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 그분의 음성은 우리의 음성과 다를 뿐만 아니라 종종 하나님 자신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시는데 가령 우리가 확실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있고(민 12:6, 마 1:18-22, 2:13, 행 11:1-10, 욥 33:13-18), 우리가 완전한 이해를 원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만 알게 하십니다(고전 13:9).  그래서 사람들은 “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실까?”라고 말하면서 만일 그분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순종할 덴데 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는데(눅 6:27-35), 과연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 명령을 들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실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기도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단 9장, 딤후 3:16), 주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 혹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닌 내면세계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데 이때 주님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많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은 개개인을 지도하시거나 격려하기 위해서이고(고전 14:3),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주관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의 마음 안에 숨겨진 욕구에 비추어 그 음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데(고전 14:29, 요일 4: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대체로 객관적인 경우보다는 주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우리 마음이나 생각에 들어 있는 이슈들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기 때문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시 66:18).  왜냐하면 마음과 생각의 불결함, 또는 편견과(행 10:9-16), 잘못된 전통은(행 15:1-21),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오염시키거나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발람의 이야기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도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일에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민 22-24장).

 

이렇게 발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면 모든 개인적으로 듣는 음성을 성경에 비추어 분별해야 하며 주님께서는 성경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의 음식 법에 대한 베드로의 해석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듯이(행 10장),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성경해석과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분은 결코 성경에서 벗어나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예언, 꿈, 환상, 그리고 모든 종류의 초자연적인 경험은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시험해 보아야 하고(요일 4: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야만 합니다(살전 5:21).  그러므로 성경말씀과 상충되거나 위배되는 것은 부정확한 것으로 판단해서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 해도 뭔가 미심쩍은 사항이 들어 있다면 이를 신중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영 안에 그분께로부터 왔다는 강한 확신과 더불어 마음과 생각 가운데 평강이 있게 마련인데(롬 8:6, 14), 만일 마음 한가운데 이러한 확신과 평강이 없다면 어떠한 음성을 들었던지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초자연적인 놀라운 것을 경험했더라도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까지(골 3:15),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시 105:4).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범하도록 인도하시거나 유혹하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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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 상대방에게 먼저 말을 걸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교제를 하기 위해 쌍방 간의 대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대화란 최소한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주된 이유 중 하나는(창 1:27),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사 43:7, 21), 만약 정상적인 주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실 때마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요 10:3-4).  그러나 문제는 소위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괴상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귀신에게 속임수를 당하는 것이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이지(갈 5:22-23),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학이나 잡다한 이론들은 성령이 주신 영적은사들을(고전 12:4-11), 활용하지 못하도록 걸림돌 역할을 할 때가 많지만(빌 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주님의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알며 또한 그를 따른다고 말합니다(요 10:27).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마 4:18-22),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목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첫째는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전도하기 위해서, 셋째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막 3:13-15).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과 친밀해지는 것이 모든 사역의 실질적인 기초로서 이 친밀감이 우리에게 넘쳐흘러야만 전도와 증거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아버지의 음성을 잘 들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이 원리에 철저하게 순종했기 때문인데(요 5:30), 예수님은 날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근거로 사역하셨고(막 1:35), 늘 행하시던 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그분과 고요한 시간을 가지셨던 것입니다(눅 5:16).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원한다면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는 마음의 상태, 즉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에게 사용될 수 있도록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분을 찾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찾아야 하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매일 30분이나 1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사람들은 경험상 쌍방의 소통 없이 일방적인 대화, 즉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없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데(눅 18:12), 만족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충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려는 반면에 친밀한 우정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의무감을 초월하는데 이런 사람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조용한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나머지 시간을 종일 하나님을 잊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분과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합 2:1),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삼상 3:10),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그분만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아는데서 만족합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과 우리의 미성숙함인 경우도 종종 있지만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만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신 4:29), 주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고 있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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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그분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우리들의 생각을 초월하는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예를 들어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혹은 기도할 때나, 아니면 누군가의 간증을 통해서, 때로는 성경공부나 읽는 책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간접적인 방법도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이와는 달리 구원받은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진(히 1:14), 천사의 방문과(창 19:12-24, 행 27:23), 주님께서 중단시키기 전까지 멈출 수 없거나 인간의 노력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베드로가 경험한 무아지경/황홀경/환상(행 10:10), 그리고 욥기에서 말한 것처럼(욥 33:14-18), 꿈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 하시기도 합니다(마 1:20, 2:13, 20-22).  이보다 더 특이한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으로 영이 끌어올려지는 것인데(겔 3;12-15, 고후 12:1-3), 이것은 오늘날 사교나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유체이탈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님이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며 더 특별한 경우가 있다면 바울이 경험한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방문하는 것입니다(행 9:1-19).  물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명확한 지침서 같은 것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성경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예시해줍니다.

 

먼저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정상적인 방법이며(민 12:6), 이러한 일들이 신약에 와서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행 2:17), 오늘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꿈과 환상에 대해 말하면 신비주의자로 혹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낙인을 찍고 신자들에게는 그런 일에 추구하거나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을 주시지 않고 그냥 그의 마음에 성경본문을 상기시켜 주시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요셉이 그녀와 이혼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마 1:18-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꿈을 사용하실 필요가 없이 그저 요셉의 마음에 이사야 7장14절만 상기시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꿈을 통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만약 꿈과 환상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맞다면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과 환상이 아닌 오직 성경만을 사용하셨어야 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헤롯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13), 이때 하나님은 그 일을 요셉에게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성경본문인 호세아 11장1절 말씀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꿈으로 그의 갈 길을 정확히 지시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행 11:1-10), 이 환상은 앞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돌아올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고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말씀 아모스 9장11-12절을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꿈과 환상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그분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욥 33:13-18).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 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주파수를 맞추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고(요 10:27),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행 2:17-18).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익숙해지면 더 이상 꿈이나 환상 같은 방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매우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마치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고 가령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음성에 친숙해 질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일일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리새인처럼 말로 성령을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않는 이상(마 12:32),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인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마치 가족끼리 서로의 음성을 알 수 있듯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분의 음성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고 그분의 음성은 보편적으로 '내적 속삭임', 혹은 '느낌'을 통해 전달되기도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인내한다면 그분은 매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고 요한복음 10장27절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점차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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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 교회가 범하는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판매원이 소비자에게 재품을 파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상품화하여 제공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지옥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질병뿐만 아니라 결혼생활과 삶의 제반적인 문제들, 즉 좋은 직장과 차와 집을 주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분명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시며 다른 모든 일도 하실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단계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머무른다면 그 신앙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히 6:1-2).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꼭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만약 주님이 가정생활과 직장, 혹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로 잡아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이 그분과의 친밀감이 아닌 주로 사람의 표면적인 문제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에 중심을 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분을 떠나거나 상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와 우리를 위해서 행해 주시는 필요에 의해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분과의 우정은 서서히 멀어져 갈 것이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유형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마르다 신앙을 가진 사람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예수님은 이 두 유형 중 어느 유형이 주님의 기뻐하는 유형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눅 10:38-42).  먼저 마르다는 헌신적으로 손님을 접대하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는 즉시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고(눅 10:38),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솔선수범 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봉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친 봉사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열심히 행하는 일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다의 분주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0:40).  정신이 분산되면 좋은 일이 고된 일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섬기는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한 것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걱정은 기쁨으로 주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눅 10:41).  분명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 같이 계셨지만 마르다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벅찬 자신의 일에 부담을 가져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도 마음이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주함은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필요한 염려와 근심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게 만드는데 사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이 그분을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고(눅 10:40),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며 마르다가 주님에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 명령을 하는 오만함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분노, 즉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약 1:20), 그녀 자신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지게 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동생 마리아까지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 자체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거나 그분과의 친밀감이 없는 사람이 교회의 여러 부서에서 섬기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때 이때 하는 봉사는 마르다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을(롬 14:4), 교만한 마음으로 판단하는 표준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엘리야와 같이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왕상 19:12), 들을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마르다와 다르게 부엌에서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그저 거실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당시 관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남자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되고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부엌이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제자들 곁에 앉아 있었다면 제자들은 그녀가 여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었을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는 제자들 곁에 앉아 있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씀 듣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주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부엌으로 갈 수 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녀는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앉아 그분의 말씀만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눅 10:39).  지금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이 좋은 편’(눅 10:42),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데 이 친밀감은 우리 인생의 잔치상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만일 오늘날 주님께서 마리아를 닮은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마치 친구가 자기 마음의 모든 것을 터놓고 교제하는 것처럼 그 사람과 소중한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요 15:14-15). 그러나 주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떠나서도 교회를 다닐 수 있고 종교적인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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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학교 운동장에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어떤 엄마가 자기가 낳은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과연 몇 명의 아이들이 그 음성에 반응할까요?   아마도 오직 한 명만이 그 음성을 듣고 반응을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아이는 자기 엄마의 음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그분과 조용히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우리의 영의 귀는 그분의 음성에 친숙해질 것이고 성경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라고(요 10:27), 말씀하고 있는데 문제는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귀신에게 사로잡히거나 환청이라는 증세에 시달리는 의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전통과 제도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고 성령께서도 이런 바리새적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해 기뻐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정상적인 신자라면 하나님은 어떤 형식에 갇혀 있지 않는 분이라는 것과 주님의 음성을 성경 이외에 개인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시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은 다양하지만(민 22:25-28, 삼하 12:1-12, 욥 33:14-18, 행 8:26, 10:3), 사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주된 근원은 성경인데(딤후 3:16),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성을 더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듣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달라스 윌라드는 『In Search of Guidance』에서 A.W. Tozer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부하여 성경과 교리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지식에 영적인 조명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마음에 베일이 덮여 있는 것과 같아서 진리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은 머리에 든 지식에 불과하지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고(마 23:2, 눅 11:52),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을 늘 암송하기도 했지만(요 5:39-40), 실제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마 26:57-68).

 

또한 이들은 성경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고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성경해석자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훈련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고 주님의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요 5:37).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도적 교리는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고전 2:13),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만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2:14).   오늘날 신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성경공부를 할 때에 신학교에서 배운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강조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에 열심히 성경공부는 했지만 결국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종교적 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C.S. 루이스는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분에게만 열중하는데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성경을 묵상하는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는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사람은 기록된 성경말씀에 아주 친밀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을 대신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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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신앙을 가진 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는데 있고 목사가 말씀을 가르쳐 주기만을 기다리거나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흘러나오는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들 중에 한 가지이기는 하지만 매일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고 성경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0:27), 만약 주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요 10:3),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것처럼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요 8:47, 10:26).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Focus on the Family』의 창설자인 James Dobson은 “나는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친구를 통해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통해 그리고 상황을 통해서 내게 말씀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했고, 달라스 윌라드 역시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각, 그리고 경험을 통해서 다가오시며 오직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의지적인 삶 가운데로 오실 수 있다고 말하며, F.B. 마이어는 잠언 20장27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은 내적인 빛들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 즉 성경이 완성된 이후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시대에 필요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 문화와 분위기, 그리고 교회의 제도와 전통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귀를 둔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시지만(히 13:8), 많은 신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종교적인 편견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요일 2:3-4).  쉽게 말하면 불순종이 그분의 음성 듣는 것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주님이 이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하고(고후 13:5), 또한 언제나 겸손하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에도 그냥 드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청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삼상 3:10).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순종 위에 무엇을 더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의 감정이나 마귀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내가 듣고 있는 음성이 주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인지(겔 13:17), 혹은 귀신들의 속삭임인지(렘 23:13),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Roxanne Brant는 음성의 근원은 “진리의 성령”과 “마귀의 영” 그리고 “육신의 생각”에서 올 수 있다고 말하며, 3세기에 있었던 몬타누스의 사건을 예를 들면서 한 예언자가 얼마든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갈 3:3), 그는 『How to test prophecy, preaching and guidanc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 안에서 동시에 육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마 16:16), 곧 바로 사단에게 조종을 받고(마 16:22-23), 결국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처럼(마 26:69-75),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르스 요컴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라도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우리가 받은 메시지에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들, 즉 사람을 통해서(행 21:10-12), 혹은 성령께서 직접 개인에게(행 10:19-20), 또는 꿈이나(마 1:20, 욥 33:14-18), 환상을 통해(행 9:10-16, 10:3),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단 9장, 딤후 3:16),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음성인지를 타진해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을 분별하는 것처럼(고전 14:29),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1),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반드시 시험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요일 4:1).  예를 들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음성은 차갑게, 명령조로 혹은 죄책감을 느끼도록 가혹하거나 비판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보편적으로 우리를 교정하거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삶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는데(삼하 12:1-15), 이와 달리 강압적이거나 조급한 마음, 그리고 두려움을 주는 듯한 메시지로 들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닌 마귀의 소리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약하면 주님의 음성은 직접적이고 확정적이며 명백하기 때문에 성령은 그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덕을 세우고 위로하며 주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고전 14:3), 그 음성은 원리나 특성에 있어 기록된 성경말씀과 절대 상반되지 않습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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