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25.05.25 선한 행위의 필요성
  2. 2025.05.17 순종의 필요성
  3. 2025.05.10 심판과 행위 1
  4. 2025.05.03 심판과 칭의
  5. 2025.04.19 Wright의 반격
  6. 2025.03.29 Piper의 불만 1
  7. 2025.03.22 믿음과 행위의 관계
  8. 2025.03.15 행위에 따른 심판
  9. 2025.03.08 행위에 의한 칭의
  10. 2025.03.01 신자들이 받을 심판 1
  11. 2025.02.22 심판 받을 자
  12. 2025.02.13 하나님의 심판 1
  13. 2025.02.09 시작과 완성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물론 야고보서를 다소 무시하는 신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어떤 이들은 야고보서의 ‘의롭게 하다’(디카이오오)와 ‘구원하다’(소조)라는 단어가 구원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야고보의 가르침을 과소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정해진 신학적 틀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는 시도로서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런 해석은 나머지 신약성서와 더불어 이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와 잘 부합되지 않는 의미를 이 단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지나치게 읽어내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동시에 완전함과 혼동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야고보서 3장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는 야고보의 말은 주목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범한 자의 범주에 포함시킨다(‘우리가 다’).  그는 우리가 다 ‘다양한 방식으로’ 죄를 범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죄를 짓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실은 선한 행위가 칭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약화시키지는 않지만,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위가 완전함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 

우리가 상습적으로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신자의 삶의 태도와 방향은 반드시 의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는 최종적 칭의에 있어 선한 행위의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긴장 관계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선한 행위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완벽주의에도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야고보서 2장 12-13절 역시 중요하다.  신자들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마 18:21-35).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야고보는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신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나 자신들의 행위에 기초하여 구원을 요구할 만한 자격을 부여하지 못한다.  구원을 얻기 위한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긍휼뿐이다(롬 9:15).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긍휼히 필요하다는 사실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바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갈 2:16).  

야고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바울만큼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고보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야고보 역시 선한 행위가 칭의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들은 심판날에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여전히 사람은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만약 행위가 칭의의 기초가 아니라면 우리는 행위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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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선한 행위가 최종적인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부인한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하지만 결코 우리는 바울보다 더 바울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디도서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이 은혜의 복음과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딛 2:11-12).  

회심 때 받은 은혜는 일상의 삶과 행동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 인격을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다.  물론 우리가 지나치게 실현된 종말론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7장 14-25절에 묘사하고 있는 것을 여전히 부분적으로 경험한다.  변화는 완전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육과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갈 5:13-6:10).  신자들은 더 이상 죄의 종은 아니지만(롬 6장), 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갈 5:17).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그날까지 여전히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죄와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빌 3:12-16).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삶’이나 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 하나님께 맡기라’(Let go and Let God)는 수동적인 사고방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다(엡 6:10-19, 고전 9:26, 고후 10:4, 딤전 1:18, 6:12, 딤후 4:7).  이 과정은 실패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따라서 너무 낙관적이거나 비판적인 사고는 위험하다.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본문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로 빌립보서 2장 12-13절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동사 ‘이루다’는 행하다, 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한다(롬 1:27, 2:9, 7:8, 15:18, 고전 5:3, 고후 5:5, 엡 6:13).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복종하다’라는 동사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히 놀랍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순종’하고 ‘행해야’ 한다.  순종이나 선한 행위 없이는 결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진술 때문에 바울이 혹시 은혜의 복음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잠재울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의 의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 낳은 의는 자신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빌 3:9).  오히려 바울 자신의 의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약 1:17).  

여기엔 스스로에게서 난 의가 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선함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결코 설 자리가 없다.  빌리보서 2장 13절 말씀이 2장 12절 말씀 직후에 이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결과(고전 15:9) 일뿐, 결코 인간의 고결한 성품이나 미덕의 결과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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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행위

최후의 심판 2025. 5. 10. 10:27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부인하지만(갈 3:10), 또 다른 본문에서는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먼저 로마서 2장에 기록된 바울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은 놀랍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로마서 1장 18-3장 20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마서 2장 6절에서 바울은 로마서 2장 6-11절 전체에 대한 논제, 즉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주장을 펼친다.  7-10절은 이 진술의 의미를 교차대구구조로 풀어낸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영생과 전혀 무관한 ‘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다시 말해 7절은 ‘영생’이 사람의 행함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순종의 행위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로마서 2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바울 서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공통 주제이지만(고후 11:15, 엡 2:11, 딤후 2:21, 4:14, 딛 1:16, 3:8, 14),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갈라디아서에만 집중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은혜의 복음을 다룬다.  바울은 ‘의’ 및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갈 2:16, 3:2, 5, 10).  하지만 바울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는 선한 행위의 토대이자 기초이다(고전 15:10).  잘 알려진 표현을 의역하자면 오직 믿음은 믿음이 혼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갈 5:6).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갈 5:18), 성령으로 살며(갈 5:25), 성령의 위하여 심고(갈 6:8),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갈 5:22-23).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는 종말론적 심판과 멸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최종적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보다 더 확실한 진술은 없다(갈 5:19-21).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자율적 행위나 인간의 미덕에 의해 발생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성령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행위가 영생에 필수적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성령을 위하여 심지 않는 자는 결코 영생을 경험하지 못한다.  즉,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갈 6:8).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울 자신이 선포하는 은혜의 복음을 악화시킨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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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이 부분을 분명하게 밝힌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에 담긴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시내산 율법도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구속사적 논증도 들어 있다.  하지만 바울의 논증에 의하면 이러한 제사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히 10:1).  왜냐하면 이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는 최종적인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이다(히 9:26).  따라서 이 저주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갈 3:13).  만약 누군가 자신을 율법 아래 두고 구원을 위해 할례를 의존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다(갈 5:2-4).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서는 인간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온다(갈 3:11-12).  바울은 할례와 율법 아래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철저히 반대한다(갈 4:21).  왜 이렇게 반대하는가?  율법은 죄를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더 증가시키기 때문이다(롬 5:20).  다시 말해 율법 아래 사는 자들(갈 3:23, 4:4, 5, 21, 5:18)은 저주아래 있고(갈 3:10), 죄 아래 있으며(갈 3:22), 초등교사 아래 있고(갈 3:25),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 노릇 하는 자들이다(갈 4:3).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의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다(갈 3:8, 11, 24).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갈 3:13).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았다(갈 1:14).  중간 지대란 없다.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지 않으면 율법을 통해 얻는다(갈 2:21).  칭의를 위해 율법의 길을 선택한 자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십자가를 보는 눈을 상실한다(갈 3:1).

무엇보다도 할례에 의존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거리낌을 거부하는 것이다(갈 5:11).  왜냐하면 할례는 전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광이 하나님께 세세토록’(갈 1:5)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반면(갈 6:14),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한다(갈 6:12-13).  요지가 무엇인가?  칭의는 결코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없고,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지도 않을뿐더러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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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ght의 반격

최후의 심판 2025. 4. 19. 10:08

Wright와 Piper는 Atlanta에서 열린 2010년 복음주의 신학회 연례 총회에서 본회의 강사로 초청받아 정면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Piper가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Thomas R. Schreiner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Schreiner는 그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한 보다 더 사려 깊은 설명을 Wright에게 촉구했다.  Justification: The Saving Righteousness of God in Christ (JETS 54, Mar 2011)에 나온 Schreiner의 말을 들어보자.  “Wright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종종 도외시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바울은 선한 행위가 칭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치고, Wright 역시 이 본문들은 단순히 상에 대한 것이 아님을 올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Wright는 Justification: Yesterday, Today, and Forever (JETS 54, Mar 2011)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칭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메시아 안에 확정되어 있다. 나는 내가 ‘기초’에 관해 언급했을 때,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룩하신 사역 및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사역과 전혀 무관 하다고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견고하고 완전한 은혜의 구조 안에서 마지막 날에 드러날 그 특정한 증거가 그 사람이 지금껏 살아온 사람의 취지와 방향이 될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 하시는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 안에 영원히 남아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미래에 일어날 칭의는 비록 그간 살아온 삶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인해 믿음 곧 오직 믿음에 따라 내려진 현재의 판결을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Schreiner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Wright가 지금이라도 최후의 심판이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수정과 해명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Wright는 이러한 설레발 감정에 대해 주의를 당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 글은 Denny Burke 교수가 Atlanta 복음주의 신학회 연례 총회에 참석한 후 Wright의 주장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쓴 글이다.  “너무 흥분하지 말라.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그동안 나의 많고 많은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철회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기초’라고 말했다. 내가 언제나 분명하게 밝혔듯이, 나는 몇몇 신학자들이 반드시 그런 의미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도, 또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기초’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 단어에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모두 바울이 로마서 2장과 다른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의 삶은 이미 변화되었고, 최종 판결은 그 변화가 제 아무리 불안전하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변화된 삶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이다”(www.dennyburk.com/n-t-wright-on-justfication-at-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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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er의 불만

최후의 심판 2025. 3. 29. 10:44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두 명의 저명인사, 영국 신약학자 N. T. Wright와 미국 목사 John Piper다.  비록 마지막 최후의 심판에서의 행위의 역할이 두 사람 사이에 드러난 견해 차이의 핵심은 아니지만,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음 확실하다.  문제는  The New Perspective(새관점) 보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인물 중 한 사림인 Wright가 최후의 심판에서 신자에게 주어질 최종의 칭의는 그가 살아온 삶 전체 기초하여, 또는 어느 정도 그 결과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칭의는 행함(performance)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자 Piper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에서 Wright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Piper가 가장 크게 우려한 것 중의 하나는 “Wright가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칭의가 행위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취지의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을 천명했다는 것이었다. 

Piper는 다시 한번 The Purifying Power of Living by Faith in Future Grace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공적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대한 증거다. 따라서 바울이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받을 상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Wright에 대한 Piper의 불만은 Wright가 ‘오직 믿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칭의에 대한 Catholic의 해석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 Piper의 불만이었다.  Piper에 따르면 “Wright는 내가 우리의 선한 행위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한 필수적 증거라고 말할 때 의미한 바와 다를 바 없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런데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Piper는 “나는 Wright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사실은 이것이 그가 믿고 있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이미 살펴봤듯이, Piper는 심판뿐 아니라 심지어 행위가 한 사람의 최종적 구원에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가 가장 크게 우려한 부분은 Wright가 최종적 구원의 궁극적 기초 혹은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완성된 십자가 사역에 대한 믿음에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행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Piper는 The Future of Justification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칭의에 대한 근거로서의 율법 준수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말을 들은 Wright도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니었다.  그는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이라는 책으로 Piper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신은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힘으로 얻는다거나 구원을 위해서는 완전한 삶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1-11)과 성령의 내주 하심(롬 2:25-29)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고(롬 6:6-11), 율법에 순종할 수 있으며(롬 8:4), 몸의 행실을 죽이고(롬 8:13), 마침내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롬 8:13).  한 마디로 자신의 견해는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연이어 말한다.  “인간은 성령이 그들 안에 역사하실 때에는 진정한 인간,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율법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들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심판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최종 판결을 이끌어내는 삶이다.  이것은 믿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에 앞서 현세에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칭하신다면, 그것은 믿음이 그렇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이들의 특성을 잘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Wright의 답변은 그를 비판하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불충분했다.  최종적 구원에 대한 근거가 여전히 모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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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에서의 행위 역할을 설명하는 방법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 뉘앙스(nuance)는 매우 다양하다.  Paul Barnett은 최후의 심판을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고전 4:5) 책망을 받는 자리로 보면서(마 25:24-30),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신자는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고전 3:10-15).  반면에 George Eldon Ladd는 로마서 2장 5-16절과 같은 본문들은 실제적 상황보다는 이론적/가설적 상황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Samuel L. Hoyt는 최후의 심판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영생이 아니라 상이며(계 22:12),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어느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Martin Luther의 신학사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Luther는 행위가 은혜보다 앞서더라도 그것이 구원/영생을 얻기 위한 공로가 된다는 Catholic Church의 행위 개념을 전면 거부했다.  그는 칭의(Justification)는 행위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Luther’s Works에서 “칭의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참되고 주요한 조항으로서 결코 취소불가능하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지속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Roman Catholic Church만이 Luther의 유일한 적수는 아니었다.  Catholic 사상이 행위에 깊이 몰두했다면 반(反)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를 완전히 무시했다.  따라서 Luther는 비록 행위가 칭의를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믿음이 실제임을 증명해 준다는 차원에서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약 2:14-26).  그는 선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약 2:26), 믿음과 행위 사이의 긴장 관계를 놓고 씨름하면서도 믿음에 우선권을 주려고 애썼다. 

Luther’s Works』에서 말한 것처럼 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예를 들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행위가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요일 4:16-18).  하지만 행위 자체는 두려움을 완화시켜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Paul Althaus가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근거하여 값없이 받는 선물이기 때문이다”(딛 3:5).  

만약 누군가가 행위 없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면, 그는 다시 말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믿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만약 당신에게 행위가 없다면 절대로 믿음 없이 심판대 앞에 서지 말라”(약 2:22).  그 이유가 무엇일까? 

20세기 후반에 와서 수많은 학자들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을 서로 조화시키려는 연구에 많은 애를 썼다.  또한 이 연구들은 아무래도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이 두 주제가 바울 서신 안에서 매우 날카롭게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1997년에 출간된 E. P. Sanders의 기념비적인 저서인『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는 바울 연구에 있어 새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Luther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유대교가 사실은 행위에 의한 의로 규정되는 종교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Sanders의 연구는 차후 The New Perspective(새 관점)으로 불리게 된 견해를 지지하는 수많은 문헌을 마구 쏟아내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새 관점이 그동안 저술된 수많은 책 역시 이 문제의 행위의 역할에 집중함에 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지난 세기에도 어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안갯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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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미움에 관계된 행동이 지속될 경우 심판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만약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어떤 심판이 내려질 것인가?(약 5:9).  정한 날이 다가오고 있겠지만, 심판자는 이미 문 밖에 서 계신다(계 3:20). 

Donald Bloesch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겠지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약 2:12).  따라서 끝까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요 10:28).  다시 말해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지만, 긍휼을 베풀면 그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한다’는 것이다(약 2:13).  그런데 명목상 교인이나 신실하지 못한 ‘나일론’(nylon)  신자들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를 보면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자들이’ 나온다(계 3:4).  사실 이들은 은혜와 순종의 응답 사이에 정교한 균형을 유지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옷은 은혜로 값없이’ 주어졌지만(롬 3:24),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예비하였기 때문이다(계 3:5).   따라서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인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이 심판은 언제나 행위에 근거해서 진행된다(마 25:41-46, 고후 5:10, 히 4:12-13).  행위는 마음에 대한 충성의 틀림없는 증거이며, 행위를 보면 믿음과 불신, 충성과 불충성을 알 수 있다.  믿음과 믿음의 행위와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론은 예수님과 바울의 이론과도 동일하다((요 5:29, 롬 2:6).

사도신경(Apostle's Creed)은 400년 동안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정통 교리를 믿어왔던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심판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받을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는 자들의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개념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요일 4:9-10)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Karl Barth다.

William J. Dalton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심판’은 그와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Aspects of New Testament Eschatology』에 나온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부당한 결론을 피하려면, 미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 진술이야말로 무조건 이런 배경의 부적합성을 감안하고, 이 부적합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빗나간 태도는 반세기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신약 성경은 정직하게 읽어보면 이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 3:24).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롬 2:6), 즉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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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실제로 비유가 아니라 예수께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한 은유(metaphor)다.  마태는 인자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심판을 위하여 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먼저 예수님은 양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그리고 염소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마 25:41-42).

이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평행구절들을 기초로 하여 본문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비유적인 요소들은 단지 목자, 양들, 염소들, 그리고 양들과 염소들의 실제적인 구분뿐이다.  이 본문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가?  죄 사함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리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저주받은 자에게 베푸는 자비도 없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대한 흔적도 나타나 있지 않다.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이 본문은 개혁주의 신학 노선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골칫덩어리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천만하게도 바울과 Augustine, 그리고 Luther의 신학에 반대하는 ‘행위에 의한 칭의’처럼 위험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Graig Keener는 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은 이 심판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행위의 역할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런데 마태복음 25장뿐만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 성경 구절 역시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한 일을 통한 구원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생명과 정죄 둘 중 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지역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는 것을 알기 원했다(롬 2:5-7).  이 구절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엡 2:8-10),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행한대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계 20:13).  진실을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해 ‘해명’(解明)을 해야 한다(욥 34:11, 시 61:12, 잠 24:12, 렘 17:10, 마 16:27, 계 20:12). 

만약 ‘무익한 말’(마 12:36)이 마지막 날에 심판에 근거가 된다면, 우리가 삶 가운데 실제로 행한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근거가 된다(고후 5:10).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에스겔 33장 30-33절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치우침이 없이 사람들이 행한 대로 주어질 것이다(고후 5:10).       

야고보 역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여기서 야고보는 독자를 ‘형제’로 부르는데, 이들은 곧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분명히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  하나는 신랄하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심판을 받는 것이고(마 12:36), 다른 하나는 오래 참으며 원망하지 않고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심판을 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야고보가 결코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은 그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아직 미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심판과정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는 분명히 여기서 심판의 최종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심판의 결과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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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이 받을 심판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행한 일들을 근거로 하여 보상을 받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나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롬 12:3) 믿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받을까?”  나에게 있어 이 질문의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확신 있게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민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히 12:23).  따라서 주께서는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며(히 10:30),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벧전 4:17).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히 9:27).  상급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 사상은 구약과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주제다(시 62:12, 렘 17:10, 단 7:10, 마 16:27, 롬 2:6, 14:10-21, 고전 3:12-15, 고후 5:10, 벧전 1:17).

그렇다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들도 심판을 받는가?  이들은 일반 신자와 다르게 ‘더 호되고 엄격한’(NRSV) 심판을 받을 것이다(약 3:1).  만약 이들이 무서운 심판을 받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잘못된 가르침을 전했을 경우에 자비 없는 심판을 받는다(눅 11:52).  개종을 주도하는 선생들이 ‘지옥의 자식’이라면 개종자들은 말한 것도 없다(마 23:15).  따라서 가르치는 권세를  가진 자는 더 큰 책임을 수반한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바울은 복음의 메시지를 최초로 전달하는 ‘씨 뿌리는 역할’을 맡았고, 아볼로는 계속해서 교육하는 ‘물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동일했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것과 그들이 믿음 안에서 성숙하도록 돌보는 일이었다.  각각의 종들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는다’(마 12:36).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날 내가 평상시에 내뱉은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마 12:37).  산 자와 죽은 자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삶에서 행한 대로 판단을 받는 곳이 심판대다(벧전 4:5).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선물(엡 2:8)이 그리스도께 믿음의 순종을 해야 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아야’(고후 5:10)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롬 14:10).  그러므로 우리는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벧전 1:17).     

여기까지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오실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행 10:42).  그러면 이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사람들이 받는 것인가?  성경은 다른 사람에 대해 비평적이거나 정죄하는 태도를 가진 위선적인 비판자(마 7:1-2), 결혼 관계를 파괴시키는 ‘음행 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히 13:4), 갑질을 밥먹듯이 하는 ‘긍휼히 행하지 아니하는 자’(약 2:13), 오래 참지 못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약 5:9)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신약 윤리에 대한 탁월한 진술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입으로만 믿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마 7:21).  그들은 구원을 받지만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 자신들의 상을 잃어버린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심판에 관해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몇몇 본문을 살펴보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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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받을 자

최후의 심판 2025. 2. 22. 19:25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임을 아셨다.  이들은 누구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고전 5:13), 곧 ‘불의한 자’(벧전 2:9), ‘경건하지 아니한 자’(벧후 3:7, 유 14-15), 예수를 경배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이 세상에서 속한 사람들’(NLT/계 6:10)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 즉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히 10:27) 뿐이다.  아무리 선하고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불신자들, NLT)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계 21:8).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같다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떠한가과연 그들도 심판을 받는가나는 문제를 차근차근 말하고 싶다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나님의 은혜( 2:8)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19:30)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규정된다( 5:2).  따라서 마귀는 행위를 막으려고 애쓰지 않고 믿음을 막으려고 발악에 가까운 궤계를 쓴다(눅 8:12). 

그런데 믿는 자들은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1:12), 주님과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영생을 현재 소유함으로써심판을 받지않는다( 3:18).  그들은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이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때문이다( 5:24).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듯이’(요일 5:12), 신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영생을 현재 소유함으로써 얻었다.

NLT 영역본은 요한복음 5 24절을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결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한다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1:13).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1).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의 몸의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다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고전 15:55).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신약성경에카리스’(은혜)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155 등장하는데, 100회가 바울 서신에서 언급된다는 것이다신성모독자이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바울 사람,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6)에게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게부어졌다(딤전 1:14).  위협과 살기가 충만( 9:1)하고, 악질 중의 악질(딤전 1:9) 바울에게 어떻게 그런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실 있을까?’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바로예수(딤전 1:15).  은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통해 주어진다(딤후 2:1).  어디에서도 얻을 없는 것이 은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여라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신실하도다 말씀이여 번역된다목회 서신 외의 다른 곳에서는 구절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딤전 3:1, 딤후 2:11, 딛 3:8), 말을 다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도 좋은 믿을 만한 말이 있다’(현대인의 성경).  말은참되니 너희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NCV).  너희가 마음에 새기고 의지할 있는 것이다’(메시지 성경).  그러므로 진술은 전적으로 신뢰할 있고, 보편적으로 받아 들어져야 한다’(J. B. Phillip’s).  마디로 너희는 말을 믿어도 된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뢰할만한 진술은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인가바울은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죄인 중에 괴수’인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말한다바울은 과거를 회고하며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인내하심을 깨닫는다바울 자신이 모든 편지를은혜라는 말로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그의 마지막 어구도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였다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은혜다( 5:2).  따라서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것은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것을 의미한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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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라는 사실(창 18:25)은 처음부터 성경 이야기의 근간이었다(창 16:5, 31:53).  하나님의 심판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딤후 4:1),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고후 5:10).  하나님께서 각사람의 행위를 따라(욥 34:10-11, 시 62:11-12, 잠 24:12, 사 59:18, 렘 17:10, 겔 24:14, 호 12:2).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실 것’(삼상 2:10)이며,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전 12:14).  이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은 가장 은밀한 것까지 숨길 수 없는 심판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공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실 것이다(창 18:25, 시 9:8, 벧전 2:23, 계 16:7).  이는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시 1:5), 의인들은 ‘여호와 앞에서 노래하게’(시 98:8) 될 것임을 의미한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정한 기약’(시 75:2) 곧 ‘여호와에게 속한 날’(렘 46:10), 다시 말해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벧후 3:7) 이미 정해 놓으셨다.  만물의 시작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끝낼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친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다(딛 2:14).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만을 위한 구원뿐만(사 45:17)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원도 포함된다(행 28:28).  따라서 새로운 창조물인 교회 안에는 국적이나 인종, 교육 정도, 사회적 지위, 부, 성, 종교, 권력의 장벽이 없어야 한다.  어떻게 이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만유시요 그 모든 것 안에 계시기(표준 새번역)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골 3:1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열이나 편견이 있을 수 없다(고후 5:17).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처럼 신약 성경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날은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롬 3:6).  ‘공의로 심판하는 날’(행 17:31.  ‘여호와의 날’(사 13:6-9), ‘주의 날’(벧후 3:10), ‘마지막 날’(요 12:48), ‘심판의 날’(마 10:15, 11:22, 12:36, 요일 4:17), ‘멸망의 날’(벧후 3:7), ‘그날’(딤후 4:8)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킨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라는 말씀처럼 그날이 더 가까워졌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고’(마 3:10),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벧전 4:7), 따라서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이시다(벧전 4:5).  이렇게 다가올 심판은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에 우주적일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설명해야 할 것이나(롬 14:12), 하나님의 세세한 조사를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시 1:5).

그런데 추가적인 발전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수행할 사람, 즉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을 선택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마 28:18), 그분을 ‘하나님이 정하셨다’(행 10:42).  모든 인간들이(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이다.  물론 그분은 ‘입법자와 재판관’이신(약 4:12) 예수 그리스도시다(요 5:22-23, 27).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를)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행 17:3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비록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는 아니지만(요 5:30),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딤후 4:1).     

심판은 복음의 한 부분이고(롬 2:16),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갈 2:5, 14, 엡 1:13), 하나님의 심판 역시 진리에 기초하여 이루어질 것이다(롬 2:2).   여기서 인간의 약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육체를 따라’ 즉 사람이 정한 기준에 의해(요 8:15), 외모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요 7:24, 벧전 4:6).  따라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만한 참된 능력이 없는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 주재’(Sovereign Lord)시다(계 6:10).  이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수 있고(롬 2:16), 또 그렇게 하실 것이며(롬 14:12),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고전 4:5) 분임을 의미한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요 8:16), ‘의롭고’(요 5:30, 계 19:11), ‘정의롭다’(롬 2:5).  왜냐하면 그분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딤후 4:8).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벧전 1:17, 행 17: 31, 롬 2:11, 벧전 2:23).  

그렇다면 심판받을 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고전 5:13),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히 10:27), ‘불의한 자’(벧전 2:9), ‘경건하지 아니한 자’(벧후 3:7, 유 14-15), 이 세상에 속한 ‘땅에 거하는 자’(계 6:10)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한 자를 심판하실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요 12:48). 

예수님의 첫째 지상 사명의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과 영생을 발견할 길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요 3:17, 8:15-16).  그런데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심판이 될 것이다.  거부당한 예수님의 말씀이 마지막 심판날에 모든 불신자들을 반드시 정죄하게 만든다(요 3:31-36, 5:22-23, 26-30,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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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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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람들의 감정을 깊이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열정적으로 논쟁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은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 컴퓨터 뒤에 숨어서 심지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인신공격적인 언쟁을 일삼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사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보이는’(잠 17:28)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더 유익을 얻을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하게 받은 은혜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놓고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롬 15:7, 엡 4:1-3).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의 한 가지 특징이 무엇인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전적인 진실성을 긍정하는 데 동의하고 그러한 긍정이 모든 교리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다시 말해 신학적으로 ‘서로 물고 뜯고 싸우지 않는다면’(갈 5:15),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더 강한 호소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요 13:35).  이 말의 의미를 알았으면 한다.    

사도 바울은 성경 두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완성에 관해 언급한다.  먼저 빌립보서 1장 6절은 확신을 주는 말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 안에서 구속이라는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때 그 일을 완수하실 것이다.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시작되었다(엡 1:13-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완성을 보장하신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살벌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바울은 선물을 받은 후 그것을 다시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히 모순인지 설명하려고 성령을 통한 이러한 체험들에 호소하고 있다.  그는 갈라디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짓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전통에 대한 종속과 맞바꾸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성령을 할례와 유대인의 음식 규례와 어떻게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던 자들이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 즉 ‘완성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 보증이 실패하는  이유는 이 보증 자체 때문인가, 아니면 이 보증을 받은 자의 실패 때문인가?  여기엔 분명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이 들어 있다.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는 것 같다.  사실 바울은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 과정의 최종 결과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롬 13:11, 살전 5:8-9),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미래시제는 아직 소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롬 5:9-10, 10:9, 13, 11:26, 고전 3:15, 5:5).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전형적인 의미에서 ‘구원받은 과정에 있는 자’다(고전 1:18, 15:2, 고후 2:15).  그런데 문제는 ‘이미’(Already) 시작된 것과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이 두 시제가 바울의 사고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시작이 완성을 보장한다는 말인가?  빌립보서 1장 6절을 읽어보면 그렇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자기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동사 시제는 바울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빌립보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날까지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읽어보면 훨씬 더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계속 믿음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질문은 구원의 과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또 다른 측면을 검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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