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것처럼 타민족 교회와 다르게 한국 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없다.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예배가 있는지 모른다. 그 예배 속에는 우리의 신조(信條)와 찬송에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고(고후 13:13),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끔 성령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앙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에서는 사실상 성령이 무시되어 왔다.
이들은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었고(엡 4:30), 심지어 성령을 소멸한 사람들도 있다(살전 5:19). 나는 이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살전 5:19), 근심시킬지언정(엡 4:30), 개인이나 목회 사역에 있어 성령을 부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들 역시 바리새인처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고(눅 18:11),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믿는다(요 3:1-11).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같이 예수의 생애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다(행 2:14-42). 성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처럼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다(행 22:3). 하지만 이상하게도 진리의 성령(요 16:13)에 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분명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성령'(엡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원하신 성령(히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나는 성령보다는 예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에서 나온 정신 나간 헛소리다.
주로 골수 장로교 교인들이 이런 골빈 소리를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들이 ‘칼빈’과 ‘골빈’을 구별했으면 한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미국 대학원에서 Calvin 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담임목사를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장로교에 대해서 모르고 떠들어 대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성공을 거둔 비밀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중심을 둔 ‘복음’에 있었다(고전 15:1-6). 이것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초보적인 성경 지식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복음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났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지닌 문제는 성장 발육이 되다 만 것처럼 여기까지만 아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히 6:1-2). 이것은 너무나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달랐다. 이들은 복음 플러스 자신들이 체험한 성령이 있었다. 성령 체험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력 있는 실체로 만들었고(행 3:1-10), 그로 인해 당시 문화 속에서 그들은 급진적인 대안이 되었다. 이러한 성령은 초대 교회의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임재였고(행 2:1-4), 그 능력은 열매(행 2:43-47)와 증거(행 4장) 및 은사들(행 5:12-16)과 모두 관계가 있었다.
예수는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성령(마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라고 약속하셨고, 그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한다.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 했다(눅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에 대해 말씀을 선포했고(행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삼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고후 13:13). 더 나아가 이 '양자의 영'(롬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구약 성경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였고(사 32:15, 겔 39:29), 선지자들 역시 정결하게 하는 불을 고대하였다(사 4:4, 말 3:2).
사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란 열매(갈 5:22-23)와 은사 모두(고전 12-14장)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만 주야장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도 같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철저하게 중심에 서는 균형 잡힌 신앙의 삶이다. 신자가 경험할 수 있으며 능력을 부여하는 실체인 성령(눅 24:49)은 바울과 그의 교회에게는 신자의 모든 삶에서 시종일관 핵심 요소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롬 8:14)과 성장(롬 15:13, 엡 4:30),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3-11), 기도(롬 8:26-27), 증거(갈 4:6, 히 10:15-18)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이 나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불교에는 ‘구두선’(口頭禪)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실제로 몸으로 실천하는 수행 없이 말이나 이론만 앞세워 선(禪)이라고 주장하는 행위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용어이다. '구두(口頭)'는 입, 말이라는 뜻이고, '선(禪)'은 선 수행을 의미하므로, '입으로만 하는 선'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둥이선’이다. 불교의 선 수행은 좌선과 같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마음을 집중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주둥이선’(口頭禪)은 이러한 실제 수행이 결여된 채, 선에 대한 언설(言說), 문자(文字), 관념(觀念) 만을 입으로 떠들어 대는 것을 가리킨다.
요지가 무엇인가? 결국 가치 있는 신학이란 스데반처럼 삶으로 전이된 성령이 충만한 신앙이다(행 7:55, 엡 5:18). 마른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죽은 신학적 학문과 수면제와 같은 설교,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드려지는 기도, 다시 말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처럼 떠들어 대는’(마 7:21), 입만 살아 있는 메마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성령이 빠진 ‘주둥이’ 신앙을 좋아하실까?(눅 6: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