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

하고 싶은 이야기 2025. 11. 29. 09:48

성령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한 분 안에 세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삼위의 한 위로서 다른 두 위와 동일하신 분으로(마 29:19, 고후 13:14), 하나님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신비한 관계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나누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다(롬 8:9).  

또한 성령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각양 은사들을 주시고(고전 12:1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친히 증거 하신다(롬 8:16).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인격과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행 1:1-2), 사탄과의 대치 상태에 있는(엡 6:10-13),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인 교회를 강력하게 세우시며(행 9:31),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할 정도로 복음을 힘 있게 하신다(살전 1:5, 벧전 1:12).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갖 일들을 그릇되게 정당화해 온 것처럼, 은사주의 교회들 역시 성령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비성경적인 행위들을 자행해 왔다.  이 시대는 예수의 경고하신 것처럼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딤후 4:3-4)과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신앙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란 그다지 쉽지는 않다(마 24:24).  

지금도 사탄은 현상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유사한 기적들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영들 분별함이 필요한 때이고(고전 12:10),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요일 4:1).  이러한 책임은 교회 목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그러나 논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즉, 어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죄로 인한 어두움과 무지함(마 22:29) 그리고 영적 교만함 때문(고전 4:6)에 비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은사주의자를 과대망상증 환자나 신비주의자, 더 심하면 귀신 들린 사람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은사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John MacArthur의 말이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전부 마귀의 하수인이며 미혹된 사람들이다”  

바리새인 기질을 가진 MacArthur는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고 비판과 정죄의 칼을 마구 휘둘러 되는 것 같다(마 26:5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히 4:12)이 아닌 무딘 신학적 칼(?)에 맞아 죽었는지 모른다.  반면에 은사주의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 비은사주의자를 비판할 때가 있다.  미지근하고 냉랭하며 영적 체험 없이 메마른 종교생활을 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라고 판단한다.    

D. A. Carson은 『Showing the Spirit』에서 이 두 부류가 상대방에 대해 상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비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실제로 믿지 않고 주님에 대한 갈증이 없다.  이들은 심오한 영적 체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너무 교만하며, 실제보다는 의식에 더 관심이 많고, 성육한 진리보다는 명제적 진리를 선호한다.  또한 전도하기보다는 신학 책을 쓰고 패배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에 대해 방어적이다.  그리고 예배는 무미건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반면 “비은사주의자들이 볼 때,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에 대한 현대적 사랑에 빠져 진리마저 희생시키고 있고 심각하게 비성경적이다.  특히 방언 체험을 신학적 영적 십볼렛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전도하기보다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양 떼를 빼앗아 간다.  더 나아가 신실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기보다는 영적인 영웅주의에 빠져 있고, 예배에 질서가 없다.  그리고 증거 본문 암기하는 이상으로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다.”  

나는 이 두 부류를 양비론(兩非論), 즉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문제는 서로 배우려 하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도토리 키재기다(고전 4:6-7).  물론 이러한 오해들을 통해 서로를 견제함으로 성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몸을 혼란케 하는 극단을 피하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은 은사주의자들을 볼 때 성령의 은사들만 거론하면 행여나 성경 계시를 넘어갈까 하여 견제한다.  반대로 성령 편에 선 사람들은 비은사주의자들이 성령의 주권적인 능력의 역사 자체를 제한하는 극단에 빠지지 않게 견제해 주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은사주의 신학보다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Calvin 중심으로 세워진 개혁주의 신학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을 만한다.  우리에게 성경 66권의 말씀이 있지 않는가?  이로 인해 그들은 복음에 대한 자신들의 지적인 깨닫음에 지나치게 만족한다.  그 결과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기대감을 철저히 배제시킨다.  

심지어 성령의 역사를 생각조차 하지 않기 위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잊고 산다.  한 마디로 Brain fog다.  이것은 의학적 질병은 아니지만 뇌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마귀의 궤계에 넘어갔다(엡 6:11).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완성된 성경이 있으니까 성령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 말이다.  이것을 관용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다.  정말, 성령 없이 성경만을 가지고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고전 12:3).  

그러나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마 22:32).  따라서 1세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었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이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 12:8).    

제자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성경은 증거 한다.  ‘그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때,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했다’(막 16:20).  사도 바울 역시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5)라고 선포한다.  1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되었던 진리의 말씀, 즉, 그 동일한 말씀을 지금도 증거 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나야 정상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말라비틀어진 메마른 복음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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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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