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는 말씀에 기뻐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신자들 중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눅 6:46), 귀신들이 결코 억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저 이 구절을 가지고 자신을 옹호하는데 사용합니다(요 10:28).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지 않는 자유를 신학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뿐이지(마 7:21), 만약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울 왕처럼 얼마든지 원수의 시험과 억압을 대적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삼상 16:14, 18:10).  한 마디로 이 약속의 말씀(요일 5:8)은 믿는 자의 순종 여하에 따라 좌우 된다는 것입니다(요일 3:21-22).  그래서 베드로는 한 때 자신이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마귀에게 이용당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충고를 한 적이 있었고(벧전 5:5-9),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신자들에게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 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약 4:7).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주의 자녀라도 교만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얼마든지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0:7-12).  다시 말해 십자가로 인해 신자들이 악의 세력에서 무장해제 된 것은 사실이지만(히 2:14-15), 아직도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엡 6:12).


사실 마귀는 닫혀진 문을 통해서는 들어올 수 없고 베드로나 가룟유다와 같이 책 잡힐만한 행동을 했을 때(마 16:22) 들어오게 되는데(요 13:27, 30), 가령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마귀를 만나거나 또는 집을 찾고 있는 귀신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영적전투에는 일정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요 8:44), 사탄 나라의 조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엡 6:10-13),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악의 세력에 의한 영적인 속박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Thomas White는 영적인 속박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네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한 우상숭배, 분노, 증오, 원한, 성적인 방종과 조상의 죄가 후대에까지 물려 내려온 경우, 그리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범죄인 강간, 근친상간, 폭행, 더 나아가 마귀의 공격목표가 된 목회활동이다.”  그러면서 처음 세 가지는 사탄의 계략이 인식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의 공격과 억압을 잘 분별하는 가운데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누군가가 귀신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탐욕과 거짓말로 가득 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죄 문제를 간과할 수 없고(행 5:3), 이것은 저절로 생겨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Occult Bondage and Deliverance』의 저자인 Kurt E. Koch 박사는 정신병 환자와 귀신들린 사람을 구별하는데 있어 중요한 점을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은 악령들이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관하여 감추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정말로 귀신들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철저히 감추려하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마귀는 아주 교활하고 간교하며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요 10:10),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고후 11:14), 마치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였던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끌고 간 것처럼(요13:2, 27, 행 1:25),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전쟁을 경험해 본적이 없거나 성령의 사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목회자에게는 이 말이 조금 비위가 거슬리거나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Maxwell Whyte가 말한 것처럼 만일 우리가 육체의 속성에 굴복하여 손과 눈과 귀를 그 속성에 내어준다면 그 특정 부위에 해당하는 귀신들이 그 부분을 차지해 버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간이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과 금을 보고 탐내듯이(수 7:21), 정욕의 귀신은 눈을 점유하고(요일 2:16), 이렇게 들어온 귀신은 신자의 선한 판단을 거스려 죄악된 행위를 점점 더 많이 행하도록 계속 부축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음란한 영화가 시각이나 청각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오도하고 색욕을 자극하여 마귀가 역사할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 12:43-45).


따라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악 가운데 살아갈 경우에는 그들이 사탄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귀신들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귀신이 신자의 삶 가운데 발판을 마련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빨리 몸에 침투하는 방법은 죄를 통해서인데(갈 5:19-21), Francis MacNutt 박사는 이것을 ‘체내 침입’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귀신들이 체내에 침입할 수 있는 근거로 John WimberKevin Springer는 『능력치유』에서 여러 가지 죄악된 행동들을 열거하는데, 그것은 부당한 분노와 타인들에 대한 증오심과 자기혐오, 그리고 복수심과 탐욕과 성적인 범죄와 변태적인 행위, 즉 성도착증, 동성연애, 동물과의 성교행위, 더 나아가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을 통해 귀신의 영향을 불러들이는 문을 열어 놓게 된다고 경고하면서 “나는 악령이 들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그들에게 자신과 또는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 ‘밀교’나 ‘사교’ 특히 동양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이 없었느냐고 물어보곤 한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것들에 관련된 경험이 있을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귀신들림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면서 밀교(密敎)에 관련된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성경구절 출애굽기 20장3-5절, 레위기 19장31절, 20장6-8절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귀신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는 과정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구약에서는 사울 왕이 계속된 불순종으로 인해(삼상 13:8-14, 15:17-23),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삼상 16:1),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6:14).  신약에 와서는 초대교회의 신자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그 모든 수입을 교회를 위해 헌금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이들 마음속에 탐욕이 생겨 그 돈의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남겨 놓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을 때, 베드로는 지식의 말씀을 통해 이들의 잘못을 알아내어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쉽게 말해 탐욕이란 죄 때문에 이들 부부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들의 마음을 거짓말과 속이는 영들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의 영을 시험한 것입니다(행 5:4, 9).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이와 같은 일이 생길 수 있고(살후 5:19, 히 10:29), 무엇보다도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육체에게 죄짓는 것이며(갈 5:19-21), 그런 죄를 통하여 마귀가 침입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의 본성에게 죄를 짓는 것(막 7:21-23)과 마귀에게 공격당하는 이중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날마다 점검하는 가운데 죄와 싸워야 하고(히 12:4), 또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겸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막 16:17).


오늘날 마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을 공격하기 위해 땅에 두루 돌아다닌 것처럼(욥 1:7),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을 통째로 멸망시키려고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찾아다니고 있습니다(벧전 5:8).  그렇다면 마귀가 어떤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삼키고 파괴시킨다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되고 내 안에 계신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기 때문에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가?”(요일 4:4)라는 신학적 강령을 끝까지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것은 논쟁이 심한 신학적 문제이긴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고 경고를 했고(딤전 4:1), 성경은 귀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를 얼마든지 미혹할 수 있으며 신자들 역시 ‘귀신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고후 11:3-4).  예를 하나 더 들어 마귀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와서(고후 11:14), 신자들을 미혹하여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귀신들과 영적간음을 하도록 유혹할 수 있는데(약 4:4), 가령 어떤 그리스도인(남편/아내)이 유혹에 넘어가 다른 사람의 아내나 남편을 범하여 한때 신실했던 부부관계가 깨어진다면 그는 이미 간음케 하는 귀신에게 복종하고 굴복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적의 진영, 사단에게 속박되어 있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눅 4:5-7), 육체의 본성과 욕구를 철저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갈 5:24), 마귀는 그것을 발판삼아 우리를 공격하고 억압하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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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큰 재앙과 그 결과로 일어난 그의 백성들을 그 나라로부터 인도해 내심을 묘사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었던 표현이고(신 4:34, 6:22, 7:19, 23:9, 26:8, 34:11, 느 9:10, 시 135:9), 신약성경에서도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행 2:22)과 사도들(행 2:43, 14:3, 15:12, 롬 15:18-19:2, 고후 12:12), 그리고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의 사역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활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표적’과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고 경탄하게 만드는 ‘기사’는 기적을 행하기 위한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묘사하고 있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그저 한두 가지의 기적이나 치유가 일어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발생했던 장소, 예를 들면 사도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손으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행 5:12),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헬라파 유대인 빌립(행 6:5)이 많은 기적을 행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표적과 기사들은 복음의 선포와 관련하여 신앙부흥이 한창일 때 일어났는데(행 2:43, 5:12, 6:8, 14:3), 이 기적들이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제외한 표적과 기사를 행했던 사람들 중에 사도가 아닌 일반 평신도인 스데반과 빌립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반해 B. B. Warfield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은사들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논의를 널리 보급시켰는데 『Counterfeit Miracles』에서 “특별한 카리스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유가 아니라 소수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기록을 볼 때 매우 분명하다. …사실상 사도의 교회나 혹은 사도 시대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은사들은 분명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은사들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인정된 대리인들로서 사도들 자격 인정물 중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은사들의 기능은 그들을 사도의 교회에 분명히 한정시켰고, 사도들과 함께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쉽게 말하면 은사의 목적은 사도들을 믿을만한 교리 선생들로 확증하는 것이었고 사도들이 죽었을 때 그 은사들도 그들과 함께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표적과 기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행한 많은 기적들을 말하고 있는데(막 6:7, 행 5:12, 19:11-12), 솔직히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스데반과 빌립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행 6:5-6), 이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행 6:8, 8:5-8).  여기서 질문할 것은 Warfield와 그의 신학적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표적과 기사의 주요 목적이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이었다면, 왜 사도가 아닌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Warfield와 오늘날 그의 계승자들이 Jack Deere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도들이 안수했기 때문이고(행 6:6),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의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은 아직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표적과 기사들이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데반과 빌립이 기적들을 행해야 할 이유는 없을뿐더러, 만약 사도들 외에 어떤 사람이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도록 허락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도구로서의 표적과 기사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중단론을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목사/신학자들 가운데서 이 문제에 대해 거의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이 궤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행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은사들의 목적을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같은 부류인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인용한다면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은사들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교회생활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모순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두 제자와 달리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속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교회의 설립자입니다(엡 2:20).  그리고 대부분의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데(행 1:12-14), 여기서 궁금한 것은 “만약 소수의 사람만이 교회를 세우거나, 제자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도 끝났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은(마 28:18-20), 세상을 복음화하고 가르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4:47, 행 1:8).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눅 10:17-19), 만약 소수의 사람들만이 기적적인 은사를 받거나 이 은사가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본문구절은 상당한 모순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해 기적을 행하도록 의도하셨다면, 왜 사도가 아닌 칠십 인에게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었고 사도들과 친분을 쌓거나 사도들 집단의 공식적인 멤버도 아니지만 귀신을 내어 쫓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막 9:38-39).  이것은 기적이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다는 이론에 대한 중요한 예외가 되는데, 한 마디로 초자연적인 사역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스데반과 빌립이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다섯 사람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행 2:43), 다른 사도들 역시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5: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아나니아는 기적적인 사역을 한 비사도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비교적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율법을 헌신적으로 지키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행 22:12).  그가 사울에 대한 사역에서 그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고(행 9:10-18), 이외에도 사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은 아나니아의 손에 의해서인 것처럼(행 9:17), 사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열 두 사도가 아닌 평범한 사람인 아나니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이론들, 즉 사도들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기적들이 사도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신학적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이고, 더 나아가 사도행전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로지 사도들을 통해서만 주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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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글에 가명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댓글을 남기면서 익명성 뒤에 숨으려하는 좋지 못한 자세를 가지고 있지만 정상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언제나 가명보다는 실명을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댓글을 달 때 실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이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예의에 벗어난 댓글을 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에 쓰여진 댓글들을 간혹 읽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공격과 욕설을 무차별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신자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엡 4:18),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불신자 못지않게 비난이나 악성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사람은 ‘말기증상’은 아니지만 귀신들릴 수 있는 ‘초기증세’라고 볼 수 있는데, 성경은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 3:15)라는 말씀처럼, 만약 이런 행동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이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측면을 다루기 위해 마음의 치유와 귀신축출 사역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은 자신의 삶을 조금도 그의 수중에 넘겨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접근할 길이 없지만(벧전 5:8-9), 가령 마음속에 상대방에 대한 미움, 원한, 복수심, 두려움 등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사단에게 역사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엡 4:26-27).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며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믿었던 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은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눅 13:25-27).  마찬가지로 귀신들린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귀신들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막 5:1-20), 그러한 사람에게 귀신을 밝혀내는데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증세들이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귀신에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귀신들린 것처럼 보이는 증세라고 해서 모두 귀신이 역사한 결과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귀신들림’인지 아니면 ‘정신병’인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고(마 4:24, 막 1:34), 귀신들림이 영적인 현상이라면 정신질환은 육체적인 병이기에 귀신들림은 축귀사역을 통해 ‘영적치유과정’을 거쳐야 하겠지만 정신질환은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아이처럼 귀신들림과 신경학적 증상인 뇌전증(epilepsy)이 결합하여 발생할 수도 있지만(마 17:14-18), 이런 경우에는 영적치료와 의학적 치료를 동시에 받아야 하고, 단지 문제가 되는 행동이나 증세만 보고 그 원인이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진단에 의해 좋은 추측을 만들 수는 있지만 영분별의 은사(고전 12:10)를 받지 않는 이상 성령께서 이런 면에 도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Frank Hammond는 『Pigs in the Parlor』에서 축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일곱 가지 징조들에 대해 이렇게 제시합니다.  ① 감정적인 문제들 (증오, 분노, 공포, 거절, 질투, 우울증, 걱정. 열등감, 불안감), ② 정신적인 문제들 (정신지체, 우유부단, 타협, 혼란, 의심, 기억상실증), ③ 언어상의 문제들 (거짓말, 저주, 신성모독, 비평, 조롱, 악담, 험담, 비방), 성적인 문제들 (정욕, 변태, 동성애, 자위행위, 호색, 간음, 근친상간, 매춘, 흥분제 사용, 공상적인 성경험), 중독증 (마약,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약물, 음식), 육체적인 질병들 (귀신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니지만 귀신에게 억압과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던 여자 / 눅 13:10-17), 종교적 오류 (거짓종교/집단들, 기독교 이단들, 신비주의와 강신술, 거짓교리, 사이비). 반면에 Thomas White는 『A Believer's Guide to Spiritual Warfare』에서 위에 열거된 것들 외에 두 가지를 더 추가시켰는데 하나는 생리학적 요인(간질, 편두통, 건망증, 노쇠현상, 조울증, 스트레스, 피로증후군, 월경전 증후군)과 상황적 요인(결혼생활의 파탄, 가족 간의 불화, 재정적인 압박, 가족의 질환, 계절적인 스트레스, 불순한 일기, 우울한 사회분위기) 등을 제시하면서 귀신의 역사로 인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심리적, 정서적, 생리학적 요인으로 인한 경우가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나타남에 의해 직면되어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증세들(심하게 귀신들림)을 열거해 본다면 Francis MacNutt가 말한 것처럼 ‘신체적인 뒤틀림’‘목소리의 바꿈’ 그리고 ‘얼굴의 표정’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체적 뒤틀림의 현상에 대해 찾아보면 마가복음 1장26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체적인 경련 즉 돌발적인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인정하며 드려지는 예배 속에서 혹은 기도모임에서 평상시 그런 일이 전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귀신에게 억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래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누가복음 8장28절에 보면 거라사의 광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상시 음성하고는 전혀 다른 매우 부자연스러운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귀신들린 여성에게 축귀사역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말을 하거나 혹은 비열하고 무례한 음색으로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귀신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것의 가장 흔한 외부적인 표시는 사람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인데, 만약 상담을 받던 사람이 대화중 더 이상 상대방의 눈을 보려하지 않고 눈이 위로 말려 올라가 섬뜩한 느낌의 흰 자만을 보일 때, 이것은 축귀사역자에게 도움 받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징후로 보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인 예로 마귀의 출현에 대한 또 다른 징후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치유사역자인 Francis MacNutt 박사는 『Deliverance from Evil Spirits』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더러운(좋지) 않은 냄새와 무엇보다도 싸늘한 냉기이다. 성령 하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종종 뜨거운 열기를 경험한다. 그러나 악한 영이 나타나면 방안에 차가운 냉기가 돈다.”  이외에도 귀신들린 사람의 증세는 엄청난 완력을 보여주기도 하고(눅 8:29, 행 19:16),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막 5:6-7, 행 16:16-18), 말을 하되 ‘나’ 대신 ‘우리’ 라는 복수로 말을 사용하는데(마 8:29), 자신을 일인칭으로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을 이인칭, 그리고 자기가 내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삼인칭으로 언급하기도 합니다(눅 8:27-28).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징후들이 나타날 때 그것이 마귀의 행동 결과인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합심 기도할 필요가 있고(약 5:14), 아니면 더 숙련되고 경험이 많은 축귀사역자에게 보내야 할지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악한 영의 출현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법이 있다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처럼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서이지만(고전 12:10), 문제는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논쟁이 심한 틈을 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대부분의 교회가 마귀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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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H. Kraft는 기적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다.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치유, 귀신축출, 천사의 보호,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을 통한 계시와 인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 죄인을 용서하는 일,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거나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는 것, 세상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것 등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세상의 관점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적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실재에 있어서는 서양적인 시계관이 그렇게 하듯이 우주를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영적인 특면을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것과 같은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적의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사물을 보고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기준에 따라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저서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나오는 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고 계신 어떤 신비한 영역에서의 비정상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해 놀라운 기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의 선봉에 서있는 John MacArthur는 『Charismatic Chaos』에서 “성경 속에서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다음 세대들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는다. 혹은 성경은 신자들이 성령의 어떤 기적적인 표현들을 구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다시 인용하면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성경에 의하면 은사들은 교회를 강화시키고(고전 14:4),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고(고전 12:7),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MacArthur는 다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이 신자들의 강화를 위해 주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가? 아니다. 사실상은 진실은 정반대의 것이다.”  사실 MacArthur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가 교회를 강화하는 목적에 대해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솔직히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관련된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7절과 14장3-5절에 관하여는 결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인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읽거나 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은사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거나(엡 4:13), 진보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는 진리의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표적과 놀라운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고(막 16:14-20),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역하면 안 된다는 명확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요 14:12), 그분이 하신 일들이 바리새인처럼 눈에 아무리 낯설게 보일지라도(마 12:22-24), 그 일을 우리가 마땅히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행 5:12)과 예수님의 제자들(행 6:8, 8:6)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하는데 있어 능력 나타남과 기적적인 은사가 필요했고(행 8:12-13), 교회의 탄생, 즉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는데 필수적이라면(막 16:17-20), 오늘날처럼 죄악이 넘쳐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하고 악한 세대(마 17:17)에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엡 4:13),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더욱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14:11),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행 9:36-42).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을 했고(행 9:29),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행 17:1-4).  구약성경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을 전도할 때(행 17:16-18), 바울은 어김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지만(행 18:19), 반면에 이방인을 다룰 때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롬 15:18), 말씀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Palmer Robertson은 William Carey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람 마음 가운데 확신하는데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때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인데(행 8:4-8), 그 사례들을 찾아본다면 먼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일어날 때(행 14장)와 귀신들린 여종 사건(행 16장),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들 앞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희한한 능을 행할 때였습니다(행 19장).  이렇듯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에게는 다른 권위와 증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24-25).


D. A. Carson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라고 상기시켰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만 한정되어 있다거나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또 다른 이유로 은사가 기록되지 않은 목회 서신이나 바울의 후기 서신을 내세우면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할 것과 신약성경의 기록의 모든 배경은 사도행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교리를 서신서 위에만 세워서는 안 되고 서신서들은 반드시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타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눅 17;17), 분명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고전 15:1-4),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고전 12:3).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더 확실하게 증거 하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반드시 필요하고(막 16:20), 이렇게 교회 속에 나타난 은사들은 결코 진리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복음의 능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고전 2:4).  그 이유는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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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악의 유혹과 시험에 부딪치고 있으며(벧전 5:8), 때로는 마귀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기에(엡 6:10-18), 사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주의 자녀들에게 영들을 분별하는 가운데(요일 4:1), 악한 마귀의 흉계를 경계하고 대적하라고 말합니다(약 4:7).  이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에 대해 Louis Berkhof는 “어둠의 세력들인 타락한 천사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항하며 선택된 사람들을 눈을 멀게 하고 그릇 인도하려고 하며 또한 죄인들을 자극하여 악을 행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관적인 편집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흘러야 하지만(고전 14:15), 문제는 악의 세력들이 우리의 길을 가로 막고 있을 때 그 귀신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 현실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Lloyd Jones는 『귀신들림, 점술, 강신술』에서 “천사나 성령이나 심지어는 모든 영적인 영역까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더 심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인격과 영적인 영역을 믿으면서도 귀신들림을 정말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시달리거나 공격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경멸적인 어투로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사로잡히다’라는 말은 고통당하는 자를 귀신이 꼼짝달싹 못하게 완전히 차지해 버린다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처럼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막 5:2,16, 18), 이것은 불신자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신자에게 있어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귀신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어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로잡힘’이라는 말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괴로움’‘속박’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용어상의 문제로 발생하는 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C. Fred Dickason는 『Demon Possession and the Christian』에서 “‘다이모니조메노스’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마귀가 ‘들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마귀가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다양한 차원의 지배를 통해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뜻한다. 사로잡힘이라는 개념은 신약의 용어나 그 용례와는 거리가 멀다.”라고 건실한 이론을 제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혼동과 정서적인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말보다는 ‘귀신들리다’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 즉 귀신에게 억압과 속박을 받는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냐는 것입니다.  먼저 ‘들리다’(have)라는 말을 고려해 볼 때 이런 비유가 좋은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령 집에 달갑지 않는 방문객을 갑작스럽게 ‘맞아들일’ 경우가 있는데 만일 생쥐 한 마리가 집에 몰래 ‘들어와 있다’고 가정할 때 여기서 ‘들어와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더러운 쥐 한 마리가 집을 장악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짜증이 나는 귀찮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난 빨리 쥐덫을 놓아 제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도 달갑지 않는 불청객인 귀신들의 방문을 욥이 받은 것처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욥 1-2장).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인 베드로는 자신이 사단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했던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한 적이 있는데, 물론 베드로가 그 당시 사단의 도구로 이용당했다고 해서 귀신이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막 8:33),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단이 가룟유다를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 것처럼(요 13:2, 행 1:25), 베드로를 청구하려고 애썼고(눅 22:31-32), 그가 선한 의도에서 예수님을 견책했던 그 순간까지도(마 16:22), 틈이 있던 베드로에게 사단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과 악령이 결코 한 사람 안에 함께 거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은 결코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겠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마귀가 거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과 혼과 몸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 조금 더 살펴보면 먼저 ‘영’(spirit)을 뜻하는 신약적 단어는 pneuma(눅 8:55)로 육적인 것, 즉 혼과 대조해 볼 때 영은 거룩한 것들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부분인(고전 2:14), 반면에 ‘혼’(soul)을 뜻하는 단어는 psyche(살전 5:23)로 생명 그 자체, 즉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정의하고 있는데(히 4:12), 성경에서 구원받기 이전의 인간은 허물과 죄악 가운데 죽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2:1).  쉽게 말해 육체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엡 4:18).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데(롬 6:4),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영에 자신의 생명을 가져다주셨기 때문입니다(요일 5:11-12).  이것으로 볼 때 죄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성령은 우리의 영속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고전 12:3), 이렇게 거듭난 자는 구원을 얻어 주의 자녀가 되었지만(요 3:6), 그와 동시에 일정 영역은 특정 죄에 의해 귀신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벧전 5:8).


예를 들어 바울은 신자의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 가르쳤는데(고전 3:16),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적으로 오염될 수 있는 성전의 ‘바깥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막 11:15-17), ‘인간의 혼’은 성결한 제사장이 접근할 수 있는 ‘성소’에 해당되고(히 9:6), ‘인간의 영’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성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히 9:7).  만약 제사장의 삶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을 경우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듯이(레 10:1-7), 사단도 전능하신 그분의 거룩함으로 충만한 지성소와 같은 인간의 영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민 18장).  같은 맥락에서 영원한 구속을 위해 성별된 영은(요 5:24), 여전히 타락의 가능성을 지닌 혼과 몸과 구별되지만(살전 5:23),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에 속박되거나 부분적으로 귀신들릴 가능성(억압이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Calvin 역시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에 대해서는 사단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영은 성령으로 점유될 수 있는 반면에 혼과 육(요일 2:16)은 아직 그분의 주권 하에 온전히 항복시키지 않았습니다(롬 7:19).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요 5:24, 골 1:13), 아직 혼과 육체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빌 2:12), 죄악 된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한 구석에 얼마든지 악한 영이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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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시절 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3박4일 동안 연합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수련회 이틀째 되는 날 오락시간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편을 가르고 밀가루 속에 있는 사탕을 집어 먹는 게임을 하다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혼자 수양관 이층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는 당시 고등부 선생 한분이 허겁지겁 상기된 얼굴로 제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전도사님, 큰일 났습니다! 한 아이가 쓰러져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전도사님이 가보셔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갔는데 쓰러진 학생 곁에는 언니만 울면서 남아 있고 선생님 몇 분은 어찌할 줄을 몰라 발만 동동 구루는 가운데 그 많던 학생들은 무서워서 도망갔거나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쓰러진 여자 학생의 얼굴을 보니까 두 손을 꽉 움켜잡은 상태에서 입에 거품을 흘리고 눈은 뒤로 젖어져 흰자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입고 입던 바지는 소변으로 인해 다 젖었고 얼굴은 예전 얼굴이 아닌 완전히 뒤틀린 상태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퍼런 색깔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실 귀신들과의 영적전쟁은 신학교 졸업반 때 한두 번 가진 적이 있었지만 솔직히 축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학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학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전 “만약 이 학생에게 들어간 귀신이 나한데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면서 그 짧은 순간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있는 선생님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전도사님 빨리 기도하세요.”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고, 솔직히 “기도하고 싶으면 먼저 손을 얹고 기도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원망(?)스러운 선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얼떨결에 손을 학생 머리 위에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은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쓰러진 학생 입에서 이물질이 나오고 큰 숨을 한 번 내어 쉬더니 눈이 뒤집혀진 얼굴이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서 몸을 떠는 현상이 멈춘 것입니다.  사실 이 학생의 부모님들은 믿음이 좋고 충성스러운 일군이기에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분들이시고 귀신에게 억압을 받았던 학생 역시 매주일 주일학교에서 예배드리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물론 각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최종 판단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겠지만(벧전 1:17), 이들 가족과 3년 이상 같이 신앙생활을 해왔었기에 이들이 믿음의 가정인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과연 “하나님의 자녀도 귀신이 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Thomas B. White가 말했듯이 악에 대한 승리는 우리가 회심할 때(골 2;15), 이미 하나님께서 보증해 주셨고(롬 8:37-39), 그리스도인들은 마침내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며(고후 5:1-5), 하나님의 자녀는 John Calvin이 말한 것처럼 “신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둔다.”라는 말과 같이 고난 속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롬 8:18-39).  그러나 악에 대한 경험적인 승리는 믿음의 실천을 통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주의 백성들이 쟁취해 나가야만 하기 때문에(엡 6:10-13), 우리는 누군가 회심하면 마귀가 그에 대한 음흉한 계획을 다 포기해 버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문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존재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롬 7:17-24)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악과 씨름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벧전 5:8-9),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과 죄의 결과를 치유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죄지은 과거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요일 1:7), 여전히 강박적인 행태와 정서적인 손상, 그리고 법적인 복권 등의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죄는 용서받았지만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약 4:7).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마귀의 영향력이 아니라 신자의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문제로(롬 7:17), 이 죄는 하나님 자녀의 삶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귀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행 5:1-11).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한 의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견책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를 대적하셨던 것처럼 베드로에게 똑같이 말씀하셨는데(막 8:33), 이것은 주님을 구하려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의도는 좋았고 진실했지만 그 순간 그는 사단에게 틈을 주고 도구로 이용을 당하다가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진심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지만(마 16:16), 사단이 얼마나 간교한지 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에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마 26:69-75).  여기서도 궁금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굴복당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 자신의 생각과 말 가운데서(마 26:33-35), 사단에게 틈을 보였기 때문이고(눅 22:24-34),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죄는 마귀로 하여금 신자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엡 4:26).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귀신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요일 5:18).  사실 사람들이 혼동하거나 문제가 되는 용어는 악한 영에게 ‘들렸다’라는 말과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라는 말인데, 실제로 영어번역본들 가운데는 ‘귀신들림’(have demon)을 ‘귀신에게 사로잡힘’(demon possessed)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막 9:17, 눅 4:33), 이것은 원본에 대한 좋은 해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어에는 그런 의미를 반영하거나 표현을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 성경은 귀신 ‘들리다’라든지(마 11:18, 요 7:20, 8:48-49, 10:20), 아니면 마귀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심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눅 8:27), 마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을 소유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A. A Hodge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마귀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들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고통을 주고 괴롭히며 시험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얼마든지 ‘억압’과 ‘괴로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막 5:1-20), 귀신에게 ‘사로잡히다’라는 용어의 문제는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자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완전히 눌려버린 뜻을 지니고 있기에,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의지를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완전히 악령에게 굴복되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귀신들린’ 상태를 나타내는 헬라어를 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로잡힘’이 아닌 ‘귀신들리다’가 되지만(마 4:24, 막 1:32, 눅 8:36, 요 10:21), 보통 사용하기 적합한 용어는 ‘귀신에게 시달리다’ 혹은 Francis MacMutt 박사가 말한 것처럼 ‘마귀화 되었다’로 이는 어떤 형태로든 악령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가운데 고통과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Mark I. Bubeck는 ‘귀신들림’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다’라는 말이 신자에게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한마디로 귀신들린 사람은 그 속박으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당하거나 시달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이 한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마귀에게 정복당했다는 의미로서 그에게 옳은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라면 그 대답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힌다는 개념은 성서적인 것도 아닐뿐더러(요일 4:4),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바 된 이후로는 죄가 다스리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6:1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여러 가지 차원의 마귀의 공격과 영향력 아래 놓일 수 있고(눅 4:2, 고후 12:7, 엡 6:12, 약 4:7), 만약 마귀에게 죄의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결코 사로잡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귀신들에게 억압과 고통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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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imber에 의하면 1982년 6월 세계복음주의협의회와 세계복음화로잔위원회 후원으로 이루어진『전도와 사회적 책임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회의』에서 27개국으로부터 50여명의 지도자들이 Grand Rapids, Michigan에 모여 복음의 사회적 표적을 토론했는데 그들의 최종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세 번째 표적은 귀신축출이다. 우리는 귀신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비신화하는 것을 반대한다. 정사와 권세가(엡 6:12), 비록 악마적 이념들이나 구조들을 언급하는듯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분명하게 귀신의 명령에 따르는 악한 개인적 지성이라고 믿는다. 귀신들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상황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해지는 능력대결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1989년 7월 Manila, Philippines에서 있었던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2차 로잔대회에서 영적인 전투분야를 담당하고 세미나를 인도했던 전문사역자인 Thomas B. White도 “구원받은 자들의 임무는 깨어 무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적의 술책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서와는 달리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는 현실만을 인정하려는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오늘날 귀신들의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며, 특히 ‘신자의 귀신들림’에 대한 그와 같은 현실을 믿는 것은 고대문화와 성경이 가르친 진부한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체로 회의적인 견해를 취하며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을 ‘비신화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Rudolf Karl Bultmann은 마귀와 천사의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존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고대의 신화들이고, 신약성경의 메시지에서 그와 같은 모든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비신화화 시켜 현대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Kerygma and Myth』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힘과 법칙들이 발견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선한 영이건 악한 영이건 할 것 없이 도대체 영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 없다. 병과 그 치유는 모두가 자연적 인과율에 돌려야 하는 것이지 마귀의 장난 혹은 악한 귀신의 저주 때문에 생긴 결과는 아니다.”  지금 Bultmann이 제시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지하세계로 된 신약의 세계관을 신화라고 비판하고 과학과 인간 자율사상에 근거하여 신약을 재해석함으로써 사단이 없는 현대에서 인간 스스로 무엇이든지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낙관적 인간관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는 찾나니’라고 말하는데(벧전 5:8), 사실 귀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거짓을 무기로 사용하는 귀신에게 속은 것이고(요 8:44), 만약 우리의 오감을 가지고 그와 같은 관여를 느낄 수 없다면 귀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병들었거나 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듯 Bultmann이 귀신이 없다고 선언한 반면에 또 다른 극단은 악한 사람의 죽은 영이 귀신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부류와 아담 이전에 살았던 인류의 영 혹은 노아 홍수 이전 사람과 천사 사이에 태어난 존재로 보는 잘못된 견해가 있고, 더 나아가 모든 질병과 사고와 고통이 귀신이 들어와서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는 귀신론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불신자의 사후가 귀신이라고 보고 귀신들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래 사람이 수명은 80-120년인데 불신자가 자신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죽을 경우 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주로 가족에게 들어가 질병이나 사고를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증거 하는 것은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여 타락한 천사장의 부하들이고(사 14:12-15, 계 13:9), 질병의 원인도 육체적, 정신적, 영적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마 4:24, 요 9:3).  사실 귀신의 활동기간을 불신자가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다음부터 본래 인간의 수명인 80-120년까지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고, 만약 사람의 수명이 본래 80-120년이라면 노아 홍수 이후에 셈의 후예 족보에 나오는 200년 이상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것입니다(창 11:10-26).  이렇게 양극단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귀신의 활동을 단순히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려고 하지만 사단은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계 20:10).


여기서 더 나아가 과연 “그리스도인도 귀신들릴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목회자나 신학자들 중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고전 3:16),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고전 6:19-20, 행 20:28), 성령과 귀신이 결코 한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령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몸에 동시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확정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구약신학자 Merrill F. Unger는 사울 왕이 귀신들린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사무엘상 10장6절에 의하면 사울 왕은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고(삼상 10:1),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지만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악한 영(악신)에게 괴로움을 당한 것을 제시하면서(삼상 16:14),『What Demon Can Do to Saints』에서 ”하나님의 영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시점에 그에게로 들어와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요 14:16). 반면에 마귀는 무단 침입자로 들어와 일순간에 쫓겨날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요일 3:8).  그러면서 Unger는 몇 가지 예를 들면서 마귀는 성령께 복종하는 신자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에 대하여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얼마든지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딤전 4:1).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는 귀신에게 사로잡히지 않지만 귀신이 들릴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John Calvin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은(창 3:15),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단에게 정복되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상처는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 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Kurt E. Koch 박사는『Occult ABC』에서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써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귀신들린 자를 다루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고 부정하는 반면 귀신들린 자를 다수 카운슬링 해 본 경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귀신의 지배를 당하며 제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요약한다면 신약시대보다 현재 귀신들의 활동이 줄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고 불신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요 8:44), 동기가 정직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가혹한 심판을 받았던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3), 그리고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룟유다(요 13:2), 심지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처럼(마 16;17), 만약 누구든지 마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준다면(엡 4:26), 신자라도 얼마든지 귀신에게 억압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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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감리교 신학대학 변선환 교수와 총신대학 박아론 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변 교수는『월간목회』를 통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논박했습니다.  변 교수는 다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박 교수 역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재차 맞섰으나 더 이상 논쟁이 전개되지 않고 중단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D. Bonhoeffer의 영향을 받은 변 교수는 현대 그리스도인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전통적인 종교의식, 즉 예배와 기도와 각족 모임을 통해서는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세상의 삶속에서 주님의 고난에 대한 참여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박 교수는 기독교가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세속을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세속교회, 또는 인류주의 교회관은 성경에 위배될 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 대다수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구원을 어느 한 측면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그 전 과정을 각 단계별로 나누어서 취해진 진술 방법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부르는데, 물론 성경이 구원의 서정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알미니안 교회, 심지어 장로교회 안에서도 학자들 간에 이 견해에 대해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단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엡 2:8), 육체의 질병(마 9:21)과 귀신에게 놓여남을 받는(눅 8:36), 것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악, 즉 전쟁(출 15:2)과 고통(시 34:6)과 원수들(삼하 22:36), 그리고 포로(시 106:47)와 사망(시 6:4)과 죄(마 1:21)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으로 “구원은 총체적인 죄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내놓으신 확실한 해결책이고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에 기초한 과거의 사건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딛 3:5), 별도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현재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으며(고후 5:17), 장래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벧후 4:13).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소유하고 체험하지만 동시에 장래의 완성을 대망하는데(빌 2:12),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롬 8:21).  이같이 바울은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종말, 즉 삼중적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일련의 구속사건으로 이루어진 복음을(고전 15:1-4),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의하고(롬 1:16),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벧전 1:18-19), 믿음에 의해서라는 진리를 선언했는데(엡 2:8-10), 이것은 바울신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구원의 근본조건이 믿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구원론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이(엡 2:8), ‘선행’으로 완성되어야 하며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확산으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열렸던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끝에 사람은 성화은총을 통해 내면적으로 칭의를 얻으며 값없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협력할 때만 선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믿음을 통해서만 구속함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로마가톨릭주의를 대변하는 Ludwig Ott는 막연히 믿는 신앙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교리적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처럼 가톨릭의 입장은 칭의를 전가된 의가 아닌 주입된 의, 즉 사람의 내면을 성화시키고 새롭게 변화시킨 ‘의’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근거해서가 아닌(딛 3:5),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롬 3:21-22),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 것(롬 8:1)과 달리 단순히 죄사함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와 더불어 태어났음을 믿지만(롬 5:12),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는(롬 10:9-10),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악한 생각이나 정욕(막 7:21-23), 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본죄’(本罪), 혹은 ‘자범죄’(actual sin), 라고 말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이 죄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대죄(mortal sin), 다른 하나는 소죄(venial sin)라고 부릅니다.  먼저 ‘대죄’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영혼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죄로 구속의 은총을 잃게 하는 것으로 이유 없이 성일이나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 술에 만취되는 것, 물건을 절도하는 것, 다른 종교서적을 읽는 것, 등을 말하고, ‘소죄’는 대죄처럼 심각한 죄가 아니며 영혼을 죽이지 않고 구속의 은총을 빼앗기지 않는 가벼운 죄로 험담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 과식하는 것, 싼 물건을 훔치는 것 등으로 이 소죄가 계속되면 대죄(大罪)/중죄(重罪)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톨릭대사전에 의하면 인간은 ‘성세성사’(聖洗聖事)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으며 성세성사를 받은 이후 범한 죄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차이는 ‘성례’(sacrament)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마 28:19)와 성찬(눅 22:19-20) 이외에도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견진’, ‘고해’, ‘종부’, ‘신품’, ‘혼인’ 등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성례 즉, 성사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 성례 자체가 은혜를 준다고 가르치기 때문인데,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고 성사 없이는 하나님과 상통할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사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구원에 대한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 점이고, 개신교에서는 성경의 교훈 밖에 아무것도 믿는 바가 없는 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온전한 성례로 인정받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더 추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을 명하신 것은 성경을 통해 쉽게 증명할 수 있지만(막 16:16, 고전 11:26), 그 밖에 다른 성사들을 명하신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엡 2:8), 결코 어떤 외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형식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말처럼 성례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 이전의 성도들과(창 17:10),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회개함으로 성례를 받을 수 없었던 강도의 구원에 대해 결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눅 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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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Mariology)은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교리학으로 그녀의 인격과 구속 계획, 특히 성육신에 관련하여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간략하게 핵심을 정리한다면 ① 마리아는 예수 출생 후에도 처녀성을 잃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일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고 죄 없는 삶을 일평생 살았다. ③ 마리아는 지상에서의 생애를 마친 후 몸과 영혼이 승천하였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⑤ 마리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고 구속에 있어 예수와 함께 간접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개신교의 견해와 전혀 다른 구속에 대한 원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이고 이들은 이것을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옹호하고 있는데, 사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됨에 따라 ‘이교’(異敎)의 여신신앙들이 교회에 들어와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4세기에는 ‘영원한 처녀성’ 주장과 431년에 개회된 에베소공의회에서 그녀를 ‘천주의 모친’으로 승인했지만 이런 마리아 예찬이 가톨릭에 의해 과도하게 행해지도록 된 것은 1854년 ‘무죄수태’ 교리와 1950년 ‘성모승천’을 교리로 선언함으로 더욱더 심화되었습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눅 1:26-35), 문제는 교회에서 그녀의 상(像)을 중심으로 발전한 숭배에 대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명분이 역사나 신학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는 이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적 근거로 마 1:16, 13:55, 눅 1:27, 43, 요 2:1-5, 19:25, 행 1:14, 등을 마리아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들로 사용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그녀에게 돌리는 영광과 역할에 대하여 지지하는 곳이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침묵하고 있고 오히려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증거를 막 3:33-35, 눅 1:47, 2:49, 11:27-28 등에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및 유년의 기사들 외에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마태는 주로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하면서(마 1:16), 예수님이 잉태된 것은 두 사람이 정혼을 하되 아직 결혼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일임을 분명히 밝혔으며(마 1:18-25),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진술은(마 1:25), 두 사람이 그 후에 정상적인 결혼생활 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처음 두 장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라는 아기를 낳을 것을 ‘고지’(告知) 하였고(눅 1:26-38), 여기서도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것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령이 잉태케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독특할 역할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모습과 천사가 그녀를 가리켜 은혜를 베푸는 자가 아닌 ‘은혜 받은 자여’라고(눅 1:28),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간 일(눅 1:39-56)과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일, 즉 목자들이 천사의 명령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한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눅 2:1-20), 이어서 할례를 받은 일(눅 2:21)과 성전에 데리고 가서 공헌한 일을 언급하고(눅 2:22-24), 성전에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님 때문에 칼이 그녀의 영혼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25-35).  마지막으로 열두 살 때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눅 2:41-51), 여기서 마리아는 아이 예수에게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애정 어린 꾸지람을 듣는데(눅 2:41-51), 비슷한 종류의 꾸지람이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에도 나오고(요 2:1-11), 그 밖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사 중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간간히 기록되었을 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혈육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3:31-33, 눅 11:27-28).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가 곁에 있었던 일(요 19:25-27)과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성경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직 사도행전 1장14절에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마리아를 흠 없는 성모로서 높이는 것은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내포할 뿐 아니라(출 20:4),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가톨릭에서 성스럽게 높이는 마리아가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서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처음에는 두 번씩 외웠고, 1986년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에 의하여 두 번씩 되풀이하던 것을 지양하고 한번만을 외우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평생토록 남자와 성관계를 한 번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라고 선언했지만 성경은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살지 않았고 많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있는데 특히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네 형제들과(마 13:55), 그의 누이동생들이 나옵니다(마 13:56).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이들은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마 12:46-50), ‘다른 친척’ 혹은 ‘이종사촌’이라고 공식적으로 가르치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가톨릭만이 가지고 있는 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역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섭리해서 원죄 없이 태어난 특전이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성경에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기 3장15절누가복음 1장28절을 들고 나오지만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는 보지 않았고, 비록 1854년 교황 Pius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라고 선포했지만, Thomas Aquinas는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은 온 인류에 원죄가 없고(시 51:5, 롬 5:12), 자범죄가 없으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히 4:15).  한마디로 마리아가 원죄가 없고 죄 없이 거룩하게 살았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에 의해 선포된 마리아가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는 ‘몽소승천’(夢召昇天) 교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성모승천을 말하는 것으로 이 교리는 4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주의적 신약외경에 처음 나타나지만 7세기경에 이르러 동/서방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승천축일을 정해 지키기도 했으며 마침내 1950년 교황 Pius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까지도 승천하였다고 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은 오순절 이후의 마리아의 생애에 대해 믿을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핵심적인 이유는 그녀를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토록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상천하의 모후가 되고 그 모성이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선언했는데,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모친인 것은 맞지만(마 12:46), 천상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요 8:58),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에(빌 2:6), 가톨릭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마리아의 구원의 중보성 그리고 기도의 유효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들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사건을 내세우면서 마리아는 참된 중개자인 예수님을 낳은 모친이 되는 만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밀접하고 탁월한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녀가 주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 문제를 위해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대사전을 인용한다면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및 지상생애에서 이룬 구속행위 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세말까지 그의 구원활동에 온전히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 말해주듯이 초기 기독교 교부 중의 한 사람인 Epiphanius가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들과 싸웠고, 5세기에 들어서는 Nestorius 논쟁을 계기로 보편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Theotokos’ 즉, ‘하나님을 낳은 자’로 묘사했는데 이것이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개념으로 대두되었고, 이런 개념들은 그녀의 무원죄 잉태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주장에 의하면 하와(인류 타락의 원인)와 마리아(인류 구속의 원인) 간의 대조는 그녀가 구원경륜에서 중재역할을 맡고 있다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섬김과 동시에 마리아에 대한 개념이 대중신앙에서 많이 강조되었고 아울러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개념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해괴망측하고 이상한 교리가 오늘날 가톨릭을 대변하는 것은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버금가는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하려는 잘못된 사상으로 성경은 이를 지지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교리들은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발로’(發露)일 뿐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중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으며(딤전 2:5),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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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성’이란 계시된 교훈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은 세계 공의회들과 공인으로서의 교황은 신앙과 윤리를 가르칠 때 오류에서 면제된다는 내용으로 이 결정은 가톨릭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마태복음 16장18절과 누가복음 22장31절 그리고 요한복음 21장15절 말씀을 근거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재확인 되었고 또한 교황이 그 직권을 가지고 말할 때 특별한 방법으로 이 권위를 지닌다고 말하며 B. C. Butler의 『The Church and Infallibility』와 George Salmon의 『The Infallibility of the Church』에 의하면 교황의 무류한 범위는 “신적인 믿음의 퇴적물만큼이나 넓어서 거룩한 위탁물로 간직하고 충실히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이 무류성을 교회의 임무에 적용시켜 규칙을 결정할 경우 그와 같은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톨릭에서는 교황 무류설을 변증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한때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교황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다가 바티칸으로부터 가톨릭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독일 튀빙겐대학교의 Hans Küng은『Infallible?: An inquiry』에서 개신교회의 논쟁과 같은 열정으로 교황 ‘무류성’(無謬性)의 허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이 교리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그 대신 교회의 ‘무흠성’(無欠性)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눌 때 17절 이후에 나오는 구절부터 가톨릭교회와 의견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을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맨 처음 교황에 임명되었고 그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교리의 근거로 두면서 신약에서의 베드로와 역사에서의 로마교회의 지위라는 근거 위에 정립한 ‘교황 수위권’ 즉, 가톨릭에서의 교황은 사도들 중 수위인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로마의 대주교이고 교회 규율과 정치에서 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 문제에서도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를 관한할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태복음 16장18-19절 말씀을 로마 지교회의 최초 주교로 베드로가 임명되었고 그가 로마에서 그의 후계 주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인계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해석합니다.  Water M. Abbott가 쓴 『Documents of Vatican II』의 글을 인용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교훈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 개인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도록 허락하셨고 천국의 열쇠도 그가 홀로 갖게 하셨으며 모든 양떼의 목자로 그를 임명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가톨릭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반석’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인데 비록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믿음과 통찰을 계시 받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첫 번째 사람이며(마 16:16-17), 초대교회의 지도자와 대변인으로서 그의 역할을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행 1:15, 2:14), 문제는 이 문맥이나 다른 어떤 서신서에서도 그의 사도직 계승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를 최종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세우고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있었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성경적/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고 전승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로마에서 대감독이 되어 선교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전해지지만(요 21:18),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는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는 부류와 로마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행적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많은 내용을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인 연구는 불안전한 학문이고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연구가 아니라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에서 오순절 이후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베드로가 취했던 사도(벧전 1:1)적 권위는 교회를 세울 모든 신자들의 기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교회 설립에 관해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을 반석으로 교회가 지어졌다고 말하며(벧전 2:4-8),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고(엡 2:20),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3:11).  그리고 마태복음 16장19절에 ‘매고’ ‘푸는’ 권세 역시 ‘토라’ 해석에 기초한 행위를 허락하거나 허락지 않는 랍비적 개념으로 여기서 매고 푸는 권세는 가톨릭의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열 두 제자(교회전체)에게 위임된 것이고(고후 5:18), 그들이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할 때에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막 4:1-9),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막 16:15-16).  요약해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롬 10:9), 즉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신앙 고백한 것과 동일한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고(요 20:28), 또한 ‘참된 교회’란 어느 사람이 세운 종교나 단체가 아니라 오직 반석이시고 모퉁이 돌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으며(엡 2:20),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마 16:15-16),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마 18:20)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교황의 수위권’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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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기독교 10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인구의 4분의1에 해당되는 큰 교세를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울 시내를 돌아보거나 밤에 남산에 올라가보면 불과 몇 미터 사이를 두고 크고 작은 교회들이 같은 상가 안에 혹은 길 하나를 두고 들어서 있는 것을 볼 때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와는 분명 다른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교회들 중에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의문시 되는데 오늘날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실상은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들이 적지 않은 상태이고(계 3:1),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기보다는 지탄을 받는 일이 허다하며 신자조차 자신의 삶 가운데 불신자와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빌 3:18).  성경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고전 13:1-2), 요즘 현대교회는 이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분열과 분쟁이 그치지 않아 교파 간에 교리만 조금 달라도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 경쟁 상대로 여겨 대화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고 과연 이런 교회들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고 뜨고 서로 싸우다 멸망당할 교회들(갈 5:15)에 대해 Hans Küng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죄 많은 동시에 거룩하고 거룩한 동시에 죄 많은 공동체이다”  그러면서 교부시대 이래로 자주 일컬어지고 있는 비유를 들어 교회는 하나의 ‘순결한 창녀’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세상으로부터의 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일수록 유사품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 땅에 세워진 유일한 제도로서(행 20:2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사 43:7, 21), 그 구성원을 영생으로 이끄는 교회들 중에는 ‘사단의 회’(계 2:9), 즉 거짓된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인데(요 10:10), 만약 이것을 깨닫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참된 교회에 속하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이방신전들에 관해 논한 적이 있는데(고전 10:19-22, 12:2), 여기서 ‘이방신전’이란 거짓된 종교 모임을 말하고 계시록에 나오는 ‘사단의 회’ 역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참된 유대인이 아닌 자칭 유대인의 모임을 가리키는데(계 3:9), 바로 이런 것이 거짓된 교회의 모습이며 이들은 사단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교회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식하게 해주는 독특한 특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 LutherCalvin은 견해를 같이 하는데 Calvin『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반복적으로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주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말씀과 성례를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진리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고 성례를 행하지 않는 교회, 인간적인 교훈이나 듣기 좋은 허탄한 이야기(딤후 4:3-4), 즉 망령되고 거짓된 교리가(딤전 6:20), 선포되는 곳에 참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믿음을 통한(엡 2:8), 구원의 복음 소식을 감추거나(롬 1:15-17), 성경 말씀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진실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위격을 부정한다면 그 어떤 모임도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행 20:28),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요일 4:6).

 

이렇게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요 8:31-32, 47, 14:23, 요일 4:1-3,),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키도록 명령하신 ‘세례’와(마 3:13, 28:19), ‘성찬’을(마 26:26-30),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시행하는데(행 2:38, 고전 11:23-26, 갈 3:26-27), 여기서 세례는 사람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수단이고, 성찬은 교회의 지속적인 회원임을 표시하는 수단이긴 하지만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볼 때(마 26:25-28),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행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행 1:16-18).  따라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서 “성례는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은혜 계약의 거룩한 표요 인치심”이라고 했고, Calvin 역시 “성례를 올바로 거행하게 될 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해 주며 또한 견고케 해주는 방식”이라고 강조했지만, 만약 이 성례를 집행함에 있어 성경에 가르치는 바에 따라 죄의 용서와(행 2:38), 주님과의 연합(갈 3:26-27), 그리고 새 생명으로의 부활과(롬 6:3-5),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됨을(고전 12:13), 확신하지 못하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마 28:19), 집행되지 않는다면 성례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세례와 성찬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그분과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는 성례의 근본 뜻과 의미를 상실하고 시행한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말씀과 성례의 시행이 있을 뿐 아니라 ‘권징’의(마 8:15, 살후 3:6-16, 딤전 1:20, 딛 1:13, 계 2:14-20), 신실한 시행도 뒤따르는데 그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모인 교회 안에는 성도의 성결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만약 교회가 성결함을 훼손하는 죄악된 행위를 고린도 교회처럼 치리하지 않고 묵인한다면(고전 5:1-8), 교회는 더 이상 순결성을 유지할 수 없어 급속히 부패할 것입니다. 사실 Calvin은 권징을 중요시 했지만 『French Confession of Faith』에서는 참된 교회를 식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말씀’과 ‘성례’를 강조했고, 후에『Belgic Confession』이나 이것보다 앞서 작성된 『Scots Confession』에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권징’을 교회의 삼대 표지로 정의했으며 이것은 후에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분시키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특이한 경우로는 구세군처럼 예배 속에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 안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거짓 확신을 심어주거나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성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악용하여 엘리 제사장처럼 범죄한 사람들을 묵인하고 내버려 둔다면(삼상 3:13), 그런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처럼 인간의 비위를 맞추거나(미 3:11), 권징이 올바로 시행되지 않는다면(마 18:15-17), 그러한 교회 역시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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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 교회의 시작과 확장에 대한 상세한 이해는 주로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후 33년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것으로 여겨지고 십자가에 처형되던 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은 오순절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강림사건인데 이로 인해 어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점화시킨 그리스도 복음의 불꽃이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빠른 속도로 로마까지 퍼져 나갔고 그 당시 로마제국에 있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끼친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 그리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누어 불렀지만 11세기까지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는 언어, 철학적 경향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수장(首長)이 없이도 하나의 가톨릭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은 2세기 초 안디옥 감독이었던 Ignatius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 곳에는 가톨릭교회가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2세기 말에는 각 지역 개교회에 대조되는 보편교회이자 이단적 종교집단들에 대조되는 정통이라는 의미로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이라는 용어에 대한 좀 더 제한적인 이해는 로마교회와 로마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교회들을 분리시켰고 교회사 전체를 통해 주요한 분열이 세 번 일어났는데 먼저 주후 553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본성을 중심으로 한 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입장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들 간의 분열과 주후 1054년에 권위의 구조를 중심으로 한 서방(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일어났던 분열, 그리고 1517년 ‘양성론’(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서방교회 안에서 일어난 ‘항의자’(신교)라 일컫게 된 기독교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사이의 분열을 둘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교회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지만 당시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초기 기독교 300년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함께 예배드리고 일하며 기도하고 생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Constantinus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후 445년에 이르러 교황 Leo가 지도권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라고 선언했을 때 이러한 주장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섬기는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들 가운데 가톨릭에서는 자신들의 성경해석에 근거를 두고 “가톨릭교회 외의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정말 “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하고 참된 교회인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신자들이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읽을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그전에는 개인이 성경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성경해석에 있어 가톨릭 교권만이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었던 James C. Gibbons는 『The Faith of our Fathers』에서 “교회는 성경 해석자와 보관자를 성스럽게 지정했으며 하나님은 살아있는 교회의 권위를 떠나서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법칙으로 삼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가톨릭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하나님 말씀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오류를 고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교정 수단을 스스로 박탈해버린 것으로 Hans Küng의 말을 빌리면 자신들이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이 어떤 권위들에 의해서만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에 의해서도 읽혀지고 해석되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Martin Luther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각 사람이며(요 5:39), 그리고 각 개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공부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권면합니다(골 3:16).  물론 성경을 배우는데 있어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행 8:30-31), 문제는 예수님께서 탁월한 성서학자나 목사, 그리고 가르치는 자들이 완전무결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약 3:1), 이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기는 하되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해석하거나 어느 한 부분만을 주관주의적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마 23:15, 눅 11:52), 가톨릭에서도 신자들에게 성경해석 권한을 주지 않고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하는 두 번의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권좌 즉, 사도계승의 최고 권위로 그가 신앙과 도덕에 관계되는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절대적으로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마태복음 16장18절에 기록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에 기반을 두고 잘못된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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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 Bruce는『열 두 제자 훈련』에서 “하나님의 일에 뛰어 들어 열매를 남긴 위대한 사역자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고난의 인물들인 까닭이다. 세상의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는 것은 도덕적 위대함과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대가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친구들’에게 주신 특권 중 하나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필수적이고(요 15:18-20),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세상으로부터 고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요 16:1-3).  그리고 사도 바울이 쓴 신약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도에게는 ‘특징’과 ‘표징’들이 있는데(마 10:1, 막 6:7, 행 2:43, 5:12, 6:6, 8:14-17, 19:6, 고전 12:12), 이러한 특징과 표징들은 다른 하나님의 사역자들 중에 사도는 아니지만 소유할 수 있으며 만약 사도라고 하면서 이런 특징과 표징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고후 11장).  따라서 사도적 직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에게든 해당하는 어떤 일반적인 특별한 특징과 표징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데(눅 9:1-11),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도(계 2:2), 이러한 특징이나 표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며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사도의 표징들에 대해(행 5:12), 바울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 번째 표징은 사도의 ‘고난’으로(고전 4:9-13, 고후 4:7-12), 이 고난당하는 목적은 고린도후서 4장7절에 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고후 6:3-10), 그 어느 누구도 질그릇 같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그 질그릇을 사용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믿게 하기 위하여(딤후 2:20-21),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오해받는 것과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고후 12:7).  다시 말해 이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위대함을 통해(벧후 1:16-18), 사람들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행 3:12), 이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사도들이 단지 인간이고 나약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고후 12:9-10).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따르면(행 14:22), 고난과 박해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도들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며(고후 11:23-33),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참 사도로서 고난의 흔적이 없거나 사람들을 통해 대접 받기만을 좋아한다면 사도라는 말을 삼가 해야 하고(갈 6:17), 성경에 보면 죽을 것 같은 고난을(고후 1:8-9), 사도들은 누구나 경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요 21:18).

 

두 번째 표징은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을 보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엡 3:1-6)과 ‘경건의 비밀’(딤전 3:16), 그리고 ‘이스라엘 회심에 대한 비밀’(롬 11:25-32)을 보는 거룩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바울은 그가 사람들에게는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던 환상을 보고 계시를 들었다고 말합니다(고후 12:1-4, 7).  세 번째 표징은 사도의 흠 없는 ‘성결성’이고(고후 1:12, 2:17, 4:2), 네 번째 표징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표적’과 ‘기사’들이 따랐는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것임을 사도들에게 약속하셨고(눅 24:49, 행 1:8), 이것은 열두 명(행 2:43, 5:12)과 이후에 나온 사도들의 사역에도 가득했습니다(행 14:3, 15:12, 롬 15:19, 고후 12:12).  물론 표적과 기사는 사도 사역의 표징이지만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도 그러한 사역을 행했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막 16:17-20).  마지막으로 사도의 권위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귀신과 모든 질병을 물리칠 권위가 주어졌는데(마 10:1, 막 3:15, 6:7, 눅 9:1), 이 권위 역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칠십 인을 보내실 때 그 권위가 그들에게도 주어졌고(눅 10:19), 마가복음 9장38-41절에 언급된 익명의 사람에게도 분명히 귀신들을 꾸짖고 물리칠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위에 열거한 사도적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직임에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고후 12:12).  그리고 이상의 것들이 참된 사도들의 표징이었다면 그것을 모방한 거짓사도들이(계 2:2), 초대교회처럼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분별하는 한 가지 매우 단순한 방법은 참된 사도는 건전한 성경적 기초, 즉 하나님의 말씀 위에 새 일을 개척해 나가고 삶의 열매가 있으며(마 7:20),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엡 2:20), 반면에 거짓사도는 분열, 분쟁,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허물어뜨리고 어지럽게 만듭니다(딤전 4:1-3).  Gordon Lindsay는 참된 사도사역에 대해 『Apostles, Prophets and Governments』에서 “진정한 사도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겸손함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임을 공적으로 선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하는 역사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역의 직임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도 사도의 사역을 행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먼저 사도의 사역을 행하면 그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인정받게 됨을 그는 알게 될 것이다”  John Eckhardt 역시 『The Ministry Anointing of the Apostle』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도라면 설교하고 가르칠 때 그 은사가 분명히 나타난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참된 사도는 다른 사역의 은사들 위에 군림을 하지 않을뿐더러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검증된 다른 복음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복종시키는데(갈 2:1-2),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행 9:26), 적어도 17년 이상 사역에 몸담아 오고 있었습니다(갈 1:18, 2:1).  쉽게 말하면 바울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회 초보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전파한 것에 대해 여전히 명성 있고 견고한 믿음의 사역자들과 의논하는 겸손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갈 2:2).  만일 바울이 자신이 받은 계시를 검증받고자 사역자들에게 제출할 필요가 있었다면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검증을 받아야 하고,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도라고 말하면서 말씀에 대한 계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롬 14:4),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인데(고전 14:29), 만약에 판단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거짓사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와(갈 1:12), 사도로서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올바르고 성경적으로 건전한가를 판단받기 원했던 것이고(행 17:11), 그것이 바울이 사역에 오래 몸담아 옴으로 이미 많은 경험을 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사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나누었던 이유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자신들을 은사중단론자로 여겨 1세기 교회 가운데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시대가 끝났고 신약성경이 완성된 시점에서 그 사용이 중단되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래서 “사도를 속사도시대의 직임으로 보기보다 하나의 전문용어로 보는 편이 낫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 사도적 사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나 사도 직함은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초대교회의 근간을 이룬 사도직임은 종료되었지만 사도의 은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여전히 계속 부어지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도에 대해 많은 논쟁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에 거짓사도가 있었다는 것은(고후 11:13-14), 오늘날도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사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롬 11:13, 고전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의 명칭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나타나는 ‘표징’과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면서 위에 열거한 표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칭 사도’일 수밖에 없고(계 2:2), 그 열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마 7:15-18).  그러므로 이 시대에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도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엡 4:11-12), 그렇다고 아무나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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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의사이자 음악인이며 아프리카 내전 국가인 남부 수단의 딩카족 마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백분 활용한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울지마 톤즈』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의사로서의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버리고 문명사회와 동떨어진 내전지역에 가서 10년간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도중 대장암 선고를 받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톨릭에서 또 한 분 있었는데 노벨 평화상을 받은 45년간 Kolkata, India에서 빈민과 병자, 그리고 고아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한 Mother Teresa로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인데 그녀가 죽었을 때 인도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가톨릭을 대변하는 사람 중에 한분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저널리스트 Christopher Eric Hitchens는 『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에서 Mother Teresa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증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는 성녀가 아닌 종교적인 사업가라고 혹평을 하고 가톨릭에 의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과 헌신 무엇보다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솔직히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톨릭 신자와 달리 얼마 전 어느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수는 좋지만 기독인들은 싫다”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답을 했고,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Mahatma Gandhi“나는 예수를 좋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한국 갤럽조사에서도 비종교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교로는 불교와 가톨릭 그리고 가장 선호하지 않는 종교로 기독교를 뽑았는데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이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이유를 “타종교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사랑한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다”,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교회건물에 집착한다”, 등등을 말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실 비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은 개신교보다는 타종교 특히 가톨릭을 더 선호하는 입장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인데 예를 들어 단군상을 부수거나 절간에 가서 기타 치며 찬송을 부르고 땅 밟는 행위 심지어 같은 교인끼리 교회건물 문제와 헌금문제 혹은 교파간의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볼 때 종교(기독교)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위선적이고 부정직하며 너무 모순된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이 가톨릭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가톨릭은 타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사제들끼리 교회건물이나 헌금문제로 싸우거나 법정다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가톨릭에 대한 국민적 신망은 높은 반면에 개신교에 대한 국민적 지탄이 하늘을 찌르고 안티기독교인들이 횡행하는 것은 바로 ‘언행 불일치’와 “삶의 열매”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톨릭에서도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고 예를 들어 권위의 문제에 있어 개신교는 성경만을 절대적 지침서로 사용하지만(딤후 3:15-17, 요한일서 5:13, 신 12:32),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구원에 있어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롬 3:24, 5:1, 10:9-10, 엡 2:8-9), 믿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신덕’(믿음)과 선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목회자 중에 어떤 이들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톨릭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될 것이고(욘 2:9), 개신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마 7:21).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사 55:8).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약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정통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고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단이고 그들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나 많기 때문에(눅 13:22-27), 개신교가 정통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마 13:24-30), 가톨릭에 교리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딛 2:11).  그러기 때문에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구원의 문제를 놓고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하고(시 3:8), 특히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에 대해 눈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판하거나 적대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5).  잠언에 보면 미물인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얻으라고 하는데(잠 6:6), 하물며 타종교에서 모범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면 비판적인 생각을 갖기 전에 먼저 그들의 모범된 삶을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기는 타종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성전을 찾은 세리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고(눅 18:1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행실과 언행을 통해(벧전 3:16),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 모독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롬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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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Berkhof은 삼위일체론에 대해 “삼위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행해진 많은 노력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삼신론’과 ‘양태론’인 하나님 개념들을 도출하게 되었으며 신적 본체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체 안에 있는 위격적 구별의 실제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교회는 다만 적절한 용어를 통해 가능한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Calvin은 후대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민할 것을 알았던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 같이 어리석으며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많은 예증은 인간의 이해를 촉진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마 28:19), 기독교가 ‘다신교’ 아니면 ‘일신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처럼 예수님이 단순히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대속의 문제, 즉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갈 3:13), 또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롬 3:28).  가령 예수님이 피조물로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가르침 역시 공적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돌리게 되어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출 20:3).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이라면, 그분이 아무리 위대해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인간을 섬기는 우상숭배 밖에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레 25:1), 그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14:13).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에 분명히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며 “각 위격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사실 세 위격들이 존재하면서 각 위격이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이 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Herman Bavinck는 “삼위일체의 고백에서 기독교의 심장이 뛴다”라고 말했는데 반면에 이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분 앞에서 영적으로 더 건전하다고 볼 수 있고, 성경은 우리에게 모순된 것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이기에 차라리 완벽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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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Küng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말할 때, 지상의 교회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고 말하며, George Eldon Ladd 역시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지 결코 그 나라 자체일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 속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고 교회는 사람들의 사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제자들이 전한 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설교와(막 1:15), 천국 복음이지(마 24:14), 교회가 가까이 왔다거나 교회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행 8:12, 19:8, 20:25, 28:23, 31).  사실 로마 가톨릭처럼 자신들의 교회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며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거나 세대주의 신학에서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교회 시대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으로 본다면 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그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교회가 천국 복음을 전파함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로 들어올 것이고(막 16:15-16),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사 52:7), 그의 나라의 축복을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포함하면서도 교회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 얻은 자들의 무리만을 가리키는(벧전 2:9), 반면 하나님 나라는 주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을 포함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주님의 구원을 입은 자들이 축복을 입으며 거하는 공간(요 18:36), 그리고 그 안에서 행사되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이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구성원은 동시에 그 나라의 구성원이므로 양자는 일치되는 면이 있으나, 하나님 나라는 그 구성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미치는 영역에 속한 일체의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롬 14:17), 그 범위와 내용에 있어서 교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에 속한 일체를 가리키는(시 103:19),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실제 성경 가운데서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먼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로(눅 11:20), 세례 요한이 말할 것처럼 회개함으로 그 일원이 될 수 있으며(마 3:1-2), 주의 능력으로 악한 세력인 귀신들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고(마 12:28), 비록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급속히 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마 13:31-33), 이것은 눈으로 불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눅 17:20-21), 마치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서(마 13:44), 영적으로 미련한 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루신 그분의 영적 왕권이 미치는 모든 영역이라 할 수 있고(마 12:28),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성도의 마음 가운데 이루어지며(눅 17:20-21),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마 13:31-33, 44-45).  또 다른 의미로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로(눅 22:30), 성경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보다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에 대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마 25:31-46), 이는 사단의 세력들이 활동하는 이 세상보다(엡 6:12), 사단의 세력이 멸절될 그 날에(계 20:10),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이 완전하게 행사될 것이기 때문에(고전 15:25), 성경은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계 21:1-8), 즉 영원무궁한 안식의 세계는 죄악이 남아 있는 이 세상과는 완전 구분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1:43, 눅 22:18, 행 14:22, 고전 6:9, 갈 5:21, 계 21:1-4).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눅 8:10), 부르심에 소망과(엡 1:18), 죄를 정복함(롬 6:14, 14:17), 그리고 마귀의 대적을 물리침과(눅 10:17), 질병에서의 고침 받는 것을 통해(눅 10:9),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느 정도 맛보게 될 것이며, 또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능력인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마 12:28, 롬 8:4-1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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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약 율법에서는 대속 받지 못하는 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신성을 모독한 죄는 그 당시에 사형으로 다스려졌고(레 24:10-23), 신약에 와서 성령에 대한 모독 즉, 성령의 사역에 의해(마 12:28), 입증된 그분의 존재를 항구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최악의 죄로 규정하고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마 12:31).  사실 진정한 고백과 회개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지만(요일 1:7-9), 용서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가 하나 있다면(막 3:29), 그것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죄는 예수님 사역 배후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눅 5:17),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눈으로 빛을 보면서도 여전히 어두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요 3:19),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또한 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거부는 그분에 대한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눅 12:10).  이 죄에 대해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을 중상하였다.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성령이 제시하는 빛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끝 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 중에 ‘용서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막 3:29),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에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죄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불신, 예를 들면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들었지만 끝까지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범하는 죄라고 규정하거나 심지어 심각한 배교 구절인 히브리서 6장4-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죄는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고 성경 본문에서 의미하는 문맥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누군가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물론 그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요 8:24-25),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는 사람을 두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은 없고 불신앙을 소유하고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로 규정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할뿐더러 이 죄가 일반적인 ‘불신’(막 6:3)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모독하는 것’(마 12:31)과 ‘성령을 훼방하는 것’(막 3:29)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본문 문맥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죄에 대해 공관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힘입은(마 12;28), 예수님의 사역에 명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마태복음에서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직후에(마 12:22), 마가복음에서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난 후에(막 3:10-12), 그리고 누가복음은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고 고쳐주신 직후에(눅 11:14),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적인 비난을 받았는데(막 3;22), 분명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마 12:28),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마 12:24), 쫓아낸다고 적대적인 주장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를(눅 5:17),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왕하 1:6),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무 분명하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이고 악한 마음으로 말로 성령을 훼방하고 자신의 사역을 귀신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막 3:29),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1-32).  Louis Berkhof은 이 죄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항하는 죄라기보다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성령의 공적 사역을 거부하는 죄이다”

 

Jonathan Edwards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 마태복음 12장22-32절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사함 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라고 말하면서 『부흥론』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비난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부에 대한 사악한 불경죄이거나 혹은 모르고서 성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모르고 한 것은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자신들이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특하게 영적 실재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빛에 대항한 고의적 죄였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사함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죄가 영적자살에 준하는 행위로서 드러난 진리를 최종적이고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시 영적으로 새롭게 일어나는 부흥을 악의적으로 반대하고 비난하며 마귀의 역사라 부르는 자들은 이제 한 가지 일만 더하면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셈인데 그 일이란 자신들의 양심의 찔림과 상반되는 짓을 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촉구합니다.  “부흥이 임한 곳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탐문하라”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의 이름으로(행 3:6-9),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역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유(악의, 질투심, 교만)로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그 역사를 마귀의 능력에 귀속시키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들을 바리새인들은 주님 앞에서 직접 목격함에도 불구하고(눅 5:17-26), 이것을 거부한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판 바리새인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표적과 기적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신학적으로 틀렸고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비주의자이거나 감정주의자 사람들이 개인의 관계와 체험을 성경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체험해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적대시 하거나 자신이 배운 신학/신앙만이 성경적이고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체험해 보지 않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참된 성도라면 육신이 연약하여 경박한 말과 경솔한 행동을 통해 성령을 근심시킬 수는 있지만(엡 4:30),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행 16:18), 즉 은혜를 주시는 성령을 모독하지는 않습니다(히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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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명을 ‘사도’라고 부르는데(마 10:2), 이 사도라는 명칭은 문자적으로 ‘사자’(빌 2:25)와 ‘사신’(고후 5:20)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요 13:23)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복음서 기자들은 이들의 사역을 설명할 때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막 6:12), 복음서에 나오는 이 기본적인 단어의 80퍼센트 이상은 오직 이 열 두 명의 사도들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었습니다(눅 9: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사도’라는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셨는데, 예를 들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직접 대면한 바울과(행 9장),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포함시키셨습니다(행 14:14, 고전 15:7, 갈 1:19, 살전 2:6).  먼저 사도적 직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사람에 의해 확증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다섯 사람들 모두는 선지자이거나 교사이지만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선지자처럼 환상과 계시를(민 12:6), 받았다는 구절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면에 바울은 계시를 받아(엡 3:3), 신약성경 거의반 정도를 기록한 것을 볼 때에 선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갈 1:11-12).  즉, 바울은 선지자겸 교사이고(딤후 1:11), 바나바는 선지자가 아닌 교사라는 것을 말해주는데(행 15:35), 이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역의 범위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성령께서 따로 세워 보내심을 받을 때까지 아직 사도적 직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다음 구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을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즉, 성경은 그들이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고(행 13:2-3),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첫 번째 선교여행 중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르는데(행 14:14), 이것은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함으로 사도적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엡 1:4), 하나님께서 사도의 직임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26: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사람들의 안수와 예언을 통해 사도적 사역에 부름 받은 것을 확증 받았던 것입니다. Kenneth E. Hagin는 이 사도적 부르심에 대해 『He Gave Gifts Unto Me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내가 지금 부르는(I am calling)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불러 시킨(I have called)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는데(행 13:2), 그것은 ‘과거시제’이다”  환언하면 안디옥 교회에서 사람들을 통해 받은 안수는 단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삶에 계획해 놓으신 사도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단순한 확증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오늘날처럼 교회의 공식적인 인증을 거치거나 사람들의 예언을 통하여 소명을 받고 사역의 직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직임을 받은 사도는 우선적으로 말씀의 설교자이며(막 16:15), 가르치는 교사인데(행 2:42), 성경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처음부터 ‘사도’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딤전 2:7, 딤후 1:11).  다시 말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갈 2:7-9),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먼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행 9:15).  사실 사도의 주된 사역이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이지(행 4:33), 교회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오늘날 사도적 직임과 관련하여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거나(계 2:2), 아니면 Peter Wagner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조정자이며 분쟁 해결자이고 심지어 ‘영적권위’라는 말까지 쉽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은 교회를 조종하거나 지배한다고 나와 있지 않으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우는 동안에 오직 교회에 대해 영적인 감독만 했고(행 16:4), 예루살렘교회나 다른 어떤 교회도 감독하지 않았으며 일단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독권을 이양해 주기만 했습니다(행 20:28).  우리가 서신서를 통해 아는 것처럼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가 질문을 해오면 그것에 대해 바른 조언들을 제공해 주었을 뿐 그들을 조종하거나 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James. D. G. Dunn은 이 문제에 대해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에서 “바울은 그들 대적하는 사람들도 인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명령 투의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베푸는 대부분의 가르침은 명령이라기보다는 ‘권유’이며 그는 개심자들이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권위주의자가 하는 방식대로 자기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고 그는 자기 권위의 효력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공동체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고전 5:3-5, 고후 2:6-8). 그가 사도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자신이 위임받은 사역에서 야기된 문제에 국한되는데 예를 들어 주님의 말씀에 뒷받침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순종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경우에는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 때조차 권위적인 태도를 삼가고 있다”(고전 7:25, 40).  물론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비중 있게 생각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갈 2장), 더 나아가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로 여겨(롬 1:5, 갈 1:1),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잘못된 교리와 교회의 질서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올라온 ‘거짓 사도’들처럼(고후 11:1-15),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스스로 ‘사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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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는 “삼위 곧 세 인격이 합해서 하나가 된다”, 혹은 “삼위는 세 하나님을 가리킨다”, 또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설명들이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들은 부분을 확대하여 하나님 전체를 설명하려는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들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판 아리우스파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인 성령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데 이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면서 왜 성경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골치 아프게 가르치느냐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단들이 도전은 교회사 이천년 동안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사실 Calvin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거대한 신비이지만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 교리는 성경의 기준이 되었고 정통 기독교 교리로 공식 인준되었으며 이후 바른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과 기독교 조직신학 전체의 기초를 형성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신 6:4, 약 2:19), 그 한 분 하나님께서는 각각 독립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마 28:19, 고후 13:13),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기독교 신앙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각 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면 그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딤후 16-18).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하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만을 믿는다면 성부가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 3:17),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며(요일 2:1), 성령이 우리를 위해 성부께 중보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롬 8:27).  또한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한 분”이심만을 믿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한다면 분명 우리는 삼위 중에 어느 분은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리우스파처럼 종속된 분이거나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과 “삼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만을 믿는다면 결과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이 되고 이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충됩니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오류들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에서 비롯되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과 유일신의 신앙 사이를 중재하고 이 둘을 합치시키려는 해석들 중에서 교회에 의해 배척된 두 가지의 극단적 이론, 즉 ‘로고스’이신(요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인했던 알렉산드리아 장로였던 Arius의 ‘종속설’과 하나님은 구속사의 과정에서 세 번 상이한 형태를 취했다는 Sabellius의 ‘양태론’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이론들을 배격하고 Athanasius의 주장에 따라 “아들은 창조되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영원하며 본질이 같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라고 선언했고, 주후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성령의 신성도 추가됨으로서 완전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통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본질상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계시를 다 같이 보존하면서 그분 안에 신적인 서열 단계를 인정하려는 종속론과 하나님이 다른 형태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양태론에 대항하여 지금까지 싸워 왔지만 오늘날 이 교리 논쟁에는 인간적 반목과 정치적 세력에 의해 정통 교회로 자처한 집단들 속에서 그 요소들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본질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삼신론’ 역시 잘못된 가르침인데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부인하는 것으로(신 6:4),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신적 본질을 말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한 신적 본체 안에 있는 세 인격을 증거 하지만 삼신론은 각각 다른 세 개체를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잡다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삼위이시고 세 인격체가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세 분 중에 어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을 일으킬 뿐 아니라 많은 신이 있다고 믿는 이방 종교와 흡사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서 구원론의 신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리는 Theodotus of Byzantium이 말한 “그리스도는 인성이 신성화했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은 신성도 영원성도 없다”라는 주장 역시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잘못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양심에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딤전 4:1-2), 이러한 잘못된 사상들을 끝까지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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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비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 가라지 교인들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진짜 성도처럼 행세를 하고 있고 또한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들 역시 교회 간판을 걸어 놓고 참된 교회 행세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가짜 교회나 가짜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돈 문제나 이성 문제가 생기면 모든 그리스도인 전체가 다 그런 양 비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기독교 교회 내에 소수의 목회자가 추잡할 정도로 돈과 여자 문제로 매스컴에서 시끄럽게 다루는 것을 볼 때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방과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 참된 성도 때문이 아니라 가라지 교인과 삯군 목사가(요 10:12),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통 기독교 교회 안에서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 교회의 물을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단의 자식들로서(요 8:44), 마치 주님의 제자인 것처럼 활동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산 교회 전체를(행 20:28), 욕되게 하고 있는데, 사실 값진 보석일수록 가짜가 많듯이 기독교의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든지 거짓된 교리를 따르는 가라지 교인과 가짜 교회는 있기 마련입니다(딤후 4:3-4).

 

사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 때문에 교회가 세속화됨으로 유형교회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제거하고 순수한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노력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3세기에 나타났던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Novatian으로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치스럽게도 신앙을 버리고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고 그 후 박해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러한 배교자들은 어떠한 참회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교회에서 배척되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말했고 만일 이런 배교자들이 교회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사람들로서 유형교회는 혼합된 교회이기(마 13:47-48), 때문에 교회 정화에 힘쓸 필요가 없고 되는대로 내버려 두자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오늘날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보다 이런 방임적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며 이들은 마태복음 13장24-30, 36-43절의 말씀인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들어 교회 안에서 거짓교인을 구분하려다가 참 성도가 시험에 들거나 상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내버려 두고(마 4:12), 우리는 이것을 구분하려고 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유형교회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물론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처럼 인간의 힘으로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정화’와 ‘치리’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살후 3:14).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15-17절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누가 구원받고 못 받고는 판단할 수 없겠지만(욘 2:9), 교회의 정화운동을 위한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딤전 1:20).  사실 유형교회에 중생하지 못한 거짓 교인이 있다는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참된 신자의 구원을 의심하기 시작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커다란 혼동과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가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직을 보존하지만 이런 교회 안에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일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 받기가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항상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 안에 권징이 시행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공공연한 죄로 인하여 권징 받지 않는 이상 사람들을 공동체의 교제로부터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본질상 교회는 각 지체들이 자신들을 한 몸으로 의식케 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엡 4:15-16),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고전 12:4-5), 은혜를 누린다는 점에서 Augustine와 Luther에 의해 “보이지 않는 교회”로 종종 불리었고 이 무형교회는 Louis Berkhor이 말한 것처럼 유형교회 안에서 상대적으로 그리고 불안전한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지막 때가 되면 완전히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 대하여 연합된 교회는 비록 그 구성원들이 아직 죄를 지니고 있기에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요 8:31-32, 47, 14:23, 요일 4:1-3, 요이 9절),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며(마 28:19, 막 16:15-16, 행2:42, 고전 11:23-30),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될 때(마 18:15-18, 롬 16:17, 고전 5:2, 9-13, 고후 2:5-10, 살후 3:6, 14-15, 딛 3: 10-11), 교회는 거룩하게 되고 이런 공동체는 주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시는 ‘교회’에는 가라지가 섞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예수의 피 값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만이 있는 반면에(계 5:9-14, 7:9-17),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역 교회 안에는 가라지 목사와 쭉정이 교인들이 얼마든지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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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분이 있는 목사님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언’과 ‘예언’에 대한 주제로 옮겨지면서 적지 않게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목사님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귀신들린 사람이 옹알거리는 소리이고 예언은 성경이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면서 아주사의 부흥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계시가 종결되었기 때문에 계시에 수반하는 모든 은사도 종결되었는데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께 직접 방언을 하고 나서 귀신이 옹알거리는 소리라고 말을 하든지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고 나서 이것이 환청에 시달리는 것인지 그분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고 본인이 체험해 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거나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제 개인기도 시간에 방언을 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기다릴 때 주님께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말씀하실 때가 있다고 말하자 그분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그렇게 열려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는데 “목사님 보시기에 제가 귀신이 들렸거나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처럼 보이시나요?”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귀신의 역사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인데(행 4:1-22), 이들에게 있어 진리는 자신의 신학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눈앞에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라고 비난합니다(눅 11:14-23).  바로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이 죄를 짓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는데(막 3:28-30), 그 이유는 자신의 판단이 주님보다 더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요 8:15).  그렇다면 이 죄를 범한 자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반면에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마 12:32).  이 말은 인자가 성령보다 지위가 낮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기간 중에 그분의 메시야 신분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실 ‘인자를 거역하는 말’‘성령을 거역하여 말’을 실제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겸손하고 경외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주님과 요한의 대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주를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을 좇아내는 일을 행하고 있었을 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생각했던(마 10:1), 요한은 분노에 가까운 명령으로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다시는 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막 9:38).  놀라운 사실은 이런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노발대발하시면서 “그 사람이 행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야!”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금하지 말 것”‘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막 9:39-40), 이 말씀의 의미는 설사 주님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다면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무당이나 무속종교를 통해 병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났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을 의지해서 병을 고쳤느냐는 것입니다(행 4:10).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귀신의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고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곳에는 가장 존귀하신 예수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마 1:21), 그것은 귀신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면 그러한 역사를 무조건 귀신들이 행하는 일로 쉽게 단정지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대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요 8:15), 좋은 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스스로의 신앙상태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요한처럼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편이 아닌 사람을 무조건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분명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유대인 마술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행 19:13-16),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을 행한다면 그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며(눅 11:23), 만약 이런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은사를 귀신의 일로 치부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는데 인간이 진짜니 가짜니 판단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고(마 12:36-37), 만약 누군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령의 사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가마리엘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하며(행 5:34),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이라면(롬 8:14, 고전 2:14-15),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을 입술로(잠 18:21), 모독하는 죄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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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사도에 대해 네 가지로 분류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물론 ‘사도’라는 단어를 놓고 어떤 서열로 분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도에 서열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도라고 해서 다 같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의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경은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고(히 3:1), 여기서 ‘사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보냄을 받은 사람’(요 3:17), 또는 ‘위임을 받은 자’들을 의미하며 주님은 모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머리 위에 계십니다(엡 1:22).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골 1:18), 공생애 사역에서 세상에 구원의 좋은 소식을(사 61:1), 가져오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막 1:38), 위임을 받은 자였습니다(눅 4:18-19).  또한 예수님은 고향에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실 때 자신을 ‘선지자’라고 칭하시기도 하셨고(마 13:57, 눅 4:24, 요 4:44,, 행 7:37), ‘복음 전도자’의 직임에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마 1:2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으며(요 10:11, 히 13:20, 벧전 2:25), 동시에 교사이기도 하셨습니다(마 5:1-2, 9:35, 막 1:21-22).  따라서 예수님은 각 사역의 은사에서 홀로 한 서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가장 높은 서열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골 1:15-18).

 

두 번째는 어린양의 사도들로서 계시록에 보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계 21:14), 이 어린양의 사도는 오직 열두 명뿐이고(마 10:2-4), 예수님을 따랐던 이 열두 사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두 번째 서열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 속에서 늘 함께 다녔던 증인이어야만 하고(행 1:21),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만 합니다(행 1:22).  이러한 자격을 가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신약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데 사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엡 2:20).  어떤 사람들은 맛디아가 아니라(행 1:23),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바울이 어린양의 사도로서 자격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적에 중생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분의 부활을 직접 본 증인도 아니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행 9장), 그를 은혜로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났습니다(고전 15:8).  그러므로 어린양의 사도들은 맛디아를 뽑으므로 끝났지만(행 1:26), 또 다른 사도의 직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보내심을 받은 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열두 사도들 외에 더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15:5-9).

 

세 번째는 바울이 속해 있는 사도의 서열로 이들 역시 신약 성경의 교리적인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두 번째 사도들처럼 토대적인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간주되어야 합니다(엡 2:20).  왜냐하면 신약 성경의 복음이 이들에게 계시되었고(갈 1:16), 특히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썼으며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계시를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았고(갈 1:12), 복음의 계시를 초기 신약 성도들에게 전파했기에(엡 3:3-5), 더 이상 오늘날 교회의 기초에 무엇인가를 더하기 위한 부가적인 계시를 받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새 언약의 계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갈 1: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뺄 수도 없을 뿐더러(계 22:18-19), 오늘날 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권위와 똑같은 서열을 받은 사도와 선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미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오늘날 누구든지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보면 사도의 자격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나바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성경은 그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행 14:14).  다시 말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없을지라도 네 번째 서열에 속한 사도들은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라는 단어는 지금보다 초대교회 시대에 더 폭넓게 사용된 것만은 사실인데 문제는 오늘날 그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라는(눅 6:13), 헬라어는 앞서 말했듯이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의 ‘아포스돌로스’로부터 번역된 말이지만(막 3:13-15), 더 정확하게 말하면 ‘특별한 대표’나 ‘특별한 사자’라는 뜻으로 바울은 빌립보에 보내는 사자로서 에바브로디도에 관해 말하는데(빌 2:25), 여기서 ‘사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아포스돌로스’입니다.  비록 바울은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사도로 부르고는 있지만 그는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도의 직임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즉, 그에게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대표자’로서 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구제 헌금을 위해 디도를 보내는 것처럼(고후 8:23), ‘회중의 대표’로 위임받아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물론 그는 두 번째나 세 번째 서열의 사도는 아니었고 신약 성경의 기초를 놓지도 않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어떤 모임에 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는 것처럼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보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사역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13:16), 또는 ‘대표자’(고후 8:23)라고 볼 수 있고 성경 어디에도 그가 바울처럼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적 직임의 완전한 활동범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 받은 자들로서(롬 10:15),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어떤 영적인 방향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나 사역을 가져오기 위해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선교사가 한 도시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그는 네 번째 서열에서 어느 정도 사도적 직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도시에 파송된 모든 목사가 다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만약 어떤 사람이 바나바와 사울처럼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면(행 13:4), 그는 네 번째 서열에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참으로 성령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자가 있다면 그들이 바로 사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사역의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2:42).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많은 이방인 교회들이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는데(행 13-20장), 오늘날 진정한 선교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역, 즉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시작하고 세울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에서 네 번째 서열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Wayne Grudem은 오늘날도 효과적인 개척자들/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용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고전 2:4), 그리고 삶과 사역자의 열매입니다(마 7:20).  만약 이런 표징들이 없다면 그는 사도직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고(고후 12:12), 진정으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스스로 사도라고 부르면서 돌아다니지 않는 겸손함이 있는데 오늘날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이 실수를 범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이 보내심을 받은 네 번째 서열의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도들이 어디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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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술가이자 성직자인 Thomas Adams는 “삼위일체는 오직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으로 그 신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교리는 신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분으로서의 하나님(신 6:4, 갈 3:20)과 세 분으로서의 하나님이(고전 8:4-6, 요일 5:20, 고전 3:16), 동시에 있는 이 신비한 현실에 대해 “삼위 하나님을 한 본체와 세 실체”로 대비되는 개념의 용어로 표현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가 분명히 제안된 표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일체를 이루시는 한 본체요, 존재가 영구불변한 실체이고, 또한 상호 절대 독립된 삼위, 곧 세 분의 인격체이기도 하지만(시 2:7, 마 3:16-17, 행 5:3-4), 바로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이라는(딤전 1:17), 사실을 추호의 차이나 기울어짐이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호 모순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는 신비하게 구현된 그분만의 독특한 존재 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초월하여 구현된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연계와 인생에 '유비'(類比)시켜 이해하고자 한다면 혹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거나 부분적인 이해에 그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Augustine이 『Of Faith and the Creed』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영혼의 구조를 끌어내기 위해 유비를 사용했지만 그가 나중에 고백한 것은 유비와 흔적을 자연과 인간에게서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이 관연 타당한가 하는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저들은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묵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지만(딤전 2:5), 성경은 성부(갈 1:3), 성자(요 1:1), 성령(딤후 3:16)을 구별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마음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유비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이 교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인간 안에 있는 “지, 정, 의”를 연합하여 말하는 것이나 나무의 세 부분인 “뿌리, 줄기, 가지”, 혹은 물의 세 형태인 “물, 증기, 얼음”을 통한 유비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독특한 삼위일체 교리를 훼손하거나 오해에 빠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의 여러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연과 생명으로부터 취한 많은 비유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어 반석과 같고(사 26:4), 돌보심에 있어 목자와 같다는(시 23:1-3), 표현을 사용은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무런 비유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어느 유비도 삼위일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Louis Berkhof이 말한 것처럼 다소 가치는 있겠지만 모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마 28:19), 이 말은 분명 다른 인격체를 이야기 하면서도 가족관계에 있어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Philip Melanchthon이 말했듯이 이 교리는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냥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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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당 건축 문제를 두고 수많은 분쟁과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할 때는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즉 건물로서의 예배당을 이야기 할 때가 많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교회란 단순한 건물 그 자체가 될 수 없고(마 24:1-2),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마 16:16), 그분과 연합된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을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엡 4:15-16).  다시 말해 비록 외형적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교회란 눈에 보이는 건물에 있지 않고(롬 12:1),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가 서로 교통하듯’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성전이나(눅 18:10), 집에서(몬 2절), 아니면 다락방(행 1:13-14), 그 어느 장소와 상관없이 두 세 사람이 모여(마 18:19).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면(요 4:21-24), 그곳이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교회에는 구성원들 모두가 죄인인(롬 3:9),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엡 2:8), 그리고 이렇게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혹은 ‘그리스도의 몸’(골 1;18), 또는 ‘그리스도의 신부’(계 22:17),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계 21:2).

 

이렇게 불리어지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유형/가견적 교회”와(고전 1:2, 살전 1:1, 몬 1-2절),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불가견적 교회”로(엡 1:10, 골 1:18, 24), 구분될 수 있는데 이것은 구교 당시 종교 개혁을 하기 전에는 이런 구분이 없었지만 종교 개혁 때부터 구분하게 되었고 이 구분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Martin Luther였으며, John Calvin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는 교회의 양상(樣相)이 아니라 영적 교회와 조직적 교회의 양면(兩面)을 말한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넓은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는 현재까지 구원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아직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나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피택자(被擇者)들까지 포함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현재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피택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 무형교회는 교파와 교단과 상관없이 거듭난 참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이지만 본질상 영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 신앙을 소유하며 참된 영적교제를 이루고 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고(엡 1:22), 하나가 되어 있는(갈 3:28),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지만(벧전 2:9), 오직 하나님만이 이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딤후 2:19).

 

이 무형교회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하나로 지금까지 모여 들었고 지금 모여 들고 있고 장차 모여 들게 되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의 충만이다”  Louis Berkhof도 무형교회에 대해 “이 교회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영적인 본질이 육안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가 이 교회에 속하였고 누가 이 교회에 속하지 않았는지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이다. 예컨대 거듭남, 참된 회개, 참된 믿음,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 등과 같은 구원의 복들은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외형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적 변화의 외적 증거들을 볼 뿐이지 실제로 그 사람의 마음이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시며(민 16:5), 이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삶과(롬 12:1-2), 예배를 통해(요 4:23-24),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히 12:33), 즉 보이지 않는 교회에 참예하게 됩니다.

 

반면에 유형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지상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구원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세우신 조직을 가리키는데 Wayne Grudem은 유형교회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립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불신자)들이 볼 수 있는 대로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자들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의 교회를 가리킨다”  이 말의 의미는 무형교회는 거듭난 신자들을 포함한 교회인 반면에 유형교회는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교회로서 비록 참된 신자의 눈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불신자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거듭나지 않는 자도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이 두 교회의 구성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유형교회 구성원 가운데 장차 구원에 이르지 못할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 있고(마 22:14, 25:32), 아직 유형교회의 구성원인 되지 않았으나 장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무형교회의 구성원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행 13:44-48).  쉽게 말하면 무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반드시 유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유형교회에 속한 교인이 반드시 무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형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처럼 양의 탈을 쓴 거듭나지 못한 거짓 목사들과(마 7:15),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은 거짓 선생들(딤후 2:16-18), 그리고 회심의 경험은 전혀 없고 육신적인 복(빵)만을 추구하는 거짓된 교인들도 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 6:26-27).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놓고 Augustine의 말을 인용하여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알곡에 가라지가 섞일 수 있다는 것인데(마 13:24-30), 사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LutherCalvin이 교회의 무형적인 면을 많이(물론 사도로부터 끊임없이 계승되어온 유형적인 거대한 조직이라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반대해서) 강조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 것은 주께서 자신의 백성, 즉 누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를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딤후 2:19).  그러나 우리가 이 두 가지 형태의 교회를 간과해서는 안 될 이유는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유기체로서의 교회와(롬 12:15, 엡 3:6), 조직체로서의 교회를(마 18:15-17, 행 6:1-6), 무시하는 ‘무교회주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외형적 제도만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와 같은 ‘교회 지상주의’로 빠지기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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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중립이 존재할 수 없고(막 9:40),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 살던지 둘 중의 하나이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란 없습니다(요8:44-47).  물론 어중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 앞에서 토하여 내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계 3:15-16), 주님은 신앙에는 중간지대가 없다는 것을 마태복음 12장30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끝까지 중립적으로 남아 있기란 불가능하며 적극적으로 주님을 좇지 않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사탄을 좇아가는 추종자들이라는 것입니다(눅 9:50).  한편 예수님은 신앙의 중간지대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바로 인간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31).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있고(엡 4:30),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거나(살전 5:19), 심지어 저항할 수도 있지만(행 7:51), 이러한 죄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예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죄들입니다(요일 1:7).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도 모르게 연약하여 성령께서 싫어하시는 행동이나 말,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함으로 근심시킬 수는 있어도(사 63:10),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때 성령을 근심시킨 것과 같은 맥락으로(마 26:69-75),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1-32), 그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으며(요 21:15-18), 사도 바울 역시 과거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딤전 1:13),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을 용서해 주셨고 택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행 9:15).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면(사 1:18), 그 죄가 무슨 죄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엡 1:7, 요일 1:1:9).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죄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먼저 Augustine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며(롬 2:5), Chrysostom은 이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죄로서 그분이 성령의 권능으로 이적과 기사를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기하여 마귀의 역사로 매도한 사람들이 짓는 죄라고 하며(눅 12:10), 또한 후기 루터파 신학자들은 성령훼방 죄는 중생은 했지만 바울의 동역자 데마(몬 24절, 딤후 4:10), 또는 가룟유다(눅 6:12-16, 요 18:1-3)처럼 신앙을 도중에 버린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히 6:4-6).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이 견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훼방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일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다면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구원교리와 반대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롬 8:38-39, 요 6:39, 엡 1:13-14, 벧전 1:4-5).  다시 말해 거듭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라(요 5:24), 그 구원을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요 10:29),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히 6:4-6, 10:26-2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그리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로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 8:1-2).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유독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이 사함을 받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Louis Berkhof은 이 문제에 대해 그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나 성령의 역사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신 32:39),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인 일과 대조하며(레 24: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성 모독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레위기 24장16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사실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도 참조할 필요는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생긴 배경을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을 때 곁에서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곧 바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주님은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단언하시면서(마 12:22-28), 자신이 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은 인자를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 세대에서나 오는 세대에서도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마 12:32).  여기서 ‘훼방’이란 말은 신적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말로 극단적인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을 말하는데(마 9:3-4), 열왕기하에 보면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살 수 있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자 엘리야가 그 사신을 만나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느냐고 말하면서 그가 죽을 것을 예언합니다(왕하 1:1-18).  여기에 나오는 바알세붑은 불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으로 에그론 사람들은 이 ‘파리의 주인’이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믿은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병자를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그 성령의 사역을 더러운 ‘죽은 파리’(전 10:1)의 신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친다고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막 3:22).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무서운 반역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회개시키는 성령 자체를 훼방하기 때문에 절대로 회개가 되질 않아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히 10:26-27).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예수님의 말씀이나 이적에 대하여 단순히 의심하거나 무의식중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러한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고 내적으로 확신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하여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대해 반항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어떤 역사가 나타날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역사인지를 알지 못하여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알면서도 귀신의 역사로 중상 모독하는 행위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활동을 믿으며(행 23:6-8),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가르쳤던(마 23:2-3), 이스라엘의 선생(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요 3:10).  사실 이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며 그분께서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분별할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은 아닙니다(요 3:1-8).  다시 말해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행 9장),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던 것처럼(갈 1:13-14), 스스로 성도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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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출신 부흥강사인 Todd Bentley가 Florida Lakeland에서 “사도 임명식” 받는 장면을 2008년에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Peter Wager를 비롯해서 그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사람들인 Rick Joyner, Che Ahn, Bill Johnson, John Arnott, Chuck Pierce 외 다수의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특이하게 본 것은 여성 선지자로 알려진 Stacy Campbell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언하는 장면과 Bentley의 안수를 통해 Che Ahn 부부가 쓰러져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들이었는데 물론 이런 경우에 타락한 인간 조건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게 보일 수 있고 또한 쓰러져서 떤다고 해서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과 같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Jonathan Edward, John Wesley, George Whitefield, Charles Finney와 같은 사람들이 집회할 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한 것은 John Stott가 말한 것 같이 사도는 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고 말했는데 이들에게 행해진 임명식이 과연 성령께서 직접 지시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세우는 것처럼 했느냐는 것입니다(행 1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역자의 열매로(마 7:15-20), Bentley는 본 부인과 이혼하고 함께 사역을 했던 아시아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일까요?

 

사실 지금도 논쟁이 심한 것이 ‘신사도 운동’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이단이다” 또 다른 사람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마귀의 운동이다”라고 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도’라는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들이 말하길 지금 시대에는 사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사도라는 말을 쓴다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열 두 사도로서 모든 것이 끝났기에 또 다른 사도는 없다는 것입니다(계 21:14).  그래서 사람들은 에베소서 2장20절 말씀을 인용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사도와 선지자의 직임은 없고 다른 직임, 즉 ‘복음을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직임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도와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만을 주셨으니”라고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엡 4:11-12).  다시 말해 이 은사들이 결코 단절된 적이 없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 13:8).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장12절에 보면 세 가지를 위해 다섯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성도들을 준비시키고”  다른 하나는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존재하게 될까요?  바로 뒷 절에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라고 말합니다(엡 4:13).  환언하면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의 직임으로 불리워지는 사역의 은사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3:10).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자들로 구성된 주님의 몸으로(엡 4:1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2:21, 벧전 2:2).  결코 우리들 중에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은 없고(엡 4:15), 주의 자녀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자라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벧후 3:18), 모든 사역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거나 영적으로 지어져가기 위해 주어진 것들로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친히(엡 4:7-10), 특별한 사역자들을(고전 12:28), 허락해 주신 것은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영적 성장의 목표, 즉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에 다섯 가지 직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로 불리우는 최초의 사람들은 본래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임명하신(막 3:13), 열두 명의 제자들이지만(마 10:2),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마 26:15), 맛디아가 제비뽑기로 선택되는데(행 1:26), 이 열두 명은 유일한 사람들이고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새 예루살렘 성벽 열 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사도들이며(계 21:14).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고(행 1:21-22),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역을 했습니다(엡 2:20).  반면 또 다른 사도들이 있었는데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부흥의 선두에 세우시고 주님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보내셨는데 그 중에 바울(롬 1:1, 행 22:4),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야고보(갈 1:19, 2:9), 그리고 본문에 많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롬 16:7), 사람들을 추가시킴으로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열두 명의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을 추가할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1세기 이후에 또 다른 사람들을 얼마든지 추가하실 수 있고 성경의 어떤 구체적인 본문에도 열두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들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고린도전서 15장5-7절에서는 열두 사도 외에 ‘모든 사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란 용어를 놓고 George Peters는 『A Theology of Church Growth』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교회의 초기 사역에서 사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는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인정된다. 오직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불리며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사도들’이나 ‘교회의 사도들’로 불린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약 성경에 여러 사도들이 나오지만(마 10:1-4, 갈 1:1), 그 어떤 구분만큼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고 다르다는 것입니다(롬 16:7, 고후 8:23, 빌 2:25).  John Stott도 일차적인 의미에서 열 두 제자(눅 6:12-13)와 바울과 같은 계승자(갈 1:1)는 오늘날 존재하지는 않지만 ‘선교사’라는 이차적인 의미의 사도들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오늘날 서로 ‘사도’라고 추겨 세우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사도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렇게 사도된 사람들을 누가 검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Peter Wagner는 이 문제를 놓고『교회의 지각 변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신사도개혁운동의 최고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사도에 대한 점검 문제를 자주 제기하곤 했는데 일관성 있는 확실한 대답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쉽게 결정내릴 수 없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만족할 만한 해답이 없다는 것으로 Wagner 자신도 사도의 증명과 점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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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6:4, 딤전 1:17), 신성으로서의 성부와( 2:7, 벧전 1:2), 성자와( 9:6, 3:16-17), 성령으로( 1:1-2, 5:3-4), 구별된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C. F. Keil & F. Delitzsch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은 철학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사건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셋인 동시에 하나”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어떤 종교나 사상, 심지어 신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기 쉬운 쪽을 따라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이 삼위일체를 개념 짓기 쉬운데 그 결과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삼신론’, 또는 한 하나님과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사신론’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부, 성자, 성령을 완전히 구분해 버리는 삼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신 분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많고 특히 성령에 대해서는 그분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간과한 채 마술사 시몬처럼 단지 무슨 비인격적인 큰 능력으로만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8:19), 이것을 엄격히 따진다면 신성모독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성부가 성자도 성령도 아니며 성자 역시 성령도 아니라는 의미로 이 삼위는 각각 독립된 인격체를 말하는데 성경 요한복음 11-2절과 1724절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를 볼 수 있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증거와(요일 2:1),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성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7:25), 예수님이 아버지와 독립된 다른 위격이심을 보여줍니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도 성령이 아닌데 로마서 827절에 보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령이 독립된 위격임을 보여주며 성자가 성령이 아니라는 사실도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28:19), 그분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14:16), 하신 말씀을 통해 성자 역시 성령과 독립된 인격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6:7).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one simple essence)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three persons) 또는 세 실재가(hypostases)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3:20), 동시에 세 신격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각위가 온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는데, 먼저 성경은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1:1), 바울은 우상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없는 고린도 교회와(고전 8:4-6), 갈라디아 교회 인사말 속에서( 1:3), 인류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신 성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한 적이 있고( 103:19), 예수님도 고난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 사건을 통해( 22:42),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역시 하나님 되심을 성경은 증거 하는데(요일 5:20),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완전한 인간이자( 1:21),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9:6), 사도 요한과( 1:1, 14), 바울( 9:5), 그리고 의심 많은 제자 도마까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진실로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20:28).  또한 성경은 성령도 온전하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물질에 눈이 어두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의 책망과( 5:3-4),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경고 속에서(고전 3:16), 성령은 단순히 어떤 감화력이나 치유의 은사를 내뿜는 막연한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살피시며(고전 2;11), 인생과 교제하시며( 14:26), 발걸음을 지도하시는( 16:13), 살아계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고 각위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지만 성경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강조하는데( 37:16), 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신명기 64절에 나오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엘로힘’이라는 명칭과 동시에 ‘여호와’라는 칭호가 함께 사용된 것을 볼 때에 여기서 여호와라는( 6:2), 성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왕상 8:60), 절대적인 신성을 소유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15:11).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부분과( 10:30), 바울 역시 하나님이 한 분 되심을 고백했으며(고전 8:6, 딤전 2:5),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말합니다( 2:19).  이러한 성경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모세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4:35), 하나님 한 분만이 천하의 왕, 참 하나님이시고 그 이름 하나 밖에 없는( 14:9),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5:5-6).  , 하나님은 삼위인 동시에 결코 나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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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단 문제에 대해 신약 성경에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라는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케 할 거짓 선생들을 언급한 베드로후서 2장1절에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과 요한의 편지들 속에서는 외부로부터 박해 뿐 아니라 내부의 잘못된 교리를 물리치라는 권고가 나오는데(골 2:8-23, 요일 2:22, 4:1-3, 요일 7절), 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웹스터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원리에 대항하고 분리와 이견(異見)을 조성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의견”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항상 거기에 대응하는 반대 세력들이 같이 하고 있었는데(마 13:24-30), 기독교의 진리에 대항하는 다른 의견을 갖게 되는 외부의 적보다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적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행 20:29-30).  수세기 지나는 동안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자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해 왔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실제로는 영이시며 육체를 가진 듯이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가현설’, 그리고 모든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며 지적으로 교화된 자들만이 신앙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2세기의 ‘영지주의’를 비롯해서 현대의 ‘사신론’(死神論)에 이르기까지 정통 기독교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대해 항상 도전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단은 엄격한 교리 차원에서의 교회의 해악을 끼치는 “비정통적인 신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리교 신학자 John Miley는 『Systematic Theology』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교리 안에 기독교 구원론의 모든 위대한 사실들: 대속, 믿음으로 의롭게 됨, 성령에 의한 거듭남, 새롭고 은혜가 넘치는 영적인 삶에 대한 확실하고 충분한 근거가 존재 한다”라고 말하며, 침례교 조직신학자 Millard J. Erickson은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Christian Theology』에서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죄를 대응하거나 하나님 수준까지 자신을 끌어 올릴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연합해야만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서 신성과 인성이 한 사람 안에서 연합되었던 성육신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지 아니하여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말을 쉽게 요약하면 예수님의 신인(神人) 양성은 기독교의 중추적인 문제로서(요 1:1, 눅 2:21), 만일 그분의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것이든지 부인한 것은(요일 4:1-6), 예수님의 참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분을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느 이단/사이비와 종교들 중에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과(빌 2:5-8),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벧전 2:24),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엡 1:7), 그리고 그분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몸으로 부활하신 것과(행 4:10),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벧후 1:21), 권위 있는 말씀으로 믿는 집단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경에 벗어난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고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딤전 6:3-5),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며(딤후 2:16-18), 논쟁하기를 좋아하고(딛 3:9), 예수님의 신성(요 1:18)과 인성(롬 9:5)을 부인하거나(요일 4:1-6), 돈(유 11절)과 호색에 놀아난다면(벧후 2:2), 분명 그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는(딤전 4:1-3), 이단/사이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확실한 것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서로 간에 쓸데없이 개인적인 주장과 이념들 속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부차적인 신학적 이슈들, 예를 들어 ‘은사들’, ‘예정’, ‘성령세례’, ‘견인’ 등에 관한 다른 의견에 대해 시간을 낭비한다면, 이것은 은혜의 참 복음과는 상반되기 때문에 유익을 끼치기보다는 무익하고 헛된 것입니다(딛 3: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우리는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고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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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논쟁거리/교회 2014. 5. 17. 11:57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교회는 다양한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져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이 많고 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교회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는 교회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엡 4:16).  따라서 교회란 단순한 사교 모임이나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소집된 모임이 아니고 또한 한 개인의 영예나 물질적 만족을 위해 구성된 모임도 아니기에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 교회의 바른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계 3:1). Calvin은 교회를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면서『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의 태속에서 우리를 잉태하고 우리를 낳으시며 젖을 먹여 양육하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처럼 될 때까지(마 22:30), 돌보시고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생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품에서 떠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와 구원이 불가능할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통해 거듭 천명된 바가 있듯이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예수님을 믿고 주안에서 성화 되어 가는 자들로 구성된 모임일 뿐 아니라 『스위스 일치신조』에서 고백한 것처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령충만함을 받은 성도들이 지속적인 모임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지만(행 2:43-47), 실상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이전 구약시대에서 부터 이미 있어 왔습니다.  그 예를 찾아보면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에서 그가 독자들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성도들’인데(고전 1:2, 엡 1:1, 빌 1:1, 골 1:1), 이 용어는 바울 자신의 유대적 배경에서 가져온 특정 도시나 지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거룩한 백성’(출 19:6, 신 7:6), 즉,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택함을 받고 구속된 자들로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모인 백성을 가리킬 때 사용될 뿐 아니라(출 19:5-6), 종말에 대한 이상을 기록한 다니엘서 7장18절에서 사용되기도 했기에 바울이 새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데(갈 6:16), 사용된 모든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구약성경 70인역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할’(모으다, 소집하다/신 4:10, 왕상 8:1)의 파생어인 “이스라엘 회중”(출 16:3), 혹은 “백성들의 모임/집회”를 (시 26:5), 뜻하는 ‘에클레시아’ 헬라어 단어인데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지교회와(행 5:11, 11:25-26, 고전 11:18, 14:19, 28, 35), 개인의 집에서 모인 가정교회(롬 16:23, 고전 16:19, 골 4:15, 몬 1:2),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보편적인 유형교회와(고전 10:32, 11:22, 12:28, 엡 4:11-16),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된 무형교회를(엡 1:22, 3:10, 21, 5:23-25, 27, 30, 골 1:18, 24), 지칭하는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의 용어인 ‘백성’을(출 19:6), 자주 사용한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과(출 15:5-6), 연속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 백성의 참된 계승자로 보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데(렘 31:31-34), 이런 연속성의 본질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히 8:5-8).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나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게 하기 위해 백성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볼 때(출 12:31), 교회는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로 구성된 그분의 소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시 24:1, 135:4, 겔 18:4).

 

이렇게 신구약 시대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 소집된 주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엡 1:22), 한 몸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성령을 공통적으로 풍성하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겔 36:26-28).  따라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에서 연합되어(고전 12:13), 모두 하나님의 가족에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 됨은(롬 12:5),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고(엡 2:14), 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었으며(갈 3:28), 예수의 피로 ‘한 새사람’이 되었고(엡 2:15), 외국인이 아닌 ‘동일한 시민’이요(엡 2:19), 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엡 2:19).  Richard Gaffin의 말을 인용하면 신약 성경은 성령이 개개인에게 역사하는 것을 다룰 때 더 광범위하게 교회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나서 그 결과로 개인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다룬다고 주장한 것처럼 바울의 시각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개개인이 아니라 그분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백성으로 택하신 한 사람이 교회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엡 4:16), 이렇게 모인 각 지체들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골 1:18), 성령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고전 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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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 그분의 음성은 우리의 음성과 다를 뿐만 아니라 종종 하나님 자신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시는데 가령 우리가 확실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고(민 12:6, 마 1:18-22, 2:13, 행 11:1-10, 욥 33:13-18), 우리가 완전한 이해를 원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만 알게 하십니다(고전 13:9).  그래서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라고 말하면서 만일 그분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순종할 덴데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는데(눅 6:27-35), 과연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명령을 들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기도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단 9장, 딤후 3:16), 주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 혹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닌 내면세계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이때 주님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많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개개인을 지도하시거나 격려하기 위해서이고(고전 14:3),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주관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숨겨진 욕구에 비추어 그 음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고전 14:29, 요일 4: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대체로 객관적인 경우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우리 마음이나 생각에 들어 있는 이슈들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시 66:18).  왜냐하면 마음과 생각의 불결함, 또는 편견과(행 10:9-16), 잘못된 전통은(행 15:1-21),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오염시키거나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일에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민 22-24장).

 

이렇게 발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면 모든 개인적으로 듣는 음성을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하며 주님께서는 성경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의 음식 법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듯이(행 10장),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성경해석과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분은 결코 성경에서 벗어나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예언, 꿈, 환상, 그리고 모든 종류의 초자연적인 경험은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시험해 보아야 하고(요일 4: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만 합니다(살전 5:21).  그러므로 성경말씀과 상충되거나 위배되는 것은 부정확한 것으로 판단해서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 해도 뭔가 미심쩍은 사항이 들어 있다면 이를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영 안에 그분께로부터 왔다는 강한 확신과 더불어 마음과 생각 가운데 평강이 있게 마련인데(롬 8:6, 14), 만일 마음 한가운데 이러한 확신과 평강이 없다면 어떠한 음성을 들었던지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초자연적인 놀라운 것을 경험했더라도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까지(골 3:15),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시 105:4).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범하도록 인도하시거나 유혹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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