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 Berkhof은 삼위일체론에 대해 “삼위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행해진 많은 노력들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색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삼신론’과 ‘양태론’인 하나님 개념들을 도출하게 되었으며 신적 본체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체 안에 있는 위격적 구별의 실제성을 부정하게 되었다. …교회는 다만 적절한 용어를 통해 가능한 조금이라도 그 균형을 유지하는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Calvin은 후대 신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로 고민할 것을 알았던지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에 대해 『기독교강요』에서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 같이 어리석으며 그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사람들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많은 예증은 인간의 이해를 촉진시키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마 28:19), 기독교가 ‘다신교’ 아니면 ‘일신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여호와 증인처럼 예수님이 단순히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면 대속의 문제, 즉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갈 3:13), 또한 그분의 신성을 부인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롬 3:28).  가령 예수님이 피조물로서 인간을 구원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가르침 역시 공적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 돌리게 되어 십계명의 첫 계명을 위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출 20:3).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이라면, 그분이 아무리 위대해도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인간을 섬기는 우상숭배 밖에는 될 수가 없기 때문에(레 25:1), 그에게 드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14:13).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볼 때에 분명히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며 “각 위격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사실 세 위격들이 존재하면서 각 위격이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이 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Herman Bavinck는 “삼위일체의 고백에서 기독교의 심장이 뛴다”라고 말했는데 반면에 이 교리를 생각할 때마다 어지러움증(?)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분 앞에서 영적으로 더 건전하다고 볼 수 있고, 성경은 우리에게 모순된 것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이기에 차라리 완벽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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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는 “삼위 곧 세 인격이 합해서 하나가 된다”, 혹은 “삼위는 세 하나님을 가리킨다”, 또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는 설명들이 있지만 이러한 가르침들은 부분을 확대하여 하나님 전체를 설명하려는 오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주장들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판 아리우스파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인 성령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데 이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면서 왜 성경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골치 아프게 가르치느냐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단들이 도전은 교회사 이천년 동안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사실 Calvin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교리는 거대한 신비이지만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 교리는 성경의 기준이 되었고 정통 기독교 교리로 공식 인준되었으며 이후 바른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과 기독교 조직신학 전체의 기초를 형성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신 6:4, 약 2:19), 그 한 분 하나님께서는 각각 독립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마 28:19, 고후 13:13),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른 기독교 신앙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각 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고 신앙고백을 할 것입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면 그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딤후 16-18).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하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만을 믿는다면 성부가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 3:17),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며(요일 2:1), 성령이 우리를 위해 성부께 중보 기도를 드린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롬 8:27).  또한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한 분”이심만을 믿고 “각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신 것을 부인한다면 분명 우리는 삼위 중에 어느 분은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리우스파처럼 종속된 분이거나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신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신 것과 “삼위는 신적 본체를 지니신 온전한 하나님”이심만을 믿는다면 결과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주장이 되고 이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충됩니다.

 

사실 교회 역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오류들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부인함에서 비롯되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과 유일신의 신앙 사이를 중재하고 이 둘을 합치시키려는 해석들 중에서 교회에 의해 배척된 두 가지의 극단적 이론, 즉 ‘로고스’이신(요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인했던 알렉산드리아 장로였던 Arius의 ‘종속설’과 하나님은 구속사의 과정에서 세 번 상이한 형태를 취했다는 Sabellius의 ‘양태론’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이론들을 배격하고 Athanasius의 주장에 따라 “아들은 창조되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영원하며 본질이 같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라고 선언했고, 주후 381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성령의 신성도 추가됨으로서 완전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정통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본질상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계시를 다 같이 보존하면서 그분 안에 신적인 서열 단계를 인정하려는 종속론과 하나님이 다른 형태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양태론에 대항하여 지금까지 싸워 왔지만 오늘날 이 교리 논쟁에는 인간적 반목과 정치적 세력에 의해 정통 교회로 자처한 집단들 속에서 그 요소들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본질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삼신론’ 역시 잘못된 가르침인데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한 분이심을 부인하는 것으로(신 6:4),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신적 본질을 말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한 신적 본체 안에 있는 세 인격을 증거 하지만 삼신론은 각각 다른 세 개체를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잡다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삼위이시고 세 인격체가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세 분 중에 어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을 일으킬 뿐 아니라 많은 신이 있다고 믿는 이방 종교와 흡사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서 구원론의 신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리는 Theodotus of Byzantium이 말한 “그리스도는 인성이 신성화했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은 신성도 영원성도 없다”라는 주장 역시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잘못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양심에 화인이 맞지 않는 이상(딤전 4:1-2), 이러한 잘못된 사상들을 끝까지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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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술가이자 성직자인 Thomas Adams는 “삼위일체는 오직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으로 그 신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교리는 신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분으로서의 하나님(신 6:4, 갈 3:20)과 세 분으로서의 하나님이(고전 8:4-6, 요일 5:20, 고전 3:16), 동시에 있는 이 신비한 현실에 대해 “삼위 하나님을 한 본체와 세 실체”로 대비되는 개념의 용어로 표현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한계가 분명히 제안된 표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일체를 이루시는 한 본체요, 존재가 영구불변한 실체이고, 또한 상호 절대 독립된 삼위, 곧 세 분의 인격체이기도 하지만(시 2:7, 마 3:16-17, 행 5:3-4), 바로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이라는(딤전 1:17), 사실을 추호의 차이나 기울어짐이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호 모순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는 신비하게 구현된 그분만의 독특한 존재 양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초월하여 구현된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연계와 인생에 '유비'(類比)시켜 이해하고자 한다면 혹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거나 부분적인 이해에 그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Augustine이 『Of Faith and the Creed』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영혼의 구조를 끌어내기 위해 유비를 사용했지만 그가 나중에 고백한 것은 유비와 흔적을 자연과 인간에게서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유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이 관연 타당한가 하는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사람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저들은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묵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지만(딤전 2:5), 성경은 성부(갈 1:3), 성자(요 1:1), 성령(딤후 3:16)을 구별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한 마음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유비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이 교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한 인간 안에 있는 “지, 정, 의”를 연합하여 말하는 것이나 나무의 세 부분인 “뿌리, 줄기, 가지”, 혹은 물의 세 형태인 “물, 증기, 얼음”을 통한 유비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독특한 삼위일체 교리를 훼손하거나 오해에 빠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의 여러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연과 생명으로부터 취한 많은 비유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어 반석과 같고(사 26:4), 돌보심에 있어 목자와 같다는(시 23:1-3), 표현을 사용은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아무런 비유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어느 유비도 삼위일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Louis Berkhof이 말한 것처럼 다소 가치는 있겠지만 모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마 28:19), 이 말은 분명 다른 인격체를 이야기 하면서도 가족관계에 있어 긴밀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Philip Melanchthon이 말했듯이 이 교리는 연구하는 것보다는 그냥 믿고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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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6:4, 딤전 1:17), 신성으로서의 성부와( 2:7, 벧전 1:2), 성자와( 9:6, 3:16-17), 성령으로( 1:1-2, 5:3-4), 구별된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C. F. Keil & F. Delitzsch는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은 철학적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사건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셋인 동시에 하나”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어떤 종교나 사상, 심지어 신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기 쉬운 쪽을 따라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이 삼위일체를 개념 짓기 쉬운데 그 결과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삼신론’, 또는 한 하나님과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다른 신으로 인식하는 ‘사신론’이라는 그릇된 관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부, 성자, 성령을 완전히 구분해 버리는 삼신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보다 여러 면에서 열등하신 분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많고 특히 성령에 대해서는 그분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간과한 채 마술사 시몬처럼 단지 무슨 비인격적인 큰 능력으로만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8:19), 이것을 엄격히 따진다면 신성모독적인 행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성부가 성자도 성령도 아니며 성자 역시 성령도 아니라는 의미로 이 삼위는 각각 독립된 인격체를 말하는데 성경 요한복음 11-2절과 1724절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으로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를 볼 수 있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증거와(요일 2:1),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성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7:25), 예수님이 아버지와 독립된 다른 위격이심을 보여줍니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며 성자도 성령이 아닌데 로마서 827절에 보면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령이 독립된 위격임을 보여주며 성자가 성령이 아니라는 사실도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28:19), 그분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14:16), 하신 말씀을 통해 성자 역시 성령과 독립된 인격체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6:7).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one simple essence)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three persons) 또는 세 실재가(hypostases)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3:20), 동시에 세 신격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각위가 온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 하는데, 먼저 성경은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1:1), 바울은 우상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없는 고린도 교회와(고전 8:4-6), 갈라디아 교회 인사말 속에서( 1:3), 인류 만물을 다스리시고 계신 성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한 적이 있고( 103:19), 예수님도 고난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 사건을 통해( 22:42), 성부가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역시 하나님 되심을 성경은 증거 하는데(요일 5:20),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완전한 인간이자( 1:21),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신데( 9:6), 사도 요한과( 1:1, 14), 바울( 9:5), 그리고 의심 많은 제자 도마까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진실로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20:28).  또한 성경은 성령도 온전하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물질에 눈이 어두운 아나니아에게 베드로의 책망과( 5:3-4),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경고 속에서(고전 3:16), 성령은 단순히 어떤 감화력이나 치유의 은사를 내뿜는 막연한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살피시며(고전 2;11), 인생과 교제하시며( 14:26), 발걸음을 지도하시는( 16:13), 살아계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고 각위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지만 성경은 결코 “나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이라고 강조하는데( 37:16), 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신명기 64절에 나오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표현된 히브리어 ‘엘로힘’이라는 명칭과 동시에 ‘여호와’라는 칭호가 함께 사용된 것을 볼 때에 여기서 여호와라는( 6:2), 성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왕상 8:60), 절대적인 신성을 소유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15:11).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부분과( 10:30), 바울 역시 하나님이 한 분 되심을 고백했으며(고전 8:6, 딤전 2:5),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말합니다( 2:19).  이러한 성경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모세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4:35), 하나님 한 분만이 천하의 왕, 참 하나님이시고 그 이름 하나 밖에 없는( 14:9),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5:5-6).  , 하나님은 삼위인 동시에 결코 나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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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C. Sproul삼위일체는 신비다.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격위에 있어서는 셋이라는 말을 기독교 교리의 많은 신비들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신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을 들라고 하면 바로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할 것이고, 이 교리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하는 독특한 교리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습관적으로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잉태하사…”라고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기도 하고, 예배 끝에 축도문 속에서 삼위의 공식을 듣기도 하지만(고후 13:13), 막상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거나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변증하라고 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신자들이 대부분 일 것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성서용어가 아닐뿐더러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셋이 하나가 되거나 하나가 셋이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구절들은 없지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단어는 Wayne Grudem이 말한 것처럼 “셋의 연합” 혹은 “하나 안의 셋”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세 분이면서도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를 가리키는데 사용하는데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사색에 빠지지 않고서도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는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1:26), 그리고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와( 3:22), 바벨탑을 쌓을 때( 11:7), 사용된 ‘우리’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우리’라는( 3:22), 복수를 사용한 일에 대해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지만 교부들과 초기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데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 본체상 한 분이시나( 6:4, 딤전 1:17), 존재 양식상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28:19), “인간 창조”라는 대주제를 놓고 삼위 상호간에 공동 상의 하신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 구절들에 대해 몇 분이었는가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이 교리에 접근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한 분 이상이 관여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은 구약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신 것 외에( 6:8), 하나님 안에 하나 이상의 인격이 있음을 나타낸 표현들, 즉 한 위를 ‘하나님’ 혹은 ‘주’라고 부르면서 역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다른 위와 구분한 구절들이( 110:1, 45:6-7, 48:16, 61:1, 63:7-11, 1:7, 3:1-2), 신약에 비해서는 희미하지만 구약에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과 동격으로 사용된 ‘여호와의 천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성자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것을 말해주는데, 예를 들면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원문에는 ‘사자’라고 기록되었고 13절에서는 그 사자를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자는 곧 하나님이신데 그 사자는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2:11-15, 18:1-19, 3:2-6, 22:35-38, 5:13-15, 2:1-2, 6:11-14, 3:24-25, 3:1).  물론 구약 다른 곳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단순히 창조된 천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19:1, 20:16, 왕상 13:18, 12:4, 2:3), 적어도 위에 열거된 구절에서 주의 특별한 천사(사자)는 완전히 신이신 독립된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처럼 인격화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에 대한 묘사와( 3:19, 8:1-31, 33:4-6, 107:20, 119:89),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데( 6:3, 9:20, 51:11, 139:7, 40:13), 이렇게 구약 성경에는 추리적인 해석을 하지 않아도 삼위일체론을 뒷받침 해주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복수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으로 인해 신약은 구약성경에 비해 훨씬 충분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증거하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2:6-8), 많은 사람들이 모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1:11), 성자는 물세례를 받으시고( 3:21), 성령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10:38),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을 통해( 3:16-17),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동시에 볼 수 있고, 전승에 의하면 아리우스가 삼위일체론을 부인할 때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마태복음 2819절에 나타난 세례 분부의 표현 방식으로 여기서 우리에게 친숙한 제도인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명칭은 성부와 성자가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성령도 다른 두 위와 똑같은 차원에서 똑같이 표현되었기에 성령 또한 한 위로서 성부와 성자와 동등된 위치에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하나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3:13).

 

만약 신약의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주’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음을 인식한다면 고린도전서 124-6절에도 삼위일체를 분명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고, 에베소서 44-6절과 베드로전서 12, 그리고 유다서 20-21절에서는 세 인격체가 따로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에베소서 l장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3-5), 성자 하나님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7), 성령 하나님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인 치시는 것을(13-14),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Benjamin B. Warfield는 『Biblical Doctrines』에서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를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환상이 아니고 전체의 증거이며 또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사실 “셋인 동시에 하나” 즉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동시에 세 신격이 존재한다는 교리는 불신자들과 이단들에게는 하나의 모순으로 매도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삼위로 함께 존재하시며 함께 활동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비록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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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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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도 난해하여 일반 신자들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조차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신앙적으로 큰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풍부한 이해와 은혜로운 경험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실 이 주제는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큰 문제로 부각되어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젊은 신학자 Athanasius를 통해 어느 정도 정리는 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도전 받고 있는 문제로 남아 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이단들이 삼위일체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도전을 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통 기독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침묵만으로 대처해 나가며 만약 이단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을 알고 피하는 것과 모르고 피하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삼위일체에 대해 아는 것인데, 그것은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준으로 삼아야할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삼위일체에 대한 대표적인 이단적 가르침들을 살펴본다면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셋”이라고 하는 ‘삼신론’(三神論)인데, 교회 역사에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밝혀 이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단으로 규정하여 교회의 입장을 내세운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일신론’(一神論)으로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주장이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하나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다 이단으로 규정된 ‘종속론’(從屬論)으로 이 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는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하나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樣態論)으로 이 이론 역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분을 다르게 설명하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신약에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 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식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이론은 하나의 본체를 놓고 그 모양만을 달리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일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풀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ugustine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열쇠가 필요한데 그 용어가 바로 ‘교제’와 ‘사랑’(아가페)이라는 단어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숫자를 말할 때 개체보다는 오히려 의미상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한 해석을 얻을 때가 있는데, 예를 든다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라고( 6:4), 말씀하시는 것은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이방 다신종교와 비교하면서 삼위일체의 유일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일체)라는 숫자를 강조하다 보니까 삼위(三位)에 대한 의미는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삼위일체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숫자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 분 하나님이 일체되어 그들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성경의 많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사랑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하나가 되는 신비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섬기며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사역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교제하며 돕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2:19).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할 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비록 아들이라는 단어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거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17:5),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관계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Calvin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낳으신바 되었다고 말하며(1:14, 18), 주후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도 그분은 창조되지 않으시고 성부와 같은 본질을 소유하신 분으로 확인했고, 같은 내용이 주후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버지께 나오시는’ 구절 앞에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사용해서 ‘낳으심’이 어느 한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영원한 일임을 거듭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낳으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해 분명하게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신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 양식과 같은 생산(生産)의 개념이 아니라 이전에 아버지 품속에 계셨으며( 1:18), 자신의 영광을 성부와 더불어 영원히 누리셨던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7:5).  그러므로 이 호칭에 매여서 현대판 아리우스 자들처럼 예수님의 위상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0:30).

 

예를 들면 히브리서 15절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7), 라는 구절에 대해 영원 전에 출생하신 아들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성육신, 혹은 그분의 부활과 승귀를 염두해 둔 아들직, 또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를 가리킨다는 이런저런 많은 해석들을 제시하지만, 이 구절에 대해 확실하게 “이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라고 말하는 신학자들은 없습니다.  Calvin은 이 문제를 놓고『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골로새서 115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구절을 가지고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 한다”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고린도전서 1313절에 보면 아버지 다음에 아들의 순서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것은 이 세 분 하나님이 동등하시기 때문에 표현 가능한 방식인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광과 권능과 인격이 같고 가지신 목표가 같기 때문에 하나가 되시고 서로 동등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기에 누군가하나님은 몇 분이신가?”라고 묻는다면하나님은 삼위로 존재 하신다”라는 것을 먼저 구분할 줄 알고 나서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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