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아일랜드 Kalapana 지역에 있는 Lava를 보기 위해 6개월 전부터 인터넷 자료와 여행자 후기를 보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용암을 보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또 다른 하나는 왕복 8마일을 걷지만 차를 몰고 가서 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용암이 눈 앞에서 흐르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 차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1 gate에서 차를 주차하고 자전거를 빌리거나 아니면 셔틀 버스로 이동하지만, 저희는 시간을 단축하고 걸어가는 것을 줄이기 위해 인터넷에서 구글링하는 가운데 그곳에 사는 원주민과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330분쯤 도착하여 1Gate를 거쳐 2Gate를 지나 약속한 원주민 사유지에 짚차를 주차하고 10분 정도 걸어 3Gate에서부터 Lava 하이킹을 시작했습니다.  용암이 흐르는 곳까지 걸어서 2시간, 그곳에 도착해서 1시간 정도 구경하고 다시 돌아오는 데만 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날 우리가 가려던 곳에서 어느 한 사람이 유황가스에 질식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뉴스에 아랑곳 하지 않고 용암으로 굳은 땅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유황 냄새, 그리고 바로 1미터 앞에서 흘러 내리는 시뻘건 용암을 눈으로 직접 볼 때 현장에서 느끼는 경험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적으로 알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솔직히 이런 예화를 드는 것은 방언 하지 않는 목사나 신학자가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입을 가볍게 나불거리는 것은 한 마디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939 Sweden 수도 Stockholm에서 열렸던 The European Pentecostal Conference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길 방언성령의 사역과 별도로 일어날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말의 의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방언의 표적이 없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아직도 방언을 성령세례의 육체적인 증거 보고 있는 반면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다소 유연한 입장, 성령세례를 받을 방언을 수도 있고 수도 있지만 방언은 여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하며 성령충만한 삶의 일상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 그리고 은사주의 갱신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 특히 메마른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학으로 물든 사람들 중에는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에게 미혹되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옹알거린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은사들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사악한 궤변을 늘어 놓기도 합니다.  사실 방언이 추잡하고 거짓된 소리 현상이라고 부정하거나 무엇보다도 방언하는 사람은 미혹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16:20), 말씀을 전해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4:12).

 

사실 방언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입만 열면 얄팍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공격을 하는데, 이런 무경험자들은 Lloyd Jones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한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만 하며 그 중에 한 가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방언을 고려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소책자와 논문집을 발간했는데, 그들 중에 한 저자가 오늘날 모든 방언은 마귀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하며 이 문제에 대해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런즉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우리가 어떤 사건의 보고를 들을 때면 이를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고성령의 주권 가운데 그분은 어느 시대라도 이 은사들 중에 어떤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신중하고 주의 깊게 범사에 헤아려 오직 좋은 것을 취하여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방언보다 더 오용되기 쉬운 은사는 없는데(고전 14:16-17), 만일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27),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에 방언을 금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한마디로 지옥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성령을 대적하지 말아야 하고(12:22-36),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것을 수용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살전 5:21).

 

그리고 방언을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인옹알거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은사를 주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고전 12:11), 대단한 모욕이라고 생각하고( 12:10), 떡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듯이( 7:9-11), 신자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그분께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11:13).  비록 그리스도인들 중에 고린도 교인들처럼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고전 3:3)에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할 때(고전 12:11),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눈에 거슬리게 행동할 수도 있겠지만(고전 13:1-3), 그렇다고 그 모든 성령의 역사를 가짜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Jonathan Edwards는 『부흥론』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지 신중하지 못한 행위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일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신중하지 못한 처신들뿐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준에 정말 반대 되는 일이 많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그러면서 그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비상식적으로 처신한 고린도교회와 거룩하고 영감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예를 듭니다.  다시 말해 경건한 사람들 중에도 베드로처럼 무지와 부패가 남아 있어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 것처럼(2:11-14), 은사 받은 사람들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역사 전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18:7),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신 때 걸림돌이 생기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20:17).  Jonathan Edwards걸림돌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1222-32절을 인용하여 성령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만큼 인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다. 성령이 인간들의 마음에 행하시는 은혜로운 역사를 대적하여 말하는 것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이 낫다. 그 어떤 것도 대적하는 것만큼 우리 영혼이 그분의 역사의 은택을 받는 것을 영원히 방해하는 것은 없다.”  한 마디로 가마리엘처럼 지혜롭게 행동하고( 5:33-39),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2:10).  더 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마시는 식수(食水)가 환경오염을 통해 더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평생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신자들 중에 은사를 사용하다가 실수나 눈에 띠게 거스리는 행동, 혹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5:22-23), 그 일로 인해 성령의 역사 전체를 귀신의 역사라고 치부하지 말아야 하다는 것입니다( 3:22).  방언기도하는 목회자로서 한 가지만큼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6:18),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방언이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어 유익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고전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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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앙의 초보인 자매가 성령의 은사 방언’(고전 12:10)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방언 받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자매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영적체험에 대해서만 신뢰할 뿐, 과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검증하지 않은 채(고전 14:27-29, 살전 5:21, 요일 4:1), 무조건 방언 받지 말 것을 주장하는 것은 성령이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귀중한 은사(고전 12:7)을 심히 거역하고( 7:51), 소멸하는 것으로 좋은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살후 5:19).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귀한 선물이고( 1:17), 믿는 자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자기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고전 14:4, 26),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잘못된 것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신뢰해야만 합니다( 7:9-11, 8:32).  그리고 누구든지 독단적인 말을 하거나 어떤 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그것에 대한 연구조사를 미리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2때 분별력 없어 귀신이 주는 방언인지 아니면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방언 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쓴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처럼 이 자매 역시 성령의 은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부터 차분하게 배우지 않았기에 일어난 문제인 것 같습니다(딤후 3:14).  그러므로 자신의 분별력 없는 무지하고 미련하게 행동한 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19:3).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체험이 없는 사람은 방언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에 잠재의식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특히 Nils Bloch Hoel의 저서 『Pentecostal Movement』에서 말한 것처럼 방언을 심리학적 질병으로 진단하고 방언을 말하는 자를 일종의 변종으로 진단합니다.  그의 의학적 견해는 들어보면 “진정한 Xenolalia(외국어란 뜻)는 일시적인 정신적 현상으로서 환자가 황홀경에 들어가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외국어를 근육 운동을 통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상태인 기억증진증(Hypermnesia)과 과거의 경험을 회상했을 때에 그것이 미경험인양 느껴지는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잠복기억(Cryptomnesia)이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만족스럽고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Hoel의 이런 주장은 오늘날 방언하는 사람이 황홀경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가 온전한 가운데 방언한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나온 잡설(雜說)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된 대로 방언하는 자는 몰아지경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이 있어 방언을 통제할 수 있고(고전 14:27-32), 성령이 역사하실 때 비합리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고 중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행 2:4, 14).

 

물론 고전적 신비주의 경건과 다른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혼자만이 성령의 은사를 독점적으로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이 예배나 기도 중에 광적이거나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무질서한 행동을 통해 일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방언은 일종의 무아지경의 언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앙의 초보이거나 말씀으로 무장되기보다는 은사를 먼저 받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바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순절날 강한 능력으로 임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방언을 그치고 베드로가 모인 군중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고( 2:1-21), 사도 바울도 방언을 순서에 따라하고 세 사람이 넘지 않게 하라고 명함으로서 방언을 말한 사람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과 스스로 자제할 수가 있고 아무도 방언하지 않을 때나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만 방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7).  더 나아가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할 것과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을 고린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볼 때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심리적인 방언이나 귀신이 주는 방언과 달리 충분히 자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고전 14:26-33)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방언을 일종의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언의 은사에 대해 Peter Wagner는 “자신이 배우지 않는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 그분께 받은 즉각적인 메시지를 자신이 배우지 않는 하나님의 성별된 언어로 그분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방언을 사적방언공적방언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먼저 사적방언은 흔히 기도의 언어로 간주하고 방언통역의 은사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428절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서 활용되면 안 되고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은 다만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공적방언은 방언통역의 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통역이 없으면 공적방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교회에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4:27-28).  요약하면 사적방언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기도의 언어로서 자기의 덕을 세워주기 때문(고전 14:4)에 통역할 필요가 없지만 공적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교회 공동체에 전달하는 것으로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23).  따라서 바울이 말한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은 교회에 와서 개인적으로 방언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회중 가운데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즉, 예배 중에 통역이 없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빼놓고 신앙생활을 한다면(5:23), 이런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방언(고전 12-14)은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허락하신 귀한 은사이기(고전 12:11)에 누군가 방언을 금하거나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또한 방언은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로운 관리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고전 14:40).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방언의 은사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고전 13:8-10)에 오늘날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고, 방언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누리는 유익한 은사로(고전 14:14)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는 놀라운 그분의 선물이기도 합니다(1:17).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돕는( 8:26), 은사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20).  물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6:18)과 로마서826절의 말씀을 해석할 때, 이 구절들은 방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도생활에서 발생하는 일반적인 체험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아무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합니다(고전 14:18).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방언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이 했다고 고백하는 이 말속에 그가 지녔던 영적인 권능의 비밀이 여기에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따라서 누군가 '방언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신자들만이 말하는 천상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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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골프 선수가  한 가지 종류의 골프채 만을 가지고 18홀 정규 코스를 돌면서 골프를 친다면 좋은 성적을 거두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골프를 치는 사람에게 있어 어떤 골프채를 특별히 선호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용하는 골프채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골프를 잘 치게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문제들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게 사역과 거룩한 삶을 위해 여러 가지 능력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즉 성경과 예배와 세례, 그리고 성찬과 친교, 더 나아가 기도라는 놀라운 특권과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가령 성령의 나타나는 표적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훈련과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탐구하는 방법을 갖추지 못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도와주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오직 한 가지 골프채만을 고집하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말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환영하는 가운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Jack R. Taylor의 말을 인용한다면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아닌 죽은 말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 특히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이지 성령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의 저자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방언을 하다가 거짓방언을 미화하는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은 성경의 방언과 무관하다고 확신하며 수련회에서 받았던 방언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 분이 영분별의 은사가 있거나 축귀사역에 경험이 있으면 귀신방언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 2 때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분별력 없이 귀신이 주는 방언을 성령이 주시는 방언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분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방언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학생회 수양회에서 마지막 날 혼자 산 속 바위 옆에서 기도하다가 방언을 했으므로 ‘내가 받은 방언은 성령이 주신 참 방언이다’라고 굳게 믿었다.  이 글을 읽고 생각나는 것은 교육전도사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에 가면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겁없이 혼자서 기도하다가 귀신이 들리거나 헛소리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처음부터 이 분이 정상적인 방언을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William Sargent가 『Battle for the Mind』에서 이야기 했듯이 자기도취에 빠져 심리적인 현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성령이 주신 방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분 말대로 “성령의 은사에는 방언기도가 없는가?, 그리고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들을 나열하면서 그 중에 방언과 방언통역함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고전 12:10), 이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고(고전 14:27-28),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고전 12:30),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고전 14:39).  달리 말하면 신약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은사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일시적으로 주신 것들 중 하나가 방언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3:10).  더 나아가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사람 중에( 10:9),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고전 12:7). 

 

그러나 이창모 목사는 현대교회의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는 사탄에게 속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속단합니다여기서 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17: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 1:3)에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7).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고( 28:19), 특별히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3:22),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성자의 신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는 모든 구원받은 자의 구주되심을 보여줍니다( 5:31). 또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란 명칭은 오직 절대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지만( 3:14),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도 직접 사용된 것은( 26:4),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 자존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시고( 22:13),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언약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1:17), ‘알파와 오메가’이신 구속사역을 완성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9:12).  그렇다면 이러한 진솔하게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무조건 방언기도를 한다고 해서 사탄에게 철저하게 지배를 받아 악령방언을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와 영어를 들먹거리고 횡성수설 하며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사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나의 연약함과 초라함,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에 대한 회개가 알아듣는 기도보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목사들 중에 누가 방언에 대해 말만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나간 목회자는 없습니다.  반쪽짜리 메마른 말씀(골프채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방언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은 성경은 복음을 통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1:16),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8:16), 왜 하나님의 말씀은 지겹도록(그토록) 강조하면서 교회 안에 귀신에게 눌리고 병든 자들이 많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4:18).  사족이긴 하지만 가 그것을 알리가 없겠죠?  자기가 게거품을 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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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빛 월간지를 발행하는 안식교 출신 손계문 목사, 구약의 율법적인 음식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혼합율법주의자인 노우호 목사, 한국교회의 대안으로 목사가 없는 교회를 주창하면서 집사 직분을 늘 달고사는 신성남 집사,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방언할 줄을 모르면서 방언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들이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를 어떻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려 말하면 자신이 왜곡한 사실을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공상허언증에 걸린 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잡설(雜說)에 가깝고, 한국 속담으로 표현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목사는 이미 논할 가치도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지만, ‘랄랄라 현상과 방언장사라는 글을 통해 현대방언은 거의 가짜라고 주장하는 신 집사의 글입니다.  사실 시간이 아깝지만 이 분의 글을 10편 정도 읽어보는 가운데 한 결 같이 느끼는 것은 마음이 비틀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인지 돈키호테처럼 교회개혁에 앞장 선 조폭(?)해결사 같이 쓴 글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분의 글을 읽다 보면 목이 곧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와 목사를 비판만 하려고 했지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골병든 글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적인 글을 계속 읽는다면 머지 않아 영혼이 병들고 믿음이 파선될 것입니다.   

 

“뜻 모를 이상한 말을 쏟아내며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신흥종교 단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주사 스트리트의 다 쓰러져 가는 건물 안에서 연일 집회가 열리고” 이 글은 1906 418일 수요일자 Los Angeles Times에 실린 기사로 The 100 Most Important Events in Christian History』란 책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정적인 언론보도는 오히려 사람들을 집회로 끌어들이는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침례교 목사 그것도 방언을 유난히 강조하다가 쫓겨난 William J. Seymou를 사용하여 아주사의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언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Stanley H. Frodsham은 『With Signs Following』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거나 배워보지 못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했고, 노르웨이의 학자이며 『성경문고』의 국제판 편집자인 Thoralf Gilbrant 1985년 세계 오순절 대회에서 이탈리어를 하나도 모르는 자신의 할머니가 유창한 이탈리어로 이탈리아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간증합니다.  물론 방언의 은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릴 것입니다(고전 1:14).  사실 오랜 세월에 걸쳐 방언은 지나치게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 가운데 방언만큼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은사도 없었고 반대 의견도 가장 많았던 은사이기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먼저 “오늘날 각종 방언 말함이 과연 성경적인가?(고전 12:10)라는 것에 대해 Gordon Fee는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방언은 사도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논란이 많은 것으로 바울의 논증 배후에는 고린도교인들이 특별히 방언과 방언통역을 선호했다는 것이 깔려있는데 바울이 말한 방언은 성령에 감동된 발언이고(고전 12:7), 화자(話者)가 몰아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으며(고전 14:27-28), 통역되지 않는 한 화자(고전 14:14)나 다른 청자(聽者)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고전 14:16),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어이므로(고전 14:2, 14-15, 28), 통역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신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Richard Gaffin과 Robert Reymond는 방언의 은사는 교회 창설적 성격을 띤 것으로 이미 중지된 계시은사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은사들이 계속된다고 할 때에 교회로 하여금 공상적인 각종 주장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 이외에 성경 교훈과의 모순을 유발한다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Anthony A. Hoekema 역시 Tongues and Spirit-baptism』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외에 신약의 어떤 서신에도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방언이 교회 안에 계속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AD 100년에서 1900년까지 교회사에 방언이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시키실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주장과 거의 양립될 없다.


그러나 Michael Green은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의 종료 문제에 관해 “성령은 교회 밀실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사도시대가 끝났다고, 신약의 정경이 완성됐다고 해서 예언과 방언이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방언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사람과 천사가 속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유함 가운데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언어이다.”라고 말합니다.  D. A. Carson도 방언의 은사가 계속된다는 측면에서 방언 논쟁에 있어 관건되는 몇 가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는데, 먼저 방언에 ecstasy(황홀경)이 포함되느냐는 여부에 대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Walter J. Hollenweger는 『The Pentecostals』에서 정신이완이 고양된 상태에서의 뜨거운 방언과 화자(話者)가 정신적으로 깨어서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인 '차가운 방언을 구분하여 전자는 ecstasy가 포함되고 후자는 ecstasy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Carson은 현대의 압도적 다수의 방언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방언이 '실제(외국어)의 언어'인가 혹은 인간 언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언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Carson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실제적인 언어들, 즉 사람들의 언어들이건 천사들의 언어들이건 간에 인식적인(cognitive) 언어들의 은사라고 말하며, 현대 방언에 대한 언어학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현대의 방언현상 수천 건을 테이프에 담아 분석한 언어학자들 간에 그것이 어떠한 인간 언어가 아닌 보편적인 합의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학자들의 여러가지 견해가 있는 반면 주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말은 교회사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방언을 하지 않았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주후 4세기의 성경주석가였던 John Chrysostom은 방언은 이미 그쳤으며, 5세기의 Augustine도 방언은 초기의 표적으로 사라졌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도 은사들은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고 가르쳤습니다.  Calvin 역시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 247문』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 즉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46절을 주해하면서 로마서 1129절의 말씀과 상반되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허용하셨던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15절 말씀을 가지고 또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사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감동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제네바 교리문답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Calvin 자신도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서 방언은 우리가 주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원하는 대로 방언을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니라 '심리적인 방언'이라고 말하면서 은사는 성령이 통제하는 것이지(고전 12:11), 사람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분별하는 가운데 좋은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살전 5:21).  이렇듯 오늘날 방언이 논쟁이 심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방언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고(고전 14:23), 그 당시 그들은 방언을 최고로 생각했으며(고전 12:30), 누구나 다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고전 12:30), 자랑하려다가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은사 목록에서 의도적으로 방언을 마지막에 둔 것(고전 12:8-10)은 고린도교인들이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 방언보다는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고전 14:5).  사실 방언은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정령주의자들도 흉내낼 수 있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 있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고전 12:7),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통역이 없는 방언을 회중 예배 때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고(고전 14:28), 교회 내에서 질서 있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기도만큼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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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가족 중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하루아침에 잃었을 때 그 마음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들 중에 신앙의 회의를 느끼거나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가지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악한 마음을 품고’(히 3:12),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비슷하게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을 받은 사람들 중에 오랫동안 방언을 하다가 어느 신학자/목사가 쓴 빈약하고 허접한 글이나 책을 읽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언기도를 하루아침에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미혹의 영에게 속아 초대교회 때 끝난 방언을 지금까지 한 것에 대해 원망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것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마귀는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미혹하는데 있어(요 10:10), 간교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요 8:44),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날 은사에 대한 신학자/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겠지만(히 5:14), 만약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다면(엡 6:10-18), 거짓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각양 좋은 은사들(약 1:17)을 초개와 같이 버리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귀신의 가르침이나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에게 충동질 당하게 된다면 아마 예수님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는 믿는 자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지만(고전 12:4-11), 경험으로 봤을 때 지성주의에 묶여 있는 사람이 거의 방언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Lloyd Jones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지적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이런 지식인은 이성에 초점을 너무 맞추고 있어 자신의 혀를 성령에게 순복시키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사실 방언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며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식과 통제력을 갖은 상태에서 방언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시작하고 원하는 때 끝낼 수도 있습니다(고전 14:27-32). 여기서 성령이 주시는 방언(고전 12:11)을 노래 부르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은 늘 우리에게 있듯이 노래를 하고자 할 때에 노래할 수 있고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과 같이 방언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고전 14:15).  물론 방언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사탄은 처음 몇 주 동안 거짓말로 “진짜가 아니야, 네가 가짜로 하는거야!”라고 의심을 심어줄 수 있지만 방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마 7:20).  다시 말해 얼마동안 방언기도를 드리고 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며 성령께 민감해지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픈 소원이 더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본인 자신이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주님과 긴밀한 소통을 하는 기도의 언어라고 볼 수 있고(유 20절), 이 은사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은 일반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에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영으로부터 오는데 이때에도 말하는 것이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고전 14:2), 만약 여기서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됩니다(고전 14:12-13).  이렇게 방언은 귀중한 은사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준다거나 억지로 따라서 할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는 어떤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은근히 강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은사를 사모하되(고전 14:1), 성령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그분 앞에서 겸손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고전 12:11).


다른 하나는 방언의 은사가 신자의 영적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은사가 나타나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고 높일 때가 있는데 물론 은사는 귀한 선물이긴 하지만(엡 4:8), 베드로처럼 은사를 주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행 3:12).  한 마디로 은사는 교회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고전 12:7), 영적수준을 재는 잣대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한 것에 대해 무척 흥분하고 있을 때, 그들이 자칫 교만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17-20). 무엇보다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오랫동안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다듬어지는 훈련을 받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이 은사를 무분별하게 남용할 때 분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데, 사실 방언을 포함하여 모든 은사들의 경우 억지로 흉내 내도록 부담감을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역자 들 중에 은사 때문에 교만하게 행동하면서도 정작 본인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위험이 있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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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좋아 흥분된 가운데 교회에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는 형제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가장 큰소리를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끔찍했던 것은 내가 하는 방언기도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다른 사람의 기도소리가 내 기도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골방(옷장)에 들어가서 기도한 것보다 교회모임에서 기도한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늘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다른 형제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무지와 무식이 조합을 이루어 깨닫지 못해서였지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교만이 하늘을 치솟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기도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던 일을 마다하고 득달같이 달려가서 성령이 허락해 주신 귀한 선물인 방언으로 마음껏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가끔 신비(?)주의적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방언을 받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앙의 초보상태에서 교회에 아름다운 덕을 세우지 못하고 심각한 해를 끼쳤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때에 누군가가 성령의 은사(방언)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면 그렇게 무식하게 공식석상에서 방언을 남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통역 없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옹알거리는 현상으로 치부하거나 방언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의 방언은 귀신의 장난이거나 마귀가 가져다주는 거짓된 은사라고 주장을 하면서 역사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주의 종들 가운데 방언을 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줄기차게 내세웁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한 것은 정말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하는 사람은 귀신에 들렸거나 미혹을 당한 사람인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를 믿기 전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향해 방언을 말할 때 귀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고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4:5).  무엇보다도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다루기 전에 신전에서 귀신을 섬겼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일부 고린도 신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만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을 저주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면서(고전 12:3), 한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자(롬 10:9), 즉 그리스도인 중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분은 귀신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7).


Jack Hayford는 이 방언에 대해 『The Beauty of Spirit Language』에서 “오늘날 영적인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신기함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원천을 간절히 구하는 것에 비롯된 것이고 그분에 마음에 더 가까이 가고자 더욱 성경적인 것을 찾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언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경건하게 높일 수 있도록 돕는 은사이다.”  Harold Horton 역시 『Gifts of the Spirit』에서 “구원받은 자의 내면에는 마음이나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언어를 통해 성령의 폭포수와 같은 물결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과 같다.”  이들의 말은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위가 상하고 역겨운 말들로 들리지도 모르지만 방언은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고전 12:10), 놀랍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지(약 1:17), 마귀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은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된 예언의 은사와 다르게(고전 14:3),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며(고전 14:2, 15, 28), 통역이 없으면 골방에서 개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덕을 세울 수는 있지만(고전 14:3),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고전 14:11-13), 마음이 아닌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로(고전 14:14-15), 얼마든지 자제력이 가능하지만(고전 14:27-28),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2:30).


문제는 오늘날 방언을 허락하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이 통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기도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경우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전 13:1).  물론 바울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언하는 사람 중에 곁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나가 기도하는 것처럼(삼상 1:13), 속삭임으로 방언하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공적으로 통역을 통해 전달할 메시지가 없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방언하는 사람이 열매가 없는 삶이나 교회 내에서 신비주의적 행동을 보일 때, 혹은 주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성령충만한 것처럼 통역 없이 큰소리로 방언을 하기 때문인데 이런 지혜롭지 못한 행동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는 것처럼(롬 2:24),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할 수 있지만(고전 14:15),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7-28절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야 하고, 무엇보다도 ‘영으로 찬미’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아름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고전 13:1), 불신자에게는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고전 14:23).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면서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온 회중이 방언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찬양하는 것입니다(고전 14:26).  다시 말해 통역이 없는 방언을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고전 14:19). 이 말은 방언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통역되지 않는 언어를 공적모임에서 사용하는 것을 바울이 비판하는 것인데, 사실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처럼 오늘날 누군가 개인적 가치를 그가 가진 은사로 평가할 위험이 있고 혹은 감정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고 단정지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기초를 세우고(고전 3:11),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초점을 맞추며(벧전 2:21),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교만하지 않는다면(고전 10:12),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빌 2:13), 귀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일 4:2).  그러므로 방언은 어떤 식으로든 사용자에게 덕을 세울 뿐 아니라(고전 14:4),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는 한 미혹케 하는 영에게 속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요일 3:7).  더 나아가 방언을 통해 무엇인가 미혹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의 은사인(고전 12:10), 방언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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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채플의 교인들은 나의 아내 루이스가 겪은 심각한 기침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거의 3년간 지속되었다.  한번은 루이스가 기침으로 인한 시각장애로 런던에 있는 성토마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안과 전문의는 아내가 기침을 멈추지 않으면 망막이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끔찍한 날들이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런데 아내의 병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의 기도로 치유되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그와 그의 아내가 친절하게도 루이스를 기도해 주기 위해 웨스트민스터채플로 찾아왔다.  당시 루이스는 기침 때문에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요.”  그녀는 간신히 교회에 도착했다.  대대적인 광고나 예배도 없었고,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라는 강조하는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부부는 아내에게 대략 5분 정도 손을 얹고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놀랍게도 아내는 즉시 나았다.  이것은 1994년 12월의 일이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의 치유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치유가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끔찍했던 기침은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이 간증은 R. T. Kendall 목사의 진솔한 고백으로 당시 루이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통해 치유기도를 받던 날은 거의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물론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무척 거스리거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은사 중지론자들은 이런 은사가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강변하는데, 이들의 말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정경의 마지막 말씀을 기록할 때까지 복음의 진리와 함께 하며 그 진리가 이미 입증됐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런 은사들을 나타낼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성경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성경 기자도 기록된 성경이 표적과 기사 등의 실체를 대신하거나 어떤 의미에서 대체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과거에는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는데 필수적이었다면(롬 15:18), 지금 불신 세상에서는 더더욱 필요할 것이고(막 16:20),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도 사역을 입증하고 확증하기 위해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는데(요 14:11), 만일 이것이 주님에게 필수적이었다면 지금처럼 타락하고 패역한 이 시대에는 얼마나 더 필수적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은사를 배제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일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말살시키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마 12:22-37), “은사들은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적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라는 D. A. Carson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답을 찾아야 하는데, 먼저 고린도전서 12장7절 말씀처럼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각각의 은사는 교회를 강화시키고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고(고전 14:4), 이렇게 각 신자에게 성령이 나타나시는 방식, 즉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산출하는 것이 그분 뜻대로 각 사람에 주시는 은사인데(고전 14:11), 이 은사의 주된 목적은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이란 다른 지체들을 돌봄으로써(고전 12:25),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골고루 세워 나가는 공동의 유익을 말하는 것으로(엡 4:16),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은(엡 4:12), 결국 은사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개인을 세워주는 것도 은사의 목적으로 볼 수 있지만(고전 14:4),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고 말한 것처럼 은사의 다양성(고전 12:14)과 통일성(고전 12:20)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종속적인 목적이 있습니다(고전 12:4-6).  즉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중에 필요치 않은 은사는 하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인(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른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은사는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른 은사들과 달리 가장 논쟁이 심한 은사가 방언인데, 궁금한 것은 이 은사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성령 하나님은 고린도교회 모임에서 방언이 사용되도록 통역의 은사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26).  또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왜 사도 바울 자신은 은밀히 홀로 기도할 때 그 은사를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사실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고전 14:29), 확실한 것은 그가 고린도 신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기도로 보냈다는 것입니다(고전 14:18).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방언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이고(고전 14:5), 무엇보다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의 영적생활과 믿음을 강화시키는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전 14:39).  더 정확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말한 것은 그 은사가 개인적인 강화뿐만 아니라 통역이 있을 때(고전 14:13), 교회에 유익이 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받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환언하면 방언을 비롯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격려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고(고전 14:3, 26), 이 은사들이 교회로부터 제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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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을 때 코스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러시아에서 큰 오순절 교회를 섬겼는데 내가 거기에 있는 동안 여러 번 나를 크게 도와주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목사님과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것을 알았지만 항상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목사님은 영어를 전혀 못하고 나는 러시아어를 거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목사님의 부인인 헬레나가 영국식 발음이기는 했지만 영어를 매우 잘했습니다.  1993년 선교여행 중에 처음으로 주일에 모스크바 방문 일정이 잡혔고 목사님은 나를 자기교회에서 설교하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강단에 낫과 망치가 걸려 있는 큰 강단이었는데… 예배가 시작되자 목사님은 마이크로 다가가 양손을 들고 또렷한 미국 본토발음으로 “성령님 오늘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가 계속되었고 나의 벌어진 입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소련 사람을 만나본 분은 아시겠지만 몇 년 동안 훈련과 연습을 거치지 않으면 소련인이 미국식 본토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목사님은 영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헬레나에게 “저는 코스댜 목사님이 영어를 전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완벽한 영어로 기도하시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남편은 영어를 못해요. 그것은 방언기도입니다. 뭐라고 기도했는지 목사님도 모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방언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코스탸 목사님이 영어로 방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도행전 2장에서 군중들이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 타국인들이 자기들 본토 방언을 하는 것을 듣고 느꼈을 감정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방언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었고 신학교에서는 방언의 부당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결과 목사가 되어 사역할 때 교인들에게 방언의 부당성을 가르쳤고 처음 십 년간은 오늘날 방언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일 년에 몇 번씩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히 찾지도 않았는데 성령께서 저와 아내에게 방언을 주셨고, 문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가 제 가정을 덮었습니다.  처음에 나로서는 이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 입장을 가르쳐왔던 내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나의 방언 체험을 사람들한테 말했는데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하는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방언만큼 그분께 나를 더 가까이 이끌어 준 것이 없습니다.  지난 십 사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방언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개인기도 시간에, 운전하면서도 방언기도를 합니다.  방언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위의 간증은 『Experiencing the Spirit』에서 나오는 것으로 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활발하게 사역하면서 헝가리와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소재하는 Messianic Jewish Bible Institutes에서 초빙교수로 섬기고 있는 Robert Heidler 박사의 고백입니다.  물론 이러한 글을 접할 때마다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질 수 있는데, 한 부류는 마귀의 주술에 걸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옹알거리는 귀신방언을 한다고 말할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사실 방언기도를 오랫동안 해왔지만 한 번도 후회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방언을 허락해 주신 성령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고전 12:11), 여기서 항상 궁금한 것은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내가 과연 마귀에게 조종 받아 시간만 되면 기도실에 들어가서 옹알거리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떤 목사는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가 된다고 장황스럽게 궤변을 늘어놓는데 왜 아직까지 나는 방언기도를 많이 했어도 좀비(?)가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방언기도를 전혀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이나 하다가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포기한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R. T. Kendall의 말을 인용한다면 “진짜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이 가짜에 관해 논할 자격이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주장은 궤변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성령이 주신 은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솔직히 이들이 받은 은사가 정말 하나님께로 왔다면(고전 12:11), 데마가 주님을 버리고 떠난 것처럼(딤후 4:10), 그 은사를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다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부모가 없듯이(마 7:9),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은사)들 중에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데(약 1:17), 안타까운 것은 그 받은 은사가 성령께로부터 온 확신이 얼마나 없었으면 쉽게 포기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귀가 보통 영악하기 그지없다는 것이고(고후 11:3), 사실 영적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상모략에 뛰어난 마귀(욥 1:9)가 주로 사용하는 무기, 즉 하와를 충동질한 것처럼 사람 마음속에 끊임없이 의심을 심어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창 3:4-5).  심각한 문제는 한 번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개 눈에 똥만 보이는 것”처럼 계속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마다 의심이 일어나는데(눅 24:38), 이것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약 1:6), 미혹의 영 마귀에게 충동질을 받아 나타나는 증상입니다(계 12: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으로 지켜주시는 것이고(사 26:3),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한 것처럼(행 27:22-26),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은사들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눅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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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방언에 대해 말할 때에 “방언하는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 기도가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라고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방언기도의 주된 목적은 내 영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유 20절).  즉, 방언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로 성경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말하는데(고전 14:15),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기도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기도는 입술을 열고 마음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목소리를 통해 전달을 하는 반면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 내용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 내 영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때에 말하는 것은 내 의지이고 마음도 깨어 있습니다(고전 14:27).  하지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열매는 없기 때문에(고전 14:14), 이때 하는 말을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고전 14:9), 우리의 목소리는 영혼의 표현으로 우리의 영이 마음의 제한과 미혹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14:2).  만약 여기에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서 덕을 세우게 되는데(고전 14:12-13), Gordon Fee는 이 문제를 놓고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때때로 마음을 뛰어넘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믿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14-15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마음과 영, 모두로 기도할 것이라고 논증한다.”

 

Michael Green 역시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못할 때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그분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고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른 이 기도를 아버지께서 받으신다.”라고 말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요지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는 말로 기도하는 것과 알지 못하는 말(방언)로 기도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고전 14:15), 그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서 들으실 뿐 아니라(행 10:31), 덕을 세우는데 있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고전 14:4).  다시 말해 만약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개인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통역이 있으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고전 14:5, 13, 26), 이 귀한 선물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는 우리의 영을 강건케 할 뿐 아니라 기도를 강력해지도록 만들어 주는데, 예를 들어 기도해야 된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마음이 너무 피곤하거나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집중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정확히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롬 8:26), 성령께서 돕는 이 기도(유 20절)를 통해 어떠한 것도 제한 받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영으로’ 축복하는 일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고전 14:16), 바울이 이 똑같은 용어를 에베소서 6장18절에서도 사용하면서 기도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때 방언이 영적전투를 수행하는 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한 가지 “방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인간의 언어인가?”라는 질문인데,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언과 관련해서 이 은사가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인간의 언어에만 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증거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행 10:44-46, 19:1-6).  물론 오순절 날 방언을 시작으로 복음의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행 2:4), 이 은사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Harold Horton는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and The Gifts of the Spirit』에서 “초대교회 사도들이 외국어의 형태로 방언의 은사를 받아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성경에 의하면 오순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 한 명이었고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람어나 헬라어로 복음을 전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이 한 방언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나라 방언으로 전해진 내용 ‘하나님의 큰일’(행 2:11)은 복음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말하는 것으로(고전 14:15),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행 2:12), 그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는데(행 2:37-42), 이날 이들이 구원받은 것은 베드로의 설교에 의한 것이지(행 2:14-36), 외국어/방언을 듣고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은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예루살렘 교회(행 2:1-13)와 고넬료 가정(행 10:44-48),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나타난(행 19:1-6) 방언만이 진짜방언이고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난 방언(고전 12-14장)은 백퍼센트 가짜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거나 쓰기도 어려운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tongue(단수)‘알려지지 않은 언어’(고린도 방언), 즉 사람도, 하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기 때문에 거짓된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반면에 tongues(복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사도행전 방언) 즉, 외국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헬라어와 영어를 대조시켜 KJV(한글)만이 완벽하게 번역된 것처럼 강조(우상시)하는 Peter S. Ruckman(말씀보존학회)의 추종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한글성경과 영어성경은 서너 개 빼놓고 거의 ‘방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유독 KJV 만큼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번역자들이 단수에 원본에 없는 unknown을 추가해서 an unknown tongue으로, 복수는 with tongues으로 번역하면서 단수는 ‘알려지지 않는 언어’이고 복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해석이 잘못된 것은 가령 나무(단수)를 나무들(복수)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듯이 단수나 복수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 뜻이 달라져 하나는 ‘진짜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방언’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불신자)에게 하는 것”(고전 14:22)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솔직히 이 한 구절만 가지고 해석한다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여호와 증인들’처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분명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라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 이 방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이 사람의 언어인 외국어라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데,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면 “왜 통역의 은사를 구해야 하는가?”(고전 14:13)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기도했다면 “왜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고전 14:14)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도 의문이 생기는 것은 만일 방언기도가 오순절 때와 같이 알려진 외국어라면 왜 사도 바울은 교회 외에 사적인 공간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보다 더 많이 기도했느냐는 것입니다(고전 14:18). 즉, 고린도교회 방언은 알려진 인간의 언어(외국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고전 14:5)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이들의 주장대로 번역하면 ‘외국어로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으로 되고,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말씀도 ‘외국어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로 됩니다.  여기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알려진 외국어로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하는 것과 인간에게 이미 알려진 언어라면 그 언어를 가지고 복음 전하는 것을 금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스스로 헷갈려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를 인용하면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해 횡성수설 하거나 말에 핵심이 없는 것을 볼 때 방언기도를 하는 나로서는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이 쓴 글에서 무지와 억지, 그리고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으려는 소름끼치는 자의적 성경해석(벧후 1:20-21)이 난무하고 방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방언은 성경이 증거 하듯 성령이 주신 귀한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39).  무엇보다도 방언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 현대 방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 모두가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방언기도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귀신에게 속아 옹알거리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이들이 말하는 악령(?)에게 더 강하고, 더 세게 다스림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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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졸업할 때쯤 어느 날 저녁 9시경에 다급한 목소리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이 학교 기숙사로 걸려왔는데 빨리 교회 사무실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기도를 많이 하는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기에 다른 두 명의 학생과 함께 교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자 집사님이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있었는데 얼마 전에 교회에서 보았던 집사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고 사무실에는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나이 드신 여자 전도사님과 귀신들린 집사님의 남편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많은 시간을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고 너무 놀라 가슴이 뛰었고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낼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무릎을 끊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담임목사님께서 “김전도사! 눈을 감지 말고 기도해! 지금 귀신들과 영적전쟁을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삐쭉’ 솟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득이나 겁이 나는데 ‘귀신들’이란 말에 더 놀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일곱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하고 귀신과의 영적싸움을 저녁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치렀고 결국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떠나가고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당시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회 안에서 벌어진 축귀사역은 경험이 없는 나에게 있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는 귀신들린 사람이 방언을 흉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는데 있어 방언기도가 강력한 도구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은사를 사모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주시면 받고 안 주셔도 할 수 없고’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교회에서 방언기도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방언에 대해 더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고 졸업식 하는 날 합심기도를 할 때 혀가 자연스럽게 말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방언)이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방언을 받자마자 마음속에 감사의 기도가 흘러 나왔고 이때로부터 시작한 방언기도는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의심이 들기도 해서 방언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는데 믿음으로 의심을 이기고 잘 극복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마귀의 주술에 걸렸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해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눅 1:35)과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벧전 2:24),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행 2:24), 승천해서(행 1:9), 하나님의 보좌 우편(행 7:55)에 계신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0:9-10).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지 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이 은사중지론 입장에 서있는 사람이나 아예 처음부터 방언이 없다는 은사부정론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헛소리 같이 들릴 것이고 마귀에 주술에 걸린 것이 확실하고 백 퍼센트 가짜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 어떤 목사가 방언을 하는 사람은 전두엽을 손상시켜 좀비로 만든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사실 성령의 은사인 방언(고전 12:10)에 대해 귀신방언이라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잘 알지도 못하는 헬라어 단어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통시적(diachronic)해석/역사 비평적 방법론(historical critical method)까지 동원하고, 심지어 방언이 없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순환논법(循環論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솔직히 은사를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사족(蛇足)을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현대 신학자나 목사들 중에 헬라 교부들의 모국어 능력과 그 말의 뉘앙스에 가까이 접근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기 때문에 지금 원어를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헬라 교부들이 보기에는 초보수준에 불과할 것이고, 그래도 신학자/목사들 중에 “내가 얼마나 헬라어를 많이 아는데”라고 교만을 떠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고전 8:1),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과신하면서 다른 형제의 신학/신앙을 단죄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지 못한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 7:1-5).

 

그리고 간혹 방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 중에 방언의 은사에 대해 풍자적으로 묘사해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 방언을 폄하하는데 이런 말은 은사를 허락해주신 성령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일일뿐 아니라(마 12:31-32), 그분을 근심시키는 행위(엡 4:30)로 듣는 자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4:29).  사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인데(딤전 4:12), 만약 겉과 속에 다른 바리새인같이 행동을 한다면(마 23:27), 하나님 앞에서 외식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약 1:22).  물론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칭 신학자/목사가 있기는 하지만(딤전 4:2), 이런 사람은 사울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고(행 9장), 무엇보다도 방언을 하지 않거나 혹은 해본 적이 없다면 방언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 말아야 하고 혹시 누군가 물어보면 그냥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대답해 줄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잠 13:3, 마 12:36-37).  아무튼 방언은 논쟁이 심한 은사이긴 하지만 이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소중한 은사이고, 만약 통역이 있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놀라운 은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고전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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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0년 후반에 홍콩에서 재키를 만났다.  당시 나는 그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씀을 들었는데 쉼 없이 방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다소 불편했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마침 홍콩에 말씀을 전하러 갔을 때 그녀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재키는 자신이 홍콩 거리에서 헤로인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그녀의 전도법이었다.  그리고 헤로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했다.  홍콩 시가 재키가 선교사역을 할 수 있도록 넓은 땅을 주었다. 그들은 길거리의 마약중독자들을 성공적으로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재키라는 것을 인정했다.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중 소수의 사람들이 옛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켰고 헤로인 중독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었다.  그들은 건강을 회복하여 직업을 갖고 선한 일을 하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약 중독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방시킨 놀라운 재키의 사역은 방언을 통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비판했던 것을 보호해야하는 이유였다.  방언은 이상한 불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간증은 1956년 2월 운전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하게 즉홍적으로 방언이 터지는 일을 체험한 R. T. Kendall 목사의 고백입니다.

 

Gordon Fee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영적싸움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에 더 온전하게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유 20절), 사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에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하는 기도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고전 14:15).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말’,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 유익한 것은 먼저 고넬료 가정처럼 이전에 알지 못했던 깊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행 10:46), 또한 로마서 8장26절의 말씀에서 방언기도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방언기도는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중보해 주시고(롬 8:27), 영적전쟁에 있어 성령께서 방언기도를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는데(엡 6:18), 무엇보다도 이 은사의 또 다른 가치를 찾는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귀중한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4).  물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은사의 목적(고전 12:7)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고전 14:12, 26), 어떤 은사도 개인의 건덕을 위해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은사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라고 명백하게 말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신을 세우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숙지해야 할 것은 모든 은사는 어떤 식으로든 은사의 사용자에게 유익이 있을 뿐 아니라(고전 12:7), 이것이 자기 교화(敎化)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공부를 하는 것(딤후 3:14)은 이단적 교리들을 잘 대처하고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딤후 2:15),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 3:17).  즉,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가 더 성숙하고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더 잘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벧후 1:5-7).  만약 이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행 17:11).  다시 말해 기독교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동들(전도, 기도, 봉사, 선교, 예배, 찬양, 성경공부, 등등)은 자기 교화의 효과적인 수단이고 더 나아가 방언기도를 통한 자기 교화도 마귀의 주술에 걸려 헛소리 하거나 잘못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공동의 유익이라는 사실은 각각의 은사 현상이 다른 이차적인 효과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방언의 사용을 장려했던 것입니다(고전 14:5).

 

그리고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4장4절에서 사용된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NLT에서는 ‘strengthened’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고, BBE에서는 'may do good', GWT에서는 ‘grow', 그 외에 수많은 번역본에서는 ‘build up’이라는 단어보다는 ‘edifie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원어에서는 ‘덕’이라는 말이 없지만, 이 헬라어 동사로 쓰인 ‘오이코도메오’는 근본적으로 ‘짓다’ 혹은 ‘세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번역하면 “방언으로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헬라어 단어를 ‘교화(敎化)하다’ 혹은 ‘강화(强化)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신앙성장에 유익을 위해 영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를 세운다는 것은 사고 능력이 아닌 영의 교화로 영적으로 강하고 믿음이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유다서 20절의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방언)를 통해 개인의 삶에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 중에 유익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약 1:17), 한 마디로 개인의 영적성장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집을 짓듯이 자신을 건축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워진다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가 간접적으로라도 필연적으로 강화가 된다는 것입니다(엡 4:12-14).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 ‘모퉁이의 머릿돌’(눅 20:17)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의 의미는 돌 하나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 방식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엡 2:2-22), 예수님이 사용하신 은유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킵니다(시 118:22).  마찬가지로 은사는 각 사람의 유익(고전 12:7)을 위해 주어진 선물이지만(약 1:17), 문제는 은사 받은 사람이 자신이 먼저 바로 세워지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엡 4:12-16).  얼마 전 어느 여성이 전쟁이 난다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맞지 않았고 오히려 격려를 받고 위로받은 것이 아니라(고전 14:3), 미혹의 영에게 충동질을 받아 사람들을 이리저리 방황을 시켰습니다.  왜 이런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분별력 없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고전 14:29).  Lloyd Jones의 말을 인용한다면 은사가 성령의 의해 계발되고 성숙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이 여성은 처음 받은 은사가 받는 순간 완벽하게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한 문제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은사를 남용한 것입니다.  사실 성숙하고 노련한 예언사역자 한 사람이 나오려면 수 십 년이라는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처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여성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인지, 귀신의 속삭임인지, 성령의 내적인 감동인지 분별없이 받아들여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은사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잘 다듬어지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 사람(목사를 포함해서)이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딤전 3:6).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아마 덕을 세우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분쟁만 일으키지 않아도 다행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는데(눅 22:32), 사실 믿음이 없는 그가 갈대처럼 흔들릴 때 다른 형제들을 세워주지 못했고 심지어 칼을 들고 설치거나(막 14:47), 입으로 저주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믿음이 없었습니다(마 26:69-75).  쉽게 말해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기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교인의 한 부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련을 겪은 후에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한 것처럼(실제로 베드로전서는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권면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음) 은사 받은 사람 역시 먼저 자신을 세우지 않고서는 다른 지체들을 세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언기도를 충실하게 했던 사람은 그 신앙의 년도에 따라 교회 안에 덕을 많이 세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적게 세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은사는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딤후 1:6), 은사 받은 사람의 실수를 가지고 눈에 할례를 받지 못한 독사의 자식 바리새인처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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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봄에 루이스가 몹시 아팠을 때, 나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었다.  절친한 친구의 아파트에 홀로 앉아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이후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줄곧 방언기도를 해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26-27절에서 언급한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것이 방언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2절과 완벽하게 연결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처럼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한 가지 아주 분명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간증은 『Holy Fire』에서 나오는 것으로 남침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R. T. Kendall의 고백인데, 그는 Lloyd Jones 목사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25년간 사역을 감당한 목사로 수 십 권의 책을 저술하고 성령의 역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강해설교와 거리에서 전도할 때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유명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역자입니다.  이 분은 2002년 은퇴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Kendall 목사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마귀의 주술에 걸려 옹알거리면서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을 부정하는 Palmer Robertson는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을 대조하는 언급은 없다. 이는 신약의 방언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나누어 주는 다른 모든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 나타나는 절대 다수의 방언 현상은 신약의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 애초부터 분명해 진다. 사적인 방언은 신약의 방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신약의 방언은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28절의 말씀에 대해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는 자가 없는 이상 자신을 자제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자신 안에서 말한다”라고 모호하게 말하면서 결론짓기를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방언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소리를 냄으로 긴장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증언할지 모른다. 그가 사용한 기도언어는 그로 하여금 오늘날의 삶을 맞닥뜨려 헤쳐 나가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다.”  사실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주장할 때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Richard B. Gaffin 역시 방언기도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공식모임에 방언의 공용성(共用性)을 주로 다루었다. 동시에 방언이 사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구절들도 있다(4, 18, 19, 28절). 그렇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경건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관은 근거가 없다. 대개 위의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방언은사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용(私用)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용(共用)으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용방언은 통역을 요구하는 공용방언과는 별도로 첨가되는 별개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용방언은 방언의 은사의 보조적이거나 주변적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서 Palmer Robertson처럼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립니다.  “방언은사는 원래 계시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 은사를 받은 자는 방언을 개인경건을 위해 쓸 수 있는 혜택도 덧붙여 받는다.” Calvin도 『제네바 교리문답 247문』에서 방언기도는 유희(遊戱)와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기독교강요』에서는 고린도전서 14장15절 말씀을 가지고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라고 강조했는데, 솔직히 방언기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방언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John Stott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성령세례와 충만』에서 “바울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이며 사모할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그 자체로서는 덕을 세울 수 있는 특정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 단 한 번의 유일한 예외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울이 쓴 것은 분명 어느 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문구는 그 말 자체로 거의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를 세우는 것은 결코 신약에서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이 한 가지 은사만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하여 공동의 유익이 아닌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Stott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무엇보다도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하나님의 말씀 편(엡 6:17)에 서 있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주장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들은 자신들도 성경을 기초로 해서 방언기도에 대해 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Lloyd Jones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우리는 오직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잠시 동안 성령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를 영적인 세계로 끌어올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특별한 언어입니다. 비록 그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고린도전서 14장4절 말씀처럼 자신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압니다. 이것이 2절(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이 은사를 소유했다면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도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바울 자신이 그런 기도를 매우 자주했으므로 이 은사를 소중하게 여겼던 고린도 회중에게 그들 중 누구보다 자신이 방언으로 더 많이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14, 15, 28절).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전 14:4, 5, 15, 17, 18절).  이들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Michael Green 역시 『I Believe in the Holy Spirit』에서 “방언은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방언이 제거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방언이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별로 놀랄 말한 사실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우는 방언과 교회를 세우는 예언을 세심하게 대조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해서 방언이 개인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다”라고 강조하고 있고(고전 14:7), Wayne A. Grudem도 방언기도에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사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고전 14:5, 15, 18, 39절). 기도로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서의 방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옳다면 우리는 비록 방언하는 사람의 마음이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영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지라도 이 은사로 인하여 덕을 세우게 될 것을 기대함이 마땅하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과 진리의 성령 편(요 16:13)에 서 있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자신들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방언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예배가 예언처럼 교회의 덕(고전 14:4)을 세워준다는 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의 기원을 찾는다면 창세기 4장부터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가 교회의 덕을 세워준다는 말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기도가 개인의 덕을 세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분쟁하는 고린도교회(고전 3:3)나 물고 뜨고 싸우는 갈라디아교회처럼(갈 5:15),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공동체에 덕을 세워주지 못한다면 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을 하셨습니다(시 29:2, 요 4:24).  그 이유는 먼저 그분이 우리를 통해 영광(사 43:7)과 찬양을 받기 위한 것이고(사 43:21),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고(엡 1:17-19), 선포되어지는 말씀(살전 2:13)을 들을 때마다 믿음이 자라날 뿐 아니라(롬 10:17), 그 예배를 통해 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 40:31).  한 마디로 영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출 20:24).  그렇다면 다른 은사와 달리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는데(고전 14:4), 성령께서는 과연 필요하지 않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을까요?(고전 12:7).  확실한 것은 여러 가지 다른 은사들은(고전 12:4), 교회뿐만 아니라(고전 14:26),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만(롬 15:18), 방언은 교회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귀중한 은사이기에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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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혀가 말리는 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겁이 나서 자신의 의지로 절제하고 거부했을 때 혀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에 일어났던 현상이 아내에게 다시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내는 그때도 역시 놀라 기도하다가 말고 응접실로 뛰어나와 묻기를 혀가 자꾸 말리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고전 12:10)를 주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기도할 때 혀에 너무 힘을 주고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한 번도 사모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은사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고전 12:7).  아내는 그때 성령께서 주신 방언(고전 12:11)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아내가 개인기도 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롬 8:14), 방언을 하면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고전 14:28), 생활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를 볼 때(갈 5:22-23),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아내가 방언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성경적이거나 귀신에게 미혹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방언을 점화시킨 것으로 보인 사건은 1900년 12월31일 Topeka, Kansas 신년 집회에서 시작되었는데 Stanley H. Frodsham의 『With Signs Following』에 의하면 벧엘 신학교 ‘기도의 탑’이라고 알려진 방에서 학생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세 시간씩 교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중보(적)기도를 드렸고 이렇게 학생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방언을 통해 여러 학생들에게 임했고 그 후 그곳에 있던 학생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Roger Stonstad는 『Spirit, Scripture and Theology』에서 당시 학생들이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 감리교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부흥사로 활동했던 이 학교 교장인 Charles Fox Parham이 El Dorado Springs, Missouri에 이어 Houston, Texas에서 “성령이 가장 두드러진 해석, 신학과 변증”이라는 설교를 할 때 그곳에 참석했던 William J. Seymour는 Parham의 설교를 받아들였고 그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Los Angeles에 있는 Azusa 거리에서 1906년 4월9일 월요일, 자신과 일곱 명의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받은 그는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버려진 감리교 교회에서 매일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Douglas J. Nleson은『The Black Face of Church Renewal』에서 그 결과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하심과 같았다고 말하면서 2년 후인 1908년에 이 운동이 거의 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순절교회의 탄생 과정은 아무런 반대가 없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Topeka의 운동과 Azusa의 부흥운동은 많은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의 의해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거부되었고 일부 칼빈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사이비 종교나 이단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루터교회 안에서는 이 운동을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으로 양분되었는데 특히 반대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인 방언에 대해 마귀적이라고 비난하면서 1909년 오순절 부흥 운동을 반대하는 “베를린 선언문”(Declaration of Berlin)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성령의 임재를 거부하던 독일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는 사라졌고 이렇게 조롱을 받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20세기에 들어와 오순절 지도자들 중에 한 사람인 Thomas F. Zimmerman과 오순절 운동의 대변인으로 평가받는 David J. Du Plessis에 의해 일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과 사귐을 갖게 되면서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통해 Van Nuy, California 성공회 사제인 Dennis Bennett으로 부터 시작된 제2의 물결인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 그리고 John Wimbur에 의해 일어나고 Peter Wagner가 명명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초교파적으로 확산된 제3의 ‘물결운동’(The Third Wave)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거나 칼빈주의 신학에 병적으로 집착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은사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이 사도시대 마지막에 중단되었다고 끝까지 주장하겠지만 오늘날 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중에 신비주의자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 이상 방언만이 최고의 영성이거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의 은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고전 12:30), 하나님을 떠나 죽어 있는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행 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외는 없고(롬 1:16),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복음이지(고전 1:18), 어떤 특정한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요 5:24).  물론 방언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개인의 경건생활, 즉 자기 덕을 세우는데 있어(고전 14:4), 방언만큼 소중하고 유익한 은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금지해야 될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방언을 하는 사람에 따라 남용이나 오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지혜롭게 관리만 잘한다면(고전 14:40),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습니다(고전 14:39).  그래서 우리는 Michael Gree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영성의 전부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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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드리는 반면에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주장을 하는데(고전 14:15), 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란(엡 6:18), 인도의 쿤달리니 명상처럼 어떤 초월적이고 몸에서 벗어난 탈혼적 체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신자의 영을 통해(고전 14:14),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 8장26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기도이고 또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살전 2:4), 성령의 마음을 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롬 8:27).  물론 이 기도와 관련하여 Wayne Grudem은 “우리의 탄식이 효과적인 기도가 되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이지 방언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다른 견해를 제시하지만, 아무튼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어디에서도 방언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제안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말임을 언급하고 있고(고전 14:28),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때문에 방언은 말하는 자의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며(고전 14:14), 또한 통역이 없이는(고전 14:28), 지혜롭게 사용하되 교회 공동체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고전 14:4-5, 15-18), 통역이 없는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회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덕을 세우기 위해(고전 14:26),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가 방언을 실제적인 ‘지상의 언어’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10-12절에서 제시된 ‘세상에 소리’에 대한 비유를 통해 방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 혹은 천사의 말로(고전 13:1), 표현한 것을 보면 방언은 지상의 언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Grant Osbome이 말한 것처럼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께서 합법적으로 주시는 정식 은사”이긴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통역 없이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의 ‘다른 방언’(행 2:4)과 고린도교회의 ‘방언’(고전 14장)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방언이라는 단어가 지상에서 다른 나라의 말, 즉 사람들이 이해하는 ‘구어’(口語)이며 ‘살아있는 언어’로 가리키는 경우는 단 한번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오순절 사건인 경우이고(행 2:4, 6-8), 신약성경에 그 외에 모든 경우를 살펴보면 그 단어는 누구도 모르는 "천사의 말/신령한 언어"(고전 13:1, 14:2)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서 나오는 ‘다른 방언’의 이적을 구원사적으로 보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언어의 혼잡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범죄로 오게 된 “바벨탑의 저주”(언어의 혼잡/창 11:7)가 오순절의 성령 강림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하나 되어 전 세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나라 말(모국어)을 들었기 때문인데(행 2:5-11), 이 사건을 가지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Calvin은 제자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로 청중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으로 “언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알 수 없는 언어라고 해석하는 Abraham Kuyper는 제자들은 한 가지 언어를 말했지만 듣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제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청취의 이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본문에 비추어 보면 설득력이 없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지(행 2:4, 6, 8), 그곳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말하는 자들이나 듣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해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사용되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성령의 능력으로 외국어 배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말(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그 순간에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Simon J. Kistemaker는 『The Testament Commentary』에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과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을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언어는 통변이 되어야 하지만 오순절의 청중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의 의미는 오순절에 제자들을 통해 사용되었던 다른 방언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 즉 고린도교회의 신령한 방언과는 다른 언어들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방언’이고, 고린도교회 방언은 공적으로 말할 때 통역이 없으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신령한 언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통해 예루살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행 2장), 사마리아에서는 빌립을 통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행 8장), 그리고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를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행 10장).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 두 곳은 방언의 현상이 동반되었고, 또한 방언이 사마리아와 관련하여 언급되지 않더라도 복음전파에 대한 기초 작업이 사도행전 1장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놓아졌다는 것입니다.  Lloyd Jones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의 방언은 바벨탑에 대한 처방이며 복음에 보편성에 대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 궁금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신자들에게 언급한(고전 14:21),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사 28:11)에 대한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Palmer Robertson『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을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저주를(신 28:49-50), 나타내는 징조라고 말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과 같은 철저한 심판을 옛 언약에 속한 백성에게 내리셨다면 그분은 새 언약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듣고 배척한 모든 사람들에게 훨씬 중대하고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라고 해석하고, Richard Gaffin 역시 이사야의 예언이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점령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하나의 거울로 삼은 것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심판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공중예배 시(고전 14:26), 이 원칙을 적용시켰는데 즉, 통역 없이 방언하는 것은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며 유다를 침범했던 이방나라들처럼 불신자들에게는 방언이 하나님의 은혜로 비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심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통역 없는 방언이 불신자들을 향한 심판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고전 14:22), 만일 외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고전 14:28).

 

사실 오늘날 은사 중지론자들은 방언의 목적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부한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표적의 은사로 이 방언의 기능은 1세기에만 유효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만일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몸의 유익에 기여하며(고전 12:7), 자기 덕을 세우는 방언(고전 14:4)에 대해 권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4:39).  그러므로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신자들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면 그것은 단지 그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모여 있을 때(고전 14:26), 누군가 방언을 하면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고전 14:27),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사야 28장11절의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불신자들을 교회 내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위험성, 즉 공적모임에서 통역 없이 사용되는 방언에 대한 남용/오용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지 방언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고전 14:18).  그러기 때문에 방언을 초대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오늘날 이 은사를 개인의 기도생활에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들 모두가 미혹의 영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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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유익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곳에서 찾거나 얻을 수 없는 진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사실 종교 개혁자들이 남긴 유산들 중에 위대한 것이 있다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과 사적 해석의 원리를 들 수 있고, Martin Luther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문맹자가 아닌 이상 스스로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적 해석의 문제로 자신의 이단성에 대해 1521년 4월17일 재판이 열렸던 독일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 로마 제국의 의회에서 자신의 글들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성서와 이성에 근거해 오류가 없는 한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판단이나 견해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에 Luther는 개인에게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비록 독일인들에게는 그가 영웅이었으나 보름스 의회를 통해 이단으로 비쳐진 그를 오늘날 용서받지 못할 이단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화된 현대 교회에 환멸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가 주장한 사적인 해석 원리가 극단적 주관주의를 허용하는 빌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것을 성경에 넣어 해석하려는 악한 성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성경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죄성 때문에 성경 속에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과도하게 부과하는 경향이 있는데 D. A. Carson은 『Exegetical Fallacies』에서 “해석자 자기대로는 본문의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자주 단순히 자기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고 있다. 만약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많은 의문들을 허용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많은 성경교사들과 목사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내던져 버리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배운 정통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읽거나 해석할 때 편견 없이 분문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해석할 때 기발함보다는 본문에 충실하려는 열망과 함께 공평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류에 빠지는 전문가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분야에 연결시키고 싶어 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실제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그 결과 그들은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신학자와 목사들 중에 성경이 다른 부분을 배제한 채 어느 한 부분만을 과장하거나 무절제한 사변과 주관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 논쟁이 심한 ‘방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실 성경의 권위에 대해 똑같이 고차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언의 은사는 더 이상 참된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방언을 부정하는 사람은 Athanasius, Augustine, Anselm, Luther, Calvin, Jonathan Edwards, Charles Spurgeon 등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방언을 인정하는 사람 주로 오순절 계통의 신자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증거라고 말하면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30절‘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는 구절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물론 성령세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성령세례와 상관없이 방언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 C. Sproul는 『The Mystery of the Holy Spirit』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역사상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 중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그 증거로 방언을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고전 14:22),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특징적인 심판의 표시로(사 28:11-13),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누군가 방언을 하면 성경적인 방언이 아니고 옹알거리는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Palmer Robertson은 『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에서 “방언은 징조이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사실상 방언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방언은 계시의 한 양식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는 통역된 방언이 예언과 똑같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교회는 교회의 보편적인 특징을 확립하는데 더 이상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방언을 통해 공급될지 모르는 새로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언된 말씀의 완전한 성취를 보존하기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적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한마디로 방언은 오늘날 더 이상 계속되는 은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즐겨 사용하는 아프리카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을 사용했던 안 했던 간에 상관없이 어떤 주장을 사용하더라도 방언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다. 당신에게 방언이 없다는 가르침이 무슨 매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 누군가 방언이 없다고 주장해도 방언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방언하는 사람들 중에 방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거나 방언하지 않는 사람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방언에 대한 해석을 할 때 Carson이 말한 것처럼 종종 “소름끼치는 허튼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 중에 ‘exegesis’(석의)와 ‘eisegesis’(자기해석)을 구분하지 못해 성경을 해석할 때 오류와 왜곡을 낳게 되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R. C. Sproul이 말한 것처럼 본문에 없는 의미를 본문 안으로 집어넣어 해석하려는 주관주의의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Lloyd Jones도 이런 문제를 놓고『성령의 주권적 사역』에서 “어떤 이가 성경의 일부분을 제거한다면 몹시 통탄할 만한 범죄이다.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방언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 시도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가 원할 때마다 방언을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방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는 언어이기 때문에(행 2:4),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방언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Wayne Grudem은 방언 말하는 것(고전 14:15, 18, 28)은 마음대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함).  따라서 모든 것을 분별하고 좋은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고(살전 5:21), 만일 방언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면(고전 12:7), 성령은 우리에게 자신의 덕을 세우는(고전 14:4), 이 귀중한 은사를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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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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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한지 4-5년이 지날 때쯤, 3년간 미국 남부지방 시골 동네에 살면서 처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가졌던 미국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교회를 다니면서 세 번 놀라운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예배 시간에 어떤 나이가 지그시 드신 목사님께서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시려고 할 때에 이백 명 이상의 성도들 가운데 한 여자 성도가 일어나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그때 담임목사를 비롯한 모든 회중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 여성의 방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 여성이 방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얼마 후에 남자 성도가 일어나 그 여성이 방언으로 말했던 것을 통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 성도가 한 문장씩 통역할 때마다 목사와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고 방언통역이 끝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광경은 성령의 은사로 문제가 많은 한국교회나 한인교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꿈같은 일이고 나에게 있어서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고 호기심에 눈을 뜬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모든 것을 보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예배가 무질서와 혼란 속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 속에서 화평으로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Gordon Fee는 공동체 안에서 방언이 지닌 역할에 대해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방언은 성령으로 감동된 말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7절과 11절 그리고 142절에서 분명해진다. 현대 교회 안에서 방언을 제자리에 두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즉 방언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결코 방언을 칭송하는 척하면서 비난하지도 않고 방언에 대해 경의감도 갖지도 않는다. 성령에 의해 능력을 부여 받은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바울은 방언이 적절한 자리에 있을 때 그것을 존중한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나(고전 14:14), 방언을 듣는 자들(고전 14:16),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통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고전 14:2, 14-5, 28),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공적인 모임에서의 방언사용과 관련해서 방언을 정죄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높이지 않은 것처럼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방언을 해서는 안 되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 통역이 되지 않는 방언은 공적인 모임 안에서 남용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Fee가 이렇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반면에 Richard Gaffin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방언에 대해 『Perspectives on Pentecost』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방언도 역시 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이지만 예언과 함께 교회 생활에서 철수되었다. 다시 말해 방언은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모든 다른 창설기의 은사들과 함께 철수되었고 더욱이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그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 해석적 근거가 없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시의 창설기 내지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21:42-43)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38-13절 말씀을 가지고 성문화(성경기록)가 끝났기 때문에 방언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가르침은 지나친 견해이며 오류라고 강력히 말합니다.  이 말을 쉽게 요약하면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28:11-12), 교회 창설기 때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중지된 은사이기에 그러한 가짜 영성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은혜의 방편인 말씀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Gaffin의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무질서하게 은사를 남용하거나(고전 13:1-3), 아니면 통역되지 않는 방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특히 초청받은 사역자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본인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할 때(고전 14:13), 그것이 무슨 대단한 영성인 것처럼 교인들도 같이 열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Michael Green은 이런 문제를 놓고 “우리는 방언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또한 그것을 영성 전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찾아보면 성령의 은사를 강조했던 사역자들이 초기에는 사역을 잘하다가 끝에 가서 비난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Tertullian이 가장 많이 지지했던 Montanus와 같은 사람은 말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일을 통해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금기시 했고 오직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년 역사동안 따돌림을 받았던 성령신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회복되기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대교회 실정이기에 누군가 방언을 한다면 그 방언 말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겠지만(고전 14:39),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되지 않는다면(고전 14:5), 무엇보다도 성경의 말씀처럼 그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해(고전 14:4), 사적으로 지혜롭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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