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고전 4:6)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것과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 것처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0) 외에는 아무것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 기록된 말씀(히 1:1-2, 딤후 3:16)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감(벧후 1:21)을 통해 주신 귀중한 선물인 것만은 사실이다(약 1:17).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는 말씀이 단순히 기록된 말씀에 관하여만 언급하고 있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과 아울러 문자에 대한 집착이 오늘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정체적인 관점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히 13:8)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성경이 기록되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요 10:27).  또한 그들과 교제를 나누신 것처럼(창 17:1-2) 우리와도 똑같이 교제를 나누실 것이다(고후 13:13, 빌 12:1-2).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빌립(행 8:26-40)과 바울 같이(행 18:10-11) 주님의 음성을 들었거나 혹은 베드로 같이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말할 때(행 1-18, 12:1-19), 개혁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느끼는 의구심과 주관성에 대한 염려는 사실상 성경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편견과 인간 내부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계몽주의적인 형태의 기독교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래전부터 바울의 삶과 사상에 나타난 성령 하나님의 중대한 역할에 대해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나팔을 쉬지 않고 불어댔다.  일반적으로 신약 학자들, 특별히 개혁주의자들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성령의 역할을 무시해온 것이 현실이다(마 12:22-37).  이들은 성령에 대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접근 방식을 취해 왔다.  마치 하나님의 마지막 대변인인 것처럼 어떤 주장들을 내세웠다.  대부분 이런 좋지 못한 교만한 태도가 성령의 은사를 환영하고 인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온 신학적 견해는 고요한 가운데 계신 잠잠하신 성령이었다.  거의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흐르는 적막함과 비슷하게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 질서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었다(고전 14:33, 40).  이것은 이세벨의 칼을 피해 시내산으로 도망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끌어온 이미지에 근거한다(왕상 19:1-3).  그곳에서 하나님은 바람, 지진,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도리어 침묵이 감돌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도망자 엘리야를 찾아오셨다(왕상 19:11-13).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를 신약 성경에서도 귀신(?)같이 찾아낸다.  이를테면 바울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대목이다(갈 5:22-23).  그에 비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오로지 사도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멋대로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고요하고 적막한 상태는 때때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도 뇌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으면 어지러움증이 생기듯이 영적인 빈혈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고자 시도해온 사실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입증된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가?  기도해 보길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지 말이다. 혼자 녹음기 틀어 놓은 것처럼 중언부언하다가 관두기 쉽다(마 6:7).  영적 빈혈은 아무리 철분제(?)를 많이 복용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우리들과 다른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배 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자빠져 자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질부리고,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이듯(약 5:17)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와 똑같이 약하고 상하기 쉬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들이다(창 1:27).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령에 대해서는 그들처럼 자신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타민족 교회와 다르게 한국 교회만큼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없다.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예배가 있는지 모른다.  그 예배 속에는 우리의 신조(信條)와 찬송에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고(고후 13:13),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가끔 성령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목사와 신학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회 공동체에서는 사실상 성령이 무시되어 왔다.  이들은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었고(엡 4:30), 심지어 성령을 소멸한 사람들도 있다(살전 5:19).  나는 이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살전 5:19), 근심시킬지언정(엡 4:30), 개인이나 목회 사역에 있어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바리새인처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하고(눅 18:11), 니고데모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믿는다(요 3:1-11).  물론 십자가의 원수 같은 쓸데없는 궤변을 장황스럽게 늘어놓지만 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 같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고(행 2:14-42),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처럼 상당한 인식을 갖고 있지만(행 22:3), 이상하게도 진리의 성령(요 16:13)에 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이들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내가 난독증에 걸린 것인가?  분명 성경에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성령'(엡 4:30)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영원하신 성령(히 9:14)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성령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이 상당히 영적인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고 무지에서 나온 정신 나간 헛소리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성공을 거둔 비밀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중심을 둔 ‘복음’에 있었다(고전 15:1-6).  이것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초보적인 성경 지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복음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났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지닌 문제는 성장 발육이 되다 만 것처럼 여기까지만 아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히 6:1-2).  이것은 너도나도 아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은 달랐다.  이들은 복음 플러스 자신들이 체험한 성령이 있었다.  성령 체험은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능력 있는 실체로 만들었고(행 3:1-10), 그로 인해 당시 문화 속에서 그들은 급진적인 대안이 되었다.  이러한 성령은 초대 교회의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임재였고(행 2:1-4), 그 능력은 열매(행 2:43-47)와 증거(행 4장) 및 은사들(행 5:12-16)과 모두 관계가 있었다.       

예수님은 사역의 목적 중 하나를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성령(마 10:20)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언급하셨다.  성경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라고 약속하셨는데, 그다음 39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성령’을 말한다.  세례 요한도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증거 했다(눅 3:16).  성령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에 대해 말씀을 선포했고(행 2:38),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삼위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고후 13:13), 이 '양자의 영'(롬 8:15)인 성령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강조하였다.  구약 성경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실 때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였고(사 32:15, 겔 39:29), 선지자들 역시 정결하게 하는 불을 고대하였다(사 4:4, 말 3:2). 

사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란 열매(갈 5:22-23)와 은사 모두(고전 12-14장)를 동시에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철저하게 중심에 서는 균형 잡힌 신앙의 삶이다.  나아가 신자가 경험할 수 있으며 능력을 부여하는 실체인 성령(눅 24:49)은 바울과 그의 교회 공동체에게는 신자의 모든 삶에서 시종일관 핵심 요소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롬 8:14)과 성장(롬 15:13, 엡 4:30), 열매(갈 5:22-23), 은사(고전 12:3-11), 기도(롬 8:26-27), 증거(갈 4:6, 히 10:15-18)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이 나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결국 가치 있는 신학이란 스데반처럼 삶으로 전이된 성령이 충만한 신앙이다(행 7:55, 엡 5:18).  마른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죽은 학문이나 입만 살아 있는 메마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마 7:22, 눅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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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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