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감리교 신학대학 변선환 교수와 총신대학 박아론 교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변 교수는『월간목회』를 통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논박했습니다.  변 교수는 다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박 교수 역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재차 맞섰으나 더 이상 논쟁이 전개되지 않고 중단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D. Bonhoeffer의 영향을 받은 변 교수는 현대 그리스도인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전통적인 종교의식, 즉 예배와 기도와 각족 모임을 통해서는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세상의 삶속에서 주님의 고난에 대한 참여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박 교수는 기독교가 세상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지만 세속을 기독교와 동일시하는 세속교회, 또는 인류주의 교회관은 성경에 위배될 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 대다수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구원을 어느 한 측면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그 전 과정을 각 단계별로 나누어서 취해진 진술 방법을 ‘구원의 서정’이라고 부르는데, 물론 성경이 구원의 서정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 루터교회, 알미니안 교회, 심지어 장로교회 안에서도 학자들 간에 이 견해에 대해 다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단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엡 2:8), 육체의 질병(마 9:21)과 귀신에게 놓여남을 받는(눅 8:36), 것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악, 즉 전쟁(출 15:2)과 고통(시 34:6)과 원수들(삼하 22:36), 그리고 포로(시 106:47)와 사망(시 6:4)과 죄(마 1:21)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으로 “구원은 총체적인 죄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내놓으신 확실한 해결책이고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에 기초한 과거의 사건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딛 3:5), 별도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현재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으며(고후 5:17), 장래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벧후 4:13).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소유하고 체험하지만 동시에 장래의 완성을 대망하는데(빌 2:12),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롬 8:21).  이같이 바울은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종말, 즉 삼중적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일련의 구속사건으로 이루어진 복음을(고전 15:1-4),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의하고(롬 1:16),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벧전 1:18-19), 믿음에 의해서라는 진리를 선언했는데(엡 2:8-10), 이것은 바울신학의 핵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구원의 근본조건이 믿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구원론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믿음으로 시작한 구원이(엡 2:8), ‘선행’으로 완성되어야 하며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확산으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열렸던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끝에 사람은 성화은총을 통해 내면적으로 칭의를 얻으며 값없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협력할 때만 선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믿음을 통해서만 구속함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로마가톨릭주의를 대변하는 Ludwig Ott는 막연히 믿는 신앙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가톨릭교회의 가르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교리적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처럼 가톨릭의 입장은 칭의를 전가된 의가 아닌 주입된 의, 즉 사람의 내면을 성화시키고 새롭게 변화시킨 ‘의’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근거해서가 아닌(딛 3:5),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롬 3:21-22),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 것(롬 8:1)과 달리 단순히 죄사함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와 더불어 태어났음을 믿지만(롬 5:12),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문제에 대해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는(롬 10:9-10),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어떤 악한 생각이나 정욕(막 7:21-23), 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본죄’(本罪), 혹은 ‘자범죄’(actual sin), 라고 말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이 죄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하나는 대죄(mortal sin), 다른 하나는 소죄(venial sin)라고 부릅니다.  먼저 ‘대죄’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영혼으로부터 빼앗아 가는 죄로 구속의 은총을 잃게 하는 것으로 이유 없이 성일이나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 술에 만취되는 것, 물건을 절도하는 것, 다른 종교서적을 읽는 것, 등을 말하고, ‘소죄’는 대죄처럼 심각한 죄가 아니며 영혼을 죽이지 않고 구속의 은총을 빼앗기지 않는 가벼운 죄로 험담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 과식하는 것, 싼 물건을 훔치는 것 등으로 이 소죄가 계속되면 대죄(大罪)/중죄(重罪)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톨릭대사전에 의하면 인간은 ‘성세성사’(聖洗聖事)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으며 성세성사를 받은 이후 범한 죄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차이는 ‘성례’(sacrament)인데, 가톨릭에서는 세례(마 28:19)와 성찬(눅 22:19-20) 이외에도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견진’, ‘고해’, ‘종부’, ‘신품’, ‘혼인’ 등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성례 즉, 성사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 성례 자체가 은혜를 준다고 가르치기 때문인데,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고 성사 없이는 하나님과 상통할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사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구원에 대한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 점이고, 개신교에서는 성경의 교훈 밖에 아무것도 믿는 바가 없는 반면 가톨릭교회에서는 온전한 성례로 인정받을 수 없는 다섯 가지를 더 추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와 성찬을 명하신 것은 성경을 통해 쉽게 증명할 수 있지만(막 16:16, 고전 11:26), 그 밖에 다른 성사들을 명하신 것을 성경적으로 증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엡 2:8), 결코 어떤 외적인 행위나 종교적인 형식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말처럼 성례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 이전의 성도들과(창 17:10), 십자가 위에서 죽기 직전에 회개함으로 성례를 받을 수 없었던 강도의 구원에 대해 결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눅 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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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Mariology)은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교리학으로 그녀의 인격과 구속 계획, 특히 성육신에 관련하여 그녀가 차지하는 역할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간략하게 핵심을 정리한다면 ① 마리아는 예수 출생 후에도 처녀성을 잃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일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고 죄 없는 삶을 일평생 살았다. ③ 마리아는 지상에서의 생애를 마친 후 몸과 영혼이 승천하였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⑤ 마리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고 구속에 있어 예수와 함께 간접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개신교의 견해와 전혀 다른 구속에 대한 원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이고 이들은 이것을 ‘공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옹호하고 있는데, 사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됨에 따라 ‘이교’(異敎)의 여신신앙들이 교회에 들어와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4세기에는 ‘영원한 처녀성’ 주장과 431년에 개회된 에베소공의회에서 그녀를 ‘천주의 모친’으로 승인했지만 이런 마리아 예찬이 가톨릭에 의해 과도하게 행해지도록 된 것은 1854년 ‘무죄수태’ 교리와 1950년 ‘성모승천’을 교리로 선언함으로 더욱더 심화되었습니다.  비록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영예로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눅 1:26-35), 문제는 교회에서 그녀의 상(像)을 중심으로 발전한 숭배에 대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명분이 역사나 신학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에서는 이를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적 근거로 마 1:16, 13:55, 눅 1:27, 43, 요 2:1-5, 19:25, 행 1:14, 등을 마리아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들로 사용하는데, 그러나 성경은 그녀에게 돌리는 영광과 역할에 대하여 지지하는 곳이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침묵하고 있고 오히려 그런 주장에 반대하는 증거를 막 3:33-35, 눅 1:47, 2:49, 11:27-28 등에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및 유년의 기사들 외에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마태는 주로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하면서(마 1:16), 예수님이 잉태된 것은 두 사람이 정혼을 하되 아직 결혼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일임을 분명히 밝혔으며(마 1:18-25),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진술은(마 1:25), 두 사람이 그 후에 정상적인 결혼생활 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처음 두 장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라는 아기를 낳을 것을 ‘고지’(告知) 하였고(눅 1:26-38), 여기서도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한 것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령이 잉태케 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독특할 역할에 자신을 기꺼이 드리는 모습과 천사가 그녀를 가리켜 은혜를 베푸는 자가 아닌 ‘은혜 받은 자여’라고(눅 1:28),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간 일(눅 1:39-56)과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일, 즉 목자들이 천사의 명령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한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눅 2:1-20), 이어서 할례를 받은 일(눅 2:21)과 성전에 데리고 가서 공헌한 일을 언급하고(눅 2:22-24), 성전에서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수님 때문에 칼이 그녀의 영혼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눅 2:25-35).  마지막으로 열두 살 때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눅 2:41-51), 여기서 마리아는 아이 예수에게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깨닫지 못했다는 이유로 애정 어린 꾸지람을 듣는데(눅 2:41-51), 비슷한 종류의 꾸지람이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에도 나오고(요 2:1-11), 그 밖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사 중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간간히 기록되었을 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혈육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3:31-33, 눅 11:27-28).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리아가 곁에 있었던 일(요 19:25-27)과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성경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직 사도행전 1장14절에만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마리아를 흠 없는 성모로서 높이는 것은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내포할 뿐 아니라(출 20:4),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가톨릭에서 성스럽게 높이는 마리아가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 대사전에 의하면 마리아에 대한 기도문에서 “평생 동정이신 성 마리아”를 처음에는 두 번씩 외웠고, 1986년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에 의하여 두 번씩 되풀이하던 것을 지양하고 한번만을 외우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평생토록 남자와 성관계를 한 번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라고 선언했지만 성경은 마리아가 일평생 동정녀로 살지 않았고 많은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고 있는데 특히 마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네 형제들과(마 13:55), 그의 누이동생들이 나옵니다(마 13:56).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이들은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마 12:46-50), ‘다른 친척’ 혹은 ‘이종사촌’이라고 공식적으로 가르치는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지극히 납득하기 어려운 가톨릭만이 가지고 있는 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았다는 교리 역시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섭리해서 원죄 없이 태어난 특전이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성경에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이 일절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사도들의 구두 가르침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간접적인 근거로 창세기 3장15절누가복음 1장28절을 들고 나오지만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다고 여겼으나 죄의 흔적이 없다고는 보지 않았고, 비록 1854년 교황 Pius 9세는 주교들과 신학자들의 협의를 거쳐 “동정녀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의 아무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라고 선포했지만, Thomas Aquinas는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부정했으며 무엇보다도 성경은 온 인류에 원죄가 없고(시 51:5, 롬 5:12), 자범죄가 없으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히 4:15).  한마디로 마리아가 원죄가 없고 죄 없이 거룩하게 살았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톨릭에 의해 선포된 마리아가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는 ‘몽소승천’(夢召昇天) 교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성모승천을 말하는 것으로 이 교리는 4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지주의적 신약외경에 처음 나타나지만 7세기경에 이르러 동/서방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승천축일을 정해 지키기도 했으며 마침내 1950년 교황 Pius 12세에 의해 마리아는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까지도 승천하였다고 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신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은 오순절 이후의 마리아의 생애에 대해 믿을만한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핵심적인 이유는 그녀를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영원토록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천상천하의 모후가 되고 그 모성이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선언했는데, 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모친인 것은 맞지만(마 12:46), 천상에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요 8:58),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에(빌 2:6), 가톨릭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마리아의 구원의 중보성 그리고 기도의 유효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들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사건을 내세우면서 마리아는 참된 중개자인 예수님을 낳은 모친이 되는 만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밀접하고 탁월한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녀가 주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 문제를 위해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대사전을 인용한다면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및 지상생애에서 이룬 구속행위 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세말까지 그의 구원활동에 온전히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 말해주듯이 초기 기독교 교부 중의 한 사람인 Epiphanius가 마리아를 숭배하는 이단들과 싸웠고, 5세기에 들어서는 Nestorius 논쟁을 계기로 보편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Theotokos’ 즉, ‘하나님을 낳은 자’로 묘사했는데 이것이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 개념으로 대두되었고, 이런 개념들은 그녀의 무원죄 잉태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톨릭 주장에 의하면 하와(인류 타락의 원인)와 마리아(인류 구속의 원인) 간의 대조는 그녀가 구원경륜에서 중재역할을 맡고 있다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섬김과 동시에 마리아에 대한 개념이 대중신앙에서 많이 강조되었고 아울러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개념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해괴망측하고 이상한 교리가 오늘날 가톨릭을 대변하는 것은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버금가는 천상천하의 모후로 추대하려는 잘못된 사상으로 성경은 이를 지지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며 단지 이 교리들은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발로’(發露)일 뿐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교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중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으며(딤전 2:5),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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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성’이란 계시된 교훈에 오류가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것은 세계 공의회들과 공인으로서의 교황은 신앙과 윤리를 가르칠 때 오류에서 면제된다는 내용으로 이 결정은 가톨릭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마태복음 16장18절과 누가복음 22장31절 그리고 요한복음 21장15절 말씀을 근거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재확인 되었고 또한 교황이 그 직권을 가지고 말할 때 특별한 방법으로 이 권위를 지닌다고 말하며 B. C. Butler의 『The Church and Infallibility』와 George Salmon의 『The Infallibility of the Church』에 의하면 교황의 무류한 범위는 “신적인 믿음의 퇴적물만큼이나 넓어서 거룩한 위탁물로 간직하고 충실히 해석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이 무류성을 교회의 임무에 적용시켜 규칙을 결정할 경우 그와 같은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처럼 가톨릭에서는 교황 무류설을 변증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한때 가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교황 무류성 교리를 비판하다가 바티칸으로부터 가톨릭신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독일 튀빙겐대학교의 Hans Küng은『Infallible?: An inquiry』에서 개신교회의 논쟁과 같은 열정으로 교황 ‘무류성’(無謬性)의 허구를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이 교리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그 대신 교회의 ‘무흠성’(無欠性)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눌 때 17절 이후에 나오는 구절부터 가톨릭교회와 의견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을 가톨릭에서는 베드로가 맨 처음 교황에 임명되었고 그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교리의 근거로 두면서 신약에서의 베드로와 역사에서의 로마교회의 지위라는 근거 위에 정립한 ‘교황 수위권’ 즉, 가톨릭에서의 교황은 사도들 중 수위인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로마의 대주교이고 교회 규율과 정치에서 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 문제에서도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를 관한할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태복음 16장18-19절 말씀을 로마 지교회의 최초 주교로 베드로가 임명되었고 그가 로마에서 그의 후계 주교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인계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해석합니다.  Water M. Abbott가 쓴 『Documents of Vatican II』의 글을 인용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교훈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 개인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도록 허락하셨고 천국의 열쇠도 그가 홀로 갖게 하셨으며 모든 양떼의 목자로 그를 임명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가톨릭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반석’이라는 단어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인데 비록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한 믿음과 통찰을 계시 받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첫 번째 사람이며(마 16:16-17), 초대교회의 지도자와 대변인으로서 그의 역할을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행 1:15, 2:14), 문제는 이 문맥이나 다른 어떤 서신서에서도 그의 사도직 계승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를 최종 권위자로 여겼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세우고 25년 동안 로마의 주교로 있었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성경적/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고 전승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로마에서 대감독이 되어 선교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전해지지만(요 21:18),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는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주장하는 부류와 로마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행적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며 많은 내용을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인 연구는 불안전한 학문이고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연구가 아니라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에서 오순절 이후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베드로가 취했던 사도(벧전 1:1)적 권위는 교회를 세울 모든 신자들의 기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교회 설립에 관해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을 반석으로 교회가 지어졌다고 말하며(벧전 2:4-8),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고(엡 2:20),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3:11).  그리고 마태복음 16장19절에 ‘매고’ ‘푸는’ 권세 역시 ‘토라’ 해석에 기초한 행위를 허락하거나 허락지 않는 랍비적 개념으로 여기서 매고 푸는 권세는 가톨릭의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열 두 제자(교회전체)에게 위임된 것이고(고후 5:18), 그들이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할 때에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막 4:1-9),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입니다(막 16:15-16).  요약해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롬 10:9), 즉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신앙 고백한 것과 동일한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고(요 20:28), 또한 ‘참된 교회’란 어느 사람이 세운 종교나 단체가 아니라 오직 반석이시고 모퉁이 돌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으며(엡 2:20),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마 16:15-16),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마 18:20)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교황의 수위권’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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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기 교회의 시작과 확장에 대한 상세한 이해는 주로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후 33년 유월절에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것으로 여겨지고 십자가에 처형되던 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은 오순절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강림사건인데 이로 인해 어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점화시킨 그리스도 복음의 불꽃이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빠른 속도로 로마까지 퍼져 나갔고 그 당시 로마제국에 있던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끼친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 그리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누어 불렀지만 11세기까지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는 언어, 철학적 경향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수장(首長)이 없이도 하나의 가톨릭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은 2세기 초 안디옥 감독이었던 Ignatius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 곳에는 가톨릭교회가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2세기 말에는 각 지역 개교회에 대조되는 보편교회이자 이단적 종교집단들에 대조되는 정통이라는 의미로 ‘가톨릭’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이라는 용어에 대한 좀 더 제한적인 이해는 로마교회와 로마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교회들을 분리시켰고 교회사 전체를 통해 주요한 분열이 세 번 일어났는데 먼저 주후 553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본성을 중심으로 한 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입장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단성론적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들 간의 분열과 주후 1054년에 권위의 구조를 중심으로 한 서방(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일어났던 분열, 그리고 1517년 ‘양성론’(칼케돈신조)를 지지하는 서방교회 안에서 일어난 ‘항의자’(신교)라 일컫게 된 기독교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사이의 분열을 둘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교회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지만 당시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초기 기독교 300년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함께 예배드리고 일하며 기도하고 생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Constantinus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후 445년에 이르러 교황 Leo가 지도권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지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라고 선언했을 때 이러한 주장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섬기는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 그리고 ‘개신교회’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들 가운데 가톨릭에서는 자신들의 성경해석에 근거를 두고 “가톨릭교회 외의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정말 “가톨릭교회만이 유일하고 참된 교회인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신자들이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읽을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지만 그전에는 개인이 성경을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성경해석에 있어 가톨릭 교권만이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었던 James C. Gibbons는 『The Faith of our Fathers』에서 “교회는 성경 해석자와 보관자를 성스럽게 지정했으며 하나님은 살아있는 교회의 권위를 떠나서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법칙으로 삼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가톨릭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하나님 말씀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오류를 고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부여하신 교정 수단을 스스로 박탈해버린 것으로 Hans Küng의 말을 빌리면 자신들이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이 어떤 권위들에 의해서만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에 의해서도 읽혀지고 해석되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Martin Luther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셨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신약에서 알려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각 사람이며(요 5:39), 그리고 각 개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공부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권면합니다(골 3:16).  물론 성경을 배우는데 있어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행 8:30-31), 문제는 예수님께서 탁월한 성서학자나 목사, 그리고 가르치는 자들이 완전무결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약 3:1), 이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기는 하되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D. A. Carson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의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자신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해석하거나 어느 한 부분만을 주관주의적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마 23:15, 눅 11:52), 가톨릭에서도 신자들에게 성경해석 권한을 주지 않고 교황의 지상권을 인정하는 두 번의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교황의 권좌 즉, 사도계승의 최고 권위로 그가 신앙과 도덕에 관계되는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절대적으로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신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류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전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마태복음 16장18절에 기록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구절에 기반을 두고 잘못된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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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의사이자 음악인이며 아프리카 내전 국가인 남부 수단의 딩카족 마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백분 활용한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울지마 톤즈』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의사로서의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버리고 문명사회와 동떨어진 내전지역에 가서 10년간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도중 대장암 선고를 받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톨릭에서 또 한 분 있었는데 노벨 평화상을 받은 45년간 Kolkata, India에서 빈민과 병자, 그리고 고아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한 Mother Teresa로 그녀는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인데 그녀가 죽었을 때 인도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였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가톨릭을 대변하는 사람 중에 한분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저널리스트 Christopher Eric Hitchens는 『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에서 Mother Teresa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증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녀는 성녀가 아닌 종교적인 사업가라고 혹평을 하고 가톨릭에 의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섬김과 헌신 무엇보다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감동이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위해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솔직히 제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톨릭 신자와 달리 얼마 전 어느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수는 좋지만 기독인들은 싫다”라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답을 했고,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Mahatma Gandhi“나는 예수를 좋아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로 한국 갤럽조사에서도 비종교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교로는 불교와 가톨릭 그리고 가장 선호하지 않는 종교로 기독교를 뽑았는데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이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이유를 “타종교에 대해 너무 배타적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사랑한다”,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다”, “헌금을 지나치게 강요한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교회건물에 집착한다”, 등등을 말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사실 비종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은 개신교보다는 타종교 특히 가톨릭을 더 선호하는 입장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고 배타적인데 예를 들어 단군상을 부수거나 절간에 가서 기타 치며 찬송을 부르고 땅 밟는 행위 심지어 같은 교인끼리 교회건물 문제와 헌금문제 혹은 교파간의 신학적인 문제를 놓고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볼 때 종교(기독교)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기독교인들을 볼 때마다 위선적이고 부정직하며 너무 모순된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이 가톨릭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가톨릭은 타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사제들끼리 교회건물이나 헌금문제로 싸우거나 법정다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가톨릭에 대한 국민적 신망은 높은 반면에 개신교에 대한 국민적 지탄이 하늘을 찌르고 안티기독교인들이 횡행하는 것은 바로 ‘언행 불일치’와 “삶의 열매”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톨릭에서도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교리적으로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고 예를 들어 권위의 문제에 있어 개신교는 성경만을 절대적 지침서로 사용하지만(딤후 3:15-17, 요한일서 5:13, 신 12:32),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구원에 있어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롬 3:24, 5:1, 10:9-10, 엡 2:8-9), 믿고 있지만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신덕’(믿음)과 선행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목회자 중에 어떤 이들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톨릭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될 것이고(욘 2:9), 개신교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더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마 7:21).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학/신앙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사 55:8).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약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정통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고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단이고 그들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나 많기 때문에(눅 13:22-27), 개신교가 정통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마 13:24-30), 가톨릭에 교리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딛 2:11).  그러기 때문에 확실히 드러난 이단들 외에 구원의 문제를 놓고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하고(시 3:8), 특히 그리스도인은 타종교에 대해 눈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판하거나 적대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5).  잠언에 보면 미물인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얻으라고 하는데(잠 6:6), 하물며 타종교에서 모범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면 비판적인 생각을 갖기 전에 먼저 그들의 모범된 삶을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기는 타종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성전을 찾은 세리처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고(눅 18:1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행실과 언행을 통해(벧전 3:16), 하나님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 모독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롬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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