Packer가 말한 대로 이 두 가지 테스트에 근거한 성경적 입장을 취한다면 누구든지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삼가야 할 것이다(마 7:1-5).  평생을 배워도 알지 못하는 짧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은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정의를 내린다면, 더 나아가 그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정죄한다면, 이것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절대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만큼 성령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Lloyd Jones의 말을 들어보길 바란다.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지혜와 슬기로 제도화되었고, 성령에게 기회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의 능력의 현현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 것이다. 지금 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성령을 통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만 증언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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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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