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의 뜻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복음 아래 완전히 패배하여 결박당하고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승리하여 천년동안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계 20:4).  문제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하다.  먼저 천년 왕국이 도래할 시점이 언제인지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가 있고, 또한 천년이란 기간을 실제 역사적 기간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 기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들이 있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천년왕국에 대해 ‘무천년설’, ‘후천년설’, ‘전천년설’(세대주의적/역사적)로 나누어진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이 질문에 대해 어느 하나를 단정하여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모든 입장들은 다 나름대로 성경에서 출발한 견해들이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상징적인 것인 동시에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얼마만큼 상징적으로 혹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그 견해들이 다양해질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느 한 입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다른 입장을 취한다 해도 그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교수에게 천년왕국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어본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다른 어떤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교수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을 ‘무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어떤 신학적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듯 양측 신학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그들 각자가 발견한 교리가 성경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전혀 갖지 않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보낸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그는 분명 그곳에서 공부를 하면서 무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지게 된다.  만약 동일한 사람이 댈러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면 거의 예외 없이 전천년주의자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과 신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법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무엇보다도 신학적 전통과 교수들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것과 믿는 것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금 더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 그 자체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도 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구약의 시편 2장 7절과 이사야 42장 1절 두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는 마태복음 3장 16-17절에 나오는 구절을 가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왕의 대관식’(슥 9:9), 혹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즉위식’,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임직 하신다는 뜻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승인식으로 해석한다.  즉 하늘 보좌에서 들려온 두 구절의 소리는 예수님의 신분을 고난당하고 죽을 종이자 영원히 다스리실 왕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이러한 해석은 신학교 교수로부터 배운 ‘신학’ 아니면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왕의 대관식’, 혹은 ‘메시아 즉위식’이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용어 자체가 없다고 해서 그 개념이나 요소가 없는 것처럼 막무가내로 우겨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얼마든지 신학적 용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많은 용어와 표현들이 신학적 개념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유용하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성육신,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 등의 용어들이 성경에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교회사를 통하여 발전된 확증들이다.  이런 신학적 용어들은 성경에 분명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가치, 실천을 바르게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유다지파(창 49:10),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눅 1:32),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미 5:2),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사 9:6), 영원한 왕(계 11:15), 구원의 왕인 것을 성경은 증거 한다(슥 9:9).  하지만 요단강에서 물세례 받는 것을 가지고(막 1:9-11) 주야장천 ‘왕의 대관식’이라고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성경에 근접한 해석을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눅 1:35),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은 신적속성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셨다(빌 2:6-8).  더 나아가 지상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요 3:34)과 능력의 기름부음을 받았다(행 10:38).  다시 말해 성경에 ‘왕의 대관식’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과 직접 관련해서 ‘기름부으심’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사 61:1, 단 9:24-26, 눅 4:18, 행 4:27, 10:38, 히 1:9), 더 성경적이고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각 사람이 가진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본문에 충실하게 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대해 신학 교수로부터 왕의 대관식으로 배웠던 사람은 장로의 유전이(마 15:3)나 안식일의 규정을 준수하는 바리새인처럼(막 2:24), 이 ‘전통적인 틀’을 깨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 가지 견해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문제는 다른 누군가 또 다른 견해를 내놓으면 “비성경적이고 왜곡된 성경해석이다”라고 비판해 버리는 좋지 못한 삐딱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신학교에서 배운 전통적인 해석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살벌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성경에 자기 생각을 과도하게 부과하여 본문에도 없는 주관주의적인 ‘자기 해석’을 하는지 아니면 성경대로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가 습득한 관점에 대해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보통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실재에 대한 다른 관점을 비논리적이고 잘못된 것으로 보거나 판단할 때가 많고, 오직 자기 것만이 논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확신을 가진다.  그래서 어떠한 신학적 입장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이 배운 신학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분다.  자기가 해석한 성경, 즉 교수로부터 배웠던 방법만이 가장 올바른 해석으로 굳세게 믿기 때문에, 이런 교조적 태도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킨다.  여기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다른 견해를 가질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절대로 범죄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R. C. Sprul은 말을 들어 보자.  “만일 우리가 성경을 왜곡시키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주관주의를 피해야 한다. 주관주의는 오류와 왜곡을 낳을 뿐 아니라 교만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내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해서 내가 믿는 것을 믿거나, 또는 그것이 나의 견해라고 해서 나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대표적인 교만의 형태다.  나의 견해가 객관적인 분석과 증명의 시험을 견디지 못할 경우에는 겸손하게 그 견해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주관주의적인 사람은 객관적인 근거나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교만을 부린다. 

D. A. Carson 역시 이런 문제에 대해 『Exegetical Fallaci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전통적인 해석을 성경 본문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읽기 쉽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전통적인 해석에다 성경의 권위를 이전시키고 그 전통적인 해석에 그릇되고 맹목적일 정도로 확실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전통은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재형성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 어딘가에 표류하게 될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비평적인 자세가 없이 성경을 연구한다면 분명 더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Robert K. Johnston의 글을 인용한다.  “복음주의자들이 한결 같이 성경을 규범으로 주장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많은 주요 이슈에 대해 서로 모순된 신학적인 공식들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현재 이해하고 있는 신학적인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이 권위 있는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같은 복음주의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도 전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멸적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성경이 실제로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해 많은 이견들과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다른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신학과 신앙 혹은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배운 바와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배워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강하게 주장하고 싶거나 아니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 분야들, 즉 성경의 여러 난해한 구절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욥 11:7-9).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을(딤후 3:16-17, 벧후 1:20-21), 죄로 인해 어두움과 무지함 속(마 22:29)에 허덕이는 불안전한 인간의 해석(행 9-16)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눅 24:16, 25).

결국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말씀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사 55:8-9).  즉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성경에 관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같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신학적 논쟁을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학 논쟁을 일삼는 자들은 개혁신학의 원조(元祖) Calvin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논쟁과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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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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