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교지도자이자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개혁자,

Zinzendorf는 교회 연합운동을 시도하였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세웠으며 수많은 찬송을 작사하였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빛나는 업적은

선교의 위대한 세기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독일 드레스덴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경건주의자인 할머니와 숙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영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상황은 할레대학에 입학한 후 루터교 경건주의 A. H. Francke로부터

영적감화를 받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수학하는 동안 그는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을 조직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1719년 유럽 여행 도중 한 미술품 전시회에서 본 예수 수난화에 큰 감동을 받고,

자신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필생의 사역에 관하여 심사숙고하게 된다.

Domenico Fetti가 그린 그 그림에는

“내가 너를 위하여 이 일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각명(刻銘)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세주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겠다고 결심하였다.

1722년 Zinzendorf는 그의 영지로 피난 온 기독교 피난자들을 보호하면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한 자신의 맹세를 지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Herrnhut(주님의 보호처)라 불렸던 그의 영지에는

어느덧 종교적 피난자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1727년 이 공동체의 놀라운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일이 계기로 Zinzendorf와 공동체 사람들은 선교와 헌신에의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루 24시간 꼬박 드리는 기도가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이후로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 세계 곳곳으로 파송되는 결과를 낳았다.

1760년 Zinzendorf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3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다.

한 명의 기도의 사람이 일으킨 기도 운동은 자발적 선교 운동으로 이어졌고,

비록 강 같은 순교의 피가 흐르기는 했어도

많은 일꾼들이 세계 각처에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기도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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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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