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3.02.17 율법과 복음 1
  2. 2023.02.11 율법의 가치 1
  3. 2023.02.05 하나님의 율법
  4. 2022.10.30 성경적인 율법관

율법과 복음

율법 2023. 2. 17. 21:57

반율법주의’란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은 물론, 율법에서 유추할 있는 여러 가지 원리들이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생활을 구애받게 없다는 사상을 가리킨다.  이 사상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케 되었으므로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로마서 3장 28절 말씀에 나와 있듯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2:8)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2:16).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4:1-4),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종류의 율법이든 이상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율법 자체가 그리스도와 상반되는 진노를 이루게 하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4:15),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이다( 5:18).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율법 폐기론자 혹은 도덕률 폐기론자’라고 부른다(롬 6:1-2).  이들은 인간의 육체와 육체 안에 속한 인간의 삶을 경시하거나 지식에 근거한 영적인 삶만을 우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특별히 Martin Luther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Johann Agricola 같은 사람도 가장 전형적인 반율법주의자로서, 오늘날 역시 이러한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율법 하면 구약의 모세 율법만을 생각하고 반대로 복음 하면 신약의 복음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자연만물(롬 1:19-21)과 인간의 양심에 새기신 법에서부터( 2:14-15), 구약 모세의 율법(성문적 율법)인 도덕법(출 20:1-17)과 의식법(레 3:1-50), 그리고 시민법(레 25:39-41)과 신약의 산상수훈의 교훈(마 5-7장)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 규범과 선과 악의 기준으로 주신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이란 Jonathan Edwards가 『구속사』에서 말한 것처럼 신약의 복음뿐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사역(고전 15:1-8)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계시, 즉 에덴동산에서의 여자의 후손 언약 이후( 3:15), 각종 언약의 내용들( 19:1-6, 5), 더 나아가 예수님과 관련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 선포( 53:1-12, 31:31-34), 역시 복음일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구속의 역사 전개를 위한 경륜의 방법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에는 구속사역을 행하실 것에 대한 언약( 9:1-10)과 구원의 객관적 조건을 제시하는 율법을 주로 강조하셨다( 3:24).  반면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10:9-14), 천국에서의 최종 구원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 맺어주신 새 언약( 26:28)과 이미 주님께서 구원의 조건에 필요한 모든 죗값을‘염소와 송아지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치르셨다고 선포하는 복음을 주로 강조하셨다( 9:11-15).  그래서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시대’이고, 신약은 ‘복음시대’라는 통념이 생겨난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성육신 사건)으로 전후로 나누어지면서 그 강조점은 다르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구속사역을 통한 죄인의 구원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일이 된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이 그 역할은 다를지라도 구원이란 목적 하에서 서로 연결된 계시들 인 것을 보여준다( 3:22-24).  

먼저 율법은 인간에게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여 인간이 죄인인지를 보여주고( 7:7), 죄의 대가인 형벌을 규정한다(딤전 1:8-10).  또한 모든 인간은 다윗의 고백한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죄인(시 51:5)인 동시에 태어나서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롬 5:12)로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형벌받을 마땅한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여기서 율법의 약점을 찾는다면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제한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7:19, 10:1).  반면에 복음은 죄인에 대한 정죄에서 머무는 율법에서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속량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무서운 죄인을 구원하기까지를 선포한다( 3:13).  

그러므로 신구약을 불문하고 선택받은 자는( 1:4),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의 결과인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아닌(딛 3:5), 구속의 은총을 적용받아 그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엡 2:8).  반면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살후 1:8-9) 율법과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역시 율법의 적용을 받아 심판을 받게 된다( 2:12-16).

조금 풀어서 말하면 율법의 근본 역할 자체가 복음의 전단계 계시인 동시에 율법은 필연적으로 복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그 목적이 상호동일하게 인간 구원이란 점과 그 수여자 및 집행자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점에서는 같다(사 33:22).  그러나 맡은 바 기능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가 왜 죄인이며(롬 3:19-20), 어떻게 정죄당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딤전 1:9-11)을 제시해 주는 반면 복음은 율법이 죄인으로 규정한 자(롬 7:7)와 그에 관한 형벌의 해결까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르다(갈 3:13). 즉 율법이 최소한의 선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 규범이라면 복음은 인간에게 절대적 선을 보여주는 영원한 규범이라고 볼 수 있다(히 7:28).  

그러나 인간의 죄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율법이 어떻게 해서 복음과 같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일 수 있는가(사 33:22)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사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아야만 어떻게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눅 5:8, 19:1-10, 행 16:30-32).  또한 율법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 것을 알아야(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롬 10:4, 갈 2:21).  그러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갈 3:24), 율법은 우리를 복음이라는 완전한 계시로 인도해 주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롬 3:31).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만이 우리는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이행할 수 있다(롬 8:3-4).  그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며(롬 13:8-1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행할 수 있다(갈 3:24-29).  믿음은 율법을 적합한 자기 자리로 돌려놓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 안에서 역할을 하게 된다.  믿음은 구약성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유대인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딤전 1:8).  요지가 무엇인가?  이 둘은 구별되지만 불가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율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의 가치  (1) 2023.02.11
하나님의 율법  (0) 2023.02.05
성경적인 율법관  (0) 2022.10.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율법의 가치

율법 2023. 2. 11. 15:23

우리가 쉽게 율법이라고 통칭하는 ‘언약법’의 실체는 그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며 각 분야마다 또는 전체로서 범위 및 역할이 다양하고 구원의 복음과도 오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갈 3:22).  흔히 종교사학파에 속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율법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 규범으로서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율법의 본질을 창조부터 종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신약과 대응되는 구약의 언약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신약시대의 복음과 관련하여 갖는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갈 3:24)와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깊은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시 19:7-10).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고 어색한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율법서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이 대부분 각종 제사 제도, 정결 예법, 이스라엘의 절기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21세기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율법을 멀리하게 만드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 이 율법을 포함시키셨다는 사실이다.  즉 율법은 반포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출 24:12),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딤전 1:8).

먼저 구약 율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제사 제도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모세오경에 기록된 제사 규례(레 1:1-7:38)는 그 세밀함과 구체성, 그리고 반복적인 강조 등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이런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죽음(빌 2:6-11)과 부활(행 2:23-24) 이후 폐지된 것을 생각한다면( 2:15), 우리에게 과연 그렇게 상세한 기록이 필요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주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 규례를 상세히 가르치시고 그 율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도록 섭리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속죄의 원리, 즉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레 17:11)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희생제물의 피는 정결함과 용서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 정결케 되었다’ 사실상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히 9:22)  아울러 제사장이 매일 서서 반복되는 제사와 짐승의 피로서는 결코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가 없다( 10:11).  오직 무흠 하신 예수 그리스도( 4:15)의 구속의 보혈만이 단번에 영원토록 모든 죄인의 죄와 허물을 사할 수 있다(히 9:12).  해마다 대속죄일에 희생제사를 드렸던 모든 제사장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전적으로 완벽하고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8:1).  

그런데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갈 3:10).  율법이 성취할 수 없는 요구 사항들을 제시하기에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범죄 한 인간이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없다(롬 2:13).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저주를 받았다(갈 3:13).  그러나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고’(히 5:8-9), 죄 없는 희생, 즉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롬 5:18)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온전하신 분이었다.  이 구절의 뜻은 그의 온전하심이 테스트를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전적으로 자신이 짊어지셨다(신 21:23).  결국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생명에 이르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그가 그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갈 필요가 없다(요 1:29).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을 겸손히 깨닫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받는 방법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골 1:20-23).

이런 의미에서 구약 율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한 예표이며 그림자이기에( 8:5), 우리는 율법의 각종 규례와 가르침을 통해 그것들이 예표하는 실체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바라볼 있어야 한다( 3:13).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율법은 결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교훈도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율법의 중심 사상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율법 중의 핵심인 십계명( 20:1-17)도 크게 그 내용을 둘로 나눈다면 ‘하나님(신 6:5)과 이웃 사랑’이다(레 19:18).  만약 율법의 가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표면만을 바라본 사람들은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억지스러운 계명으로, 혹은 피도 눈물도 없이 인간을 속박하는 법률이라고 혹평할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마 22:36),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 제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이것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다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다( 12:28-31).  십계명과 다른 모든 구약의 율법은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된다.  이 두 계명을 지킨다면 나머지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롬 13:8-10).  말씀의 의미는 구약 율법의 중심 사상은 사랑에 바탕을 것으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바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례인 것이다( 22:35-40). 

사도 바울 역시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 13:10)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율법을 대할 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율법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3:20, 3:11, 5:4).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옥에 가야 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16).  만약 우리가 율법을 통해 이것을 있다면 율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율법을 받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는 것이다(신 30:10).  이런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처음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주셨다(출 24:12).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신앙(출 20장, 레 1-7장)과 공동체 내에서의 질서 유지(신 19-25장), 더 나아가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였다(신 10:12-22).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그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거스리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셨다(신 30:15-20).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과 불순종을 반복하는 역사를 전개함으로 인해 그에 따른 번영과 오욕을 역사에 남겨야만 했다(히 3-4장).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전 10:11).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야 하며 율법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 14:21, 계 1:3).  아울러 불순종하는 삶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엄청난 불행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고전 10:1-12).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면 율법은 구약시대의 백성만을 위한 법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오는 생명의 법이 된다(마 19:17).

'율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과 복음  (1) 2023.02.17
하나님의 율법  (0) 2023.02.05
성경적인 율법관  (0) 2022.10.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하나님의 율법

율법 2023. 2. 5. 10:32

오늘날 국민의 인권이 보장됨을 원칙으로 하여 자유주의적 원리를 따르는 나라에서는 일 년에도 수백 건의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지며 또한 폐지된다.  어떤 법률은 제정된 후 몇 번 사용되지도 않고 개정, 혹은 폐지되어 그 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야의 사람들조차 그 법률의 존폐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법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여 모든 상황과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법률을 만들 능력이 없음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법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상황에 맞게 개정되어 나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불안전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법은 지극히 엄정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번 제정 반포된 후에는 결코 폐지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만일 그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있게 될 것이고(레 26:14-39),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임을 성경은 언급한다(레 26:3-13).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이 나타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말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이다(사 33:32).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게 율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율법을 기껏해야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이나 출애굽기 후반부와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 법전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율법이 모든 피조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행을 위한 강제력이 뒷받침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정의할 때(롬 2:15), 그것이 지칭하는 범위는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무엇인가?

먼저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제정하신 ‘자연법칙’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속에 특별한 본성을 심어 놓으셨다.  이 본성에 따라 곡식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1:11-12), 동물들은 육식 혹은 채식을 하며( 1:21-25), 태양은 아침마다 떠오르고 수많은 별들이 궤도에서 운행하고 있는 것( 1:14-19)도 모두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거역할 없는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서의 율법은 전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자연법칙 가운데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대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롬 1:19-21). 

예를 들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를 내려( 2:23),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시고( 5:45),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신다( 8:22).  어떤 경우에는 자연법칙을 거스리는 이적을 통해 범죄 한나라와 사람들에게 진노와 경고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창 6:5-7, 7-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법칙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자연에 내재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롬 11:8).  반면에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자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법을 발견할 수 있다(골 3:10).  즉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고 그분의 지혜를  받는 데 반해 불신자들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진다’(엡 4:18).

또한 이 율법에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양심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2:15).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엡 4:19)과 최선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전 10:15).  하지만 이러한 양심과 이성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5:12), 많은 부분이 손상을 입고 부패해졌다( 17:9).  한 마디로 ‘썩어 문드러졌다’(창 6:12).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과 이성만으로는 절대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3:12).  그러나 재물 많은 부자청년처럼 오직 상대적인 선만을 행할 수 있다( 19:16-22).  또한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딤전 4:1-2) 그 사람에게는 양심이 없는 것처럼 도덕적 불감증의 상태에 빠져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전한다(딤전 1:19-20).  그러나 양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이러한 양심을 통해 사람들은 신앙유무를 떠나서도 도덕적인 것을 보고 선하게 여길 있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여기는 본능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8:9).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에게 있어 양심은 가장 방해꾼이다( 10:22).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양심이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 자신의 양심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계속 권유할 뿐만 아니라(삼상 24:5-7), 죄에 대하여 평가할 있도록 판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4:16).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생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율법을 새겨주셨다( 8:10).  따라서 인간의 심령에 새겨진 양심의 법으로서의 율법은 그분이 정하신 하나님의 법도이다.

이렇게 피조 세계에 주어진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의 법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자연율과 양심의 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할 수 없다(롬 1:21-22).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이런 ‘기본적 율법’ 이외에 성경에 기록된 ‘특별계시’로서의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율법’이라고 부르는 ‘성문 율법’(成文律法)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7:7-9), 그분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있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범죄 한 인간을 위한( 7:28),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3:31).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아는 것처럼 그 율법을 준수하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딤전 1:8).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이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3:20). 왜냐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결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갈 5: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롬 7:7).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필연적으로 요청됨을 직시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타락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다( 3:19-24). 요약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2: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갈 3:22, 2:8).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다.

'율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과 복음  (1) 2023.02.17
율법의 가치  (1) 2023.02.11
성경적인 율법관  (0) 2022.10.30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

성경적인 율법관

율법 2022. 10. 30. 16:52

오늘날 ‘율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대략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먼저 예수님을 삼위의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자신들의 혈통적 선민의 지위에만 연연하여(마 4:7-10, 요 8:31-59), 구약만을 믿으면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고 지금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율법 절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부류는 ‘도덕률 폐기론’ 혹은 ‘반율법주의’로 불리는 자들로(롬 7:7-13), 이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 율법의 구속력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의와 형벌의 요구를 그분이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유 4절),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으므로(갈 5:1), 율법은 자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원리들이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의 생활을 구애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성경적인 율법관’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엡 2:8), 여전히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선한 것으로(롬 7:12), 자기 힘이 아닌 성령을 힘입어(롬 8:4),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인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한다(겔 11:19-20). 즉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의 바른 도리(道理)로 율법이 교훈하는 삶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먼저 율법의 고유한 본질에 대해 알아본다면 율법은 근본적으로 그 법의 주체자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사 33:22).  나아가 그 원리가 그분의 창조와 섭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집행과정이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므로 절대적으로 완전하다(시 19:7).  율법은 선택된 이스라엘이 언약의 조건과 내용으로 체결한 법이지만(출 19:1-24:11), 구속사점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 효력이 시간적인 면에서 제한이 있고(마 11:13) 능력면에서 한계가 있다(히 10:1-2).  하지만 그 내용 자체만은 영원히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시 119:89).  따라서 율법은 단순한 구약시대의 생활규범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과 연결되어 매우 오묘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갈 3:24).  원칙적으로는 신구약을 망라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 규정 및 인간 양심에 내재(시 37-31)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까지 다 포괄하고 있지만(롬 7:7), 이것을 조금 더 구분하면 둘로 나누어진다.  

먼저 ‘기본적 율법’(Elemental Law)이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자체 안에 심어놓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가리킨다(신 29:29, 롬 2:15).  이는 그 대상이 비이성적 피조물인가(롬 1:19-21), 혹은 이성적 피조물인가(롬 2:14-15)에 따라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비이성적 피조물에 내재(內在)한 고유한 특성을 가리켜 ‘자연율’(Natural Law)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도덕률(Moral Law)은 자유 의지를 갖는 이성적 존재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에 내재(內在)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이성과 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롬 2:15).  도덕률은 이성적 피조물 내부에 선천적으로 심어준 것이므로 이에 대해 무지나 몰이해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을 강압적으로 심어준 것이 아니라 신적 지혜에서 비롯된 조화로운 것이므로 그 대상도 도덕률의 내용이 합리적인 것을 인식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Calvin의 『기독교강요』을 인용하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知覺)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겪게 되는 죄책감을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안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하나님의 신적 의지의 표현이 이성과 양심으로 반영된 것이다(창 4:13).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알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홍수가 인류 대부분을 쓸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창 6:5).

기본적 율법이 창조 시부터 모든 피조물 내부에 심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인 반면 ‘성문적 율법’(Enactive Law)은 그 후에 특별 계시의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된(히 1:1), 하나님의 의지로써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다(마 22:37-40).  이는 기본적 율법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지닐 뿐 아니라(출 20:1-17), 간접적이고 제한적이나마 멸망받을 인간 구원의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탁월성을 지니고 있으며(갈 3:19-22), 이 성문적 율법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이 세 부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법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법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점은 어떤 측면은 한시적이고 또 다른 측면은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먼저의식법’은 구약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이는 제사법( 1:1-7:38)과 성결법(레 17:1-22:33), 그리고 절기( 23:1-44), 특히 종교생활의 의식적 측면과 관련된 것으로( 24-27), 입법 원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원리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모든 제사에 관련된 의식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10:1).  따라서 법은 아직 예수님께서 성육신 강림하여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 전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 사역의 여러 원리와 측면을 반영하지만( 20:28), 그것이 예표 하던 본래의 내용이 성취된 신약시대에 와서는 규범으로서의 문자적 구속력은 상실되었다( 8:7, 13).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실체인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몸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렸기 때문에 매일 드리던 모든 제사는 영원히 사라졌다( 10:10-12).  십자가 사건( 19:30)을 통해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제사와 의식들이 끝이 난 것이다( 15:38).  따라서 오늘날 짐승을 잡아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26:28)을 힘입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4:16). 성소의 휘장이 찢어질 의식적 율법이 성취된 것이고( 10:19-20), 신약의 예배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4:24), 생활 속에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이다( 12:1). 우리가 더는 의식법의 구속을 받지 않지만 그 배후의 원리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른 하나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함께 모여 살면서 성결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시민법’이다.  이 법은 재산법( 21:2-11, 19:14)과 형사법( 21:12-32, 21:1-9, 21:18-23, 24:16, 25:1-3), 이혼법( 24:1-4)과 재판법( 23:1-9, 19:15-21, 24:17-18), 그리고 민사법( 21:15-17)과 보장법( 23:24-25, 24:6-13, 14-15, 25:5-10)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분야의 율법은 그야말로 특정 시대와 공간의 상황, 역사 발전 단계에 맞추어 주어진 매우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법이기 때문에 자구적으로 영원히 적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데 있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문제를 판결해 이런저런 법을 만들어 주셨지만, 시민법도 예수님이 오시므로 막을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21:43).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만을 두고너는 선택받은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 16:16)이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9-10).  따라서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시민법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2:15).  그러나 이 법들의 배후에 있는 원리는 우리의 행동 지침에 적용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신약에 와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시민법의 규정보다 그 원리를 극대화하여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더욱 고도의 시민법 규정을 주셨기 때문이다(마 5-7장). 

끝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강령을 규정한도덕법’이다( 12:28-31).  이 도덕법은 기본적 율법 가운데 도덕률(道德律)을 요약하여 성문화 한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토록 구속력을 가진 모든 법에 기본이 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구 불변한 창조와 섭리 원리에 근거한 것이므로 시대에 따라 불변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 및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강령이다(마 22:37-40).  이 법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98문항에서 이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도덕적 율법은 십계명에 요약적으로 포함되어있다. 이것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의성으로 주어지고 판에 친히 써주신 것으로 계명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 나머지 여섯 계명에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10:4).  

도덕법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으로 범죄 한 인간이 지키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10:4).  하지만 성경은 이 법에 대해서는 다른 두 법(의식법과 시민법)과 다르게 영원하다고 선언한다( 119:89).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의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공포된 가지 계명( 22:37-40)은 도덕법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는 결국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눅 10:26-28).   도덕법의 핵심은 하나님( 6:5)과 이웃 사랑이며( 19:18), 주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답게 살도록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법으로( 3:31),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원토록 존속되는 이상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5:17).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이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폐지된 율법으로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의식법과 시민법이다(엡 2:15).  이 두 가지 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찢어질 때(눅 23:45), 의문에 속한 각 절기들과 안식일, 그리고 제사에 관한 모든 의식들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골 2:16-17, 갈 4:9-10).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율법에 내재된 정신과 원리들, 즉 거기 담긴 교훈적인 면과 내적 의미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할례’가 ‘세례’로, ‘무교절’이 ‘성만찬’으로 ‘제사’가 ‘예배’로 이어진 것이 그 사례이다.  그리고 폐지할 수 없는 율법으로는 도덕법이 남은 것이다(마 5:17).  

만약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율법을 폐지한다면 죄가 죄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롬 3:20, 5:13), 결국 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율법은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죄를 지적해 주는 거울의 역할을 했지만(롬 7:7),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의 역할이 달라졌다.  즉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롬 5:20)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딤전 1:8).  따라서 율법은 비록 부정적인 측면을 반영하기도 하지만(롬 4:15) 반면에 인간 구원에 공헌을 하며 구원사역에 필요한 것이다(갈 3:24).  결론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을 받았지만(갈 3:13) 율법 자체만은 삶의 지표로 삼아 존중하여야 한다. 

'율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과 복음  (1) 2023.02.17
율법의 가치  (1) 2023.02.11
하나님의 율법  (0) 2023.02.05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