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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2.22 성령 받은 증거 2
  2. 2026.02.15 성령의 불 1
  3. 2026.02.07 열매가 없는 은사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해줄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받지 않고 예수 믿는 제자들이 나오기 때문이다(행 19장).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롬 8:9, 16, 고전 12:3, 13, 엡 1:13).  

사실 에베소 사람들의 보여 준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절).  그런데 세례요한은 성령의 오심에 대해 분명하게 전했기 때문이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2-33).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지만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교회 탄생과 존속을 위한 성령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요한의 물세례였다(행 19:1-4절).  어쩌면 이들이 바로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행 18:25).  

그러면 요한의 세례는 무엇인가?  이것은 죄로부터 회개한 징표(마 3:2, 6, 8, 11, 막 1:4-5, 눅 3:8) 였을 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의 징표는 아니었다.    즉, 요한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인 사역이었다.  반면에 예수의 세례는 베드로의 선포에서 강조한 것처럼 성령의 세례(행 2:38), 즉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바울의 말을 듣고 에베소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행 19:4-7).  그렇다면 성령 받은 증거를 알 수 있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4:16).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 오시면(요 15:26),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 16:8).  따라서 성령 받은 첫 번째 증거는 먼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어두움 속에서는 바른 사물을 볼 수 없듯이,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인 줄을 전혀 모르고 방탕하며 살아간다(롬 3:11-12).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끌림을 받고(요 6:44), 빛 되신 그분의 부르심을 통해(롬 8:30), 예수를 믿고 자신이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고 애통해한다면(마 5:4), 그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갈 1:14),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그분 앞에 죄인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딤전 1:13).  그러나 다메섹에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난 후(행 9:3, 22:11, 26:13),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처럼(딤전 1:15), 성령은 죄로 병든 인간을 그리스도 앞에 세울 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엡 2:1)이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사실을 깨닫게 된다(출 3:1-5, 사 6:1-5, 눅 5:8).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세리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Martin Luther가 말한 것처럼 날마다(마 6:12), 용서받은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눅 8:18:13).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롬 3:9-18).

성령 받은 두 번째 증거는 ‘의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요 16:8).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에 대해 지식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으로는 모를 수밖에 없다(요 5:39).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마 11:27)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원의 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요 1:29), 그분에  대해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성령 받은 후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설교한 내용을 보면 예수의 탄생(마 1:21), 대속의 죽음(히 9:12), 부활(막 16:6), 승천(행 1:11), 재림(마 25:31)과 심판(계 21:11-15)에 대해 확실히 알고 증거 했다(행 2:14-36).  사실 베드로는 세상적으로 배운 것은 없지만(행 4:13), 예수에 대해서만큼은 ‘명약관화’하게 된 것처럼 성령을 받으면 세상지식에는 무지할지라도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이 생긴다(빌 3:8).  다시 말해 성령을 받지 못하면 니고데모처럼 세상 교육은 많이 받아 해박할지라도 예수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요 3:10).  

더 나아가 성령을 받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된다.  바울은 성령 받고 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도 했지만 (딤전 1:15), 다른 한편으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확신을 가지기도 했다(롬 8:31-39).   따라서 성령을 받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고(고후 13:5), 성령을 받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은 내 죄에 대해 ‘검사’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변호인’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롬 8:14-16).

성령 받은 마지막 증거는 ‘심판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요 16:8).  요한복음에 보면 사탄을 세상 임금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14:30), 여기서 사탄의 역사는 두 가지로 외부적인 역사와 내부적인 역사로 나타난다.  

먼저 성령이 오시면 사탄은 외부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주님은 성령의 사역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의 치열한 논쟁에서 사탄을 집주인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2:24_29).  다시 말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고(막 2:17), 그 죄인이 사탄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려면 먼저 집주인이 되는 사탄을 결박해야 한다(요일 3:8).  이러한 외부적인 사탄의. 역사를 성령이 오심으로 심판을 받게 하신 것이다(눅 10:17-20).  

내부적인 심판은 성령 받기 전의 내 마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엡 2:2),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면서 일평생 종노릇하는 가운데 살아간다(히 2:14-15).  하지만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행 2:38), 사탄이 쫓겨가고 두려움과 불안했던 마음이 사라지며, 평안(요 14:27)과 기쁨이 넘쳐나게 된다(요 16:22).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성령의 은사(고전 12장)와 상관없이 성령을 받으면 가장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고(눅 18:13-14),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며(행 4:12), 내 마음을 다스리는 분이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이미 그는 성령을 받은 것이다(갈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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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불

난해한 문제 2026. 2. 15. 14:48

거의 반세기가 지난 이야기이지만 그때에는 너무 무지했던 것 같았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출석하던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들 통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신앙의 초보인 나에게 예수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나팔을 불어댔다.  

사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생활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좋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아니,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성령을 받아야만 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얼마 후 다니던 교회에서 어느 성령이 충만한 사역자를 초청하여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광고를 듣게 되었다.  사경회 같은 말씀 집회가 먼저 끝나고 난 후 초청한 강사를 통해 성령 받을 사람들은 교회 목사관으로 모이라는 광고가 있었다.  나는 아는 분과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서 초초한 마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 기다리게 되었다.  

지금 오랜 세월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세상에나! 장로와 안수집사들이 있었고, 성경에도 없는 직분을 가진 서리 집사와 권사들도 있었다.  아무튼 앞에 서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씩 목사관에 들어가 기도를 받고 뒷문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지, 또 성령을 받을 때 어떠한 느낌이나 일(현상)이 일어나는지 초신자인 나로서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와서 안내하는 집사를 따라 목사관으로 들어가 그 사역자를 통해 안수를 받게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두 눈을 지그시 짓누르는 것이었다.  신앙이 초보인 나로서는 남들도 다 그렇게 받는 줄만을 알았다.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속된 말로 ‘눈깔 찌르는 안수’가 성경에 나오는 정상적인 안수인줄만 알았다.  

한 번도 안수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 시간이 호기심과 긴장감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더 희한한 것은 내가 선 상태가 아닌 드러누운 상태에서 안수를 받았는데, 눈에 티슈 한 장을 덮고 손가락으로 처음에는 서서히 나중에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더니 세게 눌러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눈에 번쩍이는 빛이 보였다.  순진한 나는 눈이 너무 아프지만 ‘빛이 보입니다’라고 말하자, 그 사역자가 그것이 ‘성령의 불’이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받기 원했던 성령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안수기도를 해주신 그 강사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 당시 눈이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성령을 받았다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거울에 비추어진 내 눈을 보니 많이 충혈되어 있었고 손으로 살짝 만지기만 해도 무척이나 아팠다.  

다음날 아침 호기심이 많은 나는 거울 앞에 서서 그 사역자가 하던 대로 내 눈을 손가락으로 처음에 지그시 나중에는 강하게 눌러보았다.   그러자 그 놀라운 빛, 그 사이비 목사가 말한 가짜 성령의 불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더 신기한 것은 이상하게 누르면 누를수록 눈은 아팠지만 그 빛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날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먼저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은 방언을 해야 만이 성령 받은 것으로 주장하면서 오순절날 성령이 임할 때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을 성경적으로 제시한다(행 2:4).  또한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뜻을 가진 Quaker 교도들처럼 ‘몸에 진동’을 느끼거나 떠는 사람, 혹은 기도를 받고 쓰러져 ‘성령 안에 안식’ 하는 것을 통해 성령을 받으면 몸에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겔 1:28, 단 10:7-10, 계 1:17).

그리고  ‘환상’을 봐야 한다고 나팔을 불어대는 사람은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환상을 보지 못했지만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에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본 것을 내세우기도 한다(행 10:9-16).  더 나아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행 8:14-17)과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내세우면서(행 19:6), 만약 누군가 ‘불의 종’, 혹은 ‘능력의 종’으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은 사람은 이미 그를 통해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성령을 받은 절대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불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외부적으로 보이는 역사가 있어야만 성령이 역사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왕상 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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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다(롬 12:3).  그런데 간혹 그리스도인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주장한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구절은 생각하면(요일 4:19),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사라고 볼 수 있다(약 1:17).  

하지만 Peter Wagner가 말하는 것처럼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에게는 주고 또 다른 지체에게 주지 않는 그런 의미의 은사는 아니다.  만약 ‘사랑이 은사’라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6-8절, 고린도전서 12장 8-10절, 29-30절,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에 이것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다음 바로 뒤이어 1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비교적 길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더욱 은사를 사모하라 말씀에 이어 13장에사랑 나오기 때문에 사랑을 은사 것으로 생각하거나 해석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강조한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면서 ‘더 큰’(meijon)이란 동일한 단어를 14장 5절에서 사용하고 있다.  즉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크고 더 유익한 은사’라는 뜻이다.  따라서 ‘더 크다’라는 개념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제한 규정에 지배받는 개념으로 바울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은사의 목적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도록 권면한 다음 하반절에서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더 큰 은사’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제일 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D. A. Carson은 『Showing the Sprit』에서 이런 주장을 펼친다.  “최고의 은사들을 추구하다가 보면 성령의 최고의 열매인 사랑을 제쳐놓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한 것이다. 사랑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한 은사가 아니라 그 중요성 면에서 이런저런 카리스마를 전적으로 앞서는 총괄적으로 감싸는 총체적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의도는 은사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보면 모든 신자의 삶을 특징지어주게 하는 총체적인 생활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제일 좋은 길로 제시하는 데 있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에 의하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미 이상적 혼합 은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사를 발견하여 사용하는 데 있어 은사에 충실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무질서했던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혼란스러운 교회 중에 하나였다(고전 3:3).  이들의 문제는 은사가 아닌 열매에 있었다.  즉 열매가 없는 은사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J. I. Packer는 이 문제를 가지고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고린도교인들이 인식해야 했던 것 그리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John Owen이 말한 대로 은혜 없는 은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면서도 참된 ‘신지식’이 가져오는 성령이 주시는 내면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사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후자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면서 전자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은사들을 가지고도 은혜는 갖지 못할 수 있는데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와 같이 은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한 은혜는 전혀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조금 더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은사에 관한 구절과 열매에 관한 구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은 물론이고, 로마서 12장 6-8절의 은사 목록 다음 구절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하고 있다(롬 12:9-10).  에베소서 4장의 경우에도 16절에서 은사의 목록이 마쳐지고 그다음 구절부터 열매의 대목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2절에 가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4장 9절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말씀 바로 앞에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라고 강조한다.    

Charles Stanley 역시 고린도전서를 주해하면서 “은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있어 은사는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1-3).  만약 교회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은사는 공기가 빠진 타이어와 같아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불행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귀한 영적은사를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은사를 사용하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많다.  이런 문제가 있을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15:16).  이 말의 의미는 모든 헌신은 그 열매를 통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마 7:19).  이것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역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야 함을 시사해 준다(벧후 1:8).  만약 어떤 사역자의 삶에 열매가 없다면(갈 5:22-23),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은사는 무언가 잘못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적은사들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논한 13장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 주어졌지만(엡 4:12),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고전 13:2).  즉 사랑 없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은사와 사랑을 사이에 두고 선택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함께 속해져 있기 때문이다(약 1:17).  이처럼 사랑이 은사를 행하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은사보다 더 귀한 ‘제일 좋은 길’로 바울은 제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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