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어느 동영상을 통해 하늘에서 보석이 떨어지고 손바닥과 얼굴에 금가루가 생기면서 아말감으로 메운 썩은 이가 금니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두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주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현상은 비성경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반대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 간혹  자신의 이를 금니로 변화시킬 수 있든지 손 안에 금가루를 뿌려주고 그것이 금인지 아닌지 성분검사를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참고인 입회하에 어떤 조건으로 내기할 것을 제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비판할 근거를 찾기 위해 기적을 구하는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평생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기적을 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그의 질문조차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23:8),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기드온처럼 기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책망하지 않지만( 6), 마술사 시몬( 8:18-24)이나 바리새인처럼 기적을 구할 때 책망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16:1-4).  여기서 비판적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권사나 서리집사라는 직분이 성경적인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일학교나 주보, 혹은 설교하기 전에 종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금니나 금가루 현상을 바라볼 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의문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기적을 통해 무슨 일을 행하실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내에 일부 신비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예배 중에 무슨 특별한 기적과 현상들이 나타나면 자신만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서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과대망상증에 걸린 말씀에 깊이가 없는 영이 잘못된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금니나 금가루와 같은 것은 하나의 표적일 뿐이지(고전 1:22),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다가 어떤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3:16)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벧전 2:24).  이보다 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초자연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왜 이러한 기적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한 번도 기적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고( 5:37), 다른 하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기적의 은사들도 사라졌다고 확고하게 믿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우리가 확실히 유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단지 우리가 기적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기적의 은사를 철회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했던 야곱과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28:16).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주님은 자신이 행하신 기적들에서 교훈을 유도해 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그것이 말랐을 때 제자들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 기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21:18-22).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기적에 대한 응답 역시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위해 기적들을 행하시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적 목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적 목적들을 다시 세 가지의 범주로 나누면 첫째,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고, 둘째는 불신자 전도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며, 마지막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게 하셨을 때 그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했을 뿐 아니라 그를 회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5:1-11).  사실 시몬은 장모가 병에서 고침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4:38-39), 주님의 가르침도 이미 들은 적이 있었지만( 5:3), 그 분의 말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획량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기적은 그에게 있어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그분 안에 내재한 거룩하심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기적은 전도의 문을 열 때 사용 되었는데( 5:20), 복음서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기적이 일어난 후에 그 기적에 대한 소문은 온 땅에 퍼졌고( 9:26),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씀 듣기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9:31, 5:15, 4:30, 42, 6:2, 12:9-11, 17-19).  이와 동일한 일이 빌립의 사역 속에서도 일어났고( 8:6),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일으켰을 때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으며( 9:32-35), 도르가를 죽음에서 살려냈을 때에도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9:42).  더 나아가 기적은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해 주었는데( 5:36), 주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가치에 직접적으로 호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적들을 보이면서너희가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내가 행하는 기적들의 증거에 근거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14:11).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실제로 믿음으로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11:45), 이런 기적이 항상 믿음으로 인도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생기게 했으나( 12:11), 또 다른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 표적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믿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11:48),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주님과 나사로를 같이 죽일 것인가에 대해 살인을 공모하기도 했습니다( 11:53, 12:10).

 

이렇게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1:29-34), 사도들( 3:1-10)과 다른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이( 8:4-8), 1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면 이러한 기적들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12:28).  달리 말하면 성령에 힘입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증하는 기능을 가졌었다면 왜 그것이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능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런 기적들을 체험해 본적이 없는 잘못 가르치는 목사들에 의해서 혹은 신학교에서 잘못 배운 조직신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기적과 하나님 나라는 뗄 수 없듯이 기적을 확증하는 가치에 있어 지리적이거나 연대기적인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하고, 신학적으로 어떤 궤변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도 메시야가 영적이고 육체적인 치유가 행해질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적이 있는데( 35:6-7, 61:1), 이것은 다가오는 메시야의 나라는 나이, 성별, 지위에 상관없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짐은 결국 꿈과 환상과 예언하는 것이( 2:28-32), 어느 한 세대의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구약시대와 달리 이런 기적적인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주의 백성들 전체에 걸쳐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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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for all Nations의 창시자이며 복음 전도자 Reinhard Bonnke는 아프리카 Lesotho에서 선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Charisma and Christian Life』에서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유명한 설교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작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모임에서 설교할 때 사랑하는 주님이 기적들을 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시작했을 때, 곁에서 통역하던 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임재 속에 쓰러졌고 성령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눈이 떠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  Bonnke의 사역 속에서 이러한 기적들은 계속 일어났는데 그는 기적은 우리의 흥미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그분이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계약이라고 말하면서( 1:8, 18-19, 17-20), “기독교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적의 운동이며( 2:43, 3:1-10, 6:8, 8:6, 13:50-14:3, 고전 12:28-29), 신유의 기적, 구출의 기적, 변화된 삶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안다. 이러한 경이는 그분의 검증서이고 예수님이 불변하신 이상 그분의 능력과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까지 기적 행함의 은사는 교회에 남아 있다.라고 말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다른 세상 사이에 벽을 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특별히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은 오직 구속을 근거로만 기적을 행하신다.”

 

반면에 오늘날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B. B. Warfield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 기적들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고, 심지어 죄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239절에 나오는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불신자들이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표적과 기사들을 수반한 성령의 놀라운 능력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정말 죄가 되는가?” 그리고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고 건강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셨는데,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첫 번째 요구는( 12:38), 예수께서 마귀에 사로잡혀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직후에 나왔고( 12:22), 두 번째 요구는( 16:1),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이신 후에 나왔습니다( 15:32-39).  다시 말해 두 본문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표적을 요청받으실 때 이미 두 가지의 놀라운 표적들을 행하셨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누가 표적을 요청했느냐는 것인데, 마태복음 1238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고 164절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인데, 이들은 불신앙과 외식하는 자들이었기에 그 요청이 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려서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혹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것보다 더 인상적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기적은 없을덴데 그 이상의 표적을 또 구한다는 것 자체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불순한 의도가 마태복음 1228절에 대응하는 구절에서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고( 11:16), 표적을 구하는 두 번째 요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1, 8:11).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는지 왜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분명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이 있다면 이 기적만큼은 조작하거나 속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만약 예수님께서 이것을 행하신다면 그분이 메시야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치유 받은 눈먼 사람은 진짜로 눈먼 사람인지 혹은 그의 실명은 신체적 원인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사천 명을 먹였다는 기적에 대한 보고는 어떤 가벼운 속임수로 과장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들은 의심하거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의 속마음은 진정으로 표적을 원하지 않았으며, 단지 예수님께서 표적 보여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분에 대한 불신을 믿음이 없는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9:16, 22).  그러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에수님께서( 2:24), 그들을 꾸짖고 계신 것은 표적들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악하고 불신하는 마음에서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믿게 하신 것보다( 6:26),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적들을 행하셨던 적이 많았습니다( 8:1-3, 2:5, 10:52, 7:9, 8:48).  그러므로 만약 표적들을 소망하거나 심지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신약교회는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고.( 4:29-30), 이 기도가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지진을 수반하는 표적과 기사들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며( 4:31), 사도행전의 연이어진 표적과 기사들의 흘러 넘침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12).  더 나아가 기적적인 일들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방법과 올바른 이유들을 위하여 기적들을 구할 때 그분은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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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느 칼빈주의자들 못지않게 진리의 말씀만을 줄기차게 강조하던 나에게 영적체험을 하고 나서 성령의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켜 사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받은 은사들은 비록 성숙하고 잘 다듬어지는 과정이 없었지만 예배 때마다 교회 성도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집사님 한분이 다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일찍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집사님이 어느 동양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저 휘어지고 걸을 때마다 온 몸이 휘청거리는 저 사람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집사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병자를 데려오려면 감기에 걸린 사람이나 발목이 삔 사람 아니면 기도해도 쉽게 날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오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데려 왔을까 오늘 기적이 일어날까?”  이렇게 그 동양인 여성을 앉혀놓고 기도를 하는데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적을 간절히 구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치료되지 않았고 이 단어가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표준어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그날 ‘쪽팔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는 비록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이사야는 이집트와 구스에 대한 예표로서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냈고(사 20:3), 호세아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호 1:2), 엘리사의 유골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려냈고(왕하 13:21), 베드로의 그림자는 병자를 치료했으며(행 5:15), 바울의 몸에 있던 손수건과 앞치마는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행 19:12).  그리고 이것들보다 훨씬 더 이상한 일들이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누군가가 하나님의 보좌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 환상 속에서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를 닮은 네 가지 생물들이 있는데 각각은 여섯 개의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 차 있어 이 생물들이 하나님의 보좌 주변을 주야로 날아다니면서 거룩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계 4:6-8), 아마 주변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거나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환청에 시달리는 증세가 심한 병자로 판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이치에 맞는 성경적 환상이라고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들려오는 모든 이상한 것들을 다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일 4:1),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이상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든지 비성서적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할 것은 “과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기적을 구하는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린 것인데(출 10:2), 예를 든다면 세례요한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을 닫아버린(눅 3:18-20), 헤롯처럼 눈으로 보고 그냥 즐기기 위해서인지(눅 23:8), 아니면 마술사 시몬같이 개인의 능력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행 8:1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건전한 목적을 위해 기적을 구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은(요 2:11), 복음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요 4:29, 행 8:4-8, 9:35, 42, 히 2:4), 혹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마 14:14, 20:29-34, 눅 7:11-17), 복음사역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마 8:15, 행 9:36-43, 빌 2:25-30), 얼마든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9:8, 요 9:3).  사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요 6:1-5), 주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고(막 6:30-44, 눅 9:10-11),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면서(눅 9:1),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7-8).


뿐만 아니라 오순절 이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담대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막 16:20), 기적이 나타나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행 4:29-31).  더 나아가 룻다에 있던 제자들 역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다비다가 죽은 후 그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베드로에게 요청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구했던 적이 있으며(행 9:36-43), 야고보 역시 교회의 장로들에게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으면 서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라고 권했습니다(약 5:14-16).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기적적인 응답이 언제나 일반적인 방편, 즉 의술을 통한 치료보다(사 38:21), 더 낫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눅 5:31), 무엇보다도 특별한 도움을 위한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삼상 2:6-7).  사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히 4:16)라는 말씀처럼 응답에 대한 약속을 주신(시 91:15),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긴 과부의 기도처럼 응답해 주실 때까지 간절히 구해야 하겠지만(눅 18:1-8),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기적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법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지 다윗처럼 신중하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삼상 23: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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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큰 재앙과 그 결과로 일어난 그의 백성들을 그 나라로부터 인도해 내심을 묘사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었던 표현이고(신 4:34, 6:22, 7:19, 23:9, 26:8, 34:11, 느 9:10, 시 135:9), 신약성경에서도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행 2:22)과 사도들(행 2:43, 14:3, 15:12, 롬 15:18-19:2, 고후 12:12), 그리고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의 사역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활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표적’과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고 경탄하게 만드는 ‘기사’는 기적을 행하기 위한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묘사하고 있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그저 한두 가지의 기적이나 치유가 일어나는 문맥에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발생했던 장소, 예를 들면 사도들이 백성들 사이에서 손으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행 5:12),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헬라파 유대인 빌립(행 6:5)이 많은 기적을 행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표적과 기사들은 복음의 선포와 관련하여 신앙부흥이 한창일 때 일어났는데(행 2:43, 5:12, 6:8, 14:3), 이 기적들이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제외한 표적과 기사를 행했던 사람들 중에 사도가 아닌 일반 평신도인 스데반과 빌립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반해 B. B. Warfield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은사들이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논의를 널리 보급시켰는데 『Counterfeit Miracles』에서 “특별한 카리스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유가 아니라 소수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있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기록을 볼 때 매우 분명하다. …사실상 사도의 교회나 혹은 사도 시대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은사들은 분명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은사들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인정된 대리인들로서 사도들 자격 인정물 중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은사들의 기능은 그들을 사도의 교회에 분명히 한정시켰고, 사도들과 함께 필연적으로 사라졌다.”  쉽게 말하면 은사의 목적은 사도들을 믿을만한 교리 선생들로 확증하는 것이었고 사도들이 죽었을 때 그 은사들도 그들과 함께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표적과 기사’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경우에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행한 많은 기적들을 말하고 있는데(막 6:7, 행 5:12, 19:11-12), 솔직히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스데반과 빌립이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행 6:5-6), 이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행 6:8, 8:5-8).  여기서 질문할 것은 Warfield와 그의 신학적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표적과 기사의 주요 목적이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이었다면, 왜 사도가 아닌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Warfield와 오늘날 그의 계승자들이 Jack Deere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사도들이 안수했기 때문이고(행 6:6),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의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들은 아직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표적과 기사들이 사도들을 확증하기 위해 의도되었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데반과 빌립이 기적들을 행해야 할 이유는 없을뿐더러, 만약 사도들 외에 어떤 사람이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도록 허락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도구로서의 표적과 기사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기서 은사중단론을 가르치거나 주장하는 목사/신학자들 가운데서 이 문제에 대해 거의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이 궤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행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은사들의 목적을 사도들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같은 부류인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인용한다면 “사도직과 연결되어 있던 은사들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교회생활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모순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 두 제자와 달리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속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교회의 설립자입니다(엡 2:20).  그리고 대부분의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는데(행 1:12-14), 여기서 궁금한 것은 “만약 소수의 사람만이 교회를 세우거나, 제자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도 끝났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죽었을 때 교회를 세우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은(마 28:18-20), 세상을 복음화하고 가르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4:47, 행 1:8).  그리고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허락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눅 10:17-19), 만약 소수의 사람들만이 기적적인 은사를 받거나 이 은사가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본문구절은 상당한 모순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해 기적을 행하도록 의도하셨다면, 왜 사도가 아닌 칠십 인에게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인데,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었고 사도들과 친분을 쌓거나 사도들 집단의 공식적인 멤버도 아니지만 귀신을 내어 쫓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막 9:38-39).  이것은 기적이 사도들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다는 이론에 대한 중요한 예외가 되는데, 한 마디로 초자연적인 사역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스데반과 빌립이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다섯 사람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행 2:43), 다른 사도들 역시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5:12).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아나니아는 기적적인 사역을 한 비사도적인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비교적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율법을 헌신적으로 지키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행 22:12).  그가 사울에 대한 사역에서 그는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고(행 9:10-18), 이외에도 사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은 아나니아의 손에 의해서인 것처럼(행 9:17), 사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열 두 사도가 아닌 평범한 사람인 아나니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Warfield와 그의 추종자들이 내세우는 이론들, 즉 사도들만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기적들이 사도의 사역을 확증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신학적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허상이고, 더 나아가 사도행전이나 그 밖의 어디에서도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로지 사도들을 통해서만 주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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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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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H. Kraft는 기적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다.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치유, 귀신축출, 천사의 보호,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을 통한 계시와 인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 죄인을 용서하는 일,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거나 세상사를 염려하지 않는 것, 세상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지 않는 것 등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세상의 관점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적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실재에 있어서는 서양적인 시계관이 그렇게 하듯이 우주를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도 없으며 영적인 특면을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것과 같은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적의 개념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사물을 보고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기준에 따라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의 저서 『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나오는 이 말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우리가 소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리를 두고 계신 어떤 신비한 영역에서의 비정상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적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해 놀라운 기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의 선봉에 서있는 John MacArthur는 『Charismatic Chaos』에서 “성경 속에서 사도시대의 기적들이 다음 세대들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는다. 혹은 성경은 신자들이 성령의 어떤 기적적인 표현들을 구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말을 Richard B. Gaffin Jr의 말로 다시 인용하면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지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는 달리 성경에 의하면 은사들은 교회를 강화시키고(고전 14:4), 각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고(고전 12:7),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고전 12:31, 14:1,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MacArthur는 다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기적적인 은사들이 신자들의 강화를 위해 주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가? 아니다. 사실상은 진실은 정반대의 것이다.”  사실 MacArthur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가 교회를 강화하는 목적에 대해 성경적인 뒷받침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솔직히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뒤집을 만한 관련된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7절과 14장3-5절에 관하여는 결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모호한 신학적인 추론들이나 단순한 주장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경의 진술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어떤 내용을 읽거나 고금을 막론하고 교회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도 그 때문에 우리가 은사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거나(엡 4:13), 진보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일에는 진리의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표적과 놀라운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고(막 16:14-20),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같이 사역하면 안 된다는 명확한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요 14:12), 그분이 하신 일들이 바리새인처럼 눈에 아무리 낯설게 보일지라도(마 12:22-24), 그 일을 우리가 마땅히 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행 5:12)과 예수님의 제자들(행 6:8, 8:6)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전하는데 있어 능력 나타남과 기적적인 은사가 필요했고(행 8:12-13), 교회의 탄생, 즉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는데 필수적이라면(막 16:17-20), 오늘날처럼 죄악이 넘쳐나는 믿음이 없고 패역하고 악한 세대(마 17:17)에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엡 4:13),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더욱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요 14:11),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에게는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확실한 표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행 9:36-42).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유대인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을 했고(행 9:29),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행 17:1-4).  구약성경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을 전도할 때(행 17:16-18), 바울은 어김없이 이런 방법을 사용했지만(행 18:19), 반면에 이방인을 다룰 때는 그들이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롬 15:18), 말씀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Palmer Robertson은 William Carey의 말을 인용하여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사람 마음 가운데 확신하는데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때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한 것인데(행 8:4-8), 그 사례들을 찾아본다면 먼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일어날 때(행 14장)와 귀신들린 여종 사건(행 16장),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들 앞에서 손수건을 가지고 희한한 능을 행할 때였습니다(행 19장).  이렇듯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에게는 다른 권위와 증명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고전 14:24-25).


D. A. Carson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모든 보고는 허위이거나 마귀적인 활동의 열매이거나 심리적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익하다.”라고 상기시켰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은사들이 1세기에만 한정되어 있다거나 지금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적인 은사들이 사라졌다는 또 다른 이유로 은사가 기록되지 않은 목회 서신이나 바울의 후기 서신을 내세우면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전체로 취급해야 할 것과 신약성경의 기록의 모든 배경은 사도행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교리를 서신서 위에만 세워서는 안 되고 서신서들은 반드시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타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그때나 지금이나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고(눅 17;17), 분명 타락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다면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고전 15:1-4),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고전 12:3).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더 확실하게 증거 하기 위해서는 기적적인 은사들이 반드시 필요하고(막 16:20), 이렇게 교회 속에 나타난 은사들은 결코 진리의 말씀을 희석시키거나 복음의 능력을 상실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고전 2:4).  그 이유는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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