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보통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지 교회라면 다 신앙이 좋고 순수하며 그것 자체가 바로 천국의 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개인의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은 어렵고 사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교회 전체가 신앙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다 똑같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착각하여 그릇된 길인 줄 모르고 따라가게 되는데 마치 갈라디아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 있습니다(갈 3:1-3).

 

신앙생활하기에는 에베소 교회가 서머나 교회보다 월등하게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인 한명 한명이 신앙이 좋았고 그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자들이며 쉽게 아무 것이나 호락호락 받아들이는 가벼운 교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떠합니까?  모두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능력과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병든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섬기고 인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고 이미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첫 사랑이 식어버린 종교와 제도에 얽매인 교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촛대를 그 곳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5).

 

반면에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교회인 것 같습니다.  이 교회는 아직도 한창 전투중인 교회였는데 교인들 간의 분쟁이 아니라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너무나 심해서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교회를 칭찬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투하는 살아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기에 평안한 교회보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으로 싸우는 이 교회가 더 부요한 교회로 보신 것입니다.  비록 신자 한 명 한 명이 어려워 보이지만 교회에는 말씀이 살아있고 기도가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그래도 주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한국과 한인교회와 가장 비슷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바로 세속주의로 물든 버가모 교회입니다.

 

◈ 버가모 지역은 황제숭배가 일 년 내내 행해지는 곳으로 로마황제 “가이사”를 신격화 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이라고 부르도록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마치 북한이 죽은 김일성의 동상을 세워 놓고 절하며 섬기듯이 말입니다.  본문에 ‘사단의 위’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13), 이 말은 버가모 지역은 사단이 권세를 휘두르는 총본부가 있는 곳으로 쉬운 말로 말한다면 영적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지역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항하는 강한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로마황제가 주님이다”와 “그리스도가 주님이다”라는 주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숭배가 서쪽 센터라면 버가모는 황제숭배의 동쪽 센터에 버가모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충성스럽게 잘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계속 들어가자 결국 예수님을 “주”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황제숭배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곧 바로 영적전쟁이 일어났습니다(엡 6:10-13).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과의 정면충돌이 생긴 것입니다(고후 10:4).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이고(마 10:34-36), 마치 에베소 교회에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서 그들이 섬겼던 미신적인 것들을 다 불태워 버린 것처럼(행 19장), 버가모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가장 먼저 거부한 것이 로마 황제숭배였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것입니다(계 2:13).

 

본문에 보면 ‘네가 어디서 사는 것을 아노니’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3).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이 사는 곳은 로마 황제숭배를 피할 수 없는 곳인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버가모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칭찬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탄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이렇게 주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고 그분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디바’라는 충성된 증인이 죽임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여기서 ‘안디바’는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신자들 중에서 우상숭배의 희생자가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목숨을 내놓고 순교자를 배출할 정도로 신앙을 지켰던 믿음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은 칭찬을 하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 교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계 2:14).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얼마나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문제에 대해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가 우상숭배에 대한 박해를 잘 견디어 내어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닌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사탄의 유혹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버가모 교회가 책망 받은 일에 대해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계 2:14).  이것은 버가모 교회 안에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부 교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계 2:13).  그런데도 교회 전체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교훈에 대해서 책망을 하거나 권면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냥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 소문이 날까봐 교회 전체가 쉬쉬하며 꿀 먹은 벙어리 같이 묵인한 것처럼 말입니다(고전 5장).  만약에 오늘날도 이러한 죄악들을 묵인하고 용납한다면 교회로서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치리”가 있어야 합니다(마 18:15-17).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조심하고 나중에 주님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딤전 5:20).  물론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고후 2:6-8).

 

본문에 나오는 발람은 히브리인이 아닌 거짓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을 부추겼던 사람으로(민 22-25장), 돈 때문에 발락에게 자신의 예언을 팔아먹은 대표적인 파렴치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16).  히브리인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영감이 임한 선지자이니까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사십년 간 훈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있었다면 그가 바로 발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심한 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끼쳤는가 하면 그의 계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멸망당할 뻔했고 결국 염병이 퍼졌는데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열정이 하나님의 진노를 겨우 막았던 것입니다(민 25:7-9).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가나안의 많은 왕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모압 왕의 부름을 받고 발람은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하는데 돈에 눈이 어두워진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어겨가며 발락에게 가고 맙니다.  그는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타고 있던 나귀는 그 사자를 보고 두려워 앞으로 가지 않으려 하기에 발람이 채찍으로 나귀를 마구 때리자 나귀가 “왜 자꾸 때리느냐?”고 말을 하며 발람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돈에 미친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모압 왕에게로 갔고 그가 시키는 대로 제단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저주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그 입을 틀어막고 저주 대신에 축복이 나오게 합니다.  그래도 돈에 팔린 거짓 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이 짓을 계속 시도합니다.  결국 세 번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니까 나중에 발락에게 한 가지 계책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여자들과 간음을 하도록 하는 무서운 계략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염병이 돌아서 이스라엘 자손 이만 사천 명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발람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에 대한 욕심에 팔려 결국 이스라엘 앞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올무를 놓아서 그들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민 22-25장).

 

이러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가 버가모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와 간음을 즐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영적간음이라는 것입니다(약 4:4).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만큼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마 10:37).  만약에 주님보다 더 관심을 끌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심이고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되 특히 우상숭배인 탐심을 멀리해야 합니다(골 3:5-6).

 

◈ 다른 하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계 2:15).  이들은 무율법주의자들로서 자신들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지만 방종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이들은 “지금은 율법이 필요 없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고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원파 교리와 유사하고 간단하게 말한다면 “그노시스 사상”을 가진 이단입니다.  그노시스 사상이란 사람의 육체는 근본적으로 죄 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이거와 상관없이 영혼은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사상으로 율법폐기론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만 깨끗하면 되고 육체는 더러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고후 7:1).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엡 2:8),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성경은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요 14:21).  이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눅 6:46).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에서 아름다운 열매도 맺혀야 하는데(마 4:7-9),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요 15:8).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마 7:19-21).  지금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방종한 생활로 세상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오늘날 세상풍속을 따라가는 세속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실 마귀가 버가모 교회를 심하게 핍박할 때는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지켰고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환난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귀가 전술을 바꾸어서 세상 것으로 유혹을 할 때는 쉽게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즉 내부로부터 지속적으로 파고 들어오는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정욕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쾌락 그리고 안락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마귀가 속여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다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마귀가 뱀처럼 좌리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겉만 교회이지 속은 이미 곪을 때로 곪아 터진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게 무슨 경고를 하십니까?(계 2:16).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잘못된 삶의 방식을 완전히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면서 돌이킬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뜨거운 열정은 없지만 그래도 쟁쟁한 목회자들인 바울을 비롯해서 성경학자 아볼로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디모데, 사도요한이 목회를 해서 그런지 이단 니골라당의 교훈을 철저하게 대적하여 물리쳤고 반면에 버가모 교회는 순교의 열정과 뜨거움은 있었지만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지 않아 이단적인 교리가 틈을 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약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뜨거움으로 균형 잡히게 잘 무장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지금 주님이 버가모 교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는데 그분은 양날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찾아오셨습니다(계 2:12).  그리고 주님은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16).  그렇다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할 정도의 교회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칼을 들고 나타나셨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버가모 교회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그들’이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이 교회를 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들, 즉 성경에서 벗어난 것들을 진리의 검으로 대수술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발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게도 “돈, 돈”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민 31:8).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물론 돈을 사랑하면 칼에 찔려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딤전 6:10), 발람의 교훈인 이단적인 가르침을 따르거나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변질시켜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지도자와 또 그것을 배우는 교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계 19:15).  그러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심판의 수술 대상자”가 되지 않으려면 바른 진리위에 서야 합니다(갈 1:8).  가장 미련한 것은 나귀가 소리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교인이나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의 입에서 경고의 소리가 들릴 때 빨리 돌이키지 않는다면 시퍼런 식칼을 들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인데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계 2:17).  반면에 주님은 이렇게 부패하고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는 신자들이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본문에 이기는 자에게 주는 두 가지 난해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하나는 ‘감추었던 만나’입니다(계 2:17).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배워서 우상의 제물을 먹듯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신령한 떡인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요 6:47-51).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지성소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는 것으로 영원한 천국인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히 4:16).

 

다른 하나는 “흰 돌”인데(계 2:17), 이 흰 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성경에서 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벧전 2:4-8), 본문에 흰 돌은 고대 법정에서 무죄를 상징하는 돌이나 아니면 공식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을 의미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물론 본문은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무튼 흰 돌은 어느 집에 들어올 때 주는 패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패스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패스입니다(엡 3:12).  다시 말해서 메시야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흰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새 이름이 새겨진 돌이라고 말하는데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일까요 아니면 받는 자의 이름일까요?  그것은 알 수가 없고 단지 이 돌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와 흰 돌”이란 세상풍속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에게 천국입성을 허락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계 21:27).

 

오늘날 마귀는 재래식 공격무기인 직접적으로 무식하게 핍박을 하지 않고 지금은 전략을 바꾸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유혹을 합니다.  외부적으로 강하게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오며 세상에 있는 것들인 풍요로운 삶을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즉 생활이 윤택해지고 신앙생활 하되 어려움이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풀리면 기도 안 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으면 주님을 찾으면서 열심히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해결되고 생활이 안정이 되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데 마귀는 이것을 귀신들의 두목답게(계 13:9),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가능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도록 유혹의 손길을 계속 뻗치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마귀는 온갖 궤계를 다 사용합니다(벧전 5:8, 살전 5:3).

 

◈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와 흰 돌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여기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은 싸움에서 지면 만나와 흰 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히 12:4).  지금 신자들의 싸움은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으로(엡 6:10-13), 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핍박과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세상 유혹을 동시에 이겨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싸움을 동시에 이기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요 14:16-17).  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영적전쟁에 승리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속주의 신앙에 물들지 않기를 원한다면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눅 24:4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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