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하고 싶은 이야기 2025. 9. 6. 10:26

이번에는 정통신학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환상’에 대해 말해보자.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행 11:1-18).  이 환상은 사도행전 15장 16-17절 기록에 의하면 앞으로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환상은 실제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때에도 하나님은 그 일을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 본문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모스 9장 11-12절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고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기만 하면 된다.  당시 구약성경 정경이 완전히 형성되었으므로 이러한 환상이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고, 이단 시비에 걸릴 확률이 높은 신비스러운 환상을 통해 말씀하셨느냐는 것이다.  먼저 그 이유를 바울의 겪었던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엄청난 핍박을 받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고린도로 갔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환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9-10).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바울의 마음에 상기시켜 주시는데 적합한 구약성경 본문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4장 17절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를 상기시켜 주실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미 구약성경 정경이 완전히 형성되어 있어, 이러한 신비스러운 환상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날 이단 사냥꾼들이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환상을 보여주시는 편을 택하셨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고집스럽게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에 의하면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단 8:2, 행 22:17),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다(겔 1:1).  우리는 그 해답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 12:6).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잘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욥 33:14-18).  이 말씀의 의미는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성령이 사용하시는 정상적인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것을 불필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 철저하게 속아 믿지 못하는 것이다(요 8:44).  미안한 얘기지만 듣는 것이 둔하거나 분별력이 없는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다(히 5:11-14).  하지만 가르치는 목사가 입만 열면 신학적 오류가 많은 잡다한 학설을 짓어대는 개처럼 게걸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예언과 꿈과 환상이 없다고 나팔을 부는 것은 그 배후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의 교묘한 전술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마 12:38).  조금 끔찍한 말이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는 목사를 포함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것은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른다.  마치 불신자 앞에서 예정론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고’(요일 4:1), 분별해야지(고전 14:28), 말 같지 않는 신학적 주장으로 나팔을 불어대지 말아야 한다(마 7:1).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인 교리와 율법에 흠뻑 젖어 있던 독사의 새끼들인 바리새인들(마 23:33)은 이로 인해 눈이 멀어 진정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요 5:37).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신이 배운 신학적 학문에 중독(addiction)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한때 신학적 회의주의라는 주문(呪文)에 걸려 오랫동안 예언과 꿈과 환상을 믿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나의 불신앙을 정당화해 줄 어느 특정 골빈 신학을 미친 듯이 신봉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솔직히 고백하면 당시 믿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입에 게거품을 물듯 심하게 반기를 들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성령께서 얼마든지 조직신학의 범주라는 경계선을 넘어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교도소 교목인 Charles Carrin이 흉악하고 살벌한 죄수에게 비록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겸손히 무릎 꿇고 안수를 받은 것처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겔 37:1-10)와 같이 메마른 교리만을 붙들고 있는 Calvinism 추종자들에게도,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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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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