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했을 당시 이미 고린도 교회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행 18:1-17), 교회 신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확실한 성경의 원칙에 입각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활용이었지만(고전 12:3-7), 정작 이들은 성령께서 교회를 연합하기 위해 주신 은사를 가지고(고전 1:6),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하는데(엡 2:22),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나누는 일에 사용했습니다(고전 1:13).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고전 12:7), 은사의 목적은 예배 안에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고전 14:26), 덕을 세우며 서로 격려하는 것인데(고전 14:3-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문제는 성령께서 허락해 주신 은사(고전 12:11)를 공동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지 않았고(고전 13:1-3), 오직 자신만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는 은사들에 대해서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구했으며(고전 12:29-31), 은사를 받은 교회 지도자들 역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듯 예배를 인도했을 뿐 로마 교회처럼 그 누구도 조용하게 섬기는 일은 원치 않았습니다(롬 12:7).  즉 이들은 은사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잘못 사용하여 교회 내에 갈등과 혼동 속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고(고전 3:3), 그 결과 감동적인 연설가인 아볼로파와 사람을 낚는 어부 출신인 베드로파, 그리고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파, 심지어 자신들만이 거룩하고 오직 예수만을 섬긴다는 그리스도파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고전 1:10-13).


솔직히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싸움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교회 안에서 ‘은사주의파’, ‘개혁주의파’, ‘경건주의파’, ‘복음주의파’, ‘오순절주의파’, ‘의식주의파’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천년 전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교회연합을 위해 은사를 허락해 주신 것이고(고전 12:7), 결코 교회를 나누기 위해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고전 12:12-2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알고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지적하고 있는데(고전 12:31), 먼저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은사들을 놓고 라이벌 의식이나 질투 혹은 교만 따위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그다음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14장은 사랑의 실행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은사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3:1-3).  이런 의미에서 J. I. Packer“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그 어떤 은사들도 사랑에 기초하거나 사랑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추구하고 행사되지 않는다면 그 은사는 교회 안에서 소리만 요란할 뿐(고전 13: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은사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닮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엡 3:14-19).


사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똑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엡 2:20-22)데는 은사들에 대한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성경을 읽고 권면하며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하며(딤전 4:13-16),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동일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고전 12:18-21).  쉽게 말하면 교회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나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혹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을 뿐 아니라 명백한 사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12:27).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활용하라고 강권하고 있으며(고전 14:1),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획을 올바르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에베소 신자들을 가르친 것처럼(엡 4:11-16),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은사 활용이 절대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14:39).  따라서 교회 안에 이기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 사람이 은사별로 섬기는 것이고(롬 12:4-8), 협력해야 할 메시지를 몸에 비유한 것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몸이 완전하게 서로 조화되고 각 지체가 그 기능대로 다른 지체를 도움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사랑으로 그 몸이 세워지는 것입니다(엡 4:16).  즉 은사의 일차적 목적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나가는 것처럼 자기 유익이 아닌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고전 12:7, 엡 4:7-12).


여기서 성령의 은사들(고전 12:8-10, 29-30, 롬 12:6-8, 엡 4:11)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Yves Congar“성령론 없이는 기독론은 없고 기독론 없이는 성령론은 없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자가 성부의 뜻을 따라(요 7:16-18),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요 8:50), 초점을 두었던 것처럼 성령도 예수의 영으로(행 16:7), 성자의 말씀과 행위를 생각나게 하고(요 14:26), 성자의 영광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요 16:13-14).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를 통해 어떤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면 그 사건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내야 하고,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처럼(행 3:7),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행 3:12).  그러므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의 목적은 동일한 한 성령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이고(고전 12:11),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고전 12:7), 성령의 은사로 인해 교회 안에 계층이 생기거나 분쟁이나 분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를 구실삼아 은사론 전체를 부정함으로 성령의 은사들의 다양성을 의도적으로 적대시하거나 Lloyd Jones, R. T. Kendall, Wayne Grudem, D. A. Carson, Jack Deere, Vern Poythress, Gordon Fee, Sam Storms, Michael Green 등등 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염병처럼 멀리해야 할 마귀의 능력”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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