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 3 4과에서는 말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 과를 통해 혀가 얼마나 부정적인 커다란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닫고, 혀를 제어하는 일이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임을 인정하고 의탁하게 된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성숙한 언어생활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 갈 수 있는지에 함께 나누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책자 『은혜로운 말』 (캐롤 메이홀, 네비게이토 출판사) 3 4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공부시간이나 교제시간이 아닌 일상생활 중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최근에 나누었던 대화를 세 가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 대화라 함은 인사와 같은 의례적인 말이 아니고, 마음을 나누는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나눈 그 대화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대화의 내용의 차이는 바로 마음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12:34)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가 있을 때, 우리의 화제의 중심도 그런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깊이 거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농담이나 가벼운 이야기들을 전혀 하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전부일 때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귀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물론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삶 가운데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며, 그것도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주님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하라”고 하시며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해 주십니다.

 

찬양

통화나 커피를 들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때 보면,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문제들이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나 축복들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이 찬양으로 가득한 하루가 되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눔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교훈을 깨닫게 하며, 진정한 격려를 주게 됩니다.

 

격려와 위로

참된 격려자로서 자질을 기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많은 수고를 들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격려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능력과 아이디어를 주셔서 격려하고 위로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지혜와 공의

사랑과 진리는 언제나 병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말에는 진리를 간과하고 사랑만 강조하거나, 진리는 담겨 있지만 사랑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사랑과 진리가 우리말을 걸러 주는 여과기 구실을 한다면,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말들이 많을 것입니다.

 

온유함

온유한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온유함이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온유함을 나타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선을 위한 것이든 악을 위한 것이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의 힘을 깨닫기 바랍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언 18:21).  혀는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혀를 잘 제어하면 우리의 입은 생명의 샘이 될 것이며, 우리의 말은 귀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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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32과에서는 봉사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 과를 통해 왜 봉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와 봉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배우게 된다.  또한 봉사를 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과 봉사를 기피하게 되는 원인을 함께 찾아보고, 가이오와 같은 성경이 보여주는 봉사의 모델을 통해 봉사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깨닫고 봉사의 열망을 새롭게 다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책자 『겸손』 (앤드류 머레이) 3 2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왜냐하면 겸손이야 말로 봉사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인 겸손은 인생의 첫째 되는 의무요, 또 가장 고상한 덕행이요, 동시에 모든 도덕의 기초가 된다.  모든 죄악의 근원은 바로 교만과 이 겸손을 잃어버리는 곳에서 시작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오심도 겸손을 회복시키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  겸손은 다른 여러 가지의 은혜나 미덕들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은혜와 미덕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올바른 태도요, 또한 겸손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행사를 우리에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겸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의 지위를 옳게 똑바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임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비참한 현실과 또 모든 전쟁과 민족간에 피 흘리는 일과 모든 이기심과 고통과 모든 야심과 질투와 아픈 마음과 고달픈 생활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불행들과 더불어 그 근원이 저 저주받은 악마가 불어넣어준 교만, 즉 우리 자신의 교만과 또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교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계속해서 이겨낼 수 없고 청산해 버릴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면 구속주 그리스도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그의 겸손이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었고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주 가르쳤던 교훈,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라고 하셨던 말씀이 진리였음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특히 자기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는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는 말씀을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5:19)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역사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전적인 자기 부인과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아버지께 의지하는 생활이 온전한 평안과 기쁨의 근원임을 그리스도는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는 우리에게 진정한 겸손이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 힘은 어디에서 나는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과 또 우리 자신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요, 또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지식에서 진정한 겸손과 그 힘은 생기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겸손하셨던 것과 같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겸손하셨다.

 

우리는 예수가 선택한 열두 제자들에게서 겸손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는 가장 큰 은혜인 겸손이 부족하면서도 종교적 열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모든 외부적 교훈과 모든 인간적인 노력으로서는 교만을 물리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참 겸손이란 그 겸손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사회생활이라는 현실적인 시험장에서 그 진실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의 겸손 역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쉽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생활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다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에서와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겸손을 배워야 한다.

 

신앙과 겸손은 그 근본에 있어서 동일하며, 참된 겸손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에 교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리에 대한 강한 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적 확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산 신앙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이란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전혀 무가치한 것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겸손이란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준비해 주는 것을 이름이다.  바울이 큰 은혜를 받으므로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육체에 한 가시를 주어 겸손을 유지하도록 했다.  바울의 첫 번 간구는 이 가시를 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세 번씩이나 그것을 위하여 간구했다.  드디어 그 응답은 왔다.  즉 그 가시야말로 오히려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과 또 연약하고 겸손한 중에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겸비의 자리 바로 그 자체가 축복의 자리요, 능력과 기쁨의 자리인 것을 바울은 분명히 배웠던 것이었다.  교만을 이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시겠노라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께서 그대를 높이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다.  준비의 때가 있으면 성취의 때가 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이 말씀이 진리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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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31과에서는 순종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 과를 통해 순종이 성도의 마땅히 행해야 할 바임을 배우게 되며, 순종의 원천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며, 순종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순종에의 열망을 새롭게 다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소책자 『헌신』 (네비게이토 출판사) 31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은 헌신이란 무엇이며, 왜 헌신해야 하는지,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지, 그리고 순종에 이르는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현대 문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대량생산에 대한 우리의 능력과 욕망이다.  제자 삼는 사역에까지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하려는 생각을 갖기가 쉽다.  그러나 제자를 삼는 일은 대량 생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제자들은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하나하나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에 대해 칭찬하였듯이(살전 1:9 참조), 참된 헌신은 어떤 것으로 돌아설 뿐만 아니라, 어떤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헌신이란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가?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면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을 권면하고 있다.  또 다른 헌신의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던 위인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들은 무엇엔가 헌신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헌신해야 하는가?  첫째는 하나님 말씀에 헌신해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에 헌신해야 한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해야 한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그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분의 일로 부르신 분을 사랑해야 한다.

 

참된 순종에 이르는 단계는 크게 네 가지로, 우리 자신은 어디에 와 있는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한다.  첫째 단계: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하나님께서 내게 뭘 원하시는지는 신경 쓰지 않겠다.  둘째 단계: 하나님께서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리겠다.  셋째 단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드리겠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리라 믿는다.  넷째 단계: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든 안 주시든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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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2 9과에서는 중생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 과를 통해 중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중생 받을 수 있는가를 이해하게 되며, 믿음과 중생의 관계, 중생의 확실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나아가 중생 받은 증거와 함께 삶의 열매로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 지금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믿음의 향해』2 9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다.  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고, 만족할 수 없는 하나님이 빚으신 공백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도록 지음 받았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이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도록 네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첫째는 만물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본다.  둘째는 인간의 양심으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모른다면 다른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문제는 죄로,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죄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에 반하는 것으로, 우리의 말이나 행동, 생각이나 상상, 계획,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완전한 기분에 미달하는 것은 다 죄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의 의인도 없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모두 썩어 있다죄는 우리를 무력하게 하고, 노예 되게 하였으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무능하게 만들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절대 진정으로 변할 수 없다.  죄가 영혼의 암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의 신적인 치료법이며 유일한 치료법이다. 분명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먼저 나쁜 소식이 얼마나 나쁜지 깨닫기 전에는 그 좋은 소식이 왜 그처럼 좋은 것인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은혜란 우리가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우리 죄로 인해 죽게 되었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의미다.  은혜란 우리가 받기에 마땅하지 않은 것(구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공로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오며, 은혜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한다.  은혜는 원천이고, 믿음은 수단이며, 구원은 결과인 것이다.  은혜는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소식의 중심에 있다.


성경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일하게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느낀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엄청난 한 가지 진리를 고백하는 남녀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이 진리는 바로 나사렛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의아해한다.  전지하고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살해당하도록 허용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두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죄에 합당한 처벌을 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죄인들은 자유로이 용서받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었다.

 

우리의 노력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신뢰다.  그것이 전부다.  신약성경에서 믿음과 신뢰와 신앙은 모두 잠잘 때 체중 전체를 침대에 싣는 것처럼 완전히 기대다는 의미를 지닌 동일한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다.  세상의 종교들을 비교해 보면 기독교의 단순성을 볼 수 있다.  세상의 종교는 두 글자로 설명된다.  하라’.  세상의 종교란 하나님께 용납 받기 위해서 해야만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들의 목록인 것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네 글자로 설명할 수 있다.  이루었다’  기독교는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일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라이루었다’.  당신 스스로 불가능한 것을 헛되게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이미 이루셨음을 믿든지 둘 중 하나다.  구원 얻은 참 믿음은 지성과 감성, 의지를 포함한다.  믿음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확신으로 옮겨가서 의탁으로 끝마친다.  지식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초를 가리킨다.  확신은 어떤 사실을 알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납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탁은 믿음의 적극적인 부분으로, 완전히 의지함이라는 의미로 신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공적 사역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였다.  회개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바꾸다는 뜻이다.  진정한 회개와 구원 얻는 믿음은 붙어 다닌다.  회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마음 상태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을 당신의 구주와 주로 삼기 위해 전심을 다해 믿음으로 그분께 손 내미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곱 개의 간단한 진술로 복음의 메시지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

나의 필요함 :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임 : 유죄 선고

진실을 직면함 : 스스로 구원하기에 무력함

하나님의 해결책을 인정함 :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함 : 십자가와 빈 무덤

당신의 신뢰를 이전함 : 나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영원한 구원을 받아들임 : 나의 죄를 위한 그분의 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거기에는 자기 신뢰와 자기 확신에서 돌이켜 온전하고 철저하게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인으로 신뢰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1 12-13절은 구원을 바라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술하고 있다.  첫째는 간단한 첫 걸음으로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놀라운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신비한 진리로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이 모든 것, 즉 구원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예수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복음에 대해 말할 수도 있고, 토론할 수도 있고, 논쟁할 수도 있고, 비평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초청이자 명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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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교재 28과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세례의 바른 의미에 대해, 성령 받은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개인적인 결단과 적용의 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이러한 이해가 가져다주는 실천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존 스토트 목사의  『성령세례와 충만』은 28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저자는 성령 세례와 충만, 성령의 열매와 은사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는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갖는 실천적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이해 하고픈 훈련생이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불식시키고 바른 이해를 돕기를 원하는 인도자들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다.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네 가지 서론적인 요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이는 성경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거듭남은 성령으로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성령은 직접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후에 성령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셔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울의 경우 양쪽을 다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 안에 거하는 것,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는 것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바울의 생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이라는 이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성령의 선물과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는 자들은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두 가지가 같다고 보며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에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또는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그룹은 2장의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 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120명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을 기다린 끝에 성령의 세례를 받은 반면, 3000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이렇게 120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세례가 단회적인 선물을 말한다면, 성령의 충만은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 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 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었다.  세례는 독특한 입문적인 경험이었고, 충만은 계속되는 영구적인 결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입문의 경험으로서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다 살펴보면, 첫째, 이 동사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의 충만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둘째, 이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이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그 분의 충만함을 누리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은 그 분에게 무조건 맡기는 것이다.  넷째,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형으로 된 명령은 단회적인 행동을 가리키고, 현재형의 명령은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들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익어 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737-39절에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님께로 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목마르다, 오다, 마시다, 믿다)은 모두 현재형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해서 와야 하고 계속해서 마셔야 한다.  성령 충만에 관한 신약성경의 두 번째 본문은 충만에 대한 명령도 담고 있지만 무엇 보다고 성령 충만의 증거를 강조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표지는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가장 주된 증거는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충만의 결과들을 묘사한 유일한 본문은 에베소서 518-21절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도덕적인 자질들이다. 

 

이러한 성령의 세례와 충만의 구별에 대한 반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죄나 불신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처럼 비영적인또는 육에 속한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다.  두 번째 반론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상의 독특한 성령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사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서 잊어서는 안 될 세 가지는 첫째, 이런 경험의 일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적이며, 진정한 영적 경험인 양 위장한 사단의 끔찍한 계략이다.  둘째, 그러한 경험 중 좀 더 많은 부분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경험들이 실상은 심리적인 것이다.  심리적인 것은 도덕적이나 영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  셋째, 어떤 또 다른 경험들은 실제로는 회심의 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마귀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심리적인 것도 아닌, 그리고 회심의 경험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경험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도 깊은 경험들이다.  이러한 경험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할 수 없고, 성령은 때로는 그리고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일하시기도 하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한다.  바울이 열거하는 이 아홉 가지 특질들은 세 개씩 묶어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둘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셋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가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특질 중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함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진리는 성령의 열매는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원에만 의지해서 자연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가리키고,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성령께 반응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특질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충만한 내주하심의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깊이 역사하시는 진정한 증거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나 굉장한 표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적 특질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음 진리는 이러한 특질들이 성령의 열매라고 묘사된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름으로써 그것의 초자연적인 기원과 자연적인 성장을 둘 다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연적 성화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기 원한다면 제대로 된 밭에 제대로 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거둔다는 말인가?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되고,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된다.  사도가 사용하는 이 열매의 비유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교훈이 있다.  성령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영혼에 즉각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심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많은 시간을, 아주 오랜 시간을 사용하셔서 이 생명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 키우신다.  하나님의 사역의 점진성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열매 맺는 일에서 더 적극적으로 성령과 협력하게 되고, 좋은 결실을 수확하기 위해 우리가 심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공적, 개인적 경건의 삶의 습관을 위해 자신을 더 훈련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열매와 관련 적용할 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과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는 육체의 토양에서 이러한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 둘 다 필요하다.  둘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성장이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며,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 둘 다를 위한 훈련된 습관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성숙의 과정이 점진적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들도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사용되도록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쓸 때,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고,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사역을 다양하게 만든다.

 

영적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 창조, 즉 교회의 하나님은 그분의 구속 받은 자녀들에게만 영적은사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영적은사이며, 몸의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은사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로부터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은사들은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무척 평범하고 심지어는 단조롭게 보인다는 것들도 있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 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 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또는 믿음등도 그 용어만 보아서는 그것들이 기적적이거나 기적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다.  기적이란 그 정의상 비범함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일하시는 방법에서 창의적으로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초자연이 아니라 자연 안에서 그리고 기적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우선적으로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며 그분에게 어떤 것은 하실 수 있고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은사의 종류가 다양한 것처럼 그 분배 역시 다양하며, 은사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무런 은사도 받지 못하고 간과되거나 뒤로 처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교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많은 지역 교회들은 회중이 평신도 지도력이 은사를 갖추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무것도 시도하려 하지 않고 또 그나마 겨우 시도되는 것들을 목회자가 손에 꼭 움켜쥐고 통제하려고 하는데 대한 전형적인 변명이다.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첫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카리스마타카리스를 부여하는 것인데, 카리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다.  둘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은사들을 전적으로 성령께만 돌려서는 안 되고, 삼위의 세 위격이 모두 참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영적은사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뜻에 달려 있다.  영적은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다.  인간의 몸의 기관은 기능을 담당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도 그들의 은사를 활용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우는 것의 의미이다.  모든카리스마타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세우는 역할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모든 카리스마타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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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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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은 많다그러나 존 스토트가 쓴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그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58년 이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문판은 수백만 부가 팔렸으며, 한국에서도 30년 넘게 10만부 이상 팔린 최장기 스테디셀러 가운데 한 권이다그만큼 이 책은 기독교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여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이 책을 통해 훈련생에게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크게 세 가지이다첫째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둘째는,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셋째는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교리를 배우고 깨닫는데 그치지 않는다끊임없이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를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진리 앞에서 끊임없이 삶의 결단을 요청을 받게 될 것이다.

 

올바른 접근

저자는 성경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 창조와 말씀, 그리고 행하심에 대한 진술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영역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영역에 본서의 관심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며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선언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도 확언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신 것은 인간의 필요의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무지하기도 하지만 또한 죄에 빠져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우리의 무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직접 행동도 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기독교에 대한 탐구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한 일은 기독교 신앙이 기초하고 있는 반석이다.  둘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닌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대부분의 다른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가 신이라면 그의 가르침도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모으는 것이며 우리가 확증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과 그가 나타낸 특성, 그리고 죽음에서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뚜렷한 특징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신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인간의 신앙과 사랑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주장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그는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셨다.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고, 진리를 가르치고,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의 주장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들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무죄성에 의해 뒷받침되며 그 증거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견해로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도, 용서를 구한 적도, 도덕적 과오를 자각한 적도, 죄의식을 느끼신 적도 없으셨다고 하셨다.  그가 ‘회개의 세례’를 받은 것 역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고, 또 자기를 세상의 죄인들과 동일시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제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아주 가까이 살면서 자신들끼리는 많은 다툼도 하였지만 자신들에게서 발견되는 죄를 예수님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구약의 교리에 젖어 있던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죄의 보편성을 가르치는 구약교리에 의해서도 예수님의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대적들의 견해로 그들은 최소한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호의적인 편견도 없었고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제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난마저도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심문을 받을 때도 언제나 자신의 의롭다함을 주장하였고 빌라도도, 헤롯도, 배반자 유다까지도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시인하고 있다.  넷째는 우리 자신의 평가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묘사된 예수님의 포괄적인 모습을 통해 그의 무죄성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그 증거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여러 다른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이다.  둘째는 수의가 헝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사람은 요한으로 그가 직접 경험한 버려진 수의의 모습이 갖는 세 가지 특징은 부활의 진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10회에 걸쳐 소위 베드로가 말한 ‘택하신 증인’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고 있다.  넷째는 제자들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도 귀한 증거일 것이다.  왜냐하면 전혀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인간의 상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시냐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하신 일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과 우리에게 제공하고 계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게 된다.

 

죄의 실상과 인격

성경은 죄가 보편적이라고 단호하게 밝힌다.  죄는 그 성격에 따라 적극적인 죄인 위반과 소극적인 죄인 결함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죄들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기준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자신의 법을 어기고 있다.

 

죄의 결과

죄의 또 다른 측면인 그 결과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이것은 죄의 결과 중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인간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단절을 가져오게 된다.  나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그리스도를 배척하면 영원히 죽게 된다.  둘째는 자기에의 속박으로, 죄는 우리로 노예가 되게 한다.  이는 죄가 내적 부패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범하는 범죄는 내적이고 보이지 않는 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이다.  우리는 내적 타락으로 인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셋째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이는 죄의 필연적 결과이다.  우리의 자기 중심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쳐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유발시킨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며 구원에는 죄의 세 가지 중요한 결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포함된다.  구원을 가능케 한 방법으로는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이고, 둘째, 성령을 주심을 통해서이고, 셋째 그의 교회를 세우심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께서 죄를 위한 제물로 죽으신 사건은 성경의 중심주제이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베드로는 첫째, 본으로서 죽으셨고, 둘째, 죄를 담당한 자로서 죽으셨다고 지적하고 있다.  억울한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부름 받은 내용의 일부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본을 보여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러나 단순한 본만을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본에는 속죄가 없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한 결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를 연결시키고 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복귀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죄가 없으신 구주께서 범죄 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구원'이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사함과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첫째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다음 점진적으로 자기중심이라는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사함과 화목함을 얻었으나, 자기로부터의 해방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의 교제로의 연합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까지도 변화시켰다.  이러한 내적변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이 감면되었다.  그러나 죄의 권세가 무너지는 것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은 물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사이도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몸이 하나 되게, 즉 교회의 연합을 이루게 하신다.  성령의 본질이자 첫째 열매는 사랑이다.  죄는 분리와 분열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연합시키고 화해케 한다.

 

인간이 해야 할 일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히 일련의 제안에 대해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비록 진정으로 그렇게 한다 해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 즉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 그를 우리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비용을 계산할 것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데는 주는 것과 요구하는 것이 있음을 밝히셨다.  실제로 주는 것이 값없이 제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것도 전제였다.  주님께서는 처음 부르신 제자들로부터 그 이후의 모든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깊이 생각한 다음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나를 따르라’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충성과 더불어, 자기에게서 배우고 자기 말을 순종하며 자기의 목적을 그들의 목적으로 삼으라고 권면하셨다.  그러자면 먼저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죄를 버려야 한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데 있어서 첫째 요소이다.  둘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행위의 근원인 자기 의지도 부정해야 한다.  삶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라는 명령도 받았으며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결정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진정한 믿음은 지적인 믿음을 신뢰의 단호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적인 확신이 인격적인 의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영접하면 그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우리의 삶이라는 집은 그리스도의 관리 하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리스도께 귀를 막고 그의 간절한 호소를 묵살해 버리는 일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의 두드리심에 응답하여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여는 것은 분명한 행동으로 자신 밖에 할 수 없는 개인적인 행동이자 의도적인 행동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당신은 거듭났을 때 이미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는 특권과 책임이 뒤따른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난 사람의 독특한 특권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인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친밀할 뿐만 아니라 확실하기도 하다.  이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안전한 관계이며 성경은 이 관계가 영원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특권과 아울러 책임을 가지는데 가장 큰 책임은 성장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해야 할 영역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지식이고, 둘째는 성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성장하여 더욱 더 친밀하게 자신을 알기를 원하신다.  성장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대한 의무, 즉 충성과 세상에 대해 의무, 즉 봉사와 증거를 가진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갈등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께로 도피하여 세상을 무시해 버리거나 세상에 빠져서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면 여러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택할 해결책이 아니다.  균형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 안’과 ‘세상 안’에서 동시에 똑같이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코 어느 하나만을 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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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만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움직임 역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의 증거』는 훈련생은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소책자라 적은 분량이지만,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이며, 결국 부활이 역사적 사실일 수밖에 없는지에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훈련생들은 27과에서 부활의 역사성과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 그리고 부활이 가져다 준 축복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감격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배우게 된다.  따라서 이 책 『부활의 증거』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훈련생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인도자에게는 부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여러 주장들의 허구를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위안도 주지만 도전도 해 온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활의 메시지를 공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 전체가 하나의 사기극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만약 부활이 참이라면 그것은 역사상 최고의 사건이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부활의 의미에 맞게 조정하지 못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 기사는 주로 여섯 명의 증인(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및 베드로)이 기록해 놓은 증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증언은 초대교회 전체의 증언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우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고린도전서의 저작 시기는 주후 52년에서 57년 사이로 인정받고 있다.  둘째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빈 무덤에 관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마가복음 역시 시기적으로 매우 이른 문서로 여겨진다.  셋째는 누가로, 그는 제3의 증인인데 우리에게 무덤에 찾아간 일과 그곳에서의 부활모습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상당한 보탬을 준다.  누가의 기록 역시 바울과 마가의 기록과 함께 매우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그 증언이 최소한 육안으로 목격한 증인들의 기록으로 사실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을 반대하는 이론 중 가장 극단적인 설은 그 사건자체를 고의적인 조작으로 간단히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는 압도적이다.  우선 증인의 수로, 500명가량이 최초의 목격자들로 그중 대다수가 주후56년에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말한 교훈대로 목숨까지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만약 조작이었다면 이런 음모를 꾸민 사람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다른 반대이론은 부활이 전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이유는 문서의 기록 시기가 너무 일러서 전설로 발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에는 전설에 으레 나타나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이들 부활에 대한 반대 이론들은 빈 무덤의 사실 앞에 산산이 와해되고 만다.


빈 무덤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심리적으로 보거나 윤리적으로 보거나 불가능하다.  설사 소수 인원이 그런 짓을 했다 하더라도 고문을 받을 때나 순교할 때까지도 어느 누구도 ‘불지’ 않았다는 것과 또 교회 내부로부터 그와 같은 소문의 기미조차 전혀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는 유대나 로마 당국 혹은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불합리하고 모호하다.  만약 당국에서 치웠다면 왜 그렇다고 말함으로써 부활의 전파를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을까?  만약 유대 지도자들이 치웠다면 자신의 명령에 의해 혹은 로마의 훈령에 따라 시체를 치울 때 동참한 증인들을 불러 세우지 않았는가?  아리마대 요셉이 치웠다는 주장은 더 근거가 없다.  세 번째 빈 무덤에 관한 이론은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왜 진짜 무덤을 지적하거나 시체 자체를 제시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넷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과 혈액의 유실로 말미암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즉 기절한 후 매장되었다가 소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반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이 소생해 세 명의 여인이 움직이기 힘들게 느꼈던 바위를 굴러 젖힌 후 못 자국 나고 상처 입은 다리로 몇 마일씩이나 걸어갔다는 주장은 도저히 믿기 힘든 것이다.

 

빈 무덤과 관해서 우리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사도행전 및 몇몇 서신들의 부활과 관련된 기록에서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빈 무덤에 대한 사실은 그 당시 상식이었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도시대에 무덤이 어떤 관심이나 숭배의 장소가 되지 않고 아주 무관심하게 취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부활의 사실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에 무덤이 무관심하게 취급된 것이다.  셋째는 빈 무덤에는 수의와 수건이 풀어지거나 어지럽혀지지 않고 마치 몸만 그저 살짝 빠져 나가거나 지나가기만 한 것처럼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또 다른 반대이론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설득력이 없다.  우선은 오백 명의 군중이, 그리고 좀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여러 경우에 걸쳐 이러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다.  또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결코 같은 환상을 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오백 명 모두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은 믿기 어렵다.  또 환상이란 오랫동안 원해 온 어떤 사건과 항상 관계가 있는데 제자들은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슬픔과 좌절 가운데 있었으며 소망 또한 사라진 상태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심령체험은 대개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는데 부활은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 일어났다.  끝으로 망상적 강박관념은 보통 어느 정도의 규칙성을 가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빈도가 늘거나 줄면서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데 부활은 사십일의 짧은 기간에만 나타났고 그 뒤에는 영원히 중지되었다.  환각을 일으킨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반복현상을 겪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부활에 대한 증거는 첫째, 세계 곳곳에 기독교라 불리는 집단이 존재하며 이 집단은 부활의 사건을 그 기원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당시 안식일에 열광적인 애착심을 보였던 유대인들이 부활의 사건에 근거한 주일제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부활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셋째는 초대교회의 성공으로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는 부활과 최초의 전파 사이에 있는 일곱 주라는 거북스러운 간격으로 조작이나 몽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각색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는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을 예언하셨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당시 재판시 혐의도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여섯째, 비통한 마음과 패배감으로 쌓였던 사도들이 무엇 때문에 변화를 받아 세상을 뒤엎고 어떠한 반대에도 끄덕 없는 불굴의 선교사가 될 수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바로 부활의 사건 외에는 없다. 일곱째는 전 세계에 걸쳐 내려오는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기쁨을 발견했다.  결국 개개인에 대한 부활의 궁극적인 증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름대로 아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경험의 증거가 역사의 증거를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활하신 구세주의 약속은 아직껏 유효하다.  ‘보라 내가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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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2권6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왜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그리고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삶과 인격의 변화에 대해 결단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하나하나 밝히며,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촉구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2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미국 내 최고의 크리스천 작가로 세 번이나 선정된 맥스 루케이도의 단순 명쾌한 문체와 시적인 언어, 영적인 안목과 통찰력을 함께 만나볼 수 있는 이 책은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가 주는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교만과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도 사랑을 표현하고자 선물주기를 좋아하는데 순전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즐겨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지만 십자가의 선물만큼 그분의 사랑을 잘 드러내 주는 선물은 없다.  십자가의 선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단지 피를 흘리기만 하면 되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많은 것을 하셨다.  십자가의 언덕에는 하나님의 선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선물들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  채찍질은 군병들이 십자가에 행한 첫 번째 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세 번째 일이었다.  명령에 따랐던 것이기에 이 두 행동에 대해서 군병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딴 생각이 있었고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다.  침 뱉음이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으로 군병들이 뱉은 침은 우리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시고 그것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셨다.  죄인들에게 성인의 얼굴을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얼굴을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중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시 말해 성육신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공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고 죄를 받아들인 것이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마에 얹힌 가시면류관은 그분의 마음을 찌른 우리의 죄의 열매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죄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땅바닥에 쓰러뜨린 후 예수님의 양팔을 벌려 손에 대못을 대고 망치를 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으셨다.  십자가 옆의 무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기 위해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우리들의 죄의 목록이었다.  망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은 로마 보병의 것이 아니었다.  망치를 내리치던 힘은 성난 폭동의 것이 아니었다.  사형 선고는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결정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친히 못을 택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희생으로 가리고 피로 덮기 위해서 그분은 못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렇기에 못을 택하셨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그 손으로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로마인의 명령에 따라 3개 국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진 죄 패가 있었다.  이 죄 패에는 온 세상에 다가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죄 패를 통해 유대인들을 위협하고 조롱하려던 것이 빌라도의 의도였지만 하나님은 다른 뜻이 있었다.  빌라도는 자신도 모르게 천국의 서기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죄 패에 받아 적었던 것이다.  그 죄 패로 인해 즉각적인 열매가 맺혔고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고백하였다.  둘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못할 언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은 죄 패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때로는 풍요의 언어로 때로는 궁핍의 언어로, 때로는 아픔의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갈보리 십자가 옆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두 강도는 공통점이 너무 많았다.  동일한 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동일하게 사형을 선고 받았다.  동일한 무리에 둘러싸였으며 동일한 예수님과 동일한 거리를 두고 달려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분을 욕하는 길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그분께 기도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한 사람이 기도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구해주셨고, 다른 사람이 그분을 욕했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냥 두셨다.  그분은 그에게 선택권을 주셨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길은 ‘비아 돌로로사’ 즉 슬픔의 길이다.  전통에 따르면 예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갈보리로 가신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빌라도의 법정이 아니라 천국의 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 하늘의 집을 떠나시던 날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그분의 뜻은 오직 하나,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 여정을 화목하게 하심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온갖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했다.  한걸음 나아가 그분을 대적했으며 원수가 되기까지 했다.  교만은 우리를 넘어지게 했으며 수치는 넘어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초청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신다.


성경은 우리의 행실을 우리가 입은 옷으로 표현하곤 한다.  예수님의 성품은 그분의 옷처럼 솔기가 여기저기 이어 붙인 데가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입으신 옷처럼 나누어진 데 없이 온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리스도는 이 솔기 없는 완전한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으셨다.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벌거벗음의 수치, 패배의 수치, 죄의 수치, 그분은 이음매 없는 순결의 옷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누덕누덕 기운 우리의 추한 옷을 대신 입으셨다.  비록 우리가 죄의 옷을 입고 십자가 앞에 왔지만 떠날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내어주신 그분의 옷을 입고 떠난다.  그리스도 그분을 입고 떠난다.  예수님의 몸은 찢기셨다.  채찍질에, 가시에, 십자가의 무게와 못의 구멍으로 찢기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인 휘장을 찢어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았다.  처참하게 찢긴 그 몸을 통해 영광의 문이 열린 것이다.   찢어진 휘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자신과 지성소 사이에 더 이상 장벽이 없음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이제 언제 어느 때든 자유롭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던 죄의 장벽을 그분이 제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장벽을 쌓아 올리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찢어진 육체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당신은 다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십자가를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목마르셨을까?  그분은 목말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셨다.  못 박히시기 전에 누군가 마실 것을 드렸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아니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당신도 아픔을 느끼리라는 것을 당신도 목마르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리에 서 보셨기에 당신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이 이해하시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분이 이해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는가?  포도주 적신 해융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위치적 성화는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며, 점진적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과 피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피는 당신을 위해 내주신 하나님의 제물로서 당신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없애 준다.  물은 당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원 안에서 당신을 자라나게 한다.  세월이 간다고 처음 구원 받은 날보다 더 구원 받은 자가 될 수는 없지만 구원 안에서 자라갈 수 있다.  피는 받아들이지만 물은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쁘지만 그리스도와 화목한 관계를 이루지 못했다.


그분은 어떻게 공의와 자비를 둘 다 지킬 수 있으실까?  어떻게 진리와 긍휼을 함께 베풀 수 있으실까?  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는 별 설득력 없는 해답 두 개밖에 없다.  그러나 그분의 관점으로 보면 세 번째 해답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그 자녀들을 용서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에게 옮겨 놓고 십자가에서 그 죄를 벌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간음죄를 범한 다윗도, 살인범 바울도, 배반자 베드로도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삶에 관한 한 그들은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바닥이 없으시다.  우리는 누구나 비극을 만나며 비극의 상징물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조차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요한에게 예수님의 죽음보다 더 큰 비극적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빈 무덤에 도착한 요한은 그 죽음의 옷자락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게 된다.  수의처럼 슬픈 것을 사용하셔서 요한의 삶을 바꾸신 것이다.  그분의 손안에서 결혼식장의 빈 포도주 항아리는 능력의 상징이 되며, 과부의 동전은 아낌없이 드림의 상징이 되며, 베들레헴의 볼품없는 구유는 헌신의 상징이 되며, 사형의 도구는 그분의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죽음의 옷을 취해 생명의 화신을 삼은 것이다.


엉터리와 아이러니. 갈보리 언덕은 그 둘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라면 구속의 드라마를 그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부탁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명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 시간의 각본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신의 삶의 십자가가 되려면 당신은 그 언덕에 뭔가를 가져와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버리신 것을 보았다.  당신도 뭔가를 내려놓지 않겠는가?   당신의 나쁜 순간들, 화난 순간들, 불안한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밑에 내려놓아라.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순간들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들은 절대 우연에 맡겨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길을 고르셨다.  하나님이 못을 택하셨다.  우리 주님이 세 개의 십자가를 꽂으셨고 죄 패를 써 붙이셨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세부사항, 하나님의 주권이 그 일보다 더 철저히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중하게 바로 이 메시지를 남기셨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이다. 다 너를 위해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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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바로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우리의 죄성을 정확히 파악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권5과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는 훈련생들이 반드시 점검해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5-6장)은 2권5과를 공부하는 훈련생들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며, 불신자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신가는 물론 우리가 누구인가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 죄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주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죄의 보편성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며, 그 성격은 어떠한가?  성경에서는 죄를 설명하는데 몇 가지 단어들을 사용한다.  이 단어들은 그릇된 행위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느냐 아니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소극적 의미의 그릇된 행위는 결함이다. 한 마디로 표현해서 그것은 과실, 실수 또는 실책이다.  달리 설명하면 표적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표적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결국 죄란 선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악함, 성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적극적인 죄는 위반을 말한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선 것이며 불법을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의를 어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류의 단어들은 죄와 관련해서 어떤 도덕적인 기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준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법을 어긴 것이다.  우리의 실패의식은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위 뒤에 있는 생각 즉 그 동기에 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 모든 인간이 여기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높고 의로운 하나님의 율법만큼 우리의 죄 많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죄의 또 다른 측면은 죄의 결과이다.  죄의 결과 중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일 것이다.  인간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고귀함에 대한 주된 주장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따라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켰다고 말한다.  죄는 필연적으로 분리를 가져오는데 이 분리란 ‘사망’ 즉 영적사망이요, 유일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생긴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성경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그 분이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굶주림이 있다.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신문에서 자극적인 뉴스를 요구하고 영화에서 도가 지나친 사랑과 범죄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 수영장과 술집들, 자동차 경주와 오토바이 경주, 마약과 성과 폭력의 난무?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족을 찾고 있다는 증거이다.


죄가 가져온 또 다른 결과는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포로가 되게 한다.  죄는 단순히 잘못된 외적 행동이나 습관이 아니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내적 부패이다.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것은 죄가 인간성의 내적 타락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악의 오염이다.  결국 죄는 인간성에 뿌리 깊게 내재하게 되고, 우리의 자아를 통제하게 된다.  또 다른 죄의 무서운 결과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다.  죄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바꾸게 한다.  하나님과의 가르침과는 달리 죄는 우리 자신을 첫째에 두고, 이웃을 둘째에, 그리고 하나님은 뒤 구석 어디에 두게 만든다. 이러한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적응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자기희생의 자세로 바뀔 수만 있다면, 우리의 갈등(부딪힘)은 끝이 날 것이다.  이 자기 희생을 성경에서는‘사랑’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본성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며 이 목적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시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려는 것이다.  믿음은 필요에서 생긴다.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자신의 병의 중함을 깨닫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치료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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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큰 일』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전체 기독교의 핵심이요 총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구원과 축복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의 신앙으로서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권4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순한 교리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훈련생의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2권4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신 사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마무리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래는 2권4과 참고도서인 루이스 벌코프의 책『기독교 신학개론』의 2장 신론 중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이다.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삼위(3인격)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라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러한 자기 구별은 삼위가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신적 본질이 삼위로 분할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는 각자가 완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 위들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위가 다른 위에 종속되지 않지만 존재의 질서로 보아 성부가 제1위요, 성자가 제2위요, 성령이 제3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순서는 창조와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보여 지고 있으며 이들 삼위는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구약에서는 하나님에게는 1위 이상의 있다고 말하는 구절이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으며(창 1:26; 11:7),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인격(위)으로 묘사되었으며(창 16:7~13; 18:1~21; 19:1~22),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 48:16; 63:10).  이 외에도 삼위가 다소 명백히 지시된 곳도 약간 있다.  신약에서는 삼위가 명백히 언급된 구절들이 많다.   예수님의 세례에서(눅 3:21,22), 예수님의 고별강화에서(요 14~16장), 예수님의 대 명령에서(마 28:19), 사도의 축복에서(고후 13:13), 또한 그 외 구절에서(눅 1:35; 고전 12:4~6; 벧전 1:2)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에게 적용된 성부라는 이름은 ① 모든 창조물의 근원으로서 ② 이스라엘 선민의 아버지로서 ③ 하나님의 영적 자녀인 신자들의 아버지로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층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 명칭은 삼위일체의 제2위와 관련하여 제1위에게 적용되었다.  구속사역의 계획, 창조와 섭리의 사역, 구원설계에서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사역, 이 모든 일들은 물론 다른 두 위도 여기에 참여하지만 그러나 특수적으로 성부의 일로 돌려진다.  삼위일체의 제2위는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어진다.  성자의 인격적 특성은 그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생하셨다는 것이다.  성자의 발생 교리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의 제1위와 제2위가 부자관계를 가지신다는 성경적 묘사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명확히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명칭을 성자에게도 적용되었고 성자에게도 하나님의 속성들이 있음이 발견되며 하나님의 사역들이 성자에 의해서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존영도 그에게 돌려졌다.  성자의 사역은 성자는 모든 창조와 구속의 중보적 원인이 되셨으며 특히 구속사역은 성자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령의 인격만큼 많은 사람에게 의심 받은 신성은 없으나 성경은 성령을 분명한 한 인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애정, 의지와 같은 인격적 특성들이 그에게 주어졌으며 발언, 탐구, 증거, 명령, 계시, 노력, 조정과 같은 인격적 행동을 하신다.  성령과 다른 위와의 관계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셨다.  때문에 성령은 다른 위와 더불어 가장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명칭들을 그에 붙였으며 하나님의 완전성들이 그에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사역들이 그에 의하여 시행되었고 하나님의 존영도 그에게 허락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중 특히 성령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역은 창조와 구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케 하는 것이다.  자연의 영역에서 성령은 생명을 발생하여 창조사역에 완성을 가져오신다.  성령은 특수한 임무를 위해 인간을 영감하고 인간에게 재능을 부여하시며 구속의 영역에서 구속 사업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에게 권능을 주신다.  성령은 성경을 영감하시며 교회를 형성 확장하시며 교회 안에 계셔서 새 생명의 원리로 내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를 가르치시며 보호하시고 모든 진리 안에서 교회를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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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2과 ‘하나님은 누구신가?’ 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과 더불어 이러한 지식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이러한 속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와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점검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여러 속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빌 하이벨스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는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특히, 이 책은 조금은 딱딱해 질수 있는 교리적 주제에 대해 삶 속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풍부한 예화를 통해 쉽게 설명해 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기를 원하는 훈련생들과 인도자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기독교의 힘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 즉 인품과 성품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찾고 있는 하나님의 첫 번째 성품은 전지성이다.  그분은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포괄적이고도 절대적으로 완벽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물들이 되어가는 이치와 방법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세부항목들까지도 세세히 알고 계신다.  특히 이러한 하나님의 전지성은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알기를 원하시며 실제 우리의 필요와 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낱낱이 헤아리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과 고통, 상처에 대해 결코 무심하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하나님의 속성은 무소부재성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놀라운 진리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저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들과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맺으시며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할 때 우리는 위선과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가장할 필요가 없으며 두려움을 일으키는 그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세 번째 속성은 전능함이다.  전능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감동적인 사실은 하나님은 기꺼이 그리고 몹시도 그의 능력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기도, 슬퍼하시기도, 분노하기도 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 자리한 그 감정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하게도, 마음을 아프게도, 화를 돋구게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함축된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표현 없이 사는 삶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그 성품에는 그의 표현력을 투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시기를 바라신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는 그분이 하시는 일의 중심이며,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피난처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믿는 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부었고 값진 피난의 순간들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피난처에 들어가는 다음 단계는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를 감싸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를 향하신 그의 행위, 그분이 제정하신 율법, 그리고 그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방관하지 않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우리를 마음대로 다루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통해 의의 혁명을 이루시기를 바라시며 이를 위해 우리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옳고 그름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불의의 본성적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일곱째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여기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성향을 말한다.  마땅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축복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며 하나님은 용서를 베푸시는 가운데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재적이어서 그 현장에는 반드시 변화가 따른다.

 

여덟째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하나의 이론이나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통해 확신한 사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들과 약속을 체결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의 불성실로 슬퍼하시고 우리의 성실함에 기뻐하신다.

 

아홉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결정들로 가득 차 있고 결정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바뀐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훌륭한 안내인과 표지판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아닌 더 성숙하고 현명해지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안내판은 성경과 성령의 증거, 현명한 사람들의 충고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열 번째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베푸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여 토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베푸시는 가운데 기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에게 베푸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 변화는 우리가 먼저 그의 선하심에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리를 향한 그의 관대하심을 볼 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의 불변성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기꺼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행동하시고 응답하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성품에 있어서만은 일관성을 유지하시는 분이다.  그의 권능, 임재, 지식, 약속, 은총, 관대하심 등 성품은 변함이 없으시다.  오늘날 모든 상황들은 신속히 변화하고, 전문가들은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란 변화에 대처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즉 소용돌이치는 변화의 바다에서 닻을 달아 내리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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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교재 2권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복음과 교리, 생활이라는 삼중적 관계를 통해 연구하고 묵상하게 된다.  14주 동안 배우게 되는 내용들은 모두 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기독교의 진수에 속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다루는 2권1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을 깨닫고 성경의 완전성과 유기적 영감설을 이해하며, 성경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게 된다.  오늘날 사회 전반에서는 연장자, 상관, 가족, 학교, 국가 등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으며 교회 역시 이러한 도전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속에서 믿는 사람들은 무비판적인 묵종과 그에 비교되는 무비판적인 거부, 양자의 유혹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말씀의 권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존 스토트의『성경의 권위』는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며 2권1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성경의 신적인 영감성과 그 권위를 받아들이는 주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충성심에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승낙의 필수적인 결과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 규정되며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의 어떠한 부분도 배제시킬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쳤는가?  예수님은 구약의 신적인 기원과 영원한 타당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여러 번 언급하였으며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간접적 증거를 추가하셨다.  또한 성경에 대해 단지 말씀만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거하여 행동하셨다.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크게 세 가지 영역, 즉 개인적 의무와 공중사역, 그리고 공개논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 세 영역은 모두 한 결 같이 질문, 문제, 그리고 논쟁이 각각 있었는데 예수님은 성경에 의지해서 질문에 답하고 문제를 풀고 논쟁을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다.

 

신약에 대해서는 구약과 병행되는 신약성경이 기록될 것임을 예견하셨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이 기록되기를 원하셨고 사도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신중하게 신약성경의 기록에 대비하셨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친히 임명하셨고 자신과 함께하는 역사적인 경험과 더불어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신약의 기록을 준비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셨고 또한 신약성경의 기록을 예비하셨다.  따라서 주된 문제는 성경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와 관련된 것이다.  그 분이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사도들을 임명하여 권위를 부여하여 너희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가 어찌 사도들이 쓴 신약을 배척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구약의 권위와 신약의 권위 가운데 어느 한 쪽이라도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궁극적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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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가요 신학자이며 강해 설교가로 유명한 워런 위어스비 박사의 저서인 이 책은 1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일 뿐만 아니라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있는 이들에게 권해 볼만한 책이다.  그리고 1권6과를 통해 훈련생들은 기도가 반드시 선하게 응답된다는 사실과 기도응답의 방해물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나아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지체되는 기도응답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 『당신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는 성경에 나오는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예들을 통해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들이 응답 받지 못한 기도는 단순히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의 기도가 아니라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의 기도 중에도 있었기에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참된 교훈은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원인들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도의 응답을 다루는 1권6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거나 혹은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거나 그분이 무능력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더 큰 축복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특별한 기도에 대해 그 응답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하신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당신의 뜻을 벗어나거나 당신의 성품과 모순된 것이라면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응답 받는 기도를 방해하는 장벽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네 가지 심각한 장벽들이 있는데 첫째는 알고 있는 죄이다.  이는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있는 고의적인 죄를 말한다.  둘째는 이기심으로 우리가 이기심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을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셋째는 가정불화로 베드로전서 3장7절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만일 서로 화목하지 않으면 그들의 기도가 막힐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기도생활의 장애물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구하는 것이지 주님과 변론하는 것이 아니다. 응답 받지 못한 모세의 기도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허락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할 때 이미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모세가 이전에 지었던 죄의 결과로 하나님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분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기도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도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은 죄를 후회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적 성품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징계를 피할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용서해 주시지만 하나님의 통치하심 안에서 너는 네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서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 보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도록 내려진 징벌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고 대신 그가 길을 가는데 육신의 양식과 영적 용기를 주셨다. 엘리야가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과거, 즉 그가 걸어온 과정과 그의 안, 즉 그의 영적인 상태를 살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를 들이실 때 인간의 본성과 그 문제점을 헤아려 보신다.  그리고 우리가 구한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닐 때,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앞을 내다보시며 그분이 엘리야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미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걸어온 과거의 길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미래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구한 것보다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뜻이 나타나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광인을 고치신 사건에는 세 가지 기도가 나타난다.  첫째는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시지 말고 대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던 귀신들의 기도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역에서 떠나기를 간청했던 마을 사람들의 기도이고, 셋째는 귀신들로부터 놓여난 사람이 예수께 나와 그와 함께 가서 제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해달라고 간청한 기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첫 번째 귀신의 기도와 두 번째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셨지만 구원 받게 된 사람의 기도에는 응답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귀신나간 사람은 그 결박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깊은 감사와 행복에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더욱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고 이것은 극히 당연한 기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정으로 돌아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다.  그런데 그는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즉시 자기 길로 가서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온 성읍에 두루 퍼뜨렸다.

 

주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거기에 따른 주님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때때로 주께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인 주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응답하시지 아니하시는지도 모른다.  그가 거절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이면에 숨겨진 목적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거절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탐욕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최고를 바라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것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발생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기심으로 때로는 탐욕으로 기도할 때는 들어 주시지 않으신다.  진지하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실망한다.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문제로 고심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도 경우에 따라서 이런 경험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안 돼!’ 라고 말씀하실 때는 대개 우리가 삶 속에 기도를 방해하는 어떤 문제들을 갖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더욱 큰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기도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을 때이다.

 

응답 받는 기도는 하나님께 있어서나 우리에게 있어서나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에 응답 받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첫째는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갖기 위해 시간과 힘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규칙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구한 후에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무엇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주문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할 것을 이루는 데 도구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병 고침을 위해 드린 기도는 앞서 살펴본 기도와 달리 주께서 왜 거절하셨는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도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이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며 이는 어떤 특별한 목적 때문이다.  그 목적은 때로는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함이요, 때로는 온전케 하기 원하시기 때문이고, 때로는 보호해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축복이 멍에와 함께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상처 없이 전쟁터를 빠져 나오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승리의 기쁨을 경험하려면 먼저 싸움터의 고통과 불안을 견뎌내야 한다.  셋째는 영적 축복이 육체적 축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보다는 그 가시를 사용하셔서 그의 내적 성품을 다듬어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다.

 

이 책 『당신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는 우리에게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 주는 좋은 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응답하시지 않지만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다듬어 가시고 축복해 가는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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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5과에서는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기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의식과 바른 기도의 방법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해 배우게 된다.  훈련생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주기도문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우리의 기도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기도를 어떻게 고쳐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강해하고 있는 『무엇을 기도할까』는 1권5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비록 기도하는 방법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 동안 방법론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우리들의 기도생활에 대해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도전하고 있다.  기도의 생명은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있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기도의 내용을 보여주는 주기도문을 통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에 대해 밝히고 있는 이 책은 1권 전체에서 반드시 읽어볼만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할 만큼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며 이 책을 통해 훈련생들은 바른 기도에 대해 이해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나누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총 9개로 나누어 강해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 중 몇 가지를 발췌해 보았다.

 

기도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조용히 기도하고 일어나시는 모습 속에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이 간청을 들으시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간청하는 제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기도의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기도의 자극을 받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도 생활이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보다 앞서서 자극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둘째는 우리는 기도의 자극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주기도문은 그 자체가 완전한 기도로 동시에 모든 기도의 기초가 되고 지침이 되는 완전한 모형이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셋째는 주기도문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기도인가를 배운 사람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믿는 사람이 무시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 이름은 그분 자신입니다

주기도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핀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평소에 드리는 기도와 순서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순서상 우리 자신이 우선되어 있으나 주님이 가르치는 기도의 최우선은 하나님 자신이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실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전부 이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한 기도에만 몰입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기도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점이 많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도의 잘못된 우선순위와 편협한 강조점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전 인격을 나타내는 귀중한 상징이며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그분의 인격 자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거룩해질 필요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거룩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원한다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해달라는 소극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그 기도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이 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약속과 결단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이름에 합당한 영광 역시 돌릴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을 항상 마음에 모시고 살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첫 자리는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은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 없다.  넷째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생활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전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하겠다는 약속과 결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려면 위의 약속과 결단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간청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 들어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핵심,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서만 아니라 사복음서를 위시한 신약 전체에 있어서도 중요한 테마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었으며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영토를 소유한 세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다스림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하나님나라를 세상적인 나라로 착각하는 것이다.  첫째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는 현대 교회 신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치관이나 관심사 등이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천국으로 해석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통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갈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임하기를 기도하는 자이면 그 나라가 먼저 우리 마음에서 꽃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뜻에 기쁘게 순종해야 하며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천국은 교회를 통해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이 천국은 교회를 통하여 온 세계에 확장된다.  하나님께서 지상교회를 세우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 세계에 확장하는 데에 있다.  끝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은 이제 오실 것이며 이 세상 왕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그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당신은 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를 소망한다면 당신의 마음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를 계속 확장하기 위해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한다.  당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

주기도문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후반부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들어 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우리 자신을 위한 네 가지 기도 중 첫 번째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위한 기도의 첫 자리에 먹고 마시는 ‘일용할 양식’을 갖다 놓았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것임을 주님께서 솔직히 시인하셨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솔직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잘못하면 이 기도를 우리와 아무 관련 없는 기도, 즉 1세기 당시의 빈자들에게 어울리는 기도라고 냉소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첫째는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하루 생활이 전적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 기도는 꼭 필요하다.  둘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한다.  셋째는 이 기도에는 우리의 생의 목적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도를 해야 한다.  넷째는 내일의 염려를 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한다.  끝으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기도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강한 능력이 들어 있다.

 

우리는 다 여유 있는 생활을 원한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에는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 수 있는 여유가 많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하나님의 자녀답게 경건하게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생활에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에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가진 일용할 양식이 세상 사람의 소유물에 비해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시고 허락하시는 그 일용할 양식만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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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4과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에서 훈련생들은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과 성경의 기능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우리의 신앙 인격과 삶을 온전케 한다는 사실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러한 배움과 깨달음은 당연히 말씀과 동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씀의 손 예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법에 대해 간략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1권 4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말씀의 손 예화에서는 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네 손가락은 네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 즉 듣기, 읽기, 공부, 암송을 보여 주며, 성경의 가르침들을 일상생활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는 묵상은 엄지손가락에 해당된다.  이 예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면 균형 있게 섭취할 수 있는가를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이 다섯 가지 방법은 하나하나가 모두 다 중요하다.

 

듣기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듣는 일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점은 보통 설교자가 분당 약 125단어를 말할 수 있는 반면, 우리 머리는 분당 약 1,000단어 이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할 정신적 에너지의 90%는 사용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단순히 듣기만 해서는 안 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는 기록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설교자보다 한 걸음 앞서 생각하고 다음에는 설교자가 실제로 하는 말을 들어 보는 것이다.  계속해서 생각을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듣는 방법이다.

 

읽기 - 효과적이고 즐거운 성경읽기를 위한 지침

성경을 읽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자세가 요구된다.  성경 읽기의 목표는 즐거움과 새로운 힘을 얻는데 있는 반면, 성경 공부는 확신을 높이고 구체적인 적용을 하는데 있다.  성경 읽기를 위한 도움이 될 만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고 대화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대화를 갖게 하며, 이를 통해 삶의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개인의 경건 생활뿐만 아니라, 소그룹에서의 나눔에도 큰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둘째는 집중적으로 읽는 것으로, 이러한 읽기의 목적은 성경의 어떤 장이나 책의 내용에 흠뻑 젖어 드는 데 있다.  성경의 한 권이나 한 장을 택하여 작정한 횟수만큼 되풀이 하여 직접 읽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읽기를 통해 개인 성경 공부를 위한 보다 깊은 준비를 할 수 있다.

 

공부 - 스스로의 탐구 : 효과적인 성경공부의 열쇠

성경공부를 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주어진 구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분석해야 한다.  첫째는 이 구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둘째는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인가, 셋째는 이 구절을 내 삶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세 질문은 관찰, 해석, 적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경공부를 위한 실제적인 방법으로는 먼저 공부할 책을 전체적으로 통독하면서 저자의 목적과 해당 장이 전체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찾는다. 둘째, 그 장의 성경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분석하면서 명령이나 약속, 교훈이 없는지 찾는다.  셋째, 다시 전체를 다시 살펴보면서 짧은 요약 혹은 개요를 작성한다.  넷째,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와 "이 말을 하는 속뜻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면서 해석한다.  다섯째,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적고, 그 가르침과 연관하여 나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적으면서 적용한다.

 

암송 - 성경 암송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중 하나는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암송함으로써 균형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일을 계발시켜 나가야 한다.  성경 암송은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데도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묵상 - 성서적인 묵상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

말씀을 섭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방법인 듣기, 읽기, 공부, 암송이 있지만, 이 방법들이 묵상과 연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하게 붙잡을 수가 없다.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분석하며, 단어들을 생각으로, 생각을 행동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는 우선 기도한 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주의를 기울인다.  중요한 것은 섭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섭취한 그것을 소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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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3과에서는 경건의 시간에 대해 다룬다.  경건의 시간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 그리고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질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된다.  특히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건의 시간을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개인적인 결단을 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는 막막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큐티를 실천하는 데는 어떻게 할지 몰라 헤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영성이 깊어지는 큐티』는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은 어떻게 경건의 시간을 가질 지에 대해 구체적인 예와 함께 방법론을 보여준다.  처음 큐티를 시작하는 사람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구절 큐티부터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를 발견해 내는 원리 중심 큐티까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큐티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각 단원마다 풍부하게 제공되는 실제 큐티의 예를 통해 구체적인 가이드를 받을 수 있다.  저자는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하게 하는 핵심적인 도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큐티라고 대답한다.  큐티란 말씀으로 샤워를 하는 것으로 큐티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큐티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마치 샤워를 안 하는 사람처럼 악취가 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큐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큐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경공부가 성경의 지식을 추구한다면 큐티는 성경 속 하나님의 음성을 추구한다.  성경공부가 내용을 중시한다면 큐티는 감동을 중시하며 성경공부가 ‘앎’을 강조한다면 큐티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물론 두 경우 모두, 결국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강조점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큐티가 어렵지 않은 이유는 큐티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큐티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공한다.

 

1. 큐티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

이는 가장 기초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3개월이든 6개월이든 꾸준히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서로를 끊임없이 자극해 줄 수 있는 함께 큐티하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4. 묵상을 기록하라.

어설픈 묵상이라도 일단 글로 쓰기 시작하면 묵상능력이 증폭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5. 큐티 안내 책자를 읽기 전에 먼저 스스로 묵상하라.

6. 본문이 어렵다고 주석이나 참고 서적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7. 일찍 자라.

8. 한 번 정도는 큐티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공부를 해 보라.

 

저자는 처음 큐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큐티 방법으로 구절 큐티를 권한다.  구절 큐티란 이미 주제가 정해져 있는 한두 구절을 중심으로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구절 큐티에서는 그 구절을 포함하고 맥락을 모른다 하더라도 명확하게 구절이 말하는 주제를 알 수 있는 구절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보통은 성경암송구절을 이용한다).

 

구절 큐티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선정된 구절(보통 한두 구절)을 몇 차례 읽는다.

2. 읽으면서 마음속에 갖게 되는 느낌이 무엇인지 잘 살핀다.

3. 그 느낌과 감상을 담대하게 적어 나간다.

4. 기록하다 보면 나의 삶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할지 깨닫게 되며 그것을 기록한다.

 

구절 큐티의 이점은 성경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절 큐티의 단점은 본문의 전체 맥락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좀 더 깊은 말씀 묵상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본문 큐티를 저자는 제시하고 있다.

 

본문 큐티를 하는 일반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선정된 본문을 두세 번 읽는다.

2. 본문의 내용과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안경을 쓰고서 본문을 다시 읽는다.

3. 묵상의 내용을 기록한다.

4. 말씀에 따른 적용을 기록한다.

5. 기도함으로 마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2항으로 본문 큐티를 위한 묵상의 도구인 “7가지 묵상을 위한 안경”이 있으며 이중 한 가지를 가지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1.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2. 내가 버려야 할 죄는 무엇인가?

3. 내가 주장해야 할 약속은 무엇인가?

4. 내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5. 내가 피해야 할 오류는 무엇인가?

6.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7. 내가 새롭게 발견한 진리는 무엇인가?

 

나아가 이러한 묵상의 깊이를 더해 줄 두 가지 방법으로는 첫째, 묵상할 때 질문을 사용하는 것과 둘째, 묵상한 후 기도로 하나님께 묵상의 내용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가 권하는 큐티 방법은 원리 중심의 큐티이다.  구절 큐티는 즉각적인 적용이 가능하며 본문 큐티는 삶의 표면에 나타나 있는 행동을 고치는 적용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본문 큐티를 오래하다 보면 거의 같은 영역에서 적용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의 표면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원리와 태도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리 중심의 큐티이다.  원리 중심 큐티는 성경을 정확히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 관찰과 해석이라는 성경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야 한다.

 

원리 중심의 큐티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내용을 관찰하기.

순수하게 본문 내용을 통해 객관적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고 관찰 할 때 어떤 관 점에서 관찰할 것 인 가를 사전에 결정해야 한다.

2. 일반적인 원리를 끌어내기.

이는 묵상에 의한 내용의 재해석으로 관찰된 사실에서 일반적인 성경의 원리를 끄집어내 는 과정이다.

3. 일반적인 진리를 나의 삶 속에 특별한 진리로 가져오기.

지금 자신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묵상하며 이 과정에서 새로 운 깨달음과 기도, 결단, 적용 등이 이루어진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원리 중심 큐티가 어떻게 말씀사역에 이어질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무엇보다 큰 강점은 각각의 설명하다 실제 본문을 가지고 어떻게 큐티가 이루어지는 실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실례는 내용이 보다 풍부한 이해뿐 만 아니라 실제 큐티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 책은 경건의 시간을 배우고 가르치는 훈련생들과 인도자에게 좋은 참고도서가 될 것이며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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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2과는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생활에 관한 내용으로 경건의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건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하도록 훈련생을 이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시간을 결단하지만 쉽게 실천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늘 급한 일에 쫓기는 삶』은 1권2과의 좋은 참고도서가 된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급한 일에 얽매여 사는지에 대해 말하며 이의 극복을 위한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훈련생들에게 그들의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떻게 경건의 시간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좋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래는 그 대략의 내용이다.

 

우리는 늘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문제는 중요한 일은 꼭 오늘이나 금주 안에 끝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 반면 긴급한 일들은 그것이 덜 중요하다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처리하도록 압박을 가해온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사용은 궁극적으로 각자가 세운 목표에 의해 좌우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치 않았던 기회나 요구에 충동적으로 많은 시간을 소모하여 정작 중요한 일을 미처 끝내지 못하는 경우 역시 허다하다.  그래서 늘 긴급한 일에 쫓겨서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게 된다.

 

생산적인 시간 사용을 위해서는 우선 중요한 것을 정해야 한다.  시간을 통제하는 첫 번째 단계는 어떤 활동이 가장 중요한지를 정하여 하루 혹은 한 주 혹은 한 달 동안 그 일에 적절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간을 현재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당신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현재 당신의 생활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조정해야 한다면 현실에 직면함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실제 시간 사용 표를 만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는 시간 예산을 세우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높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할 활동을 위해 어느 활동을 줄여야 할지를 신중하게 결정해라.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 많은 변동을 계획하지는 말라.  끝으로 실천이 필요하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웠다 하더라도 확고한 실천의지가 없다면 소용이 없다.  하루를 시작할 때 그 날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우선순위에 따라 해야 할 일을 나열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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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 1권1과에서 개인의 간증을 다루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오픈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끄셨는가를 발견하고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자훈련을 통해서 더욱 당당한 간증자가 되어야겠다는 기대와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다.  데이브 도슨의 『효과적인 간증: 간증문 작성법』은 이점에서 제자훈련 1권1과의 좋은 참고도서라고 할 수 있다.  간증의 필요성과 효과적인 간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간증문을 작성할 때의 유의점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실제 간증문을 어떻게 써야 될지에 대한 좋은 가이드와 구체적인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소책자라 분량도 부담이 없는 만큼 한 번쯤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래는 대략의 내용이다.

 

간증은 하나님께로 향한 당신의 순례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효과적인 도구의 하나이다.  간증이 효과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는 첫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경험한 바를 듣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고, 둘째는 아무도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할 수 없으며, 셋째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나눌 수 있고, 넷째는 다른 사람도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할 수 있고, 다섯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게 할 수 있다.  효과적인 간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민감한 필요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삶 가운데 건드리거나 자극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나 필요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간증을 나눌 때 자신의 민감한 필요를 중심으로 간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당신을 진실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자신의 민감한 필요를 당신에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에 대해 나누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 믿게 된 경위, 믿음 후의 삶의 변화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삶에서는 자신을 청중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민감한 필요를 드러냈고, 믿게 된 경위에서는 왜 제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끝으로 믿음 후의 삶의 변화에서는 자신의 민감한 필요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간증을 나눌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는 첫째, 자신의 지난날을 다 이야기하지는 말 것, 둘째, 바울의 간증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민감한 필요를 상세히 설명할 것, 넷째, 복음을 명확하게 소개할 것, 넷째, 민감한 필요의 해결책을 설명할 것, 다섯째, 신중하게 나눌 것, 여섯째, 1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설교를 하려 들지 말 것, 일곱째, 자신의 간증의 가치를 인식할 것, 여덟째, 사실을 말할 것, 아홉째 기도할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당신의 간증에는 주님을 만나기 전 당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민감한 필요를 사실적, 구체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믿게 된 경위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은 후 변화에서는 당신의 민감한 필요와 관련지어 예수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설명하되 설교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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