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C. Sproul삼위일체는 신비다.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격위에 있어서는 셋이라는 말을 기독교 교리의 많은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신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을 들라고 하면 바로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할 것이고, 이 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하는 독특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습관적으로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기도 하고, 예배 끝에 축도문 속에서 삼위의 공식을 듣기도 하지만(고후 13:13), 막상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거나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변증하라고 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신자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성서용어가 아닐뿐더러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셋이 하나가 되거나 하나가 셋이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구절들은 없지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단어는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셋의 연합”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세 분이면서도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를 가리키는데 사용하는데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사색에 빠지지 않고서도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1:26), 그리고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와( 3:22), 바벨탑을 쌓을 때( 11:7), 사용된 ‘우리’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우리’라는( 3:22), 복수를 사용한 일에 대해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지만 교부들과 초기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데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 본체상 한 분이시나( 6:4, 딤전 1:17), 존재 양식상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28:19), “인간 창조”라는 대주제를 놓고 삼위 상호간에 공동 상의 하신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 구절들에 대해 몇 분이었는가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이 교리에 접근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한 분 이상이 관여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은 구약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신 것 외에( 6:8), 하나님 안에 하나 이상의 인격이 있음을 나타낸 표현들, 즉 한 위를 ‘하나님’ 혹은 ‘주’라고 부르면서 역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다른 위와 구분한 구절들이( 110:1, 45:6-7, 48:16, 61:1, 63:7-11, 1:7, 3:1-2), 신약에 비해서는 희미하지만 구약에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된 ‘여호와의 천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성자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것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원문에는 ‘사자’라고 기록되었고 13절에서는 그 사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자는 곧 하나님이신데 그 사자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2:11-15, 18:1-19, 3:2-6, 22:35-38, 5:13-15, 2:1-2, 6:11-14, 3:24-25, 3:1).  물론 구약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단순히 창조된 천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19:1, 20:16, 왕상 13:18, 12:4, 2:3), 적어도 위에 열거된 구절에서 주의 특별한 천사(사자)는 완전히 신이신 독립된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인격화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대한 묘사와( 3:19, 8:1-31, 33:4-6, 107:20, 119:89),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데( 6:3, 9:20, 51:11, 139:7, 40:13), 이렇게 구약 성경에는 추리적인 해석을 하지 않아도 삼위일체론을 뒷받침 해주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복수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으로 인해 신약은 구약성경에 비해 훨씬 충분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증거하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2:6-8), 많은 사람들이 모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1:11), 성자는 물세례를 받으시고( 3:21), 성령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10:38),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을 통해( 3:16-17),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동시에 볼 수 있고, 전승에 의하면 아리우스가 삼위일체론을 부인할 때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마태복음 2819절에 나타난 세례 분부의 표현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에게 친숙한 제도인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명칭은 성부와 성자가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성령도 다른 두 위와 똑같은 차원에서 똑같이 표현되었기에 성령 또한 한 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동등된 위치에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3:13).

 

만약 신약의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주’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음을 인식한다면 고린도전서 124-6절에도 삼위일체를 분명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에베소서 44-6절과 베드로전서 12, 그리고 유다서 20-21절에서는 세 인격체가 따로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에베소서 l장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3-5), 성자 하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7), 성령 하나님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인 치시는 것을(13-14),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enjamin B. Warfield는 『Biblical Doctrines』에서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를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환상이 아니고 전체의 증거이며 또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셋인 동시에 하나” 즉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동시에 세 신격이 존재한다는 교리는 불신자들과 이단들에게는 하나의 모순으로 매도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로 함께 존재하시며 함께 활동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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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렘 31:33), 행복과 미래를 보장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특권과 권리만을 자랑하고 주장하며(마 3:9, 요 8:33), 하나님의 자녀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언약적 의무 조항들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았습니다(렘 22:9).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 백성으로서 자격 기준이 있는지를 알려 주고자 건물의 견실성을 측정하는 도구인 다림줄을 아모스에게 보여주시는데 이 환상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말씀의 잣대인 다림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있으면 전부 부수어 버린다는 무서운 심판을 보여줍니다(암 7:7-9).  여기서 나오는 다림줄이 오늘날에 석공들이 담을 곧게 수직으로 쌓아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것처럼 기독교와 다른 신앙, 즉 이단/사이비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재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는데 그 많은 성경 구절 가운데 바른 기독교 핵심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을 찾으라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것과(고전 15: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요일 4:2).

 

사실 성령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 하는 것이고(요 15:26),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요 16:13-14), 예수님의 인격이 곧 진리와 거짓을 구분 짓는 시금석이 되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고전 12:3), 사도 요한 역시 동일한 주장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던 이유는 그 당시 그것이 영지주의 이단의 대표적인 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요일 4:1-6).  그러나 이단/사이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즉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벧후 1:17), 육체를 입고 오신 인간이시고(요일 4:3),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요 2:22), 하늘에 올라가셨다가(행 1:11), 다시 오실 것을 철저히 부정하는데(마 26:64),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즉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자(요 1:1),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눅 2:21), 부인하는 것을 보면 멸망의 길을 서슴없이 선택하는 자들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갈 1:8, 벧후 2:3. 3:16).  따라서 이단들이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성경 말씀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말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일 4:6).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들은 골로새서 1장15절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의 책 『You Can Live Forever in Paradise on Earth』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유일한 자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은 『아다나시우스 신조』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도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분의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라는(신 6:4), 성부와(시 90:2), 성자의(요 1:2), 동일한 본질에 대해 철저히 부정합니다.  또한 일부다처주의를 옹호하는 “몰몬교” 역시 한 선지자(조셉 스미스 2세)가 새로운 성서 『몰몬경』을 썼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이것 외에 『교리와 성약』, 『값비싼 진주』와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을 포함해서 이 네 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권위가 있고 영감을 일으키는 “교회의 표준적인 경전”이라고 주장하지만(몰몬교 신조 8장),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경 외에 그 어떤 것도 포함시킬 수가 없고(계 22:18-19),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이단적 주장을 단호히 배격합니다(요일 1:10-11).  그 외 '통일교', '뉴에이지', '유일신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등 수없이 많은 외국산 이단들이 오늘날 기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 못지않게 한국에도 수많은 이단/사이비들이 기생충같이 퍼져 나가는데 대표적인 것들만 찾아본다면 먼저 애천교회의 창시자이며 통일교 신도였던 정명석(JMS)은 통일교 원리강론을 표절하여 『30개론』이란 유사교리를 만들어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만 바른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가족 관계를 대입시켜 아버지가 성부, 어머니가 성신, 아들이 성자로서 성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적 수수관계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 자신도 색욕을 일삼아 여성문제가 복잡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더 황당한 집단은 '한농북구회'의 박명호로 그는 월간지 『새벽이슬』에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이천년 전 예수를 낳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인데 해괴망측한 것은 '창기십자가' 라는 교리를 만들어서 자신이 색욕의 함정에 대신 들어가 창녀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이단적 사상을 가르치며 『십계천국』4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술집 창녀를 끼고 술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으라…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불행한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신천지', '영생교', '구원파', '베뢰아 귀신론', '하나님의 교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한국산 이단들이 기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많은 이단들에게 있어 그 핵심적인 문제는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인데, 이들은 교주를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믿으면서 교주가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믿고 또한 그것을 통해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이들은 지구 종말을 강조하면서 얼마 남지 않는 날을 준비하기 위해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처럼 광신적인 종교적 의식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단/사이비들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이런 이단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바른 신앙과 신학이 절실히 필요하고 위에 열거한 이단들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실히 부정하거나 반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면 분명 그들을 이단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아닌 정통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 즉 눈에 거슬리게 보이는 어떤 사역을 통해 이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선언하기 전에 “그것이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독단적인 주장이 아닌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D.A 카슨의 말을 인용한다면 어떠한 현상을 분별하거나 본문의 뜻을 해석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집어넣어서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신앙만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신실한 다른 형제의 신앙을 이단시하거나 비성경적인 인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롬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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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성인이면서 초대 교회의 교부이자 카르타고의 주교인 Cyprianus하나님께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잡다한 개개인의 신자들 무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위한 한 백성을 구원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구원받은 개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목적은 전체로서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개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는 하지만( 10:9-10), 구원을 단순히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고전 12:13),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15-16).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에 몇몇 개개인들이 저지른 심각한 음행 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범죄한 개인뿐 아니라 그 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교회를 향해 책망을 하고(고전 5:1-13),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고 그것을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한 책임에 대해서도 교회를 꾸짖기도 하였는데(고전 6:7-11), 여기서 바울이 문제를 삼은 것은 구원받은 개개인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와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에 대해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역 교회 지체들과 아무런 교제 없이 혼자 집에서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영상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6).  가령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집 텔레비전 앞에 앉아 기독교 방송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설교자가 구원의 초청을 할 때 TV 앞에서 그 설교자를 따라 앵무새처럼 신앙고백을 할지라도 사실 그가 출석하는 교회가 텔레비전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뿐 구속받은 신자들의 지역 모임과 아무런 교제가 없다면( 4:11-15), 과연 이러한 사람을 두고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겠지만( 2:9), 문제는 그런 식의 구원이 신약 성경이 정해놓은 틀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요일 2:19).  그런데도 사람들은 로마서 109절 말씀을 인용하여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 본문은 적어도 물세례를 받을 때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장소가 기독교 공동체라는 전제를 두고 있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는 세례를 통하지 않으면( 2:37-42, 16:31-33), 신자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쉽게 무시하거나 놓치는 것이 있다면 바울 서신서에서 나오는 ‘서로’(알렐론)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지체들이며( 12:5, 4:25), 서로를 세워주어야 하고(고전 12:25), 서로 사랑해야 하며(살전 3:12, 4:9, 살후 1:3), 서로 유익을 위해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살전 5:15),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해야 하며( 4:2), 서로의 짐을 져야 합니다( 6:2).  나아가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 인자하게 불쌍히 여겨야 하며( 4:32), 서로 복종하고( 5:21), 자신보다는 서로를 더 낫게 여겨야 하며( 2:3),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하고( 12:10), 서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12:16).  이러한 것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개인을 구원하여(물론 구원하시지만) 세운 것이 아니라 전체의 백성들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9:6-7), 이것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으로( 6:16),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언약을 맺은 대상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인 것처럼( 19:5-6),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5:3), 백성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속성을 드러냅니다.

 

Hans Küng은 이러한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교회 온 하나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이며 온 신앙인의 공동체이다. 모두가 선택된 민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화(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의롭게) 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사람들이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1-2).  따라서 교회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새로운 백성의 무리들( 1:13), 즉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벧전 2:9), 세상의 어떤 모임과도 구별된 “택함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은 교회론의 값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이며 선택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 20:28), 안에는오직 구원받은 참된 주의 백성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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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상대방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교제를 하기 위해 쌍방 간의 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대화란 최소한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주된 이유 중 하나는(창 1:27),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사 43:7, 21), 만약 정상적인 주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실 때마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요 10:3-4).  그러나 문제는 소위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괴상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귀신에게 속임수를 당하는 것이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갈 5:22-23),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학이나 잡다한 이론들은 성령이 주신 영적은사들을(고전 12:4-11), 활용하지 못하도록 걸림돌 역할을 할 때가 많지만(빌 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주님의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알며 또한 그를 따른다고 말합니다(요 10:27).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마 4:18-22),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목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첫째는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전도하기 위해서, 셋째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막 3:13-15).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과 친밀해지는 것이 모든 사역의 실질적인 기초로서 이 친밀감이 우리에게 넘쳐흘러야만 전도와 증거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아버지의 음성을 잘 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이 원리에 철저하게 순종했기 때문인데(요 5:30), 예수님은 날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근거로 사역하셨고(막 1:35), 늘 행하시던 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분과 고요한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눅 5:16).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원한다면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는 마음의 상태, 즉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에게 사용될 수 있도록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을 찾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찾아야 하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매일 30분이나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사람들은 경험상 쌍방의 소통 없이 일방적인 대화, 즉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없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데(눅 18:12), 만족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반면에 친밀한 우정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의무감을 초월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조용한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나머지 시간을 종일 하나님을 잊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과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합 2:1),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삼상 3:10),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그분만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아는데서 만족합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과 우리의 미성숙함인 경우도 종종 있지만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만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신 4:29),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고 있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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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은 영적인 선물들이나 사역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질 때마다 다양성과 사랑과 겸손을 포함하는 통합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면서(롬 12:5-10, 고전 12-14장, 엡 4:1-16, 벧전 4:7-11),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2:13), 여기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롬 12:5), 구절에 대해 Gordon D. Fee는 말하기를 “바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적 관심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자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은(엡 4:7, 11-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성령의 선물을(약 1:17), 아낌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기뻐하지 않을 때 고린도 교회처럼 한 몸을 이루기보다는 시기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10-13, 3:3).  사실 원칙적으로 보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고(딤후 3:16-17),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기준은(벧후 1:20-21), 마땅히 받아들여할 확실한 것이지만(계 22:18-19), 그렇다고 해서 ‘성령세례’와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동일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화중에서 거듭나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3:8), 여기서 쓰인 ‘프뉴마’라는 단어는 문맥상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즉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머리로는 알 길이 없고 신비로우며 예측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이나(요 1:12-13), ‘성령충만’(행 2:4, 4:8),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사건들에(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할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깊게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묘한 일들은 하나님에게 속하였을 뿐 아니라(신 29:29), 하나님 나라의 일들은 신앙 형식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행위를 통해(고전 12:11), 임하기 때문에 매우 신비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Craig S. Keener는 『Gift and Giver: The Holy Spirit for Today』에서 “성령 사역의 모든 차원은 회심할 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회심 이후에 성령의 여러 가지 또 다른 면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에 대한 확실한 안내를 이렇게 제공합니다.  “그 능력을 덧입는 경험을 회심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 생각하든 아니면 물세례를 받을 때 경험이라고 생각하든 아니면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특별한 역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든 간에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좀 더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가지고 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겠지만 주님은 분명 ‘성령세례’라는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끼리 분열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요 17:22).  J. I. Packer는 이러한 논쟁을 두고 “성령세례와 계속되는 은사들, 성령의 현재적 현현들의 범주를 더 넓혀야 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신학적 사고 안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 안에 계속해서 도전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적절하게 세우는 것이고, 이 문제를 풀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의 신학을 예외적인 몇몇 경우들을 기반으로 세울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폭넓게 신학적으로 잘 설명된 문맥에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Sam Storms가 말한 것처럼 개혁/복음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심 때 성령세례를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종종 극적인 성령체험의 실재를 부정하는 점에서는 그르다고 볼 수 있고,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은 회심 이후에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성령과의 만남의 실재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옳지만 이런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옳다고 볼 수 없고 더 적당한 용어를 찾아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눅 1:41, 67, 행 4:31, 7:55, 13:9).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모든 신자의 회심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결코 성령의 활동을 회심으로만 제한해서는 안 되고, 신약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다양한 이후의 경험을 인정하며 권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놓고 서로 간의 견해를 나누는 우리 모두는 서로가 좋든 싫든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영적 형제들입니다(고전 12:13). Richard B. Gaffin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주 안에서의 공통된 연합에 대한 관점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 점에 대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신자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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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도 난해하여 일반 신자들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신앙적으로 큰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풍부한 이해와 은혜로운 경험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큰 문제로 부각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젊은 신학자 Athanasius를 통해 어느 정도 정리는 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도전 받고 있는 문제로 남아 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이단들이 삼위일체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통 기독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침묵만으로 대처해 나가며 만약 이단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을 알고 피하는 것과 모르고 피하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삼위일체에 대해 아는 것인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준으로 삼아야할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이단적 가르침들을 살펴본다면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셋”이라고 하는 ‘삼신론’(三神論)인데, 교회 역사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밝혀 이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의 입장을 내세운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일신론’(一神論)으로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주장이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종속론’(從屬論)으로 이 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는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하나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樣態論)으로 이 이론 역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다르게 설명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신약에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 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식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이론은 하나의 본체를 놓고 그 모양만을 달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일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ugustine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용어가 바로 ‘교제’와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숫자를 말할 때 개체보다는 오히려 의미상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한 해석을 얻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고( 6:4), 말씀하시는 것은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이방 다신종교와 비교하면서 삼위일체의 유일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일체)라는 숫자를 강조하다 보니까 삼위(三位)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삼위일체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숫자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 분 하나님이 일체되어 그들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섬기며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사역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교제하며 돕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19).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할 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비록 아들이라는 단어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거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17:5),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Calvin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낳으신바 되었다고 말하며(1:14, 18), 주후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그분은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와 같은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확인했고, 같은 내용이 주후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버지께 나오시는’ 구절 앞에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낳으심’이 어느 한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일임을 거듭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낳으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해 분명하게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신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같은 생산(生産)의 개념이 아니라 이전에 아버지 품속에 계셨으며( 1:18), 자신의 영광을 성부와 더불어 영원히 누리셨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5).  그러므로 이 호칭에 매여서 현대판 아리우스 자들처럼 예수님의 위상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30).

 

예를 들면 히브리서 15절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7), 라는 구절에 대해 영원 전에 출생하신 아들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성육신, 혹은 그분의 부활과 승귀를 염두해 둔 아들직, 또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를 가리킨다는 이런저런 많은 해석들을 제시하지만, 이 구절에 대해 확실하게 “이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신학자들은 없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골로새서 115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 한다”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313절에 보면 아버지 다음에 아들의 순서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것은 이 세 분 하나님이 동등하시기 때문에 표현 가능한 방식인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과 권능과 인격이 같고 가지신 목표가 같기 때문에 하나가 되시고 서로 동등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기에 누군가하나님은 몇 분이신가?”라고 묻는다면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는 것을 먼저 구분할 줄 알고 나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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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적으로 ‘이단’이라고 말할 때 어떤 쟁점에 대해 사소한 견해차이나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어떤 특수한 입장의 차이로 인해 기독교 내에서 분파를 달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든지 아니면 성경의 명백 자명한 가르침을 교리적으로나 행위로 부정하든지 혹은 성경의 내용을 감하거나 더하는 경우에 이단으로 규정했지 단지 무지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자들에게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이지 않았고 오직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재삼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아서지 않고 고집하는 자들만을(딛 3:10), 가리켜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단들, 즉 예수님이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요 10:30-31), 부인하거나 예수님이 육신의 몸으로(빌 2:7-8),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많았는데(요일 4:2-3), 전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분의 지위를 하락시켰고(요 17:5), 후자는 인간으로 오사(마 2:1),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롬 5:8),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골 1:21-22), 육체의 부활을 부인함으로서 그분의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롬 1:4).  또한 어떤 이단에 속한 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재림주로, 혹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이 퍼져 나가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고 이들에 특성에 알아야만 이들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는데, 먼저 이단들의 공통된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이들은 처음의 주장과 나중의 주장을 서로 달리하고 처음에는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가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다른 말을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문으로 이단(異端)은 “끝이 다르다”는 뜻으로 이들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자신들의 입장을 바꾸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딤전 4:1-3).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조명하심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교주의 주장이나 인간의 사상을 기준으로 해석하고 교주의 말은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헤롯처럼 인간 교주를 절대적 권위를 갖는 카리스마적 존재로 신격화하기도 하고(행 12:22), 절대 성경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후메네오와 빌레도 같이 일부를 왜곡 해석하거나 다른 무엇을 성경에 첨가하여 해석하는데(딤후 2:17-18),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이신득의 교리” 등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신들이 만든 교리들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더러운 행위들을 일삼으면서(벧후 2:2), 그것을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고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떠나게 만들거나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구원론, 즉 기존 교회를 떠나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서 서머나 교회는 발람의 가르침을 통해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가르침으로 인해 큰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계 2:14, 20), 이단에 대해 올바로 분별하여 잘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딛 3:10-11, 요이 1:10-11),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신앙의 노선을 가진 사람들처럼 신앙과 신학에 있어 교조주의적이거나 배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학이 아니라(고전 1:10-13),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열매이고(마 7:15-20),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믿는바가 무엇이냐는 통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예수님의 신성(요 10:30-31)과 인성(마 2:1), 중 어느 것이든지 부인한다면 이단일 것이고(요일 4:1-6), 가령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신자들을 이익의 대상으로 삼거나(벧후 2:3), 형제간의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고(딤전 6:3-5),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든다면(유 4절), 그는 발람의 길을 가는(벧후 2:15), 거짓 선생으로(벧후 2:1), 분명 육에 속한 자이며 성령이 없는(유 19절), 흉악한 이리일 것입니다(행 20:29).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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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그분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우리들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혹은 기도할 때나, 아니면 누군가의 간증을 통해서, 때로는 성경공부나 읽는 책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간접적인 방법도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이와는 달리 구원받은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진(히 1:14), 천사의 방문과(창 19:12-24, 행 27:23), 주님께서 중단시키기 전까지 멈출 수 없거나 인간의 노력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베드로가 경험한 무아지경/황홀경/환상(행 10:10), 그리고 욥기에서 말한 것처럼(욥 33:14-18), 꿈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 하시기도 합니다(마 1:20, 2:13, 20-22).  이보다 더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으로 영이 끌어올려지는 것인데(겔 3;12-15, 고후 12:1-3), 이것은 오늘날 사교나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유체이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며 더 특별한 경우가 있다면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방문하는 것입니다(행 9:1-19).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명확한 지침서 같은 것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예시해줍니다.

 

먼저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정상적인 방법이며(민 12:6), 이러한 일들이 신약에 와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행 2:17),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꿈과 환상에 대해 말하면 신비주의자로 혹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신자들에게는 그런 일에 추구하거나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을 주시지 않고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마 1:18-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이사야 7장14절만 상기시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꿈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만약 꿈과 환상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맞다면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과 환상이 아닌 오직 성경만을 사용하셨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13), 이때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본문인 호세아 11장1절 말씀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1:1-10), 이 환상은 앞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고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말씀 아모스 9장11-12절을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꿈과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욥 33:13-18).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 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고(요 10:27),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행 2:17-18).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익숙해지면 더 이상 꿈이나 환상 같은 방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매우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마치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고 가령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음성에 친숙해 질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리새인처럼 말로 성령을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않는 이상(마 12:32),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치 가족끼리 서로의 음성을 알 수 있듯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고 그분의 음성은 보편적으로 '내적 속삭임', 혹은 '느낌'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인내한다면 그분은 매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고 요한복음 10장27절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점차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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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시 119:68), 그분이 창조한 만물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수많은 악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악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물리적인 악”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도덕적인 악”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악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창 3:1-15, 마 15:18-20).  이 세상 안에 있는 악과 고난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선하고 의로운(스 9:15), 하나님을 변호해야 하고(이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필수적인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유사 이래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숫한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결코 이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선한 하나님과(합 1:13), 창조 세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악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악이 부정되는 곳에는 더 이상 구원도, 가치규범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롬 5:21), 결국엔 인간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를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는(사 45:7),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의 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악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혹은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인 것처럼 자주 언급하지만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문의 ‘라’(ra)가 악과 악의 결과, 즉 악행과 그 결과를 망라하여 뜻하는데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사용된 ‘짓는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bara’로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1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로서 절대적 창조,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말하는(애 3:38), 반면에 그분은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시고(신 32:4),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합 1:13), 시편 5편4절에서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의 여러 본문들은 아이러니하게 악한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 하지만(삼하 16:11, 왕상 22:20-23), 또 다른 한편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고(호 9:15),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며(욥 34:10-12), 악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잠 8:7).

 

초기 교회 시대의 이단 마르시온은 이 구절을(사 45:7), 근거로 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미치광이들은 악이란 말을 놓고 왜곡하여 마치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분, 즉 죄를 만드신 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사야의 본절을 얼마나 어리석게 오용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에 속하는 재앙의 조성자일뿐 범죄에 속하는 악의 조성자는 아니라는 통상적인 구분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하나님만이 홀로 모든 사건의 조성자이시다”라고 합니다.  칼빈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악의 기원의 문제는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악 같은 것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해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Heinrich Ott는 이 세계 안의 악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 “신학적 한계의 질문으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G. Gutierrez는 『On Job: God-Talk and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에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결국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인간의 신학적 개념 안에 가둘 수 없는 이유는 그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그 지식에서 작용되는 논리는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분으로(롬 11:33-34, 고전 1:25),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고(사 55:8),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처럼 일일이 변명하지 않으시며(욥 13:6),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렘 32:19).  Herman Bavinck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시면서도 그의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은 예리한 칼을 사용하면서 자녀에게는 칼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었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는 아니시지만 그 어떤 재난도 그분의 주권적 뜻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욥 1-2장, 암 3:6), 만약 우리가 이 상충적인 양 진리를 무리하게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을 침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죄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라고 한 Louis Berkhof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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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란?

논쟁거리/이단 2013. 11. 2. 08:06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여러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비성경적이다', '거짓교사다' 혹은 '종교다윈주의자다' 더 심하면 '이단이다' 라고 까지 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신앙과 신학이 성경과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YWAM의 창설자인 로렌 커닝햄에 대해서 말할 때에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하며, 존 파이퍼와 인터뷰한 새들백 교회의 릭 웨렌에 대해서는 종교다윈주의자이며, 제임스 패커는 유진 피터슨의 성경번역본 『The Message』를 극찬했다는 이유로 에큐메니칼 사상을 지닌 자로, 존 스토트는 “영혼 멸절설”을 말했다고 해서 비성경적인 인물로, 그 외 A.W. 토저, 빌 브라이트, 등등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을 정도의 복음주의자들을 경계의 대상이나 요주의 인물 아니면 거짓 선생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핵심 인물인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사건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론을 제시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어떤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칼빈에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교회를 개혁한다는 이유 아래 돈키호테처럼 쓸데없는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기도 받고 쓰러지면 '이단!', 예언과 방언을 하면 '사이비!', 환상을 보고 꿈을 꾸면 '신비주의자!', 육체의 질병을 고치면 용한 무당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기에 자살한 목사의 입에서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균형 잡히지 않은 반쪽짜리 설교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분명 성경은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고(요일 4:1), 분별하여(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는데(살전 5:21), 무조건 칼빈주의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바리새인처럼 다른 신앙을 적대시 하는 것은 그다지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봅니다(막 9: 38-40).  누가복음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상대방 세리에 대해서 멸시를 하는데 이 바리새인이 착각한 것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것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세리를 보니까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눅 18:11).  그러나 결과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 자부심을 가졌던 바리새인은 예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고 신학과 관계없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눅 18:14).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진 신앙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다른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잘못되었다고 논쟁의 칼을 휘둘러 댄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그분께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롬 2:1-3).

 

사실 교회를 분열시켰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과(딤후 2:17-18), 이단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령의 증거에 열렬히 호소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앙과 신학을 제시할 경우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영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요일 4:1).  왜냐하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종교들과 이단/사이비들이 범람해 왔으며 늘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를 모방해 왔기 때문입니다(갈 1:6-8, 벧후 2:1).  최근에 우리 주위에서 이단적인 행태와 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세대에도 그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고, 이런 문제를 놓고 H. Wayne House는 이단에 대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역사적 기독교에 모순되는 중심 교의를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는데, 사실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이단들이 없었던 때는 없었으며 이단들은 때로 교회 안에서 생겨 누룩처럼 퍼져 나가기도 하고(행 20:30), 어떤 경우에는 밖에 있는 이교적인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벧후 2:1), 진리의 일부를 왜곡시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이단들이 말세에는 더욱 횡행하여 신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4:5, 요일 2:18).

 

그러나 이러한 것을 빌미로 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에서 유익한(고전 12:7), ‘예언’과 ‘방언’(고전 13:8-13), 성령의 놀라운 영광에 압도되어 쓰러지는 것을 가지고(겔 1:18, 단 10:8-9, 마 17:6, 행 9:4), 비성경적이거나 신비주의, 더 심하면 이단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기도 받고 쓰러지는 경우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인 사라가 일주일 이상 천국의 영광(황홀경)을 체험한 것에 대해 간증을 하면서『균형 잡힌 부흥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광신주의적인 것이며 정신이 돌아서 생긴 일이라면 내 머리가 더욱 이런 정신병에 걸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것이 미친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아름다고 영광스럽게 미치기를 기도합니다.”  에드워즈는 사라가 체험한 황홀경에 대해 비성경적이지 않고 이단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역시 에드워즈에 대해 그는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지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에 대해 히스테리에 기만당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 있게 말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에드워즈를 보고 이단이거나 비성경적, 혹은 성경에서 벗어난 요주의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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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악해져 가는 불신 세상에 둘러싸여 다음 천 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때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령의 능력을 받는 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 필요한 것이지만 ‘교리’ 그 자체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자기도취에 빠져 냉랭한 성령론을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든 Fee는 『God’s Empowering Prese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약 4:8), 보기 드문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임재라고 부를만한 현상은 종종 전율(합 3:16), 위엄에 사로잡힌 경외심(사 6:1-5), 서 있지 못함(왕상 8:10-11, 대하 7:1-3, 계 1:17), 압도적인 기쁨(시 16:11) 및 이와 관계된 다른 징조 등과 같은 반응을 촉발하는데 이 점은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의 시대에는 특별히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회 신자인 고든 Fee가 말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은사들, 가령 "예언적 은사"처럼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초기시대의 교회에 “정경적” 원리의 일부로 기능했지만 그런 은사들은 정경의 완성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 수립과 관련된 표적 은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은 특정한 용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를 구분하는 것으로 특정한 용어의 사용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더 큰 진리를 놓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특정한 언어적 언급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냐 아니냐가 결정될 때는 더욱 그러한데 영국 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논리학 이론과 언어 철학에 관한 독창적이며 중요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했던 Ludwig Wittgenstein이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우리를 미혹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신학적 용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D. A. 카슨이 말한 것처럼 성경에서 나오는 어떤 특정 단어 하나를 놓고 신학자들끼리 언어학적인 말장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에 대해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 즉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 때문에 많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든다면 오순절 날 일백이십 명에게 일어났던 초자연적인 사건이 성령을 체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것인가?  만약 오순절이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경험에서 그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행 2:3), 드러나는 같은 경험 또는 유사한 체험을 매번 기대해야만 하는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면 성령이 처음 임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람소리나 불의 혀 같은 모든 현상들이(행 2:1-4), 다 나타나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야만 하는가?  이렇듯 수많은 질문에 사로잡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각자의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신학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절되어야 할 것은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는 선입관이 포함된 교조주의적 태도와 생각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 Robert W. Lyon는 『Wesleyan Theological Journal』(volume 14, 1-Spring 1979). “Baptism and Spirit Baptism in the New Testament”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모든 믿는 자들은 회심할 때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또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을 구별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이 모든 표현이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례’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구절들도 이러한 결론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 모두 믿는 자들의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포괄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존 브라이트는 『The Authority of the Old Testament』에서 “성경은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고 많은 것은 의미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성경이 해석되는 원칙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고전 4:6),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어지지 않으면 특정한 교리 문제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을 두고 은사주의 신학분야의 초기 선구자인 루터교 목사이며 신학자로 회중의 연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균형 잡힌 사역을 하고 있는 Larry Christenson는 『Speaking in Tongues』에서 오순절주의자와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결정할 문제다. 사실 기독교인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사역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자가 독특하다. 성령은 각 사람을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신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신비스럽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어떤 확실한 정의를 내리거나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것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편견으로 시야가 어둡게 가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대부분 성령을 추적하거나 그의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이나 정의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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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교회가 범하는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판매원이 소비자에게 재품을 파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상품화하여 제공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지옥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질병뿐만 아니라 결혼생활과 삶의 제반적인 문제들, 즉 좋은 직장과 차와 집을 주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분명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시며 다른 모든 일도 하실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머무른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히 6:1-2).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주님이 가정생활과 직장, 혹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이 그분과의 친밀감이 아닌 주로 사람의 표면적인 문제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에 중심을 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분을 떠나거나 상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필요에 의해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분과의 우정은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마르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 두 유형 중 어느 유형이 주님의 기뻐하는 유형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눅 10:38-42).  먼저 마르다는 헌신적으로 손님을 접대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는 즉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고(눅 10:38),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솔선수범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봉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친 봉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열심히 행하는 일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다의 분주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0:40).  정신이 분산되면 좋은 일이 고된 일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섬기는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한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걱정은 기쁨으로 주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눅 10:41).  분명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 같이 계셨지만 마르다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벅찬 자신의 일에 부담을 가져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도 마음이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주함은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필요한 염려와 근심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게 만드는데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그분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눅 10:40),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며 마르다가 주님에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 명령을 하는 오만함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분노, 즉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약 1:20), 그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생 마리아까지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 자체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그분과의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이때 하는 봉사는 마르다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롬 14:4),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표준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엘리야와 같이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왕상 19:12), 들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르게 부엌에서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그저 거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당시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남자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부엌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제자들 곁에 앉아 있었다면 제자들은 그녀가 여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제자들 곁에 앉아 있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 듣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주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부엌으로 갈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녀는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눅 10:39).  지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이 좋은 편’(눅 10:42),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데 이 친밀감은 우리 인생의 잔치상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만일 오늘날 주님께서 마리아를 닮은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마치 친구가 자기 마음의 모든 것을 터놓고 교제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소중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요 15:14-15). 그러나 주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떠나서도 교회를 다닐 수 있고 종교적인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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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이 믿는 대로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죄까지도/사 45:7),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그분에게 하나도 없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인간이 악에 대하여 인과율적으로 책임이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지만(요일 3:4),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에 의해(시 115:3), 인간의 죄에 대하여(잠 16:4),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왠지 불공평해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시 25:8), 악을 작정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며 왜 그분만이 면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 야고보서 1장13-15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의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더욱이 그분은 누구라도 죄를 짓도록 시험하거나 죄를 짓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죄는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요 8:44),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죄에 연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 9:14).  반면에 에베소서 1장11절은 하나님이 부득이 하게 모든 것, 심지어 죄까지라도 미리 정하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딜레마는 역설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출 15:18), 그분의 절대적 거룩함(시 47:8), 모두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역설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은 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구절인 로마서 9장18-21절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라니…’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19절에서는 지적 궁금증을 제시하고 20-21절에서는 바울이 이에 대하여 답하고 있지만 19절에서 제기된 질문은 지적 문제뿐만 아니라 질문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0-21절에서 바울은 태도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지적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할 수 없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의해 역설이라는 견해가 실제로 입증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 안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규범적 뜻”과 “하나님의 허용적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 뜻”으로 이 세 개의 뜻 모두는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속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창 12:1-9),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그 땅이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 명하셨습니다(창 17:8).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6:2),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으로 이 규범적 뜻 안에는 오직 ‘선’만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악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합 1:13).  반면에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기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저버리고 약속의 땅을 출발하여 애굽을 향해 떠난 것처럼(창 12;10), 이 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허락하신 것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잠시 동안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행 14: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완악한 뜻에 맞추신 것입니다(마 19:8).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소유하여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는데 먼저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는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뜻은 호세아 11장1절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지만(벧전 1:15-16),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악에 대하여 용인하듯이 죄를 허용하는데(요일 1:10),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 뜻 안에서 우리의 죄에서조차 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롬 8:28).  마치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창 50:20).  사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나기는 하지만(롬 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창 2:17), 결과적으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렘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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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학교 운동장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어떤 엄마가 자기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과연 몇 명의 아이들이 그 음성에 반응할까요?   아마도 오직 한 명만이 그 음성을 듣고 반응을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아이는 자기 엄마의 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분과 조용히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의 귀는 그분의 음성에 친숙해질 것이고 성경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요 10:27), 말씀하고 있는데 문제는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귀신에게 사로잡히거나 환청이라는 증세에 시달리는 의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고 성령께서도 이런 바리새적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해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정상적인 신자라면 하나님은 어떤 형식에 갇혀 있지 않는 분이라는 것과 주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시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다양하지만(민 22:25-28, 삼하 12:1-12, 욥 33:14-18, 행 8:26, 10:3),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주된 근원은 성경인데(딤후 3:16),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성을 더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듣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달라스 윌라드는 『In Search of Guidance』에서 A.W. Tozer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부하여 성경과 교리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지식에 영적인 조명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마음에 베일이 덮여 있는 것과 같아서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은 머리에 든 지식에 불과하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고(마 23:2, 눅 11:52),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을 늘 암송하기도 했지만(요 5:39-40),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마 26:57-68).

 

또한 이들은 성경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고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성경해석자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훈련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고 주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요 5:37).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도적 교리는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 2:13),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만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오늘날 신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성경공부를 할 때에 신학교에서 배운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강조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열심히 성경공부는 했지만 결국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종교적 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C.S. 루이스는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분에게만 열중하는데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성경을 묵상하는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기록된 성경말씀에 아주 친밀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대신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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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경이 믿음과 실천을 위한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성경을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는 데에는 중요한 단계를 따라야 합니다먼저 테스트를 '문법적'으로 즉, 단어의 어원, 특히 동사나 명사 등의 각종 변화형과 문장 구문론 등의 문법적 요소와 문학양식, 문맥구분, 저자의 문체 등을 분석하여 문자기록의 해석에 필수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이 있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텍스트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거기에 쓰인 단어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것은 주관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텍스트의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막아줍니다여기서 더 나아가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주석하는 작업인데 이 단계는 텍스트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주석하고 텍스트 의미를 밝혀주는 신학을 세우는 작업으로 해석 대상이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성경 전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는 방법입니다이러한 해석론을 기초로 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고전 4:6), 사도 바울의 말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연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각 사람들이 해석하는데 있어 일치된 신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리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을 기초로 해서 교단 신학에 입각해 성령세례에 대한 어떤 정의들을 내릴 때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옳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의 성격이나 강도, 즉 성령으로 채워지는 결과는 받는 자가 믿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믿음에 얼마나 합당한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Walter C. Kaiser는 “성경에서 비슷한 표현들을 발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경험을 처음 기록된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성령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보다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을 W.T. Conner는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그렇게 분명하게 도전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보다 분명하게 성령의 사역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경험되는 무엇가를 논하고 있다”

 

사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고전 12:3),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존 스토트는 “그들(사도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 언급된 유일한 두 가지 적극적인 명령, ‘성령을 따라 행하라’( 5:16, 25)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5:18),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현재 시제로 신자가 이미 맺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암시하는 것이지 어떤 결정적인 새로운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신약성경의 어떤 본문에서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호소나 명령은 없고 반면에 에베소서 518절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통해 “성령세례는 하나이지만 성령충만은 다양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빈이 사도행전 15절과 217(주석)에서, 그리고 로이드 존스가 『성령세례』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를 경험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해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언급한 여러 경험들 중 어느 하나에 국한하여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세례에 대한 개념적 오류들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을 경험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개념을 초월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그분이 당신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대로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개념이 부족하다고 해서 경험의 진실성을 무시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은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을,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성령론에 대해 서로 강하게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살전 4:8), 주어진다고(전치사 ‘엔’ 대신 ‘에이스’ 현재 시제의 사용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성령이 진행 중이고 지속적인 역할을 강조) 말한 것처럼 성령론은 완성되지 않는 과정 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분께 귀를 기울이며 서로 겸손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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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만물의 활동 배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협력 섭리가 있다고 말하며(마 10:29-31), 그러한 그분의 섭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증거 합니다(잠 16:33).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나의 생각과 뜻대로 행동을 했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이 협력이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외견상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자신이지만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그분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 하는데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은 그의 형들이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섭리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창 45:45).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 가운데 그분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성경은 악한 성격의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왕상 22:20-23).  그렇다면 “죄의 최종 원인자가 하나님이신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사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고후 5:21), 거룩한 분이시고(사 5:16),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지에 따른 악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으시지만 다만 허용하심으로 악인의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이 그 의지로써 죄를 짓는 것을 제지하시지 않으시고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만족한 답변을 얻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인 성경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지혜가 무궁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신 것은 분명 어떤 거시적인 원대한 그분의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사 55:8-9).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의 원인이 되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볼 수 있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배 밖으로 던져버렸지만 그러나 15절후에 요나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진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말하면서(욘 1:15),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증거 합니다(욘 2:2:3).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과 요나 스스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책임이 있는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욘 3:1-4).

 

조금 더 성경을 살펴보면 신약에 와서 인류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행위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요일 2:2),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요 3:14, 갈 3:13).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창 3:15), 단순히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그분이 계획하셨습니다(행 4:27).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지만(눅 2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하나님에게 그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는 한 문장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예지를 법 없는 자들의 도덕적 책임과 연관시켜 설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여기서 주목할 만할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은 그렇게 행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미리 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행 2:36).

 

이렇게 인간과 사단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용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통해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 속에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며 심지어 자신의 영광과(롬 9:14-18), 우리의 선을 위해(롬 8:28), 악을 사용하시고(출 9:16), 그 악을 심판하심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시 76:10, 잠 16: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잠 8:7),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며(욥 34:10-12, 롬 9:14), 악에 대한 책임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시 5:4).  그런데 만에 하나 우리는 그분의 뜻을 거절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이 공정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고 다만 전능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9:11-13).  물론 이러한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 받은 물건이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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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신앙을 가진 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는데 있고 목사가 말씀을 가르쳐 주기만을 기다리거나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들 중에 한 가지이기는 하지만 매일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고 성경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0:27), 만약 주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요 10:3),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요 8:47, 10:26).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Focus on the Family』의 창설자인 James Dobson은 “나는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친구를 통해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통해 그리고 상황을 통해서 내게 말씀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했고, 달라스 윌라드 역시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각,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다가오시며 오직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의지적인 삶 가운데로 오실 수 있다고 말하며, F.B. 마이어는 잠언 20장27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은 내적인 빛들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 즉 성경이 완성된 이후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시대에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문화와 분위기, 그리고 교회의 제도와 전통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귀를 둔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시지만(히 13:8), 많은 신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종교적인 편견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요일 2:3-4).  쉽게 말하면 불순종이 그분의 음성 듣는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주님이 이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하고(고후 13:5), 또한 언제나 겸손하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에도 그냥 드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청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삼상 3:10).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순종 위에 무엇을 더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나 마귀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내가 듣고 있는 음성이 주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인지(겔 13:17), 혹은 귀신들의 속삭임인지(렘 23:13),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Roxanne Brant는 음성의 근원은 “진리의 성령”과 “마귀의 영” 그리고 “육신의 생각”에서 올 수 있다고 말하며, 3세기에 있었던 몬타누스의 사건을 예를 들면서 한 예언자가 얼마든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갈 3:3), 그는 『How to test prophecy, preaching and guid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 안에서 동시에 육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마 16:16), 곧 바로 사단에게 조종을 받고(마 16:22-23), 결국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처럼(마 26:69-75),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르스 요컴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라도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들, 즉 사람을 통해서(행 21:10-12), 혹은 성령께서 직접 개인에게(행 10:19-20), 또는 꿈이나(마 1:20, 욥 33:14-18), 환상을 통해(행 9:10-16, 10:3),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단 9장, 딤후 3:16),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타진해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을 분별하는 것처럼(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1),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반드시 시험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1).  예를 들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은 차갑게, 명령조로 혹은 죄책감을 느끼도록 가혹하거나 비판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보편적으로 우리를 교정하거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삶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는데(삼하 12:1-15), 이와 달리 강압적이거나 조급한 마음, 그리고 두려움을 주는 듯한 메시지로 들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닌 마귀의 소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약하면 주님의 음성은 직접적이고 확정적이며 명백하기 때문에 성령은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덕을 세우고 위로하며 주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고전 14:3), 그 음성은 원리나 특성에 있어 기록된 성경말씀과 절대 상반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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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롬 1:17),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고후 5:17 엡 4:22-24), 존 웨슬리는 주장하였는데, 그는 칭의와 성화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잡는 것이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 신학에서는 전자를 ‘의인’이라고 하고(롬 3:24), 후자를 ‘성화’라고 구분하여 취급하는데(엡 1:4, 살전 5:23-24), 웨슬리는『The Works of the Rev John Wesley, AM, Volume VI』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객관적/율법적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결과로 우리가 죄책에서 용서받은 상태적인 변화를 말하며, 성화는 주관적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결과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성질에서의 자유를 얻은 실제적인 변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성화에는 두 가지 체험이 있는데 하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체험 즉 '초기의 성화'와 다른 하나는 그 후에 오는 또 다른 체험, 곧 '온전한 성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초기의 성화는 불신자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얻은 순간적인 체험이라고 한다면 온전한 성화는 신자가 자신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 체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이러한 체험을 『The Letter of the Rev John Wesley』에서 '제2의 축복' 혹은 '온전한 구원'으로 신자의 생활이 보다 높은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사용한 두 번째 축복은 중생 다음에 체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흔히 '성결의 체험'이라고 불러지기도 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 체험을 통하여 신자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말하면서 온전한 성화의 체험이 최종 목표가 아니며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성도로서 승리할 때까지(엡 3:16-19), 계속 '기독자의 완전'에로 나아가라고 권고합니다(고후 7:1).  물론 여기서 말한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단어는(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은 절대적 완전이 아닌 상대적 완전으로 신자가 사랑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관계를 말함) 당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용어로서 오늘날에도 논쟁의 불씨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기독교의 완전 교리를 가장 중요시하였고 온전한 성화를 가리켜 '종교의 진수'라고 말하면서 '기독자 완전성별'과(벧전 1:15-16), '온전한 성화'(살전 5:23), 그리고 '온전한 사랑'을(마 22:36-40), 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완전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The Works of John Wesley, 3rd』에서도 “우리는 이 둘(칭의와 성화)을 각자의 자리에 놓아야 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함께 묶어 두셨고 사람들이 갈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똑같은 열정과 성실함과 한편으로는 값없이 완전한 현재적인 칭의 교리를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과 삶이 다 같이 성화되는 완전한 성화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웨슬리 신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에 대한 특징이 “오직 믿음”과 “거룩한 삶”을 끝까지 붙들었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예를 들어 구속 같은) 특히 성령 교리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하게 설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웨슬리의 성령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성화와의 긴밀한 상호 관련 속에서 보는 것인데 그의 설교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시는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깃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두 번째 은혜, 성령의 능력이 그 가운데서 드러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하는 것은 두 번째 축복,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겔 36:26-28), 우리가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4).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19세기 일어났던 성결운동은 예외 없이 성화를 '성령세례'로 보고 오순절을 두 번째 은혜의 역사의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이 웨슬리주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부흥 운동을 이끈 설교가들 역시 완전성화가 성령세례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완전성화는 즉각적이면서 동시에 회심에 뒤이어 일어나는 '두 번째 은혜'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오순절 성령세례 교리의 뿌리가 웨슬리주의 신학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 Mildred Bangs Wyncoop은 “많은 용어 중에 웨슬리는 완전성화라는 말을 사용했지 한 번도 성령세례나 다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웨슬리주의자들에게는 완전성화를 의미하며 '새로 거듭남', '후속적으로 경험되는 채워짐' 그리고 '인격의 변화'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이끌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친구인 John Fletcher도 '성령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완전성화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완전성화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웨슬리는 성령세례와 완전성화를 제2의 축복, 즉 동일한 체험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웨슬리의 성령세례에 대한 주장은 복음주의자들, 특히 개혁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장10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외에는 아무것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라고 결심할지는 몰라도, 오늘날 성령사역의 다양한 국면들에 대한 폭넓은 견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는 완성되지 않는 먼 미래의 물결이지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Dunning, H. Ray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두고 “나는 칼빈보다 칼빈주의의 몇몇 형식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웨슬리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마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는 유산의 일부인 모든 은혜와 은사들을 포함하여(고전 12:7, 엡 4:7), 성령의 가장 주된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지(빌 2:5, 벧전 2:21), 서로 신학과 신앙에 대해 비방하는 것이나 자신들만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서로 간의 일상적인 교제가 불가능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대의 속에서의 존중과 사랑과 협력은 여전히 경계를 넘어 필수적인 기독교 교리의 다른 영역에서 동일한 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로 계속 흘러 넘쳐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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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원론적인 사고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거룩하고 경건한 일에만 관여하시고 악하고 속된 일에 대해서는 무관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단순히 성도들의 삶만을 주관하시고 불신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떼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과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정신적인 것이든 또는 선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관여하시는데 이것에 관해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을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잠 16:4).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소소한 사건조차도 신앙의 눈으로 다시 확인해 보면 그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손길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삶을 회고하고 자기를 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피조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행동과 적용들에도 관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며 인간은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통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는데(삼하 12:11-12),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하신 말씀이 앞으로 자신에게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그와 그의 종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삼하 16:5-8), 그는 시므이에게 보복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그의 군사들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삼하 16:11)라고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생애 말년에 여호와께서 다윗을 자극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을 때(삼하 24:1), 다윗은 후에 그것이 죄인 줄을 깨달았고(삼하 24:10), 하나님은 그 죄로 인하여 유대 땅에 벌을 내리셨습니다(삼하 24:12-17).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다윗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하신 것을 알 수 있고(삼하 24:1),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하신 또 다른 수단이 '사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이 한 사건을 통해 성경은 한 가지 행동이 일어나도록 각기 다르게 영향을 준 세 가지 요소에 대한 경이할 만한 통찰력을 제시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셨고 또한 그를 격동시키기 위해 사단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다윗에게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삼상 24:10).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솔로몬이 이방 아내들을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에돔 사람 하닷과(왕상 11:14),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왕상 11:23),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욥의 재산과 자녀들을 해롭게 하도록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태풍과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의 악을 통해서였습니다(욥 1:12-19).  욥은 이러한 사건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 부차적인 원인을 넘어 그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지만(욥 1:21), 그분을 원망하거나 잘못하셨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돌렸습니다(욥 1:22).  다시 말해서 부차적인 원인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악으로 인해 그분을 원망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약 5:9), 욥은 그러한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욥 2:10).

 

구약성경 다른 곳을 보면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 왕의 모든 선지자들에 넣으셨고(왕상 22:23),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라고 했으며(사 10:5),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느부갓네살을 비롯한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보내시면서 “이 땅과 그 거민들을 치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라고 말하시면서(렘 25:9), 더불어 바벨론을 벌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렘 25:12).  그리고 우상숭배를 인하여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에 관한 내용 중에서 거짓 소식을 전하는 미혹된 선지자가 있다면 그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로 하여금 유혹을 받도록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14:9).  아모스 선지자는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수사학적 질문들을 열거하면서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암 3:6),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에게 기근과 기갈과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와 메뚜기 염병과 말과 사람의 죽음을 주셨음을 상기시키지만(암 4:4-13), 그럼에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암 4:6, 8, 9, 10, 11).

 

이러한 구약의 많은 사례들을 볼 때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그들에게 악과 재앙이 임하게 하셨는데 비록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모두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만(롬 3:9-18, 5:12), 그렇다고 언제나 심판으로 재앙이 임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께서는 악인들이나 마귀의 세력들 혹은 자연재해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히 12:6-10), 아니면 불신자들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단 4:25-37, 롬 1:18-19), 혹은 완악한 죄인들에게 저주와 멸망의 심판을 하시기 원하실 때에(잠 16:4, 롬 1:28), 즉 악한 일이 인간에게 일어나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시 5:4).  궁극적으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선을 가져다주는 선하신 목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롬 8:28).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자들, 바로나 가나안 사람들, 혹은 바벨론 사람들처럼 악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이심으로써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출 9:16, 롬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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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세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먼저 로이드 존스는 성령세례에 대해 『The Sovereign Spirit』과『성령세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거듭난 신자가 될 수 있다(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은 즉각적이며 이것은 이론이나 신앙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행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현,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며 실제로 우리의 체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세례"이며 그 목적은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능력과 확신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로이드 존스는 이미 중생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눅 24:49), "성령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에 대해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사도행정 2장에 있는 베드로의 설교와 고린도전서 12장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찾고자 했던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선물"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새 언약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며 또한 시초적인 축복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축복이다. 그것은 새 시대에 소속된다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며 그 복의 수여자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언약에 들어오는 모든 자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둘 다 주신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그것은 단회적인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세례는 중생 이후에 받게 되는 뒤따라오는 축복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와 상반되게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에 뒤따르는 후속적 경험이 아니라 중생과 일치되는 "제1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시에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람들, 벤자민 B. 위필드, 리차드 개핀, 제임스 던, 월터 C. 카이저, 프레드릭 D. 부루너, 존 스토트는 성령세례가 회심 때 일어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견해를 달리하는데, 예를 들어 제임스 던은 성령세례의 경험은 받는 자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개핀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에 대한 바울과 누가의 신학이 같다는 점에 있어 공통된 의견을 갖습니다.  반면에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는 사람들 중에 D.L. 무디, 찰스 피니, R.A. 토리, A.J. 고든, F.B. 마이어, 앤드루 머레이, 로이드 존스는 구원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 죄로부터 구원 얻는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면서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통해 죄를 이길 힘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죄를 이기며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놓고 서로간의 의견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된 한 가지 견해는 성령의 주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임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19세기 이전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각각 나름대로 성령을 받는 방식과 성령을 받는 시기에 대해 해석을 했지만 일치된 성령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의 일치된 교리가 없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나 체험마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Eduard Schweizer는 “성령은 교리의 주체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중생을 성령세례로 보고 그 후에 받는 것을 성령의 충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체험하는 성령충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성령으로 세례 받는 사건에 관한 일곱 구절들을(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고전 12:13),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에 얽매인 교회가 아닌 이상 성찬식 때 가운을 입을 것인가 정장을 할 것인가, 찬양할 때 드럼을 사용할 것인지 오르간을 사용할 것인가 라는 사사로운 것들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성령세례'에 대한 용어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깊이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의 놀라운 역사와 임재를 충만하게 누리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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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령세례는 회심과 구분되기에 그것은 회심 후에 따라오는 경험이며, 그 첫 번째 육체적 증거는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선조들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이미 거듭난 신자들에게성령세례’ 받을 것을 권장합니다그리고 오순절 사건인 사도행전 2장과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의 역사( 8),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의 역사와( 10),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 받은 일을 내세우며( 19), 이러한 사건을 근거로 해서 교리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제자들도 먼저 거듭나고 이후에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삶속에서 오순절과 같은 ‘이차적 체험’ 즉 ‘제2의 축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쉽게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분되어야 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능력을 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을 보통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체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리고 이들은 성령세례의 전제 조건이 ‘회심’이라고 말하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지만 일단 회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조건들, 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어 ‘죄와의 결별과 회개’, ‘순종과 기도’, 그리고 ‘인내와 믿음’ 등이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세례는 회심 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바울 서신에서 유일하게 성령세례에 대해 언급한 성경구절인 고린도전서 12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세례’란 새 시대를 여는 단회적인 오순절 사건 이후 신자 개개인의 삶속에 회심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이지 그 이후에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몸속으로 유입되는 순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다르게 중생과 성령세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중생이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며 구원 이후에 오는 성령의 또 다른 사역을 ‘성령충만’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약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 묘사적 본문, 즉 서술적 본문들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서술적 본문들을 교리로 근거 삼는 것을 기피하고 오히려 교훈적 본문들, 즉 일반적인 바울의 글을 더 선호하고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였던 벤자민 B. 위필드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물론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탁월한 신학자로 정평이 나있는 칼빈은 오늘날 논쟁이 심한 ‘성령세례’에 대해 사도행전 1장 주석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중생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 되는 일들을 성령이 가시적으로 보내신 것에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보냈을 때에만 성령으로 베푸신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대답해 둔다. 그는 이미 사도들에게 이 성령을 주신 일이 있으며 또 마찬가지로 날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해서는 “요약해 말한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신 양자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특출한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를 ‘중생의 영’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사건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칼빈은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고넬료가 그리스도 영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속된 중보자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자가 가져올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다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게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하셨음에 틀림없다.   쉽게 말하면 고넬료 가정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은 ‘중생의 영’이기보다는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내려주시는 부가적인 ‘성령의 은사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바울이 성령을 믿음과 결합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바울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진 신앙에 관하여 더욱 정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교리에 대한 신뢰의 여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3:2), 묻고 있으므로 그러한 질문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방법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은사들을 내려 주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처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베드로가 말한 ‘성령의 선물’을( 2:38/주석), 구원의 은혜보다는 ‘은사’로 해석하고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약하면 칼빈은 사도행전 1장을 제외한 네 번의 성령 강림 사건들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구원 이후에 받는 ‘제2의 축복’, 즉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본 것입니다.

 

사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은 이중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생의 영’으로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고전 12:3), 다른 하나는 Anthony D. Palma가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위한 능력 있는 증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증인들에게 능력을 더하시는 것 이외도 사도행전과 똑같이 영적인 은사와 기사와 이적을 베풀게 하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령세례는 ‘능력과 은사의 영’을 받는 것으로 사도행전 2, 8, 10, 19장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순절주의자들과 칼빈이 같은 점이 있다면 ‘성령세례’를 구원 이후에 받는 은사들을 동반하는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칼빈은 사도행전에 일어난 성령사건들은 사도시대 이후에는 반복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2:38/주석), 오순절주의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The Sovereign Spirit』에서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의 은사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대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반복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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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아름답게 만드신 인간을 범죄 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죄까지도 만드신 것은 아닌가?”인데 과연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시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죄를 짓도록 적극 간섭하셨을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에 이미 그들이 장차 범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지만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범죄를 예견하시고 그것을 허용하실 뿐(시 78:29, 행 14:16), 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주선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스스로의 행동과 사고를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습니다(창 2:17).  다시 말해서 기계적으로 순응하는 로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지정의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창 2:7, 살전 5:23).  그리고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시고 그들의 자의적으로 범한 죄에 대하여 방해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잘못인가를 일깨워 주셨고 인간의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서는 간섭하시고 또 관여했습니다(창 4:6-9).

 

루이스 벌코프는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기동하고 우리의 존재를 갖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행 17:28). 이 신적인 활동은 매순간 인간의 행동을 동반하지만 결코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는다. 행동은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 즉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역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범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사10:23).  그러나 만일 그분의 섭리 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되신다면 “하나님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이 질문에 접근함에 있어 우선 하나님이 악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게 하신 원인이었다고 한 가장 분명한 예는 요셉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그분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창 37-50장).

 

뿐만 아니라 출애굽 사건에서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음을 거듭 강조하시면서(출 4:21, 7:3, 9:12, 10:20, 27, 11:10, 14:4, 8), 또한 바로가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출 8:15, 32, 9:34).  어떤 사람들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스스로가 자기의 의지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반역한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출 4:21, 7:3),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출 8:15), 말하기 훨씬 전에 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시에 같은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 두 가지 요소 모두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하심으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단지 바로의 마음속에 있던 악한 정욕과 선택을 더욱 강렬하게 하신 것뿐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이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악에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에 악한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렘 17:9, 막 7:21-2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출애굽기 9장16절에 관해 생각하면서 로마서 9장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구체적인 예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추론해 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까지 쫓아오게 하셨고(출 14:17, 시105:25), 또 다른 예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멸망되었던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구약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으며(수 11:20, 삿 3:12, 9:23), 믿지 않는 팔레스타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 삼손의 요구에서(삿 14:4), 또한 엘리의 아들들이 악행을 인하여 책망을 받았을 때(삼상 2:25), 심지어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말합니다(삼상 16:14).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지만(렘 33:2),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욥 34:10. 대하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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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분은 인간의 도움이나 협력 없이 혼자의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지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이후부터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인간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인간 창조의 목적대로 영광을 받으셨고 앞으로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사람과 협력하시되 그분의 거룩한 사역 수행에 동참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도덕적인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인간의 범죄까지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신적인 질문은 고대로부터 계속 제기되어 왔고 때때로 우리들 자신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의문을 갖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죄악과는 절대 무관한 분이시고 인간의 범죄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으십니다.  다만 악인이 그 사악한 마음으로 범죄 하여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뿐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시라는 구절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도덕적인 피조물의 의지적인 행동을 통하여 악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하셨다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66:3-4, 전 7:29).  성경에는 악으로 인해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을 비난한 적이 없으며(출 15:11, 사 5:16), 하나님은 악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고(욥 34:10), 인간들이 범한 잘못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겔 18:4, 롬 8:13).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악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악을 즐기시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분명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2:4, 시 5:4).  사실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악한 일이 행해지도록 하셨다고 한 성경구절은 상당히 많이 있지만 이 모든 경우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기로 한 사람이나 마귀가 악을 행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의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기를 원했고 결국 그를 구덩이에 집어넣고 마침내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시 105:17),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창 37장).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창 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창 50:20).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죄악된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는데 이 둘 모두 사실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이사야 45장7절의 말씀도 하나님이 친히 악을 행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악이 행해지도록 예정하셨지만 구체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하나님은 실제로 악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 강요』에서 지혜롭게 말합니다.  “다른 악행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며 주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신 심판을 이루시도록 이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의 행동을 사용하시고 그의 심판이 임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도 모든 악으로부터 순결을 유지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목적을 위해 악을 사용하시지만 악을 행하지도 않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거나 의로우신 분이 아니시며 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고(욥 34:10),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악이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28).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지도 않으셨는데 악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분이 원치 않고 의도하지 않은 악들이 이 세상에 점점 더 많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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