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길'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5.04.04 사역자의 자세
  2. 2014.12.27 치유를 위한 기도
  3. 2014.09.06 믿음을 통한 기도
  4. 2014.06.28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5. 2014.03.22 상처 입은 사역자

오늘날 사역자들 중에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영적인 능력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치유를 향한 열망과 집회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치유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오해할 때가 많고, 또한 치유 대상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신다는 약속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거나 지금까지 자신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마치 스스로의 능력으로 행한 것처럼 언제나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사역을 행하는 모든 사역자가 알듯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대로 역사하시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역자가 성령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사역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오용은 위신을 세우거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단호히 거부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비추어 볼 때(요 5:19, 30), 그분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 안에서 행하여지지 않는 사역은 그것이 ‘치유’, ‘기름부음’, ‘예언’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없고(고전 13:1-3),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때 항상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셨고(마 14:14), 그분의 사랑으로 감싸는 능력을 통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행하신 것처럼(막 5:19), 우리의 목적 또한 그분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역자의 또 다른 문제는 치유과정 중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의 믿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인데, 물론 치유 대상자가 굳센 믿음의 소유자라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하고 판단할 때가 많은데 사실 치유를 비는 기도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치유과정에서 믿음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믿음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이 즉석에서 고침을 받는가 하면 분명 보기에는 굳센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치유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어떤 사람이 치유 받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믿음의 분량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인상을 지나치게 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여자의 귀신들린 자녀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 부모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통해 고침을 받았고(마 15:21-28),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은 아무런 믿음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냥 불쌍히 여겨주셨기에 고침을 받았듯이(막 5:1-20), 사역자가 능력이 많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마 8:3)나 베데스다 못가의 삼십 팔년 된 병자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만(요 5:30), 그분의 주권적인 능력을 통해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신 32:3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나 능력보다는 인간의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실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고, 가령 어떤 사람에게 “만약 당신에게 성령충만한 믿음이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을 뗀데”라는 인상을 주는 것 역시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에 응답하실 뿐(마 9:29), 결코 그것에 의해 유도 당하시는 법이 없고 그분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렘 33:2).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신다고 할지라도 치유 받지 못한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고 판단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고(고전 4:3-4), 치유의 결과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하고(요 5:19), 단지 온갖 사랑을 다 기울여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사역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마 10:7-13).  그리고 어떤 틀에 잡힌 치유사역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사역자가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물론 대규모 집회에서는 불가피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에도(눅 4:40-41),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셨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막 1:32-34).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하지 않는 모든 치유사역은(막 5:19), 결코 하나님의 방식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요 5:30), 대체로 기도를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혈루증을 앓은 여자처럼 예민하거나 긴장된 상태에 있기 마련이고(눅 8:43-48), 이들 중에는 전에 한 번도 이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도 많이 있기에 가능한 긴장을 풀게하고(막 9:20-27), 최대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며(막 5:35-43), 결코 격한 감정을 받도록 유도해서는 안 되기에 치유를 행하는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것처럼 사역을 행할 때 불필요하게 큰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역자는 치유사역을 행할 때 가능한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행 3:12), 기도 받는 사람들 역시 될 수 있는 대로 가나안 여자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되는데(마 15:27), 그 이유는 Jonathan Edwards가 말한 것처럼 어떤 감정으로도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사역자가 그들을 치유하거나 또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본인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치유를 행할 때 치유를 받는 사람이나 기도하는 사람 모두가 평온한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에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을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렘 33:2), 최선의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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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만약 아픈 사람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있을 때 이들 “모두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의 예로 비추어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도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다 고치지 않으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그 많은 병자들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을 고치셨고(요 5:1-14),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치유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입니다(요 5:19).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사역을 행해야 하겠지만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분께서 어떻게 우리가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알게 해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분별이 필요하겠지만(요일 4;1), 어떤 사람은 주님의 분명한 음성을 통해 그러한 사람을 알게 해주신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환상 가운데 그림처럼 보기도 하고, 또는 천사가 그 고칠 사람 뒤에 와 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을 보면 궁금하고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 경우에는 구체적인 인도를 구할 때마다 거의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같고 아마도 언제가 그분의 인도를 좀 더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일을 그칠 수는 없습니다(삼상 23:2, 4, 30:8).

 

오늘날 거의 모든 목회자들은 누구를 위하여 “기도 한다”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 사역에 있어 하나님께서 어떤 증세를 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기 보다는 예수님처럼 그 병자에게 그 증세가 떠나가기를 직접 명령할 때가 많은데(요 14:12), 성경 누가복음 9장1절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신”것처럼 우리는 주님에게 어떤 사람의 병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분을 대신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요 14:13-14), 베드로가 행한 것 같이 그 사람에게 사역을 행하여야 하고(행 3:6-9), 무엇보다도 치유사역에 있어 이것이 일차적인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기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는 없고(막 9:14-29), 치유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히 해야만 하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일치시키며(마 26:39),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기도가 우리 자신의 죄와 무가치성을 고백하고(빌 4:13, 딤전 1:15), 앞으로 닥치게 될 영적인 싸움에서 그들을 대적할 성령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야 합니다(엡 6:10).

 

왜냐하면 이러한 준비기도가 없이는 아무런 능력과 권세도 받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사역을 행하기에 앞에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통찰력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하고 실제로 그것이 ‘치유’를 구하는 것이든, ‘귀신축출’을 위한 것이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으로(막 16:17-20), 그러한 증세가 사라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권세와 능력이 없으므로 어떠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없지만(요 15: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셨기에 그분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명령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요일 5:14-15).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아는 일인데 아마 그분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우리가 명령하는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능력을 행하는 일이 특히 귀신축출을 위한 사역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우리가 이러한 사역을 행할 때 귀신들에게 떠나 달라고 간청하거나 그렇게 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몬의 장모에게 열병이 떠나갈 것을 명령하셨던 것처럼(눅 4:39), 직접 그 귀신들에게 명령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칠십 인의 제자들처럼 귀신들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고(눅 10:17-20), 주님께서도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요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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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사무실에 계약 문제로 아내와 함께 들리게 되었는데 Leasing Agent인 Susan과 모든 서류에 대한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사무실에서 나오려고 할 때 그녀의 왼쪽 발 전체에 orthopedic boot를 신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자 발가락 안에 있는 부러진 뼈를 2주 후에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에 감동이 와서 기도해 주어도 괜찮은지 물어보았을 때 Susan은 쾌히 승낙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무릎을 끊고 간절한 마음으로 치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치유의 능력을 풀어 이 여성의 발가락에 부러진 뼈를 수술하지 않고 깨끗하게 고쳐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그녀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자신이 기도를 받고 나서 2주 후에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X-ray를 찍어보더니 부러진 뼈가 사라졌고 발가락이 정교하게 붙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은 Susan은 무신론자인데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과 상관없이 깨끗이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사역을 알기 전에는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치유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놀라운 일로 생각했는데 물론 성령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고전 12:11), 사실을 알았지만 기도할 때마다 거의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깊은 좌절감과 당혹감 속에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기해 버리고 싶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 사역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계속해서 치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 성령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할 때 그분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가 커져 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누군가 “믿음을 갖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먼저 실천을 통해 배우게 되며 무엇보다도 믿음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 자라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달란트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과감히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빼앗아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처럼(마 25:14-30),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단순히 보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실수를 무릅쓰고라도 활용하기를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에 믿음을 키워 나아가는 일 역시 실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두 가지 일, 즉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마 10:5-8, 눅 9:2, 10:9), 은사 받는 일에 있어 이 두 가지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고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과 치유사역의 형태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충실하게 사역을 행하면서 그러한 것들 가운데 과연 어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가를 발견해 내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떤 영역에서 은사를 받았는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내는 것 같지만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께서 명하신 일을 담대하게 행하기를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정한 형태의 치유사역을 형성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사역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분의 뜻에 따라(고전 12:11), 각기 다른 치유의 은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종류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만(약 5:16),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육체적 질병’, 또 다른 사람은 ‘마음의 병’이나 ‘귀신축출’, 그리고 ‘신체의 특정부위’에 대해서 잘 낫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 사역을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눅 10:19),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라고 분부하셨으며(눅 9:1-2), 나중에는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제자로 삼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8:20).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에 의해 도구로 쓰임을 받고자 원한다면 그분과 함께 실패를 무릎 쓰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만약 기도해서 아무런 효과도 없더라도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는 일에서 결코 많은 열매를 거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은사가 마찬가지겠지만 ‘병 고치는 은사’란 끊임없는 실천과 믿음을 쌓아가는 점진적인 배움의 과정이기에 우리는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충분히 점검해 본 후에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아야 하고 치유 받지 못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러한 실패와 좌절감 속에서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이러한 사역을 행할 의무가 있는 제자들의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계열에 속해 있기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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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성숙해지는 과정과 성령의 새로운 경험을 맛보는 여정에서 자신의 삶 가운데 숨겨져 있던 치유되어야 할 새로운 영역들이 마주치게 되는데 어떤 상처는 하나님의 빛이 조명되는 순간 치유되기도 하지만 어떤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치유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필요한 모든 것은 회심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잖아요. 옛것은 다 지났거든요!”(고후 5:17).  사실 이러한 확신은 두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문제는 말 자체는 맞는 말 같지만 실제의 그들의 삶에서 아직 옛것이 다 지나갔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골 3:1-6), 또한 성경 자체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히 12:4).  다시 말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천사 같은 삶을 산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여러 문제들, 예를 들어 어려움과 역경, 그리고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며 모든 신자들은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고후 5:1),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롬 6:12-13).

 

사실 사탄은 이미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죄의식을 느끼도록 사람들을 유혹하지만(계 12:10), 어떤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발람이나(민 24장), 사울처럼(삼상 19:23), 성령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즉 죄악에 빠져 들게 된 사역자들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역을 행하도록 허용하실 때가 많은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걸음마를 배우다가 넘어졌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내다 버리는 사람은 없듯이 부모는 그 자녀가 결국 걸을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사역자가 넘어졌다고 해서 단번에 진멸해 버리지는 않으시지만(사 42:3, 마 12:20),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실수와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분하시는 분이시기에(시 9:8, 렘 11:20), 고의적으로 죄에 빠져든 사역자에게는 마땅한 징벌을 내리고(히 10:26), 걸음마를 배우다가 자주 넘어지는 사람에게는 실수 많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 21:15-19).

 

이렇듯 연약한 사역자에게 있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그분과 온전히 친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충만을 통해 능력을 받으셨지만(행 10:38), 그분의 권세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나온 것으로 주님은 몇 시간이든 기도하시는 가운데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고(막 1:35, 눅 5:16), 또한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일치시키셨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권능이 아니면 어떠한 일도 행치 않으셨습니다(요 5:19, 7:16-18).  우리들 역시 성령충만을 통해 예수님처럼 능력 받을 수는 있지만(막 16:17-20, 눅 24:49, 요 14:12),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역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통해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귀신들을 내어 쫓으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충만을 통해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신 것처럼(요 7:16-17),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에(요 5:30, 8:28), 그 성공률은 백퍼센트였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 차이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 그 뜻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행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관문은 능력을 부여 받는 일이라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즉 우리의 뜻과 그분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기에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는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요 12:49).  사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렘 29:11),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고(눅 4:18), 사랑과 기쁨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끔 사역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막 9:38-40).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이러한 핵심적인 영역들에 대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리라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도구로서 성령충만하게 사역을 행할 수는 있겠지만(고전 12:11), 일정 시점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역사를 일으킬지에 대해서 아는 일이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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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대형 교회 목회자들 중에 돈 문제로 혹은 이성 문제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지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처음에는 사역을 잘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역 중간이나 말기에 가서 온갖 부끄럽고 추잡한 일을 통해 그들이 여태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했던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난 받는 것을 볼 때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강심장의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 그들과 똑같은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고, 만약 그들처럼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 신자들이 바라보는 목회자상은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의 모습이지만 문제는 목회자들도 범죄 하기 쉬운 한 인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만하고 영적으로 무지한 목회자가 아니라면 스스로가 성도들이 바라는 만큼의 성숙한 인격체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알고 있으며, 특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곁에 있는 목회자의 아내만큼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훤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은 목회자의 겉모습, 즉 깨끗하고 말끔한 차림의 양복에 늘 온화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확신에 찬 모습과 고상하고 차분한 목소리,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사모에게 대하는 예의 바른 행동, 이것이 외식적인 행동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시겠지만 더 나아가 교회에서 매우 헌신되게 일하는 모습을 볼 때 교인들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표면적인 모습일 뿐 목회자들에게도 말 못할 고민과 문제가 산적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신령하고 거룩한 목회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면 모든 목회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거룩하고 신령한 척 행동을 하는 것이지 단 한사람도 신령한 사람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어떤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한 성령충만한 목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천식 걸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 역시 내적인 갈등과 고민 없이 영육간에 강건하게 목회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목회자는 가정, 자녀, 질병, 물질, 사역, 교인, 등등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목회자 자기 자신만의 내면세계인데 이것을 볼 때 모든 목회자는 상처 입은 사역자들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가 만약 어떤 도움을 얻기 위해 교인들에게 찾아간다면 목회자의 허점이 새어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또한 같은 목회자끼리 교제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히 대화할 수 없는 서로간의 어떤 라이벌 의식이 있는 것처럼 불신 상태가 심하고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상담소를 찾아가는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이것을 놓칠 리가 없는 사단은 목회자가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으며 쉽게 공격 받을 수 있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위선과 죄책감, 그리고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등으로 갈등을 겪게 만들어 자포자기의 심정을 갖도록 유혹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 지나치게 단순 논리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역자들은 마귀의 공격을 가장 받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단은 모든 교파와 교단과 상관없이 물질과 성적 타락으로 목회자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최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원하지 않는 일들이 세상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단에게 만약 선택이 가능하다면 그는 평신도들보다 목회자들을 먼저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돈과 권력과 섹스는 사단에게 있어 목회자를 옭아매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누군가가 이러한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면 그들의 배후에 귀신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사단이 목회자에게 초점을 맞추어 공격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목회자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집요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에서 전면에 나서고 있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위험 부담을 지니고 있는데, 만약 목회자가 돈이나 이성 문제로 실족한다면 교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만들어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게 커서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상처와 실망을 가지고 방황하거나 심지어 교회를 영영 떠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회자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절박한지에 대해 목사 자신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알아야 하고 특별히 모든 신자들에게 중보 기도가 필요하겠지만 목회자만큼 중보기도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목회자가 타락할 때 성도들은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비난만 하지 말고 교회를 섬기는 같은 지체로서 그 상처 입은 목회자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중보기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철저하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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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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