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대적하는 것들'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3.06.11 신학 1
  2. 2023.06.04 지식 2
  3. 2023.05.28 불신
  4. 2023.05.21 질서
  5. 2016.10.29 종교적인 배교
  6. 2016.08.13 종교적인 전통
  7. 2016.07.09 종교적인 교만

나는 ‘동성애’ 못지않게 ‘뉴에이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뉴에이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Dave Hunt가 쓴 『The Seduction of Christianity』에서 ‘코끼리와 소경들’이라는 재미있는 인도의 우화가 나온다.  하루는 네 명의 소경들이 동물원으로 코끼리를 구경하러 갔는데 한 소경이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지고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겼네.”  그러자 다른 소경이 코를 잡아보고는 “아니야, 코끼리란 놈은 뱀과 같이 생겼거든”  이번에는 또 다른 소경이 다리를 만지고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코끼리란 놈은 기둥같이 생겼어.  너희는 이렇게 만져보면 모르냐”  그러자 마지막으로 옆에 듣고 있던 소경이 꼬리를 잡으며 말하기를 “무식한 놈들 같으니! 다들 틀렸어, 코끼리란 놈은 빗자루같이 생겼단 말이야” 

이렇게 네 명의 소경들은 서로 상대방은 틀리고 자신의 생각만이 맞다고 우겨대면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의 성급한 결론은 자신들이 만져본 일부분만을 이해했을 뿐 코끼리 전체를 이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의 잘못된 판단은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나서 그 지식을 통해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일반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각자의 제한된 지식을 기초로 해서 부분적이며 불분명한 사물만을 보고 자신만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우화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기가 습득한 관점에 대하여 독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많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실재에 대한 다른 관점들을 비논리적이고 그릇된 것으로 보거나 판단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자기 것만이 논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절대적으로 옳은 것 사이에 어떠한 불일치도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틀렸다고 우겨 되거나 심하면 이단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마치 자신만이 진정한 실재를 파악한 것처럼 나팔을 불어댄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문제는 자기가 인식한 실재를 하나님의 진정한 실재와 동일시하는 망상증 환자 같은 병적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심리적 현상 중의 하나인 확증편향과 선택적 회피(Selective Avoidance)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거나 아니면 우리 삶을 헌신코자 하는 어떤 일, 혹은 서로 다른 성경해석을 가지고 있는 분야들이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행 1:5), ‘천년왕국’(계 20:6), ‘은사들’(고전 12:8-10), ‘예정’(행 13:48,), ‘율법’(마 1:17), ‘삼위일체’(고후 13:13) 등등 여러 가지 난해한 것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욥 11:7-9).  다른 사람의 신학, 혹은 신앙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눅 18:9-14). 

혹시 입에 게거품을 물 정도로 강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메시지만을 증거 하면 된다(고전 15:1-5).  이렇게 말이다.  ‘이는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 일러라’(행 18:2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고전 2:2)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마 18:22)만을 증거 하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쓸데없는 신학적 논쟁을 통해 정신질환의 일종인 ‘관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인정받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요즘 목사들은 연예인도 아니면서 자기 좀 알아달라는 관심종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 각자의 행동양식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상대방에 대해 섣부른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요 8:15).  그 이유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관습 또는 관점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지(시 119:137), 불안하고 범죄 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14:4).  

예를 들어 누군가가 코끼리를 만져보고 기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그것이 기둥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코끼리를 빗자루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빗자루인 것처럼 인간의 유일한 실재란 자신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는 ‘기둥’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 ‘빗자루’나 ‘뱀’ 혹은 ‘벽’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성경 그 자체가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딤후 3:16), 사실조차도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언제나 정확하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벧후 3:16).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한 것은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벧후 2:21)의 진정한 실재가 불안전한 인간의 해석이라는 인식된 실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행 10:9-17).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사람들의 해석은 제각기 달랐다(12:28-30).  여기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정확하게 해석하실 수 있다마찬가지로 예수님 외에 각 사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 완벽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롬 3:9).  정신 나간 소리다.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란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고, 혀로는 거짓말만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 저주와 독설이 가득한’(롬 3:13-14) 자들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썩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결국 우리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 즉 그것이 석의(exegesis)든 자기 해석(eisegesis)이든 하나님께서 이해하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 139:6).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린도전서 4장 3-5절 말씀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는 굉장히 신실한 종으로 보이는 목회자라도 그 마음속에는 사악하고 음흉한 교만을 감출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탁월하지도 않고 뚜렷한 열매를 거두지도 못한 목회자로 보일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일 수 있다.  요지가 무엇인가?  신학적 잣대를 가지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롬 2:1).  주제넘게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마 7:1).  신학적 ‘꼴값’을 떨지 말아야 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많은 논쟁거리 중에 하나인 ‘성령세례’는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는 같은 사건인가?” 아니면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인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국과 미국 교회에서 잘 알려져 있는 칼빈주의 신학자 Richard Gaffin 박사가 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고 싶다.           

먼저 동시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겠지만 사도행전 10장과 19장이고, 그 후에 받은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과 8장이다.  중생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과 중생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중생 이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주장하면 이단인가?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목사와 신학자들은 Harry G. Frankfurt 박사가 말한 대로 ‘개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둘 다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기 전에 받는 것인가?”  아니면 “물세례를 받은 후에 받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물세례 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10장에서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서이다.  그 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마리아 사람들(행 8장)과 에베소 사람들인데(행 19장), 막상 사도행전 2장에는 전후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혹시 목사들 중에 인도의 우화에 나오는 네 명의 소경 같이 코끼리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그 짧은 신학을 통해 코끼리 전체를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대는 정신이 몽롱한 목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세례 받기 전이나 물세례 받은 후나 모두가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어느 하나만을 가지고 무식하게 우겨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다른 질문은 성령세례는 “사역자의 안수를 통해 받는 것인가?” 아니면 “안수 없이 그냥 받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성경에 보면 사역자의 안수와 함께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8장과 19장이고, 안수 없이 받은 것으로 기록된 곳은 2장과 10장이다.  성령세례를 목사의 안수  없이 받으면 이단인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세가 안수한 적이 없는 장로 칠십 명에게 임한 신(spirit)은 어떻게 해석할지 참으로 궁금하다(민 11:17, 25).  안수를 통해 받든, 안수 없이 받든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무식하게 논쟁(딤전 2:23)을 일으키는 목사가 있다면 그 배후가 귀신에게 철저하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99%가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다.  100%다.  왜냐하면 논쟁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신학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로 인해(딤전 6:4-5) 다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귀적이다(약 3:14-16)..  

이와 같이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의 사건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볼 때에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각 교단과 교리 노선에 입각한 각기 다른 의견의 차이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교단 신학이나 다른 교파 신앙 혹은 새로운 체험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배운 것에 일치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오순절 신학과 웨슬리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을 ‘개떡’ 같이 배운 사람,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만을 ‘주야장천’ 배운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 ‘확증편향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자신이 배워 온 관점만이 가장 성경적이고 확실하다고 믿을 때에 나타나는 독선적인 반응이다.  이런 목사를 만난 신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삯꾼은 신학적 논쟁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복음과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기 때문이다(요 10:10-12).  진실을 말하자면 신학적 논쟁만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어진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매가 그것을 증명한다(마 7:20).      

심지어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단들처럼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딤전 6:4).  하지만 토론과 각자의 입장을 비교하는 일을 통해 많은 것을 서로 겸손히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인해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또한 우리의 이해를 진정한 실재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야 한다(벧후 1:20-21).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성경에 관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와 다르듯이(사 55:8-9) 우리 자신의 ‘신학적 해석’이나 ‘신앙관’이 그분의 생각과 견해에 일치한다고 확신할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롬 11:33-34).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신학은 목이 곧은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심하게 대적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행 7:51).  

사족이지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보고‘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다(마 23:33).  독사의 새끼들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어느 목사가 독사의 새끼처럼 신학적 논쟁을 통해 분쟁을 일으키는지 말이다.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목사만이 존재한다.  참된 목자와 삯꾼 목자.  양도 아니고 늑대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다.  누군가가 참 목자가 아니면 그놈은 삯꾼 목사다.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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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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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온 대부분의 책들을 읽어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성경 원서의 언어를 알고 성경의 문학적 구성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체계적인 신학 이론 등을 잘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쇠다.  즉 성경지식이 풍부한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처럼(요 10:27),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대신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잠언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잠 2:10), 지식은 그 자체만으로 커다란 축복이다(호 6:3).  우리는 언제나 ‘성경관주’와 ‘신학해설사전’, 그리고 ‘성서용어색인’과 ‘신학 논문’, 혹은 ‘다양한 번역본’과 여러 ‘주석’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또한 그 많은 서적들이 모두 지식층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열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성경적 지식이 풍부해질 때 생기는 교만과 자만심이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들, 특별히 신학자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 풍부한 지식으로 업적을 이루거나 연구할 때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들은 매일 성경을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요 5:37-47).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눅 11:52), 그 계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 마음에 있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시절의 종교 지도자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랍비’라 칭함을 받으면서(마 23:1-7),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던 이스라엘의 선생들이었다(요 3:10).  하지만 이들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마음이 강퍅하고(요 8:13),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이었기에(눅 16:15), 하나님의 음성(요 5:37)과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다.  생명을 주며 깨우침을 주는 말씀이 그들의 닫힌 마음과 귀, 생각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요 8:47).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이들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인위적인 법의 강요로 인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눅 11:52).  그 결과는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보내졌다(마 23:13).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지도자의 잘못된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전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사 9:16).  이 종교 지도자들의 눈먼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다’(마 23:24).  사소한 신학적 논쟁 즉 외식적인 정결법에는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영역 ‘의’(justice), ‘인’(mercy), ‘신’(faithfulness)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향해 가차 없이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한 경고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곱 가지 행위를 말씀하시면서 저주를 퍼부으셨다(마 23:13, 15, 16-22, 23-24, 25-26, 27-28, 29-36).  이들은 이미 구원받을 희망에서 제외된 자들이다(마 23:33).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만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마 17:5-6).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음성을 들으셨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 대신 우레와 천둥 치는 듯한 소리만을 들었다(요 12:28-30).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듣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이 올바로 서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해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소리는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30절).  그러나 이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는 방식들이 제각기 달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오직 예수다(28절).  가르치는 선생들은 이 구절을 꼭 기억하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을 심히 핍박한 바리새인들은 어떤가?  이들은 명석하고 총명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한 지식은 성경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수많은 일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도록 자신들의 귀를 막았다(요 8:45-59).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항상 겸손하셨기에(마 11:29), 한 번도 아버지의 음성을 놓치신 적이 없었다(요 5:30, 8:28, 12:49, 14:10).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지(잠 3:34), 성경지식이 많아서 그 지식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는 바리새인 같은 ‘관심 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딤전 6:4).  이런 자들에게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다.  쓸데없는 변론과 궤변에 병적으로 열광적이라는 것이다(REB).  유익이 없는 논쟁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병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이런 악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나타난다(딤전 6:5).  

사실 겸손하거나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다지 총명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현대교회 목회자들처럼 세련되어 보였을까?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 53:2).  이 분의 약력은 이렇다.  우선 가방 끈(학벌)이 짧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가문의 배경이나 정치적 기반이 전무하다.  인맥(人脈)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조차도 없다.  세상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낄만한 조건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절).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항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할 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준비된 마음(요 5:19)과 순종할 자세(마 26:39)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그 지식을 통해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자기만족, 즉 ‘교만’이라는 시험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지식의 소유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성경에 의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의 지식과 수양, 그리고 전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낙오자들이었다(마 15:1-9).  이러한 이들의 고집과 교만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상하신 적이 있었다(막 7:1-13).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말씀만을 하셨다(눅 8:10).  또한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도록 교만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비밀을 감추어 버렸다(마 13:10-15).  다시 말해 지식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도록 숨겨 두신 것이다(막 4:11-13).

이런 지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뜻 듣고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하나님 말씀이 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22)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듣기에는 자신의 박식함을 모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기에 불쾌하게 여겼다(막 11:18).  이들은 누구인가?  대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고, 반면에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이자 교사인 바리새인들이었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대단히 경멸하는 관계였지만(행 23:6-10),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마음을 같이 했다.  예수님의 모호한 진술은 완고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들을 좌절시키는 한편, 동시에 진지한 추구자들의 호기심을 북돋우는 이중의 과제를 성취한 좋은 실례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상징적인 표현법에 매우 불쾌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건이 있었다(요 6:41-60).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해결해 주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는 육의 양식을 향한 그들의 욕망에 대응하여 은유법이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하셨다.  이는 기적적인 겉표면만 보는 육적인 사람들에게 빵 이외의 더 깊은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요 6:53-58).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시험거리였다(요 6:60). 

만약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끝까지 그분과 함께 했더라면 이런 상징적인 표현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의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군중의 주위를 맴돌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의 양식’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매우 불쾌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 그것이 성경지식이든 신학적 지식이든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전 8:1)는 것이다.  요지가 무엇인가?  누구든지 늘 겸손하지 않으면 그 지식을 가지고 얼마든지 성령을 대적하는 걸림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마음이 활짝 열려 있는 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D. A. Carson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리와 지식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칫 지적인 교만에 빠지기 십상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지적인 교만은 자기보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해 ‘자기 부인하는 사랑’(self-denying love)을 발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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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은 타인에게 이목을 끄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궁금하지 않은가?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는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명령받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가져온 불은 NIV 성경에서 ‘인가받지 않은 불’(unauthorized fire)로, KJV성경에서는 ‘이상한 불’(strange fire)로 번역했다.   이 불은 공인되거나 율법의 규정된 방법대로 드려지지 않은 ‘불경한 불’이다(출 30:9).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 불이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과는 반대되는 ‘다른 불’이었다(레 10:1).  이 불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Rabbi David Rosen의 말을 인용하면 성경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드려진 불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의법’을 어긴 것이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제사를 업신여겼을 뿐 아니라(삼상 2:17),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울처럼 두렵고 떨림 없이 마음대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삼상 13:9).  이런 불신은 의도적인 거역으로 이어져 모세와 아론, 그리고 다른 제사장들이 보는 앞에서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드리는 불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만큼이나 좋을 것이라고 믿었던 잘못된 신앙, 즉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것은 그분 보시기에 불신앙이라는 것이다.

가령 어떤 불신자가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지(갈 3:13)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단지 마음이 열려있을 뿐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롬 1:3), 죄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죽는다면(요 14:6), 그 사람은 성경에서 기록된 대로 당연히 지옥에 갈 것이다(요 8:24).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은 단지 열려 있는 마음이 아니라(요 8:31-37),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행 2:39), 그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7:21-27). 

예수님께서도 “나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 있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눅 11:28).  마찬가지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해 적대적인 것보다는 열려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사실이다(눅 9:50).  하지만 이 열려있는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영적인 것을 진보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열려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고전 12:31).  그 역시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사모하며 구하라고 말한다(고전 14:1, 39).  여기서 은사들을 ‘사모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추구하다’, 달라고 요구하다’, ‘열망하다’, 얻으려고 애쓰다’ 등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시제는 진행형으로서 그 속에 함축된 의미를 따라 해석하면 ‘사모하기를 계속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세기에 사람들은 치유와 기적들을 찾아 예수님과 사도들을 따라다녔다(막 6:53-56).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져서 낫기 위해 왔다.  그들은 질병과 귀신들이 떠나가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병든 자들을 주님께 데려왔다(마 8:14-16).  이들은 산을 옮길만한 열정을 가진 믿음이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 나아가서 주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것을 열망하고 사모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같은 성령의 놀라운 기적과 치유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겔 20:7).  여기서 ‘우상숭배’가 순결함의 상실이라고 말한다면(요일 5:21), ‘율법주의’는 수가성의 여인이 가진 신앙처럼 하나님과의 친밀성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4:20-24).  이것 못지않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거두어가고, 그분의 놀라운 기적적인 사역을 방해하며 차단하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바리새적 ‘불신’을 들 수 있다(마 12:22-37).  이러한 것들은 현대의 신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역을 방해한다.

여기서 불신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주님은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신과 경멸에 직면하셨던 적이 있었다(마 13:53-58).  이러한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기적적인 사역에 어떤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마가는 그것에 대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라고 기록한다(막 6:5).  이상하지 않는가?  능력이 많으신 주님께서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이유 말이다.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권능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기적을 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가 마리아의 아들인 평범한 목수일뿐(막 6:3), 이사야가 말한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사 53:1-3).  다시 말해 보잘것없는 목수와 초자연적인 선지자 사이의 대조가 너무 극명해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것은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결정이었다(막 6:6).  그 결과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신으로 인해 야이로 회당자의 딸을 살리신 일(막 5:39-43)이 무색할 정도의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할례를 받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다(엡 1:17-18).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히 4:2).  한 마디로 불신앙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히 13:8).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초대교회처럼 아무런 능력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초신자들도 알고 있듯이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오직 예수’를 지겨울 정도(?)로 강조하면서 설교를 한다.  그런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셨듯이(마 8:11-12)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마 8:16)라고 말한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마귀의 영역에 대한 그분의 권세를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신이 성령의 능력을 가로막고 철회시킨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모두가 건강하고 귀신 들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면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과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눅 4:18, 행 10:38).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대교회가 가진 슬픈 현실이다.  여기서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오늘날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까?”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에는 기적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거짓 선생들이다.  나는 분명하게 드러난 이단이나 사이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개신교 안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유명무실한 목사와 신학자들이다.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이들(딤후 2:17-18)의 왜곡된 가르침이 믿음을 파선시켜 잘못된 신앙으로 양산(量産)해 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학교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치유하시고자 한다는 것에 관하여, 혹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시 않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일부이지만 James Montgomery Boice는 마태복음 12장 39-42절을 가지고 실제로 기적을 구하는 것은 악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교회의 목사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바로 그것을 교회에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는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신자들은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병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 같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직접 체험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현대교회에 사역하러 방문하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분명 이들의 신학적인 혹은 종교적인 전통이나 불신으로 온몸이 묶여있는 것을 ‘기이히 여기시고’(막 6:5-6), 나사렛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많은 병자들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로 나사렛을 떠나신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셨다는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 기회가 한정 없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열려 있다고 말만 해 놓고 믿음을 온전히 갖지 않는다면(히 11:6), 우리는 결코 그분의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Thank you’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복음주의 지성 가운데 한 명으로 잘 알려진 Dallas A. Willard 박사가 오래전 자신의 저서 『In Search of Guidance: Developing a Conversational Relationship With God』에서 하나님의 방식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렇게 경고를 한 적이 있다.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 성도들에게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해로움과 악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경험 속에서 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을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죄들에 대한 일화는 하나님의 한분 위(位)를 추구함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이라고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니라’(대하 7:14).  우리 시대의 교회 목회자들의 중요한 임무들 중의 하나는 교회가 이 약속을 믿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불신을 버리고 성경의 한없는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 더 나아가 기적의 하나님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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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농장으로 유명한 South Africa Worcester의 어느 강당에서 Andrew Murray와 함께 사역하던 부목사 J. C. de Vries의 인도로 60여 명의 교회 청년들이 기도 모임을 가졌다.  이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는 동안 갑자기 성령의 불이 임하자 사람들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와 임재를 느끼며 일시에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858년경 남아프리카 공화국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Murray 목사는 다른 예배실에서 저녁설교를 마치고 교회 장로 한 사람을 통해 청년모임에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고 현장으로 갔을 때,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동시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무질서한 상황에서 부목사는 통제할 생각이 없는지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Murray는 청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당부하였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큰소리로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분의 목사입니다. 조용히 하십시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도 호응하지 않고 그들은 계속 기도를 하면서 견딜 수 없는 죄의 무게로 인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몰두해 있었다. 

부목사 역시 하나님이 임재 앞에 거룩함과 경외함으로 계속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다시 Murray는 힘껏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셨지만 결국 화를 내며 예배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여기는 모든 게 엉망이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날도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모임에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무엇보다도 청중들의 자발적인 통성기도가 터져 나올 때마다 신비스러운 천둥소리가 세차게 울리면서 교회 건물 전체를 감쌌다. 

이번에도 Murray 목사는 통로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동분서주할 때, 마침 미국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한 부흥의 현장을 보고 돌아온 무명의 한 성도가 그에게 다가와 “이 교회 목사님이시군요. 당신의 행동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목격하고 왔는데 이와 꼭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곳에 주의 영이 역사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후에 Murray는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는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과 그동안 성령의 깊은 역사를 방해했던 것을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통회 자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였다. 

이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인 소설이나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눈과 귀에 성령으로 할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막 4:12).  이것은 J. Edwin Orr의 책 『The Fervent Prayer』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Murray는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상 부흥이 임했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인간의 감정의 폭발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흥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교리 안에 갇힌 신학과 편협한 신앙이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오늘날 Andrew Murray의 깊이 있는 가르침과 저술을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Murray가 쓴 모든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여기서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신학자나 목사라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엡 1:17-19),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이 감겨 있는’(마 13:14-15) Murray처럼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고전 2:14). 

이러한 일은 1730년-174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에 있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 때에도 일어났었다.  그 당시 Jonathan Edwards는 미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사람으로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현상,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사이의 쉽지 않는 차이점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의 현상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중 『The Great Awakening /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Series, Volume 4』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큰 은혜에 복받치는 것 같았고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픔을 느끼면서 방안은 통곡과 꺼꾸러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부르짖음과 고꾸라짐, 경련과 같은 현상들과 함께 애통함과 기쁨도 방안 가득히 충만했다”라고 말한다.  또한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서는 “어떤 경우는 하나님을 향한 큰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도 했다. … 때로 그들은 소리 높여 크게 찬양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고 때로 그들은 혼절하기까지 했다”라고 증언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 먼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적 대각성을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열매로 판단할 것과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다섯 가지를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제시하였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일어나는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설사, 그 현상이 눈에 거슬리고 보기에 낯선 것일지라도 이러한 다섯 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만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둘째, 죄를 미워하고 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가?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셋째,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는 결과를 낳는가? (성경에 대한 높은 관심).  넷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가?  (건전한 교리와 신학).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그러면서 그는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강조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이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걸림돌 역할을 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서 더 많은 배교와 무서운 범죄를 보게 될 것과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면 또 다른 걸림돌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를뿐더러 그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언적인 말까지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면 바리새인의 비판 정신과 불신앙 때문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Edwards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패역하고 트집을 잡는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을 하실 때마다 물(?) 귀신처럼 물고 늘어졌다(마 12:22-37, 막 3:20-30, 눅 6:43-45, 11:14-23, 12:10, 요 8:1-11).  얼마나 지겹게 물고 늘어졌는지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런 일은 지나간 역사 속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종처럼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쟁을 일삼는 목사들 말이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들이다(막 14:21).  나는 이런 자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고 싶다(마 23:33).  팔레스타인과 시나이 반도에는 독사가 많다.  그러면 한국은 ‘개’(Dog)가 많은데, 예수님이 오시면 이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빌 3:2).

사실 교회사를 보면 참 부흥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 이것을 가장 반대했던 세력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가톨릭이 신앙의 위인들을 이런 이유로 박해했고, 개신교 안에서도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이유로 핍박했던 것이다.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갈 4:29).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상기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자들을 핍박하는 것 말이다. 

이들이 핍박을 받은 이유는 제도주의와 전통과 예의, 그리고 질서와 형식과 의식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몇 세기 동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법에 수백 개의 종교적인 전통들을 추가하여 유대인의 각 영역들을 통제하면서 모든 규칙과 의식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지한 자로 낙인찍었다(막 7장).  Murray 역시 모든 것을 질서대로 통제하려는 것과 위엄 있는 거룩한 종교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한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애즈베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각성 운동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장난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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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병자들을 치료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마 4:24), 어떨 때에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기도 하시고(요 9:6), 때로는 안수기도(눅 13:10-13)와 믿음의 고백(막 10:46-52)을 통해서, 혹은 순종함(눅 17:11-19)과 꾸짖거나(막 1:25), 손을 잡으시므로(마 8:15), 시공간을 초월해서(마 8:5-13),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육체의 질병 문제를 완벽하게 고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누가복음(눅 5:17)과 사도행전(행 10:38)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들을 치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눅 4:18-19),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질병에 대한 인식을 영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치의 병에서 고침을 받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나오는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하신 말씀처럼(요 5:14), 죄 속에 계속 머물러 생활하거나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계 2:21-23), 들릴라에게 머리를 밀린 삼손(삿 16:20)과 초심을 잃은 사울 왕 같이(삼상 16:17-26), 언제든지 성령의 은혜와 영광이 떠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4:21).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 중에 요한복음 10장28절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만약 그분께서 싫어하시는 죄 가운데 계속 머문다면(합 1:13), 성령의 임재와 능력은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시 5:4).


사실 주의 백성들이 출애굽기 20장1-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 그를 대신하여 다른 것들을 추구하거나 사랑할 때(민 25:1-3),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서 자비하신 임재와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렘 1:16).  이것은 한 개인이거나(왕상 16:30-31), 혹은 한 민족 전체가 될 수도 있는데(출 32장), 우리는 이것을 구약성경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민 14장).  먼저 갈대아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전국토가 황폐하여짐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문인 시편 74편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배교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것들 중에 하나인데, 이 시편 한 구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거부하시고 그분의 능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부의 적들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애가의 성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9-11절).  그 당시 시편기자에 따르면 기적적인 표적들과 선지자 사역의 부재는 이스라엘 안에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 땅에 대한 심각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분의 기적적인 능력을 철회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며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시 77:7-14).  환언하면 시편기자는 그의 시대에 기적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태도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주의 백성들의 배교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종교적인 배교의 결과에 대한 최고의 예증을 사사기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고, 사실 사사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네 구절들로 된 사시적인(cyclical)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교 기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들에게서 떠나는 것을 경험하고, 둘째는 그로 인하여 이방인 압제자들에게 넘겨진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으며(삿 6:13), 셋째는 그들이 전심으로 회개하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를 보내주셨고(삿 13-16장), 넷째는 사사들(구원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부의 적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사사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과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가장 분명한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배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배교는 자주 우상숭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대하 34:25), 반면에 사도 바울은 신약에 와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고 있는데(골 3:5), 사실 인간이 이러한 탐욕에 사로잡힌다는 자체가 바로 실제로 우상숭배의 한 형태이고, 만일 집착한다면 성령의 임재를 말살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잃게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말로 성령을 심히 거역하는 이유도 있겠지만(마 12:32), 무엇보다도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의 배교는 가령 어떤 신자가 부도덕하거나 음란한 것에 열중한다면 그는 도덕적인 배교를 하는 것으로 성경은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요일 1:6).  한 마디로 배교는 본질적으로 순결함의 상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죄 가운데 산다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리적으로도 배교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사탄에게 내어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신학자/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문제들로(딤전 1:19-20), 예수님의 신성(요 1:1)과 믿음만을 통한 칭의(롬 5:1)와 대리적 속죄(벧전 1:18), 동정녀 탄생(마 1:18)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행 1:3)과 육체적으로 다시 오심(딛 2:13), 그리고 천국(눅 23:43)과 지옥(막 9:48), 성경의 권위(딤후 3:14-17)와 성령의 은사(고전 12-14장) 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교회나 죽은 전통을 강조하는 교회들은 성령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교회들 가운데서 치유와 기적들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물론 성령의 능력은 아마도 이들이 배교하기 시작한 후 얼마동안은 개인이나 공동체 안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하나님의 인내가 다하는 그때가(창 7:1-5), 그분의 임재와 능력이 떠나는 때이고 심판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합니다(창 7:10-12).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요일 2:15),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성령의 임재는 떠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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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믿는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들에게는 전통이 없는 것처럼 확신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종교적 전통에 크게 미혹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인 전통들 가운데 일부를 대적하시는데(마 15:9),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도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감지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요 10:25-27).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고 해서 분개한 적이 있었는데(막 7:5), 사실 이 씻음의 기원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손과 발을 씻었던 성막의 물두멍에서 유래된 것이고(출 30:17-21), 손을 씻는 전통은 세균을 없애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고(마 27:24), 그저 구약성경에 있는 의식적 정결의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레 15:19-31, 민 19:13).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이런 전통과 성경자체 사이를 구분하거나 인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차원에서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권위아래 두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법보다 장로들의 유전(전통)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들의 전통 중 하나를 등한히 하셨을 때(마 15:2),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눅 6:1-11), 죽이려고 모의까지 했습니다(막 3:6).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성인 남자는 자기의 모든 돈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쉽게 고르반(드림, 봉헌물) 서약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신명기 23장21-23절 민수기 30장1-6절 말씀을 근거하여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돈을 하나님의 성전에 헌납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했지만(출 20:12, 엡 6:1-3), 이런 전통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바리새인들은 탐욕스러운 아들이 궁핍한 부모를 돕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해 냈는데(마 15:6), 그것은 바로 부모를 돕는데 사용할 돈을 종교적 서원을 통해 이미 하나님께 받쳤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께 돈을 바치지 않았습니다(막 7:10-12).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길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막 7:13),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말씀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요 5:37-40).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들과 동일한 일을 행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역시 역사가 깊은 교회 전통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어떤 전통의 맹목적인 집착은 우리 모두에게 안전감과 통제력을 줄지도 모르지만 심각한 것은 이런 종류의 통제와 안정감은 종교제도와 관례를 갖도록 만들어줌으로써 수가성 여자처럼 전통을 자랑하는 종교인을 양산해 낸다는 것입니다(요 4:20-22).


물론 이 말에 심히 반박하며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것을 자신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나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종교적인 전통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사람은 존귀한 존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말씀처럼(시 49:20), 우리 자신도 어떤 전통에 빠지면 그러한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전통이란 이전 세대 또는 현세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 위에 군림하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전해진 신념이나 관습을 말하는 것인데,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가 이 종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골 2:8), 이것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나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들 생각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요 8:4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경고(마 23장)는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바리새인들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마 6:8).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예수님께서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처럼 많은 내용을 할애에 가면서 기록하게 하셨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성이 강하고 죽어 있는 전통에 얽매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마 23:3).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의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려는 바리새적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염려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골로새 사람들에게 ‘누가 헛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골 2:8).  이 말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죽은 전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사람들을 사로잡으면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녀의 특권으로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10:27).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의 이러한 경고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지역교회는 하나의 전통을 세우는데 있어 불과 몇 십 년 혹은 몇 년밖에 걸리지 않는데 만약 누군가 이러한 전통 중 하나를 범하거나 감히 전통에 도전하는 어떤 문제들, 가령 예배나 찬양스타일, 혹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누군가 교회에 접목시킬 것을 건의한다면 분명 교회 내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거나 심하면 신비주의자로 몰리기까지도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기로 하거나 또는 우리의 전통과 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려 할 때면 대체로 “우리는 성경에서 무어라고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방언을 포괄적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보다 자신들의 교회 전통이나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을 더 옳은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개중에는 중립적인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기에(고전 11:2), 실제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살후 2:15).  이것은 사도들의 권위에 기초(엡 2:20)를 둔 선한 정통이지만(살후 3:6), 문제는 ‘이 백성이 입술로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7)라는 이사야의 말처럼 종교적인 전통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는 망상을 줌으로서 마치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요 4:20-24),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거나(사 29:13), 예배를 헛되게 드릴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중에 영혼을 죽이는(마 23:15), 바리새적인 성경해석(눅 11:52)과 교회 전통을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자랑한다면(골 2:8), 엘리야가 들었던 성령의 작고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할뿐더러(왕상 19:12),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경고하신 것이고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이 세대에 행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들을 거역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리새인처럼 종교적인 전통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환언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죽어 있는 교회 전통에 집착한다면 인간적인 방법과 규칙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가질 수 없지만 만약 그분과 진정한 교제를 원한다면 교회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결함이 많은 무익한 전통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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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Lewis는 “우리 안에 교만이 많을수록 그만큼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교만을 싫어한다.”라고 했고, Jonathan Edwards도 “교만은 죄라는 건물의 기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부분에 놓여 있으며 그 일을 하는 방법이 가장 은밀하고 속임수가 많으며 찾아내기가 어렵다.”라고 했으며, Lloyd Jones 역시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면서 떠벌리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총명을 떠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쁘다. 교만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자기 자신을 너무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 ‘교만’이고, 이 교만이 다른 죄들보다 더 위험한 이유는 그것을 탐지해 내기가 어려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대표적인 인물인 백성들을 가르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눅 20:45-47), 이들의 교만이 얼마나 은밀한지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위대하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그러한 교만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마 23장).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벧전 5:5), 여기서 문제는 우리도 종종 다른 그리스도인에게서 교만한 모습을 발견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교만에 대해서는 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마 7:1-5).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교만이라고 부르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 혹은 “진리의 말씀을 수호해야 하는 사명감”이라고 포장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교만의 정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성경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려는 욕구인 동시(겔 28:2)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고(에 6:6),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을 그분처럼 높이고 싶어 하는 마음인데(사 14:12-14). 구약선지자 이사야는 바벨론 왕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교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이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분이며 모든 면에서 무한히 우월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인들이 얼마나 교만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한 예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9-10).  이 비유에서 말해주는 것은 종교성이 강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기뻐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눅 18:11).  이렇게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눅 16:15),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와 같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위해서 성경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지 못한 형태의 교만이 자기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강한 ‘종교적인 교만’인데(행 12:21-23), 이 교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신다고 스스로 믿는 믿음이기도 합니다(마 6:1-2).  예를 들어 고린도에는 많은 신전들이 있었지만 Gorden Fee가 말한 것처럼 살아계신 성령의 전은 고린도교회 하나뿐이었고(고전 6:19), 이 성전은 고린도에 있는 유일한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였습니다(행 20:2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일 누구라도 고린도에 있는 주의 성전을 파괴하려 한다면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고전 3:17).  그렇다면 과연 고린도교회에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전후문맥을 살펴볼 때 그런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고전 3:18-21).  사실 이들은 다른 형제의 잘못을 알며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 줄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이들이 교회 밖에 불신자들보다 교회에 더 심한 해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남용했기 때문입니다(롬 2:17-24).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메마르고 얄팍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형제를 비판합니다.


언젠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종교성 강한 바리새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로 인해 걱정을 해서인지 주님이 종교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마 15:1-13).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4).  예수님은 자신이 눈먼 자를 보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눅 4:18),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실 것 같지 않는데 좀 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배격하신 것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눅 11:52),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있는 눈먼 인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마 23:15).  다시 말해 눈먼 사람이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진리를 발견한 소경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처럼(눅 18:35-43), 눈먼 사람이 거지 바디매오 같이 진리에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막 10:46-52), 진리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소경되기를 원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요 9:40-41).  솔직히 종교적인 교만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요 5:37), 가르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모든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23:13).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에(행 7:51), 늘 성령을 거스리거나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마 12:28-32).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의 좋지 못한 신학이나(요 4:20), 부도덕함을 보고도 그 여인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금하지 않으셨고(요 4:18),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기 일보직전의 여인에게까지도 망신을 주거나 내버려 두지 않으셨지만 (요 8:1-11),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스스로 소경됨은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주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고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한다면’(고전 8:2), 예수님은 그 사람을 무지 안에서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날까지 내버려두실 것입니다(롬 2:16).  이것은 고대시대에 주어진 경고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주기 700년 전에 이사야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라고 말했습니다(사 5:21).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무서운 말씀이 있다면 로마서에 나오는 말처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것입니다(롬 1:24, 26, 28).  물론 이런 것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눅 13:22-27), 만약 예수님으로부터 내버림을 당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을 것이고 지옥의 궁극적인 고통은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부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적으로 교만하거나 평생을 배워도 다 못 배울 성경지식을 가지고 무엇인가 안다고 떠들어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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