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시 119:68), 그분이 창조한 만물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수많은 악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악이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물리적인 악”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도덕적인 악”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악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창 3:1-15, 마 15:18-20).  이 세상 안에 있는 악과 고난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선하고 의로운(스 9:15), 하나님을 변호해야 하고(이를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필수적인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유사 이래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숫한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하늘에 사무치도록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결코 이 질문을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는 선한 하나님과(합 1:13), 창조 세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악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악이 부정되는 곳에는 더 이상 구원도, 가치규범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롬 5:21), 결국엔 인간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를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는(사 45:7),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의 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악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혹은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인 것처럼 자주 언급하지만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문의 ‘라’(ra)가 악과 악의 결과, 즉 악행과 그 결과를 망라하여 뜻하는데 있기 때문인데 여기서 사용된 ‘짓는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bara’로 이 말의 의미는 창세기 1장1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로서 절대적 창조,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말하는(애 3:38), 반면에 그분은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시고(신 32:4),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며’(합 1:13), 시편 5편4절에서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의 여러 본문들은 아이러니하게 악한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 하지만(삼하 16:11, 왕상 22:20-23), 또 다른 한편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고(호 9:15), 악의 조성자가 아니시며(욥 34:10-12), 악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잠 8:7).

 

초기 교회 시대의 이단 마르시온은 이 구절을(사 45:7), 근거로 해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미치광이들은 악이란 말을 놓고 왜곡하여 마치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분, 즉 죄를 만드신 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사야의 본절을 얼마나 어리석게 오용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심판에 속하는 재앙의 조성자일뿐 범죄에 속하는 악의 조성자는 아니라는 통상적인 구분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하나님만이 홀로 모든 사건의 조성자이시다”라고 합니다.  칼빈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악의 기원의 문제는 기독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악 같은 것을 허용하셨는지에 대해 성경은 합리적으로 답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Heinrich Ott는 이 세계 안의 악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해 “신학적 한계의 질문으로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G. Gutierrez는 『On Job: God-Talk and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에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결국 도덕적으로 악한 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를 인간의 신학적 개념 안에 가둘 수 없는 이유는 그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그 지식에서 작용되는 논리는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분으로(롬 11:33-34, 고전 1:25),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고(사 55:8),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인간처럼 일일이 변명하지 않으시며(욥 13:6),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렘 32:19).  Herman Bavinck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시면서도 그의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은 예리한 칼을 사용하면서 자녀에게는 칼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예를 들었는데 비록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는 아니시지만 그 어떤 재난도 그분의 주권적 뜻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욥 1-2장, 암 3:6), 만약 우리가 이 상충적인 양 진리를 무리하게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을 침범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죄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라고 한 Louis Berkhof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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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이 믿는 대로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죄까지도/사 45:7),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그분에게 하나도 없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인간이 악에 대하여 인과율적으로 책임이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지만(요일 3:4),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에 의해(시 115:3), 인간의 죄에 대하여(잠 16:4),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왠지 불공평해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시 25:8), 악을 작정해 놓으신 이유가 무엇이며 왜 그분만이 면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난해한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 야고보서 1장13-15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의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더욱이 그분은 누구라도 죄를 짓도록 시험하거나 죄를 짓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죄는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요 8:44),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죄에 연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 9:14).  반면에 에베소서 1장11절은 하나님이 부득이 하게 모든 것, 심지어 죄까지라도 미리 정하신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딜레마는 역설이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출 15:18), 그분의 절대적 거룩함(시 47:8), 모두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어야 한다고 강력히 말하지만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함”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역설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은 답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는 구절인 로마서 9장18-21절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라니…’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19절에서는 지적 궁금증을 제시하고 20-21절에서는 바울이 이에 대하여 답하고 있지만 19절에서 제기된 질문은 지적 문제뿐만 아니라 질문자의 태도에 대한 문제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20-21절에서 바울은 태도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이것을 통하여 지적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할 수 없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의해 역설이라는 견해가 실제로 입증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 안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규범적 뜻”과 “하나님의 허용적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 뜻”으로 이 세 개의 뜻 모두는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속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창 12:1-9),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그 땅이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 명하셨습니다(창 17:8).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셨는데(창 26:2),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으로 이 규범적 뜻 안에는 오직 ‘선’만 포함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악을 차마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합 1:13).  반면에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기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저버리고 약속의 땅을 출발하여 애굽을 향해 떠난 것처럼(창 12;10), 이 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아니지만 허락하신 것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잠시 동안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행 14:16-1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이상적인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완악한 뜻에 맞추신 것입니다(마 19:8).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소유하여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는데 먼저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는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뜻은 호세아 11장1절에서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규범적 뜻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지만(벧전 1:15-16), 하나님의 허용적 뜻은 악에 대하여 용인하듯이 죄를 허용하는데(요일 1:10),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 뜻 안에서 우리의 죄에서조차 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롬 8:28).  마치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창 50:20).  사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나기는 하지만(롬 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창 2:17), 결과적으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 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렘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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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만물의 활동 배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협력 섭리가 있다고 말하며(마 10:29-31), 그러한 그분의 섭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증거 합니다(잠 16:33).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나의 생각과 뜻대로 행동을 했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이 협력이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외견상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자신이지만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그분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요셉의 사건을 통해 이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 하는데 요셉을 애굽에 판 것은 그의 형들이지만 그 배후에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섭리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창 45:45).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 가운데 그분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성경은 악한 성격의 일에도 하나님의 협력의 역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왕상 22:20-23).  그렇다면 “죄의 최종 원인자가 하나님이신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사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고후 5:21), 거룩한 분이시고(사 5:16), 그분은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지에 따른 악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으시지만 다만 허용하심으로 악인의 그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자신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이 그 의지로써 죄를 짓는 것을 제지하시지 않으시고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만족한 답변을 얻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인 성경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지혜가 무궁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신 것은 분명 어떤 거시적인 원대한 그분의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사 55:8-9).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의 원인이 되심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볼 수 있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배 밖으로 던져버렸지만 그러나 15절후에 요나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진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말하면서(욘 1:15),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증거 합니다(욘 2:2:3).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하는 것과 요나 스스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도덕적인 책임이 있는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욘 3:1-4).

 

조금 더 성경을 살펴보면 신약에 와서 인류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가장 악독한 행위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요일 2:2),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요 3:14, 갈 3:13).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창 3:15), 단순히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그분이 계획하셨습니다(행 4:27).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지만(눅 2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하나님에게 그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는 한 문장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예지를 법 없는 자들의 도덕적 책임과 연관시켜 설교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여기서 주목할 만할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은 그렇게 행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미리 정하신 뜻을 이루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행 2:36).

 

이렇게 인간과 사단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사용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통해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 속에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며 심지어 자신의 영광과(롬 9:14-18), 우리의 선을 위해(롬 8:28), 악을 사용하시고(출 9:16), 그 악을 심판하심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시 76:10, 잠 16: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잠 8:7),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며(욥 34:10-12, 롬 9:14), 악에 대한 책임도 없으시다는 것입니다(시 5:4).  그런데 만에 하나 우리는 그분의 뜻을 거절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이 공정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고 다만 전능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권리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롬 9:11-13).  물론 이러한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 받은 물건이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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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원론적인 사고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거룩하고 경건한 일에만 관여하시고 악하고 속된 일에 대해서는 무관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단순히 성도들의 삶만을 주관하시고 불신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손을 떼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과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정신적인 것이든 또는 선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관여하시는데 이것에 관해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을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잠 16:4).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소소한 사건조차도 신앙의 눈으로 다시 확인해 보면 그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손길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삶을 회고하고 자기를 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피조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행동과 적용들에도 관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며 인간은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통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많은 예들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여호와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는데(삼하 12:11-12),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하신 말씀이 앞으로 자신에게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그와 그의 종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삼하 16:5-8), 그는 시므이에게 보복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그의 군사들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삼하 16:11)라고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생애 말년에 여호와께서 다윗을 자극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셨을 때(삼하 24:1), 다윗은 후에 그것이 죄인 줄을 깨달았고(삼하 24:10), 하나님은 그 죄로 인하여 유대 땅에 벌을 내리셨습니다(삼하 24:12-17).  성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다윗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하신 것을 알 수 있고(삼하 24:1),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하신 또 다른 수단이 '사단'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이 한 사건을 통해 성경은 한 가지 행동이 일어나도록 각기 다르게 영향을 준 세 가지 요소에 대한 경이할 만한 통찰력을 제시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셨고 또한 그를 격동시키기 위해 사단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죄에 대한 책임이 다윗에게 있었다고 증거 합니다(삼상 24:10).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솔로몬이 이방 아내들을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에돔 사람 하닷과(왕상 11:14),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왕상 11:23),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욥의 재산과 자녀들을 해롭게 하도록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태풍과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의 악을 통해서였습니다(욥 1:12-19).  욥은 이러한 사건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 부차적인 원인을 넘어 그 모든 것이 여호와의 손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지만(욥 1:21), 그분을 원망하거나 잘못하셨다고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돌렸습니다(욥 1:22).  다시 말해서 부차적인 원인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악으로 인해 그분을 원망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약 5:9), 욥은 그러한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욥 2:10).

 

구약성경 다른 곳을 보면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 왕의 모든 선지자들에 넣으셨고(왕상 22:23), 앗수르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진노의 막대기”라고 했으며(사 10:5),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느부갓네살을 비롯한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보내시면서 “이 땅과 그 거민들을 치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라고 말하시면서(렘 25:9), 더불어 바벨론을 벌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렘 25:12).  그리고 우상숭배를 인하여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에 관한 내용 중에서 거짓 소식을 전하는 미혹된 선지자가 있다면 그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로 하여금 유혹을 받도록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14:9).  아모스 선지자는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수사학적 질문들을 열거하면서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암 3:6), 여호와께서 그 백성들에게 기근과 기갈과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와 메뚜기 염병과 말과 사람의 죽음을 주셨음을 상기시키지만(암 4:4-13), 그럼에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암 4:6, 8, 9, 10, 11).

 

이러한 구약의 많은 사례들을 볼 때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그들에게 악과 재앙이 임하게 하셨는데 비록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나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고 모두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만(롬 3:9-18, 5:12), 그렇다고 언제나 심판으로 재앙이 임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이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께서는 악인들이나 마귀의 세력들 혹은 자연재해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히 12:6-10), 아니면 불신자들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단 4:25-37, 롬 1:18-19), 혹은 완악한 죄인들에게 저주와 멸망의 심판을 하시기 원하실 때에(잠 16:4, 롬 1:28), 즉 악한 일이 인간에게 일어나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시 5:4).  궁극적으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백성들에게 선을 가져다주는 선하신 목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롬 8:28).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않은 자들, 바로나 가나안 사람들, 혹은 바벨론 사람들처럼 악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과 능력을 보이심으로써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출 9:16, 롬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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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아름답게 만드신 인간을 범죄 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죄까지도 만드신 것은 아닌가?”인데 과연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시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죄를 짓도록 적극 간섭하셨을까요?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에 이미 그들이 장차 범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지만 그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범죄를 예견하시고 그것을 허용하실 뿐(시 78:29, 행 14:16), 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주선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스스로의 행동과 사고를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습니다(창 2:17).  다시 말해서 기계적으로 순응하는 로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지정의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를 창조하신 것입니다(창 2:7, 살전 5:23).  그리고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시고 그들의 자의적으로 범한 죄에 대하여 방해하지는 않으셨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잘못인가를 일깨워 주셨고 인간의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서는 간섭하시고 또 관여했습니다(창 4:6-9).

 

루이스 벌코프는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기동하고 우리의 존재를 갖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행 17:28). 이 신적인 활동은 매순간 인간의 행동을 동반하지만 결코 인간의 자유를 빼앗지는 않는다. 행동은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 즉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자유의지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역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범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사10:23).  그러나 만일 그분의 섭리 안에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 되신다면 “하나님이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기는데 이 질문에 접근함에 있어 우선 하나님이 악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게 하신 원인이었다고 한 가장 분명한 예는 요셉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그분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창 37-50장).

 

뿐만 아니라 출애굽 사건에서도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음을 거듭 강조하시면서(출 4:21, 7:3, 9:12, 10:20, 27, 11:10, 14:4, 8), 또한 바로가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출 8:15, 32, 9:34).  어떤 사람들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스스로가 자기의 의지대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반역한 것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출 4:21, 7:3),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출 8:15), 말하기 훨씬 전에 되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시에 같은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 두 가지 요소 모두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바로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하심으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단지 바로의 마음속에 있던 악한 정욕과 선택을 더욱 강렬하게 하신 것뿐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행동이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악에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에 악한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렘 17:9, 막 7:21-2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출애굽기 9장16절에 관해 생각하면서 로마서 9장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 구체적인 예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추론해 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까지 쫓아오게 하셨고(출 14:17, 시105:25), 또 다른 예로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멸망되었던 가나안 사람들에 관한 구약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으며(수 11:20, 삿 3:12, 9:23), 믿지 않는 팔레스타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한 삼손의 요구에서(삿 14:4), 또한 엘리의 아들들이 악행을 인하여 책망을 받았을 때(삼상 2:25), 심지어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사울을 번뇌케 했다고 말합니다(삼상 16:14).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무엇이든지 사용하시지만(렘 33:2),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욥 34:10. 대하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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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분은 인간의 도움이나 협력 없이 혼자의 힘으로도 무슨 일이든지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이후부터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인간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인간 창조의 목적대로 영광을 받으셨고 앞으로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사람과 협력하시되 그분의 거룩한 사역 수행에 동참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도덕적인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인간의 범죄까지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신적인 질문은 고대로부터 계속 제기되어 왔고 때때로 우리들 자신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의문을 갖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죄악과는 절대 무관한 분이시고 인간의 범죄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으십니다.  다만 악인이 그 사악한 마음으로 범죄 하여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뿐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시라는 구절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며 도덕적인 피조물의 의지적인 행동을 통하여 악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하셨다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66:3-4, 전 7:29).  성경에는 악으로 인해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하나님을 비난한 적이 없으며(출 15:11, 사 5:16), 하나님은 악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고(욥 34:10), 인간들이 범한 잘못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겔 18:4, 롬 8:13).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악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악을 즐기시므로 하나님이 책임을 지셔야 한다는 식의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분명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신 32:4, 시 5:4).  사실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악한 일이 행해지도록 하셨다고 한 성경구절은 상당히 많이 있지만 이 모든 경우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기로 한 사람이나 마귀가 악을 행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의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기를 원했고 결국 그를 구덩이에 집어넣고 마침내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시 105:17),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창 37장).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에 형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하면서(창 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창 50:20).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죄악된 인간이 행한 악행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의 조화를 볼 수 있는데 이 둘 모두 사실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을 지으셨다고 말하는 이사야 45장7절의 말씀도 하나님이 친히 악을 행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 악이 행해지도록 예정하셨지만 구체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하나님은 실제로 악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 강요』에서 지혜롭게 말합니다.  “다른 악행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며 주님께서는 스스로 결정하신 심판을 이루시도록 이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의 행동을 사용하시고 그의 심판이 임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도 모든 악으로부터 순결을 유지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목적을 위해 악을 사용하시지만 악을 행하지도 않으시고 악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거나 의로우신 분이 아니시며 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고(욥 34:10),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악을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악이 우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주장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 8:28).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지도 않으시고 원하지도 않으셨는데 악이 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분이 원치 않고 의도하지 않은 악들이 이 세상에 점점 더 많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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