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1.03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들 2
  2. 2014.09.27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
  3. 2014.07.25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약 율법에서는 대속 받지 못하는 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신성을 모독한 죄는 그 당시에 사형으로 다스려졌고(레 24:10-23), 신약에 와서 성령에 대한 모독 즉, 성령의 사역에 의해(마 12:28), 입증된 그분의 존재를 항구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최악의 죄로 규정하고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마 12:31).  사실 진정한 고백과 회개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지만(요일 1:7-9), 용서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가 하나 있다면(막 3:29), 그것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죄는 예수님 사역 배후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눅 5:17),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눈으로 빛을 보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요 3:19),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그분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눅 12:10).  이 죄에 대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중상하였다.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성령이 제시하는 빛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끝 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막 3:29),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에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죄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불신, 예를 들면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들었지만 끝까지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범하는 죄라고 규정하거나 심지어 심각한 배교 구절인 히브리서 6장4-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죄는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고 성경 본문에서 의미하는 문맥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누군가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물론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8:24-25),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는 사람을 두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은 없고 불신앙을 소유하고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할뿐더러 이 죄가 일반적인 ‘불신’(막 6:3)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마 12:31)과 ‘성령을 훼방하는 것’(막 3:29)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본문 문맥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죄에 대해 공관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힘입은(마 12;28), 예수님의 사역에 명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마태복음에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직후에(마 12:22), 마가복음에서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난 후에(막 3:10-12), 그리고 누가복음은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고 고쳐주신 직후에(눅 11:14),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적인 비난을 받았는데(막 3;22), 분명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마 12:28),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마 12:24), 쫓아낸다고 적대적인 주장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를(눅 5:17),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왕하 1:6),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무 분명하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고 악한 마음으로 말로 성령을 훼방하고 자신의 사역을 귀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막 3:29),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1-32).  Louis Berkhof은 이 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항하는 죄라기보다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성령의 공적 사역을 거부하는 죄이다”

 

Jonathan Edwards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마태복음 12장22-32절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사함 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라고 말하면서 『부흥론』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비난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부에 대한 사악한 불경죄이거나 혹은 모르고서 성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모르고 한 것은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자신들이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특하게 영적 실재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빛에 대항한 고의적 죄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사함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죄가 영적자살에 준하는 행위로서 드러난 진리를 최종적이고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시 영적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부흥을 악의적으로 반대하고 비난하며 마귀의 역사라 부르는 자들은 이제 한 가지 일만 더하면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셈인데 그 일이란 자신들의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는 짓을 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촉구합니다.  “부흥이 임한 곳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탐문하라”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으로(행 3:6-9),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유(악의, 질투심, 교만)로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그 역사를 마귀의 능력에 귀속시키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들을 바리새인들은 주님 앞에서 직접 목격함에도 불구하고(눅 5:17-26), 이것을 거부한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신학적으로 틀렸고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비주의자이거나 감정주의자 사람들이 개인의 관계와 체험을 성경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적대시 하거나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만이 성경적이고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체험해 보지 않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참된 성도라면 육신이 연약하여 경박한 말과 경솔한 행동을 통해 성령을 근심시킬 수는 있지만(엡 4:30),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행 16:18), 즉 은혜를 주시는 성령을 모독하지는 않습니다(히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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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분이 있는 목사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주제로 옮겨지면서 적지 않게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목사님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귀신들린 사람이 옹알거리는 소리이고 예언은 성경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아주사의 부흥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계시에 수반하는 모든 은사도 종결되었는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께 직접 방언을 하고 나서 귀신이 옹알거리는 소리라고 말을 하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고 나서 이것이 환청에 시달리는 것인지 그분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고 본인이 체험해 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제 개인기도 시간에 방언을 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기다릴 때 주님께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말씀하실 때가 있다고 말하자 그분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그렇게 열려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는데 “목사님 보시기에 제가 귀신이 들렸거나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처럼 보이시나요?”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인데(행 4:1-22), 이들에게 있어 진리는 자신의 신학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눈앞에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합니다(눅 11:14-23).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 죄를 짓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막 3:28-30), 그 이유는 자신의 판단이 주님보다 더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8:15).  그렇다면 이 죄를 범한 자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반면에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마 12:32).  이 말은 인자가 성령보다 지위가 낮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기간 중에 그분의 메시야 신분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실 ‘인자를 거역하는 말’‘성령을 거역하여 말’을 실제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겸손하고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주님과 요한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주를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던(마 10:1), 요한은 분노에 가까운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막 9:38).  놀라운 사실은 이런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야!”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금하지 말 것”‘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막 9:39-40), 이 말씀의 의미는 설사 주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무당이나 무속종교를 통해 병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났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을 의지해서 병을 고쳤느냐는 것입니다(행 4:10).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귀신의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곳에는 가장 존귀하신 예수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마 1:21), 그것은 귀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한 역사를 무조건 귀신들이 행하는 일로 쉽게 단정지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요 8:15), 좋은 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스스로의 신앙상태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요한처럼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편이 아닌 사람을 무조건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분명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인 마술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행 19:13-16),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을 행한다면 그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며(눅 11:23), 만약 이런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은사를 귀신의 일로 치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는데 인간이 진짜니 가짜니 판단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고(마 12:36-37), 만약 누군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령의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마리엘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하며(행 5:34),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이라면(롬 8:14, 고전 2:14-15),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입술로(잠 18:21), 모독하는 죄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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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중립이 존재할 수 없고(막 9:40),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 살던지 둘 중의 하나이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란 없습니다(요8:44-47).  물론 어중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 앞에서 토하여 내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계 3:15-16), 주님은 신앙에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마태복음 12장30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을 좇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사탄을 좇아가는 추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눅 9:50).  한편 예수님은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바로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31).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있고(엡 4:30),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거나(살전 5:19), 심지어 저항할 수도 있지만(행 7:51), 이러한 죄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죄들입니다(요일 1:7).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도 모르게 연약하여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함으로 근심시킬 수는 있어도(사 63:10),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때 성령을 근심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마 26:69-75),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1-32), 그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으며(요 21:15-18), 사도 바울 역시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딤전 1:13),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용서해 주셨고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행 9:15).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면(사 1:18), 그 죄가 무슨 죄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엡 1:7, 요일 1:1:9).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먼저 Augustine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며(롬 2:5), Chrysostom은 이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죄로서 그분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하여 마귀의 역사로 매도한 사람들이 짓는 죄라고 하며(눅 12:10), 또한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성령훼방 죄는 중생은 했지만 바울의 동역자 데마(몬 24절, 딤후 4:10), 또는 가룟유다(눅 6:12-16, 요 18:1-3)처럼 신앙을 도중에 버린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히 6:4-6).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견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일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다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교리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롬 8:38-39, 요 6:39, 엡 1:13-14, 벧전 1:4-5).  다시 말해 거듭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라(요 5:24), 그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요 10:29),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 6:4-6, 10:26-2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그리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은 아닙니다(요 3:1-8).  다시 말해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행 9장),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것처럼(갈 1:13-14), 스스로 성도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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