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의 교회로 나타나는데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는 반면에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고 또한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가 있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틀에 매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는 에베소 교회와 발람의 거짓 교훈을 받아들여 세속주의로 물들어 버린 버가모 교회 그리고 많은 일들을 했지만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들어와서 교회 전체가 음행에 빠져 버린 두아디라 교회, 이미 죽어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데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없고 칭찬만 받은 교회로 핍박을 받아가면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 승리한 교회들입니다.  오늘 보게 될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무섭게 받은 여러 가지 중병에 걸린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아무런 형식이 없이 그냥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분명하고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계시록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항상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에 대한 모습은 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상황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셨는데 그것은 주님이 나타나신 모습을 통해 그 교회의 신앙상태를 한눈에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교회에서 무슨 일과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데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계 3:14).

 

하나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만이 진실하시고 참된 증거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거짓된 진리와 거짓된 증인들이 많이 있지만 참된 진리를 증거 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요 14:6).  주님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번도 참된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지 않은 교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을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창조의 근본’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 되시며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골 1:15-18).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진정한 다스림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왜 존재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참된 진리와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라오디게아 지역에 분명히 교회가 존재하고 있기는 한데 이 교회는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여러 행사와 활동들이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교회 안에 함께 하시도록 초청되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기록한 이유는 오늘날도 그러한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세상 것들이 주님의 눈에는 가증스럽고 추한 것들 밖에 없어 입에서 토하여 내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인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이며 어떤 점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경우인데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어려운 환난이나 심한 핍박을 받은 적이 없고 그렇다고 거짓 선생을 통해 잘못된 이단적인 가르침이나 이세벨 같은 음란한 여자와 놀아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비위가 상하신다고 심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계십니다.  이런 표현이 본문에 적절한 것인지 모르지만 주님이 음식을 잘못 드신 것도 아닌데 이 교회를 바라볼 때 토하고 싶을 정도로 구역질이 났습니다(계 3:16).

 

◈ 본문에 중요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차다’는 말과 ‘덥다’라는 말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 수도 있고 아니면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벧후 3:16).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정도의 당시 최고의 선생들이지만(마 23:2), 교인 하나만 생기면 배나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보낸 사람들입니다(마 23:13-15).  본문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으려면 확실히 믿고 믿지 않으려면 아예 그만두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지 않으려면 그만두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기 여기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기회를 주시고 타락한 영혼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벧후 3:9).

 

여기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한 지리적인 조건을 이해하면 쉽게 ‘차다’와 ‘덥다’가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북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스’라는 뜨거운 온천이 있어 많은 피부병 환자들이 그곳에 와서 온천욕을 즐겼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 8000피트가 넘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오염되지 않은 물로서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심으로 기갈을 해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에라볼리스에서 내려오는 뜨거운 물은 온천하기에 좋은 물이었고 또 반대로 동편에서 내려오는 물은 아주 차가워서 골로새 사람들의 더위와 갈증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물이었는데 라오디게아는 두 극단 중간에 위치하여 미지근한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문에 ‘차다’라는 말은 높은 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처럼 전혀 감각이 없는 냉냉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전적으로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배척하는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덥다’라는 말은 온천물이 펄펄 끊듯이 뜨겁게 불이 붙은 상태로 복음에 대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상태는 어떠합니까?  이들은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음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미지근하다’라는 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로(왕상 18:21),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즉 진리의 말씀을 듣더라도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두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열정도 적대감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차다’와 ‘덥다’라는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을 두고 말씀하신 것인데 사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분명히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눈에는 은혜의 눈물이 흐르고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고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반면 복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얼굴이 굳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눈에는 쌍심지를 켜고 온갖 더러운 욕설을 하고 그분에 대해 듣기를 싫어합니다(행 13:45).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둘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러한 반응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말씀에 대해서 전혀 관심과 반응이 없었고 말씀을 듣기 전이나 듣고 난 후에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미지근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있었는데 그것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주는 맛으로 이 세상에서 잘사는 생활들과 화려한 것과 세상풍속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에 한번 맛을 들거나 마음을 빼앗겨 놓으면 복음에 대해서 미지근한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들은 유행과 변화에 민감하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다 알고 있지만 정작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 생활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입술로는 신자인데 행동으로는 불신자라는 것입니다(딛 1:16).

 

주님은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무슨 말을 하십니까?  본문에 보면 점잖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으시고 너무나 비위가 상하고 역겨워서 입에 토하여 내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3:16).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토하여 내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번 사용하셨던 말씀으로(레 18:25, 28, 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풍속을 쫓아가고 문란하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강력하게 거부하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레 20:17-23, 엡 6:9-10, 계 22:15).  그러므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토하여 내치다’라는 말은 무섭게 심판을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에서 제외시켜 버리시겠다는 경고성의 말씀입니다(출 32:33).

 

◈ 본문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계 3:17).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물질적으로 부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교회는 부자들이 많아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는데 그 지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다 모인 교회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직업과 학력, 그리고 경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에 걸맞게 은행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인 사업으로 직물업을 하는 사람들과 안과 대학교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이 교회는 돈 없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들만 모인 교회라 주후 60년에 큰 지진이 그 지역에 발생했을 때 그들은 로마 정부에서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돈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적으로 교만한 것인데 이 교회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서 자신들은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은혜를 가장 많은 것처럼 행동을 하고 성경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성경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이미 신앙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로 얼마나 많이 배우고 성경적인 지식이 많은지 성경책을 손에서 놓고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멋도 모르고 복음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예전에 이미 그런 과정을 다 마쳐서 자신들은 복음에 대해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고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기억해야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꾸준히 배우지 않는 사람들 모두는 교만하다는 것입니다(딤후 3:14-17, 딤전 6:3-5).

 

더 중요한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본인들은 부자이고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계 3:17).  “시장철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건물을 자랑하고 예산, 숫자, 실적과 같은 외부적인 업적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번듯한 자체 교회 건물이 있고 재정도 든든하고 교인들도 많아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서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교회인가 할 정도로 골병이 제대로 든 교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교회를 하나 뽑으라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로 이처럼 영적으로 빈곤하고 비참한 교회가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 그렇다면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에는 그 처방약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가지는 것입니다(계 3:18).  이것은 세상적인 부나 금을 모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말은 어려운 고난을 통과한 연단된 믿음을 말하는데(벧전 1:7),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모두 가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믿음이든지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그 순수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약에 믿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없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불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3:13).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고난을 통과한 진짜 믿음이 아닌 “짝뚱” 믿음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여태까지 해왔기 때문에 주님은 진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흰 옷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처음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으로 의의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계 19:8).  다른 하나는 흰 옷을 한 번만 입는 옷이 아니라 계속 입고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원래 흰 옷은 하나입니다.  주님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며(벧전 2:15), 양심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매순간 그분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흰 옷을 사서 입어본 적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 많은 돈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지만 흰 옷을 사서 입을 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흰 옷을 사서 입고 제발 “알몸”으로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약국에서 안약을 사서 보이지 않는 눈을 보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인 분별력을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주변에는 유명한 안과대학교가 있어 육신의 눈을 고쳤을지 모르지만 영적인 눈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육신의 소경보다 더 불행한 것은 바로 영적인 소경인데(요 9:39-41),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눈은 떴지만 앞을 못 보는 소경들만 잔뜩 모인 교회였습니다.  본문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영적인 눈을 뜨려면 진리의 성령에 대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엡 1:17).  왜냐하면 이 교회는 성령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고 에베소 교회처럼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한 교인들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행 19:2-3).  그래서 돈을 아끼지 말고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전 2:10).

 

이렇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보면 중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교회로 겉은 화려하지만 속을 썩을 때로 썩은 교회였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교회가 저절로 썩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병들게 만든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교회는 사람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교회로 이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친 심신을 쉬기 위해 왔습니다.  사실 일주일 내내 먹고 산다고 심신이 지쳤는데 설교까지 골치 아프고 신경을 쓰게 만든다면 누가 교회에 오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는 가능한 부담이 없어야 했습니다.  마치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아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고 죄에 대한 책망이나 지적을 듣는 것은 꿈같은 얘기였습니다.

 

◈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이한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거듭난 사람들은 별로 없고 자기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마 5:4), 회개한 사람들이 거의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세운 교회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그 곳에 없었습니다(엡 1:22-23, 골 1:18).  본문에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님을 한 번도 마음에 모셔 들인 적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계 3:20).  아마 목사 아니면 장로나 집사들이 이 교회에서 목에 힘을 주고 목소리 높여 가면서 주인 노릇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현대교회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합니다(계 3:20).  우리는 이 말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본문은 불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계 3:14).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스스로 영적으로 부요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문에 보면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인간적인 교제를 재미있게 나누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닫아 버린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밖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바울 성당에 홀만 헌트라는 화가가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는 오두막 같은 집에 예수님이 등불을 켜고 찾아오셔서 그 집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서 계신 집의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집 주인이 안에서 열어주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열어 줄때까지 주님이 문 앞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마음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고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데 내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주님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누구를 위해 예배를 드리러 모였는지 몰랐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한결 같이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자에게만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계 2:7, 11, 17, 26, 3:5, 12, 21).  이 말의 의미는 이기는 자가 있는 반면에 지는 자들도 있다는 것인데 만약에 이기지 못하고 지면 어떻게 됩니까?  영적전쟁의 패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앉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전투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히 12:4).  신앙생활에서 은혜로 구원받는 것 외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냥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힘써 싸워야 합니다(엡 6:10-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그냥 앉으신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하늘보좌에 앉으셨습니다(요 16:33, 막 16:19).  그분은 우리의 모델이시기에(벧전 2:20-21), 우리들도 주님처럼 믿음으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본문에 ‘이기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21), 이 말은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킨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고난의 불을 통과한 사람들로서 주님을 위해 고난당한 흔적을 몸에 가지고 살았습니다(계 7:14, 14:12).  또한 이들은 다니엘처럼(단 1:8), 자기 양심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로(계 14:4-5), 정말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바라봤던 하늘의 보좌에 앉는 것입니다(행 7:55-56).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말하는데 마치 예수님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여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누구든지 싸워서 이기는 자들도 주님의 보좌에 앉게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계 3:21).

 

◈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절대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다 가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 6:24).  두 가지 다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다 가진다면 하늘에서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가운데 오직 주님만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마 16:24).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며 다시는 눈에 눈물을 흘리거나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계 21:4).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한 신앙의 온도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그리고 미지근한 것 중에 어느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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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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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주님의 뜻에 가깝고 성경이 제시하는 모델에 가까운 교회를 찾으라 하면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든 교회들은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았지만 두 교회만큼은 책망을 받지 않았는데 우리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을 보고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은 모든 교회들을 다 좋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주님 마음에 맞지 않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다 똑같은 교회로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평가로 본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전혀 듣지 않은 승리한 교회입니다.

 

◈ 예수님이 교회에 나타나시는 모습은 각 교회의 사정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교회의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참되고 진실하신 청지기의 모습으로 찾아오셨는데 본문에 보면 ‘다윗의 열쇠’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3:7).  여기서 다윗의 열쇠란 청지기인 엘리야 김에게 주었던 열쇠를 말하는데 이사야 22장에 보면 당시 히스기야 왕의 국고를 맡았던 궁내대신 셉나가 자리에서 쫓겨나고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 김에게 다윗의 열쇠를 맡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열쇠는 집과 성전과 창고를 맡아서 주관하는 그런 열쇠로 다윗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말은 모든 것을 관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권한을 왕의 이름으로 엘리야 김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며 이 열쇠를 가지신 주님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기를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라고 말합니다(계 3:7).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실세 중에 실세이며 모든 결정권을 한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마 28:18), 천국에 들어갈 사람과 들어가지 못할 사람을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삼상 2:6-7), 메시야 왕국에서 지옥의 권세와(계 1:18), 하늘과 땅의 권세(마 28:18), 또한 자기 집(다윗의 집)의 권세를(히 3:6),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서 오직 그분만이 자기 백성들을 거룩한 도성인 천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요 14:6).

 

그렇다면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갖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델비아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의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다윗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는데(계 3:9), 우리는 이것을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주님과 심한 논쟁을 벌이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이라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것은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유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어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4:6).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들어갑니까?  성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통으로 되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소용이 없고 몇 대째 믿었다고 해도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육적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열심히 있는 자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 열정을 가졌던 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들 중에는 끝에 가서 주님을 배척하기도 했습니다(요 6:66).  그러기에 사람의 의지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요 1:13).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가 되어 새롭게 다시 한번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요 3:3, 5).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엡 2:8),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행 4:12, 계 1:18).

 

그러므로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나타나신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선민의식에 대한 반론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의지할 분이라고는 주님 한분 밖에 없는, 다시 말해서 다른 교회들 보기에 참으로 딱하고 융통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세상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계 3:10), 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불신자들처럼 행동하며 더 악하게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천국의 열쇠를 가지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3:9).

 

◈ 오늘날 사람들은 현대교회의 능력을 어디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두 가지로 측정될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사이즈인 교인들의 수입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재정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능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에 교회의 규모가 작으면 능력 없는 교회로 인식해 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입니다.  그 교회에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나 좋은 직업이나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우선 그 교회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안에 고급 직종인 의사나 변호사, 아니면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 혹은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분들이 많으면 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무슨 덕을 볼까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이러한 교회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은 사실입니다(약 2:1-4).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정말 별 볼일이 없는 초라한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8), 이 말은 영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실제적으로 작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노예이거나 가난한 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회적으로도 힘이 없고 스스로 보호하거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전혀 없는 전무후무한 교회였습니다.  이름난 교회 같으면 사회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어려움이 생길 때 찾아가서 호소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이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교회였습니다.

 

정말 빌라델비아 교회는 성도들의 수가 너무 작아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이런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 너무 사람이 없으면 가기 싫어 할 것입니다.  분명이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큰 교회를 찾아갈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교인들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사람 수가 적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소아시아의 이름난 교회들에 비해 숫자적으로 본다면 가장 별 볼일 없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였지만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이 보시는 눈과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사 55:8-9).

 

왜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았습니까?  이들은 교회 사이즈와 상관이 없이 진리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히면서 믿음생활을 충실히 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들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3:8).  다시 말해서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한번 자세히 보세요.  면류관은 언제 받는 것입니까?  천국에 올라가서 받습니다(고전 9:25, 살전2:19, 딤후 4:8, 벧전 5:4, 계 2:10).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은 천국에 올라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면류관을 받았습니다(계 3:11).  다시 말해서 그들의 신앙생활이 주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상급을 벌써 받은 것입니다.

 

◈ 주님은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첫 번째 약속은 그들 앞에 열린 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계 3:8).  사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봐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짝퉁” 교인들이 많아 쉽게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열심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복음만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롬 1:16).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지옥의 형벌의 대상이고 마치 감옥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교수형을 당해야 하는 죄수의 처지와 같습니다(롬 5:12, 히 2:14-15).  이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히 9:27).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버립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말입니다(요 5:24-25).

 

본문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8), 이 말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교회로서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을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다 복음의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골 4:3).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서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만이 복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데 교회에는 복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직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계 3:1-3).  설사 복음의 문이 열려도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데 교회는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교회로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복음의 문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의 신앙관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십자가의 복음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 있거나 불신자들 앞에서도 확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딤후 2:3-4).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부름을 받은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높일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릴 사람들은 없었습니다(마 5:13-16).  그래서 주님은 그들 앞에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 두 번째 약속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계 3;9).  교회가 가장 기쁠 때가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돌아올 때인데(눅 15:7), 그것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마 16:26).  특히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거나 예수님에 대해서 말만 하면 입에 거품을 흘리는 사람들이 돌아올 때는 그것처럼 더욱 기쁜 일이 없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주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가 열립니다(눅 15:10).  이 사람은 얼마나 악질 인간인지 하나님을 잘못 믿어서 얼굴에 살기가 돌 정도로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지만(행 9:1),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완전히 박살이 난 사람입니다(행 9장).  이렇게 하나님 만나기 전 바울과 같은 유대인들이 하는 짓들이 무엇입니까?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행동들을 보면 마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마 12:22-37).

 

지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이라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확실히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을 ‘사탄의 회’라고 부르는데(계 3:9),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핍박하는 집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요 8:44). 왜냐하면 믿기는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늘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막 3:22-30).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구제불능의 인간들이며 루터가 말한 것처럼 지옥의 땔감으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너무나 기쁜 일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그렇게 마귀 같은 짓들만 골라서 행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계 3:9).  결국 복음을 듣고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이 끝까지 믿음과 행함으로 삶의 열매를 맺히며 살았기 때문입니다(계 3:8).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데 주위의 친척이나 형제들이 나를 무시하고 나의 신앙을 조롱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이 신앙이 옳다는 것을 무릎을 꿇고 인정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시 23:5).

 

◈ 세 번째 약속은 시험의 때를 이기게 해주신다고 합니다(계 3:10).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시험과 고난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난을 주셔서 연단을 시키십니다(히 12:6).  그래서 연단이 올 때 그것을 잘 견디고 인내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정작 큰 위기 때 보호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어려움이 왔을 때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결국 무서운 환난이 왔을 때 이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0:10).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빼내가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오면 그때에는 겸손해 지고 자기 잘못도 시인하고 잘해보겠다고 다짐도 하지만 그 사람 속에 있는 죄성까지 다 빠져나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충분히 연단시켜서 죄의 본성까지 빠져나가게 하십니다.

 

본문에 ‘시험의 때를 면하리니’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10), 여기서 “시험의 때”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시험의 때”는 7년 환난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을 면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그 환난 직전에 땅에서 취하여 가심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단 12:1, 욜 2:31, 막 13:14, 살후 2:1-12, 계 14:7).  다른 하나는 “시험이 때”는 재림 직전의 대 환난을 말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17장15절에서 주님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빌라델비아 신자들이 환난을 당하지만 그 환난 속에서 궁극적으로 보호해주신다는 해석입니다(계 7:14).  아무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어려운 환난 가운데서 철저하게 보호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시험을 당할 때 도와주신 것처럼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단 3:27).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이고 면류관을 받은 교회로 여러 가지 시험들이 많이 있었지만 넘어지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해서 한 가지 주의사항을 주시는데 그것은 지금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계 3:11).  이 말씀의 의미는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자칫하면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빌라델비아 신자들이 처음 가지고 있던 신앙을 끝까지 굳게 잡는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고’ 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믿음을 말합니다(계 3:8).  다시 말해서 처음 신앙을 잃어버리면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눈팔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이 교만하거나 인간적인 의를 자랑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로부터 받는 면류관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사실 어려운 시험에서 잘 견디어 내고 고난도 잘 극복하다가 나중에 교만해져서 상급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높은데 마음을 품으면 면류관을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에서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귀중한 것인 줄 모르고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창 25:34),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도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도덕성의 문제로 유다에게 빼앗기고(창 49:4, 8), 사울 왕은 교만으로 인해 다윗에게 그 왕위를 빼앗깁니다(삼상 16:1).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누구든지 교만하거나 주님 앞에서 불충성하면 언제든지 빼앗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고전 10:12).  그러므로 인간이 교만해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인데 그것은 매순간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 6:13).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투를 계속하는 생활로 성경은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묘사합니다(딤후 2:4). 이 말은 지상에서 영적 싸움이 치열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엡 6:10-10-18).  하지만 주님은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는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계 3:12).  우리들 생각에는 천국에 무슨 기둥이 필요하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천국에는 기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리라’라는 말은 기둥처럼 안전하고 견고하게 붙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기둥이 무너질 염려가 없는 것처럼 완전한 천국 삶을 보장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 가까이에서 그분을 섬기는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계 15:7).

 

다른 하나는 이기는 자에게 삼중 서명을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은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던 무명의 사람들로 누구도 인정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면류관을 주시며 이길 경우 성전 기둥에다 삼중 서명을 해주실 것을 보증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과(민 6:27, 고후 3:3),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계 21:2), 나의 새 이름을(계 2:17, 골 3:4, 요일 3:2),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 기둥에 세 가지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과 천국시민으로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며(빌 3:20), 주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건축물을 세울 때 믿을 수 있는 업체가 건물을 다 짓고 나서 그 건물에 몇 년 몇 월에 완공된 날짜와 이름을 새기는 것처럼 삼중적으로 보증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오늘날도 어떠한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주십니까?  그것은 신앙이 견고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 같은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이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불평하지 않고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주님도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축복과 평강을 부어주신다고 말합니다(사 26:3).  만약 우리가 처음 믿은 예수님을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만 않는다면(히 3:14), 주님 나라 성전에 기둥이 될 것이고 또한 그 기둥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삼중 서명인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새겨질 것입니다(사 62:2, 65:15).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때 이름만 대면 무조건 통과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 될 것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핍박과 시련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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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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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갈수록 교회의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먼저 에베소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려 전투하지 않는 교회로 전략하고 반면에 서머나 교회는 핍박을 받아가면서 계속 영적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로 변했고 두아디라 교회는 여러 가지 교회 일들은 많이 했지만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교회가 온통 성적인 방종에 빠진 음란한 교회로 변했습니다.  오늘 보게 되는 사데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이단이나 음행에 물든 교회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심한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죽어버린 교회가 되어서 대수술을 몇 번해서도 살아날지 의문인 교회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모두가 형편이 다르고 가지고 있는 문제들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각 교회의 형편에 맞게끔 나타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3:1), 이 말은 완전하시고 전지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표현으로(계 1:4, 16, 20), 계시록 5장6절의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눈’으로 스가랴 4장10절의 ‘일곱 눈’처럼 성령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일곱 영’이란 성령의 완전함으로 그분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성령의 편재성을 의미합니다(시 139:7-10).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일곱 영을 갖고 계신 분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사데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성령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생명은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일곱 교회에서 증언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엡 4:7-8).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많이 부어지면 부어질수록 생명력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차단되거나 소멸되면 그때로부터 교회는 서서히 죽어갑니다(살전 5:19).  그렇다면 죽어 있는 사데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성령을 소유하신 예수님이십니다(행 2:33).  본문에 ‘일곱 영’을 가진 분으로 묘사한 것도 주님만이 죽어 있는 교회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고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령을 소유하시고(요 15:26, 롬 8:9), 또한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잡고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도록 통치하시는 분으로 죽은 사데 교회를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계 1:16, 2:1).

 

◈ 오늘날 교회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지요?  여전히 예배만큼은 드리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은 자기 교회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예배가 죽은 예배인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만약 그 사실을 안다면 분명히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영적으로 계속 죽어가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엡 5:14).  사데 교회 역시 처음부터 죽어 있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교회들처럼 예전에는 살아서 활동하고 움직였던 교회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교회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차단하는 어떤 것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것이 사데 교회의 생명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본문에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1).  이것은 사데 교회 안에서 드려지는 모든 행위들인 예배, 기도, 찬양, 봉사, 선교, 구제, 섬김 등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계 3:2).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유명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주변에도 유명하고 이름난 교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눈으로 그러한 교회를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어렵게 생각하거나 해석할 필요가 없이 겉으로 볼 때는 이름난 교회이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실상은 죽은 시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시체들이 모여 있는 교회, 조금 끔찍하지 않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열심히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와 찬양은 합니까?  당연히 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교인들이 모이고 있나요?  모이니까 예배를 드리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것들을 보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1).  이들은 여전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할 것은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하는 사데 교회를 놓고 “사망 진단서”를 띨 수가 있습니까?  사망 진단서는 완전히 죽었을 때 발부되는 증명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사데 교회는 이미 사망 진단서를 띤 상태에서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행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죽은 시체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로 가득찬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한 업적들이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기도를 드리고 교회출석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구제도 하며 봉사와 선교를 하는 이름난 교회였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해서 유명해진 교회입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입으로 떠드는 것보다 일을 행한 것이 백번 낫기 때문입니다(약 2:17).  그러나 문제는 주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행한 일들 중에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2).  쉽게 말하면 이들은 성령을 힘입어 일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노력과 힘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롬 10:2-3).  더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사기 시대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삿 21:25).

 

◈ 본문에 ‘온전하다’라는 말은 ‘채워지다’, 혹은 ‘달성되다’, ‘성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빈 컵에 물이 가득 차게 된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준이 있는데 그것이 다 채워지거나 달성될 때 그분이 그것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기도, 찬양, 구제, 선교, 봉사 헌금은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표준에 맞추어서 드려야 하는데 이러한 모든 대답들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출 20:1-17, 마 5-7장).  그러나 사데 교회는 많은 행위들은 있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준에 이르는 행위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 보기에는 살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죽은 교회로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시면서 4절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것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고 자기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 행동할 때 주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으신 것처럼(창 4:5),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지(벧전 4:11), 인간적인 생각이나 계획, 힘과 노력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살전 5:19).

 

사람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지만 교회는 죽더라도 다시 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은 교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본문에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는데(계 3:2), 이 말의 의미는 사데 교회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생명력을 잃지는 않았기에 주님과 사데 교회 사이에 가로막는 걸림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역사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제거하면 죽었던 교회가 살아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죽은 교회를 다시 살린다는 것은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데 교회가 살아나려면 고통스러운 대수술을 여러 번 해야 되지 않나 생각됩니다.

 

◈ 그러면 성령의 역사를 차단시켜 사데 교회로 하여금 죽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잘못된 제도와 관행들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교회에는 제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제도는 교회의 참된 기능을 돕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사의 직분이 존재하는 것은 교회를 말씀으로 풍성하게 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지 그 목사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있어서 목사의 직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해야 하고 목사가 오히려 주님의 일을 가로막는다면 이 목사직은 성령의 역사를 풍성하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게 됩니다.

 

장로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를 세우는 것은 약하고 어려운 교인들을 돌아보고 또 교인들의 행실을 감독하여 잘못된 행실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 세우는 것입니다(딤전 5:17, 딛 1:5-9, 약 5:14-16).  그러나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돈이 있고 세상의 유망한 사람들에게 명예를 주기 위하여 장로를 세운다면 이 장로직은 분명히 그 교회에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아니, 거부하는 것은 둘째 치고 교회를 치열한 전쟁터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 만큼 교회를 분열시키는 유명한 장로들이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이것을 안 사도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산 교회에서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장로직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직을 두는 것은 교회에서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인데(딤전 3:8-13), 그런 목적이 아니라 믿음도 없는 사람을 교회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직분을 주거나 아니면 잘 믿는다는 표시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집사의 직분을 준다면 바로 그런 제도가 교회에서 성령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제도든지 보안적인 것이어야 하고 교회 안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실제적인 일들입니다.  즉 실제로 설교하고 실제로 돌아보고 실제로 몸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직분은 세상 감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안되고 사람의 체면을 위하여 제도를 세울 때 그 제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트리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고 결국 성령은 떠나고 인간들의 목소리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고 나중에는 사데 교회와 같은 죽은 시체들이 모인 교회로 전략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된 관습들도 성령의 역사를 막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자신들의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0:2-3).  물론 처음에 어떤 습관이 생기게 될 때 모두가 나쁜 의도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래 생각과 다르게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떠나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많은 제도들과 관행들이 성령의 역사를 막았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 안에서 빛나는 것들은 오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 자랑거리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를 세울 때는 잘 세워야합니다.  교인들을 돌보지 않고 행실의 본이 되지 않는 장로와 일하지도 않는 집사들은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직분이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위한 직분이 되어야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명예를 위한 직분이 될 때 그때로부터 교회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참된 생명을 잃어버린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문에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계 3:3).  이것은 사데 교회가 처음 들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죽게 된 것은 본래 들었던 복음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에게 다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고(롬 1:16-17), 구원을 받았으니까 다 된 것처럼 생각한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면 구원받은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첫 과정에 불과하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험난하고 멀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마 7:13-14, 요 10:7-9). 그러니까 믿으려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눅 14:25-35).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죽게 된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원의 첫 체험을 기억하는 것이 회복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골 2:6, 히 3:14, 10:3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그분 앞에서 지옥 갈 짓들만 골라서 행한 무서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긍정하시는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한 말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1:15).  다른 하나는 이러한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을 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요 3:16, 엡 2:1-10).  만약 이 두 가지 사실을 잊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이지만 교회 안에서도 복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 현대교회는 물질적으로 풍부해서 선교사도 파송하고 여러 가지 사회사업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제도나 묵은 관습에 묶여 교회 안에서 복음을 몰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곳이 교회가 되어버렸고 전도할 대상들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으로 살아 있는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에 민감해야 하고(계 2:7, 11, 17, 29, 3:6, 13, 22), 성령에 민감하려면 지금까지 잘못된 방법으로 믿고 있던 습관들이나 의식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그 잘못된 신앙의 틀을 깨지 않는다면 교회는 계속 죽어갈 것입니다.

 

만일 사데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도적같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내가 도적 같이 임하라니’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데 교회를 심판하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계 3:3).  다시 말해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돌이키지 않으면 완전히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계 2:5, 16, 22-23, 3:20).  즉 회개와 경성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무시하면 예고 없이 ‘도적 같이’ 임하여서 무서운 징계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죄가 생각이 나면 회개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이 속히 임해서 심판하실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경고를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들지 말아야 합니다(창 19:14).

 

사실 모두가 세상적으로 살 때 혼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완전히 “왕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데 교회 안에는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이 있었는데 본문에 ‘흰 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3:4).  이것은 “칭의”를 말하는 것으로 칭의는 한번 의롭다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이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계 14:4).  그래서 주님도 그들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한다면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바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세속적인 문화에 물들지 않고 그들과 같이 동화되지 않고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계 14:4).  만약에 이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면 분명히 흰옷은 더렵혀졌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산 사람들이 사데 교회 안에 얼마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극소수라고 말합니다(계 3;4).  그러시면서 흰 옷을 입은 몇 명에게 ‘합당한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합당한 자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흰 옷 입은 그들은 처음 들었던 복음을 기억하고 그 신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은혜와 감사 그리고 회개의 눈물을 수도 없이 흘렸을 것입니다(계 21:4).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그분만을 높이고 주님을 위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합당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 안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흰 옷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계 3:5),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흰 옷’이란 세상 풍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스러운 ‘세마포’으로(단 10:5, 계19:14), 환난에서 승리한 자들이 입는 옷을 말합니다(계 7:9-14).  이들은 이 세상에서 받은 치욕과 비난을 보상받고도 남을 영광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또한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흰 옷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수 있는 예복으로(마 22:11),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킨 사람들과 옳은 행실 속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입니다(계 19:8).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흰 옷은 누구나 받는 옷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옷입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계 3:5).  여기서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기는 자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만약에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가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 사람의 입술의 고백과 삶을 통해 그것을 결정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출 32:32).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 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출 32:33).  이 말은 범죄 한 사람이 진실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겔 18:31).

 

그리고 본문에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말합니다(계 3:5).  이 말을 어디서 들어보거나 읽으신 적이 있지 않나요?  신약성경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부터 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인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이름을 흐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절대로 중간에 변질되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끝까지 붙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튜빙겐 대학의 마이어 박사는 본문을 가지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된 자라도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께로 보내주신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고(요 6:37),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롬 8:39).  여기에 대한 마이어 박사의 대답은 그런 말씀도 있지만 예수님을 시인하면 그분도 시인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면 그분도 부인한다는 말씀도 있다고 말합니다(마 10:32-33).  뒤이어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이어 박사는 “불안한 것이 아니라 경성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지금 마이어 박사가 말하는 요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교회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믿어도 배교하면 구원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론은 주장할만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장로교 칼빈주의 신앙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합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하나인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구원을 잃지 않고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는 교리로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오래 참으심에 근거를 둡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구절은 로마서 8장38-39절, 요한복음 6장39절, 10장28-29절, 에베소서 1장13-14절, 베드로전서 1장4-5절을 인용합니다.  이렇게 상반된 주장 속에서 계시록 2-3장에서 이기는 자에 무엇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구원적인 용어라는 점에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받지만(신 32:39, 삼상 2:6, 약 4:12), 동시에 그분의 주권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신실한 반응과 순종도 마지막까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빌 2:12, 히 3:14, 18-19, 4:1-2, 6, 11).

 

◈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주님이 갑자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말씀하시든지 아니면 “너 말고 다음 사람” 이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만 칭찬을 받아야 진짜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부터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올라온 사람들은 한결 같이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고(계 7:9), 복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데 교회가 죽은 교회로 판명을 받은 것은 처음 들었던 복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처음 들었던 십자가의 복음을 지금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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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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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가 설립된 과정은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는 두아디라 지역에서 비단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자 상인이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귀향해서 설립된 교회일 가능성과(행 16:14), 다른 하나는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복음을 강론할 때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소아시아 사람들 가운데 두아디라 사람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설립했을 가능성입니다(행 19:10).  이렇게 설립된 두아디라 교회는 일곱 도시 가운데 가장 작은 도시에 있는 교회로서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 중 가장 긴 메시지를 받았고 버가모 교회보다 더 깊은 죄악을 빠진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모습은 버가모 교회에 나타난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모습이었습니다(계2:12).  이렇게 양날 선 칼을 들고 나타나신 것은 돈에 탐나서 모압 왕 발락에게 팔려가는 거짓 선지자를 죽이려는 천사의 모습과 같고(민 22:21-30),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회복할 가능성이 있기에 잘못된 부분을 잘라내고 수술해서 다시 살리겠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버가모 교회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것으로 당시 제우신의 아들 “아폴로”가 두아디라의 주신(主神)으로 숭배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아들은 아폴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2:18).

 

본문에 ‘눈이 불꽃같고’라는 말은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의 통찰력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발은 빛난 주석 같고’라는 말은(계 2:18),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발로 밟듯 무서운 심판하시겠다는 것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던 발이지만 교회를 심판하실 때는 포도주 틀을 밟듯 무서운 심판의 발인 것을 보여줍니다(계 19:15).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심판하실 때 곡식이 가득 실은 수레가 누르는 것 같이 하실 것이라고 했는데(암 2:13), 짐이 가득 실은 짐차에 깔리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초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에 벌겋게 달군 주석 같은 발로 한번 밝히면 어떻게 됩니까?  아마 뼈가 으스러지듯이 이런 식으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시기 전에 먼저 칭찬을 하시는데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에 선행의 실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를 위해 산 삶의 흔적이 있었고 무엇인가 열심히 일을 하는 교회로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것을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라고 말합니다(계 2:19).  처음 시작은 별 볼일이 없이 시작한 교회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교와 구제 사업을 많이 하고 삶의 열매도 풍성하게 맺힌 교회로 성장을 한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려서 책망을 받았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그들이 갖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두아디라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가 좋은 동기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열매가 많이 맺힌 교회라면 책망을 받지 말아야 되는데 다섯 가지 좋은 일을 하고도 한 가지 죄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2:20-21).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알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마 5:48, 벧전 1:15).  마치 우리가 낳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바른 삶을 살기 원하듯 말입니다(엡 6:1).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죄악 된 생활로 물들어 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눈에는 바리새인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교회로 보였던 것입니다(마 23장).

 

◈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사업을 하고 삶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힌 이 교회를 음행에 빠지도록 만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계 2:20). 다시 말해서 교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용납하고 수용해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잘못된 가르침과 함께 세상의 더럽고 음란한 풍조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즉 교회의 도덕적 제방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이세벨이라고 부르는 거짓 선지자인데 이 여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면서부터 두아디라 교회는 음행으로 몸살을 앓게 되고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교회의 문제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인 이세벨의 더러운 음행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이 다 이세벨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상황을 보면 대단히 음란한 사회인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로마서 l장만 보아도 수많은 성적인 타락과 동성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인들이 처음부터 정결하고 순결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분명이 그들 중에 예수를 믿기 전에 성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개인적으로 늘 그런 유혹에 노출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다 타락한 마귀가(계 12:9), 이것을 모를 리가 있을까요?(벧전 5:8).  사악한 마귀는 성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을 나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을 도구로 사용해서 두아디라 교회가 음행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생활에 빠졌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싫어하시고 또 교회는 그런 생활을 묵인해 주거나 받아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교회는 아주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 가운데 산 사람이라도 일단 주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하면 용서는 받지만 신앙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도 다시 죄악 속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두아디라 교회는 아직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오염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도덕적인 방파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일이 생긴 것은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미끼를 던졌을 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반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간음을 저지를 수 없듯이 누군가 반응을 한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잠 6:28-29).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를 안으로 썩게 만든 이세벨이라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물론 여기에 나오는 이세벨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보면 적어도 800년의 간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아닌 것만은 사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세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학설이 있는데 두아디라 교회 감독의 부인이 아니면 그 지역 권력자의 부인, 혹은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한 여자였는지 모릅니다.  확실히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아디라 교회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서 들어왔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몸을 무기로 삼아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았던 음란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구약에 나오는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로서 바알의 선지자 사명을 가지고 시집을 왔고 이스라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습니다(왕상 16:31).  그래서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의 진영에 퍼뜨린 여자로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장 큰 타격과 피해를 준 장본인이었습니다(왕상 16:31-33).  그 외에도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왕상 18:4), 엘리야까지 죽이려다 미수에 그치고(왕상 19:2), 무죄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워 강제로 죽였던 잔인하면서도(왕상 21:10), 음행과 술수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구약성경에서는 가장 악녀였습니다(왕하 9:22).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오는 이세벨도 교회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하고 점점 죄악과 타협하도록 유혹한 여자였기에 구약의 이세벨과 같은 이름으로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서 유혹한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신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들로 본문에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20).  여기서 내 종들이란 말은 오늘날 주의 종들인 목사들을 말하는데 이세벨이 얼마나 교묘하고 사악한 여자인지 평신도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유혹해서 교회를 깨트리기 위해 얼굴과 육체를 무기로 삼고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짐작하건데 이 여자가 주의 종들을 꾀어서 음행을 하게 할 정도라면 대단히 매력적이고 지적인 여성으로서 어느 남자라도 이 여자를 한번 보면 반할 정도로 매혹적인 여자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영적인 은사까지 가진 사람으로 행사하며 주의 종들의 영혼과 육체를 타락시켰습니다.  결국 교회 전체를 말아먹은 여자였습니다.

 

사실 발람은 속이기만 했지 이렇게 인격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고 이 여자는 완전히 사람들을 호려서 자기 품에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도 발람의 영향은 일시적이었지만 이세벨의 영향은 지속적이어서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들고 유다를 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유 11절).  그래서 거짓 선지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진리에 있어 혼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육체까지 지배해 결국에는 망할 때까지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잘못 만나면 일시적으로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잘못된 여자를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거의 돌아오지 못합니다.  둘 다 망할 때까지 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남자를 잘못 만나서 신세를 망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골계가 아닌 “칠계”를(출 20:14), 조심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성품은 모든 인간들이 멸망을 당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벧전 3:9).  한 영혼이라도 심판을 받지 않도록 반드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세벨과 그와 간음한 모든 자들에게 회개할 것을 말씀하시는데(계 2:22-23),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죄 지은 모든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세벨과 함께 음행에 빠진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까?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그들은 회개하거나 죄악된 삶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계 2:21).  성경에 보면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망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바로 왕(출 9:30), 홉니와 비느하스(삼상 2:25), 아마샤(대하 25:16), 므낫세(대하 33:10), 아몬(대하 33:23), 시드기야(대하 36:12), 벨사살(단 5:22-23), 신약에 와서는 부자청년을 들 수가 있습니다(마 19:22).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의 순결을 팔아먹을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추하게 생각하는 더러운 죄에 어떻게 빠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 누구도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본성은 거룩한 방향보다는 더럽고 추악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막 7:21-23), 누구든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넘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평소에 경건의 훈련을 쌓지 않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인 것인지를 늘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넘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에 기억을 해야 하는 것은 “나는 천사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고전 10:12).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잠 28:26).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런 약점이 노출될 수 있는 데는 근처도 가지 말아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을 그럴만한 분위기로 이끌지도 말아야 합니다(고전 15:33).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예 미리부터 차단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아예 장난삼아 카드나 화투를 손에 잡지도 말고 눈으로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도박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또 이성에 유달리 약한 사람들은 아예 다른 여자와 일대일 만나는 기회조차 갖지 말아야 하고(딤전 5:2), 술에 약한 사람은 술 근처에 가지도 말고 술친구와 사귀지도 말아야 합니다(잠 23:31).  그래서 우선적으로 이런 유혹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며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실수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성적인 실수나 범죄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한순간에 날려 버립니다(잠 6:32-35).  우리는 그것을 뉴스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이미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여자나 남자가 간음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정욕은 살아있고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한 순간에 넘어질지 모릅니다(고전 10:12).  그래서 사탄은 두아디라 지방에서 특별히 뛰어나고 매력적인 여자를 사용해서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멍청한 주의 종들을 찍어 넘어뜨린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방심하는 사람을 공격하지 정신을 차리고 날마다 주님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고 매순간 고백하는 사람들은 공격하지 못합니다.

 

◈ 본문에 ‘침상에 던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22).  이 말을 어렵게 해석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이 침상에서 범죄를 했으니까 다시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건강으로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음란하게 즐겨 사용했던 침상이 고통의 병상으로 변한 것이고 죽을 때까지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그 병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 일평생 자리에 드러눕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처럼(계 2:23), 침상에서 범죄를 했으니까 침상에서 오래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죽이리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세벨의 잘못된 가르침에 완전히 빠진 사람들로 그 여자가 낳은 영적자녀들로 그들의 신앙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속은 사람들만 다 망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어진 기간 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다가 결국에는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탈레반의 자살 특공대처럼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무모하게 죽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여자에게 걸려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데 아름다운 가정, 좋았던 교우 관계와 추억들이 다 파괴되고 비참하게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너무 좋아하거나 가까이 하면 안 되고 너무 잘해 주려고 하면 결국 이세벨의 그물에 걸려들어 신세를 망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적절한 것이 좋고 가능한 욕을 조금 얻어먹더라도 자기 자신을 굳게 지키며 사는 것이 안전합니다(잠 4:23).  왜냐하면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침상에 드러눕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한 번 드러눕게 만드시면 다시는 일어날 가망성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 신종 이세벨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두아디라 교회는 겉으로 본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 교회이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열매를 많이 맺힌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 와서 내부를 살펴보면 음행에 빠진 교회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다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음행에 빠져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이세벨의 잘못된 가르침인 사탄의 깊은 것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계 2:24),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성경은 “알곡”이라고 부릅니다(마 3:12).  다시 말해서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자기 혼자만 남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신실한 자기 백성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왕상 19:18).

 

여기서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깊은 것과는(고전 2:10), 반대되는 말로서 이세벨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말하는데 이 용어는 주로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말로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어떤 특별한 가르침이나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어떤 영적인 신비한 지식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사탄의 깊은 것인 이세벨의 잘못된 이단교리를 말합니다. 이 가르침 안에는 성적인 방종과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단들에게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교인들 중에 평범한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색다르고 특별한 가르침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배우려는 사람들과 진리의 말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마귀의 밥이 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전혀 동조하지 않고 말씀 하나만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인들 중에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배우기 위해 이교회 저교회 무리처럼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심지가 굳건한 사람들입니다(사 26:3).  본문에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시는데(계 2:25), 이것은 한번 잡은 것은 사생결단하여 놓치지 말고 꽉 잡을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여러 가지 부족하여 남들처럼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 진리의 말씀되신 예수님만을 굳게 잡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히 3:14).  그러시면서 주님은 이들에게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24).  이것은 이들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복음을 굳게 잡은 그들을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복음을 끝까지 잘 지키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계 2:26-29), 하나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이긴 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으로(마 19:28), 메시야가 오셔서 왕 노릇할 때 복음을 잘 지켰던 자들도 같이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계 20:6).  다른 하나는 ‘새벽별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계시록 22장16절에 보면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별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의미는 어두움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같이 동행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꿈에도 그리던 천국입니다.  물론 이 지상에 살면서도 주의 자녀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는 권세와(눅 10:19),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약속했지만 말입니다(마 28:20).

 

◈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에서 앞뒤가 꽉 막힌 것처럼 융통성이 없이 복음만을 굳게 잡은 자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고리타분하게 한다고 미워하며 무시했고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진리의 말씀만을 굳게 잡은 자들이 결국 승리를 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죽기까지 굳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소망이 없는 세상을 사랑해서 간음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약 4:4).  만약 두아디라 교회처럼 여러 가지 교회 사업을 많이 하고 열매를 맺혔더라도 세상 풍조를 받아들이고 신앙의 순결을 팔아먹는다면 주님이 주시는 권세와 새벽별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계 14:4).  오늘날 이 시대는 자신의 신앙의 순결을 굳게 지켜야 할 때입니다.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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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보통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지 교회라면 다 신앙이 좋고 순수하며 그것 자체가 바로 천국의 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 개인의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은 어렵고 사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교회 전체가 신앙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믿음이 다 똑같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착각하여 그릇된 길인 줄 모르고 따라가게 되는데 마치 갈라디아교회처럼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칠 수 있습니다(갈 3:1-3).

 

신앙생활하기에는 에베소 교회가 서머나 교회보다 월등하게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교인 한명 한명이 신앙이 좋았고 그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자들이며 쉽게 아무 것이나 호락호락 받아들이는 가벼운 교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떠합니까?  모두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능력과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린 병든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섬기고 인내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고 이미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첫 사랑이 식어버린 종교와 제도에 얽매인 교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촛대를 그 곳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5).

 

반면에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교회인 것 같습니다.  이 교회는 아직도 한창 전투중인 교회였는데 교인들 간의 분쟁이 아니라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너무나 심해서 환난과 궁핍한 가운데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교회를 칭찬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투하는 살아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기에 평안한 교회보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영적으로 싸우는 이 교회가 더 부요한 교회로 보신 것입니다.  비록 신자 한 명 한 명이 어려워 보이지만 교회에는 말씀이 살아있고 기도가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그래도 주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한국과 한인교회와 가장 비슷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바로 세속주의로 물든 버가모 교회입니다.

 

◈ 버가모 지역은 황제숭배가 일 년 내내 행해지는 곳으로 로마황제 “가이사”를 신격화 시켜서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이라고 부르도록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마치 북한이 죽은 김일성의 동상을 세워 놓고 절하며 섬기듯이 말입니다.  본문에 ‘사단의 위’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13), 이 말은 버가모 지역은 사단이 권세를 휘두르는 총본부가 있는 곳으로 쉬운 말로 말한다면 영적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지역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항하는 강한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로마황제가 주님이다”와 “그리스도가 주님이다”라는 주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숭배가 서쪽 센터라면 버가모는 황제숭배의 동쪽 센터에 버가모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충성스럽게 잘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계속 들어가자 결국 예수님을 “주”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황제숭배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생기자 곧 바로 영적전쟁이 일어났습니다(엡 6:10-13).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과의 정면충돌이 생긴 것입니다(고후 10:4).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이고(마 10:34-36), 마치 에베소 교회에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서 그들이 섬겼던 미신적인 것들을 다 불태워 버린 것처럼(행 19장), 버가모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가장 먼저 거부한 것이 로마 황제숭배였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것입니다(계 2:13).

 

본문에 보면 ‘네가 어디서 사는 것을 아노니’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3).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이 사는 곳은 로마 황제숭배를 피할 수 없는 곳인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버가모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칭찬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탄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이렇게 주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믿고 그분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디바’라는 충성된 증인이 죽임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여기서 ‘안디바’는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신자들 중에서 우상숭배의 희생자가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목숨을 내놓고 순교자를 배출할 정도로 신앙을 지켰던 믿음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은 칭찬을 하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 교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을 구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계 2:14).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얼마나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문제에 대해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가 우상숭배에 대한 박해를 잘 견디어 내어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닌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사탄의 유혹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버가모 교회가 책망 받은 일에 대해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계 2:14).  이것은 버가모 교회 안에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부 교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계 2:13).  그런데도 교회 전체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교훈에 대해서 책망을 하거나 권면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고 그냥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을 저지른 자에 대해서 소문이 날까봐 교회 전체가 쉬쉬하며 꿀 먹은 벙어리 같이 묵인한 것처럼 말입니다(고전 5장).  만약에 오늘날도 이러한 죄악들을 묵인하고 용납한다면 교회로서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치리”가 있어야 합니다(마 18:15-17).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조심하고 나중에 주님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딤전 5:20).  물론 죄를 범한 사람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할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고후 2:6-8).

 

본문에 나오는 발람은 히브리인이 아닌 거짓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을 부추겼던 사람으로(민 22-25장), 돈 때문에 발락에게 자신의 예언을 팔아먹은 대표적인 파렴치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16).  히브리인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영감이 임한 선지자이니까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사십년 간 훈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있었다면 그가 바로 발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심한 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끼쳤는가 하면 그의 계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멸망당할 뻔했고 결국 염병이 퍼졌는데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열정이 하나님의 진노를 겨우 막았던 것입니다(민 25:7-9).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가나안의 많은 왕들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모압 왕의 부름을 받고 발람은 당연히 가지 말아야 하는데 돈에 눈이 어두워진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어겨가며 발락에게 가고 맙니다.  그는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타고 있던 나귀는 그 사자를 보고 두려워 앞으로 가지 않으려 하기에 발람이 채찍으로 나귀를 마구 때리자 나귀가 “왜 자꾸 때리느냐?”고 말을 하며 발람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돈에 미친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모압 왕에게로 갔고 그가 시키는 대로 제단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저주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여 그 입을 틀어막고 저주 대신에 축복이 나오게 합니다.  그래도 돈에 팔린 거짓 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이 짓을 계속 시도합니다.  결국 세 번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니까 나중에 발락에게 한 가지 계책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여자들과 간음을 하도록 하는 무서운 계략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염병이 돌아서 이스라엘 자손 이만 사천 명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발람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에 대한 욕심에 팔려 결국 이스라엘 앞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올무를 놓아서 그들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민 22-25장).

 

이러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가 버가모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와 간음을 즐기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간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영적간음이라는 것입니다(약 4:4).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만큼은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마 10:37).  만약에 주님보다 더 관심을 끌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심이고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되 특히 우상숭배인 탐심을 멀리해야 합니다(골 3:5-6).

 

◈ 다른 하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계 2:15).  이들은 무율법주의자들로서 자신들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지만 방종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이들은 “지금은 율법이 필요 없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고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원파 교리와 유사하고 간단하게 말한다면 “그노시스 사상”을 가진 이단입니다.  그노시스 사상이란 사람의 육체는 근본적으로 죄 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이거와 상관없이 영혼은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사상으로 율법폐기론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만 깨끗하면 되고 육체는 더러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고후 7:1).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만(엡 2:8),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성경은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요 14:21).  이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눅 6:46).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에서 아름다운 열매도 맺혀야 하는데(마 4:7-9),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요 15:8).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마 7:19-21).  지금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방종한 생활로 세상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오늘날 세상풍속을 따라가는 세속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실 마귀가 버가모 교회를 심하게 핍박할 때는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을 지켰고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환난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귀가 전술을 바꾸어서 세상 것으로 유혹을 할 때는 쉽게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즉 내부로부터 지속적으로 파고 들어오는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즐기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정욕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쾌락 그리고 안락한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마귀가 속여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다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겉으로는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마귀가 뱀처럼 좌리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겉만 교회이지 속은 이미 곪을 때로 곪아 터진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게 무슨 경고를 하십니까?(계 2:16).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잘못된 삶의 방식을 완전히 뜯어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한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면서 돌이킬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뜨거운 열정은 없지만 그래도 쟁쟁한 목회자들인 바울을 비롯해서 성경학자 아볼로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디모데, 사도요한이 목회를 해서 그런지 이단 니골라당의 교훈을 철저하게 대적하여 물리쳤고 반면에 버가모 교회는 순교의 열정과 뜨거움은 있었지만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지 않아 이단적인 교리가 틈을 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약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뜨거움으로 균형 잡히게 잘 무장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지금 주님이 버가모 교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알 수 있는데 그분은 양날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찾아오셨습니다(계 2:12).  그리고 주님은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16).  그렇다면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할 정도의 교회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칼을 들고 나타나셨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버가모 교회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그들’이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이 교회를 치시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버가모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들, 즉 성경에서 벗어난 것들을 진리의 검으로 대수술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발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그렇게도 “돈, 돈”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민 31:8).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물론 돈을 사랑하면 칼에 찔려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딤전 6:10), 발람의 교훈인 이단적인 가르침을 따르거나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변질시켜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지도자와 또 그것을 배우는 교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계 19:15).  그러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심판의 수술 대상자”가 되지 않으려면 바른 진리위에 서야 합니다(갈 1:8).  가장 미련한 것은 나귀가 소리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교인이나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의 입에서 경고의 소리가 들릴 때 빨리 돌이키지 않는다면 시퍼런 식칼을 들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인데 그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계 2:17).  반면에 주님은 이렇게 부패하고 세속주의로 물든 교회에서 믿음을 지키는 신자들이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본문에 이기는 자에게 주는 두 가지 난해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하나는 ‘감추었던 만나’입니다(계 2:17).  이 말은 버가모 교인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배워서 우상의 제물을 먹듯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신령한 떡인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요 6:47-51).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지성소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는 것으로 영원한 천국인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말합니다(히 4:16).

 

다른 하나는 “흰 돌”인데(계 2:17), 이 흰 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성경에서 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벧전 2:4-8), 본문에 흰 돌은 고대 법정에서 무죄를 상징하는 돌이나 아니면 공식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을 의미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물론 본문은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무튼 흰 돌은 어느 집에 들어올 때 주는 패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패스는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패스입니다(엡 3:12).  다시 말해서 메시야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흰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새 이름이 새겨진 돌이라고 말하는데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까요?  주님의 이름일까요 아니면 받는 자의 이름일까요?  그것은 알 수가 없고 단지 이 돌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와 흰 돌”이란 세상풍속에 물들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에게 천국입성을 허락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계 21:27).

 

오늘날 마귀는 재래식 공격무기인 직접적으로 무식하게 핍박을 하지 않고 지금은 전략을 바꾸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유혹을 합니다.  외부적으로 강하게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오며 세상에 있는 것들인 풍요로운 삶을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즉 생활이 윤택해지고 신앙생활 하되 어려움이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풀리면 기도 안 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으면 주님을 찾으면서 열심히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해결되고 생활이 안정이 되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데 마귀는 이것을 귀신들의 두목답게(계 13:9),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가능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도록 유혹의 손길을 계속 뻗치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마귀는 온갖 궤계를 다 사용합니다(벧전 5:8, 살전 5:3).

 

◈ 그러므로 우리가 만나와 흰 돌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여기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은 싸움에서 지면 만나와 흰 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히 12:4).  지금 신자들의 싸움은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으로(엡 6:10-13), 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핍박과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세상 유혹을 동시에 이겨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싸움을 동시에 이기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내주시는 성령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요 14:16-17).  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영적전쟁에 승리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속주의 신앙에 물들지 않기를 원한다면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눅 24:49).

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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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며 여든여섯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사람으로 당시 폴리갑을 잡아서 심문하던 총독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시이저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이 말을 들은 폴리갑은 “내가 팔십 육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내게 나쁜 일을 행하거나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폴리갑이 원형극장 안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폴리갑, 남자답게 담대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마침내 폴리갑은 11시에 경기장에 끌려가 오후 2시에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폴리갑 같은 순교자의 정신을 잘 이어받은 주님 보시기에 단점이 없는 모범된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다 똑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지역과 형편에 따라서 교회의 사정들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 교회는 처음부터 쟁쟁한 주의 종들이 사역한 곳으로 많은 열매가 있었던 곳입니다.  교인들은 분별력이 있고 참고 견딜 줄 알며 엉터리 거짓 선생들이 통하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싸움이 끝난 교회며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안정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대해서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문화와 생활은 있는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2:4-5).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라는 말은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전투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서머나 교회는 늘 환난과 궁핍한 생활 속에 온갖 핍박을 다 받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이 보기에는 가장 불쌍한 교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자세히 보면 ‘서머나’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도 않는데 아마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관점에서 별로 중요한 곳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교회마다 형편이 달랐고 주님도 각 교회 형편에 따라 나타나시는 모습이 달랐는데 모든 교회에 다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책망을 받을 교회에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위로를 받을 교회는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듯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한 결 같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적이 없고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계 2:1, 8, 12, 18, 3:1, 7, 14).

 

본문에 보면 주님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데 하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8). 이 말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주권자”라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며(계 22:13),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시는 분으로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사 41:4).  다른 하나는 주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묘사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은 고난과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요 11:25-26).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해보신 분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이기 때문에(계 1:18), 주님이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지금 환난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무서운 심판을 재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며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실제로는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자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며 그를 대항하여 시비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9:1-5).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로 해서 싸우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행 22:7-8).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핍박을 한다고 해서 복수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눅 6:27-35), 그는 지금 나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상대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울이 멋모르고 날 뛰면서 주님을 대적하여 싸운 것처럼 말입니다(행 26:14-15).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15:18, 행 8:3).

 

◈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무서운 환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계 2:9).  이 교회는 종교적인 핍박과 환난을 많이 당한 교회로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잡히면 정원에 불을 밝히는데 이들을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고 교인들을 양의 가죽이나 짐승의 가죽을 입혀서 산에다 풀어 놓아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살기 위해서 도망치는 이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히 11:37).  뿐만 아니라 서머나 신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족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과격하게 악행과 훼방으로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굶주려가며 힘든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히 10:24).

 

주님은 이렇게 환난을 당하고 가난한 서머나 신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9).  본문에 ‘실상은 부요한 자’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가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부자라는 것입니다(고후 6:10).  여기서 주님의 생각과 우리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사 55:8-9), 우리들 보기에 서머나 교회는 별 볼일 없는 초라하고 가난한 교회로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신앙적으로 윤택한 교회로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가며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 천국백성으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벧전 4:12-14).  그러기 때문에 정말 주님을 잘 믿으려고 하면 물질적으로 궁핍해 질 수가 있는데 그것은 불법과 타협하지 않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2:5-6).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막힌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사 1:15-17).  서머나 교회는 겉은 초라해 보이지만 주님과의 막힌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직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환난은 주님이 함께 느껴지지 않는 고통과 아픔은 없었습니다.  이 교회는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었지만 성도들 사이의 사랑은 풍성했으며 또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체험도 가장 많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편안한 신앙생활은 아닌데 매 순간마다 주님은 그들을 지켜 주시고 피할 길로 열어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는 부유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속이 골병든 교회로서 그것도 여러 가지 합병증을 가진 교회로 평가를 받은 교회였습니다(계 3:17).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는 경제적인 부가 아니기 때문에(마 5:1-11), 하나님 앞에서 부요해지려면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내가 가진 것을 쓰지 않고 어려운 사람을 주면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 주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께 꾸어준 것이 많은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들입니다(잠 19:17).  이런 면에 있어서 서머나 신자들은 주님께 꾸어준 것이 많았습니다.  예를 든다면 옆집이 어려움에 처하면 도와주었고 또 친구가 잡혀가면 그 집 아이들을 대신 돌보아 주고 또 감옥에 있는 자들을 돌보아 주어야 했었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쓴 것이 많았고 그만큼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마 25:34-40).

 

만약 어느 잘살고 어려움이 없는 교회가 있는데 모든 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고 분명히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만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실제로는 가장 가난하고 병든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꾸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약 2:15-16).  내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릴 절호의 기회입니다(잠 22:9).  그러므로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이 많은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면 줄수록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딤전 6:17-19).  그렇다면 이렇게 서머나 신자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핍박을 받아가면서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망을 땅에 두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이 선진들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것입니다.

 

◈ 서머나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유대인들의 훼방이었습니다(계 2:9).  유대인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요 8:31-33).  이 말의 의미는 조상 아브라함이 섬겼던 하나님을 자신들도 잘 섬기고 있으니까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 백성들일까요?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통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마 4:8-9).  이 말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지만 영적으로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요 8:37).  이들은 입으로만 믿었지 행동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막 7:6, 딛 1:1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들을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분문에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라고 말합니다(계 2:9).  여기서 ‘유대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며 ‘사탄의 회’라는 말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교회를 향해 온갖 악하고 더러운 짓을 다하는 사탄의 집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타락하면 불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주님의 자녀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것입니다(벧후 2:20-22).  마치 바울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말입니다(딤전 1:13).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간다고 해서 주의 자녀가 아니고 간판을 걸어 놓고 사람만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은 교회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사탄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환난과 궁핍한 생활을 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은 반가운 소식이 아닌 무겁고 힘든 소식을 전하는데 그것은 이 교회에 당분간 환난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계 2:10).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사탄의 선동을 받아 서머나 교회를 참소하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참소는 사도행전에 여러 차례 기록을 하고 있는데(행 13:50, 14:2, 5, 19, 17:5), 본문에 ‘시험’은 단순히 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서머나 신자들 중에 순교의 영광을 얻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십일 동안’이라는 말은 확실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서머나 신자들에게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통과해야 할 것을 말해줍니다(행 14:22).  다시 말해서 서머나 교회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딤후 3:12).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앞으로 있을 고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키고 계신 것으로 기왕 옥에 갇히고 순교의 피를 흘릴 바에는 세상과 죄와 타협하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십니다(계 2:10).  이것은 무섭고 어려운 시험이 다가오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살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계 13:4-5).  주님의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비굴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긴 주님만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요 16:33).  왜냐하면 담대함이 나중에 큰 상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0:35).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5-7장).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좁은 길로 걸어가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마 16:24).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세 사람이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그들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따르려고 하자 주님은 그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으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13-14).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난의 길을 갈 때 혼자서 가지 않고 주님이 끝까지 동행을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마 28:20),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시 23:4).  왜냐하면 고난의 키를 주님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사 45:7).

 

◈ 분문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0).  여기서 ‘충성’이라는 말은 “믿음이 꽉 찬”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주님에 대한 신앙의 절개를 말하며 이것은 생명을 걸고 신앙을 지키라는 말로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서머나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순교할 것이라는 말씀은 아니지만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 앞에서도 주님에 대한 일편단심 신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계 14:4).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을 위해 고난이 다가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에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그 가운데서 죽을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론 죽는 사람도 생길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는 반드시 길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복음을 알바니아라는 나라에서 전하다가 붙잡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살아나온 YWAM의 사역자 ‘레오나 피터슨’과 ‘에비 머글턴’의 간증은 로렌 커닝햄의 저서『벼랑 끝에 서는 용기』와 『네 발에 신을 벗으라』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죽기 하루 전날에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 구출된 것을 기록한 실화 간증이야기입니다.  반면에 같은 YWAM의 사역자들인 ‘마이크’와 ‘제니스’ 부부는 두 살배기 딸과 3개월 된 아들과 함께 필리핀 산악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부족민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렌 커닝햄 목사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하나님께 이렇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이제 당신의 모든 보호하심이 떠나버렸습니까? 하나님!”

 

이 일이 있는지 며칠 뒤에 태국 내 캄보디아 국경 길에서 의료사역자 9명이 소형 승합차를 타고 사역지로 가다가 게릴라들에 의해 무차별 총격을 받아 모든 유리창은 다 깨어지고 말 그대로 총알이 빗발치듯 그들을 행해 날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격이 끝나고 부셔진 차에서 의료 사역자 9명이 간신히 나왔을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고 그것도 총알이 머리 옆을 스치는 가벼운 상처였습니다.  총알을 맞은 차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부셔졌지만 이들은 멀쩡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로렌 커닝햄 목사는 마치 하나님이 “로렌, 이 제 YWAM의 사역자들이 나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알겠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의 살아계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히 11:6).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둘째 사망”이란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과 불신자들이 들어가는 영원한 형벌인 불못을 말하는데(마 25:41, 계 20:14), 이 둘째 사망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첫째 사망과 구분되는 사망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는 무서운 형벌을 말합니다(계 21:8).  즉, 육체적인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으로 인간의 육체가 멸절이 되지 않고 끝없이 의식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형벌입니다(계 20:10).  그래서 주님은 서머나 신자들에게 고난 받는 것과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고난이 두렵다고 해서 주를 부인한다면 정말 자비가 없는 무서운 심판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10:28).

 

◈ 오늘날처럼 신앙의 절개가 귀한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딤후 2:4).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마귀와 끝까지 싸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엡 6:10-13).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게 책망이 하나도 없는 칭찬만을 받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는 어려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잘 견디어 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해 봐야 합니다.  만약에 진리의 말씀 위에 서서 싸우기를 포기한다면 둘째 사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혼을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요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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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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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교회들이 있고 각 교파와 교리마다 신앙의 모습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각 교회마다 교회로서 특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는 윤리적인 생활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교회는 상담과 내적치유를 강조하고 또 다른 교회는 선교와 구제에 온 마음을 쏟기도 하며 반면에 기도와 성령의 은사를 유난히 강조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제자훈련을 통한 영적인 성숙을 중요시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교회의 모습 가운데서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의 모습이냐 하는데 대한 혼란이 일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단지 그 당시 교회에 대한 평가일 뿐 아니라 앞으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 대한 평가이기도 한데 이 일곱 교회들 중에 반드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계시록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있는데 먼저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으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일곱 세대를 뜻하는 것이라는 학설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 교회를 초대교회부터 주후100년까지 그리고 서머나 교회는 속사도시대인 100년부터 기독교가 로마에 정식으로 공인이 된 313년까지 또한 버가모 교회는 로마 공인을 받으면서부터 점점 세속화되는 590년까지를 말하고 두아디라 교회는 교리적으로 타락하고 배교적인 행위가 많았던 1517년 교황시대까지 그리고 사데 교회는 17세기 말인 종교개혁이후의 시대까지 빌라델비아 교회는 무디와 스펄젼, 피니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이 나온 19세기 말까지이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 미지근한 말세 교회를 상징한다는 학설로서 일곱 교회를 각 시대별로 나눈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1세기 당시의 일곱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학설인데 사실 일곱 교회는 그 당시 대표적인 교회들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었는데 이 해석은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이 그 당시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각 교회들마다 얼마든지 소아시아 일곱 교회처럼 똑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해석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초대 교회에도 있었고 중세에도 있었고 근대와 현대에도 있는 어느 시대에 얼마든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유형의 교회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석은 일리는 있지만 성경과 근접한 해석은 세 번째 해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에베소 지역에 대한 두 가지 특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는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그 유명한 아데미 여신전이 있는 곳으로 가장 음란하고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행 19:24-35).  그래서 신전은 여사제들이 종교적인 행위로 창녀 역할을 하는 신비주의 중심지이기에 부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과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행 19:18-19).  다른 하나는 에베소 교회는 탁월할 주의 종들이 목회를 했던 곳으로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이곳에 와서 삼 년간 복음을 전했고(행 19:1, 20:31), 성경학자인 아볼로가 말씀을 가르쳤으며(행 18:2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목회를 한 적이 있었고(행 18:26), 디모데가 말씀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합니다(딤전 1:3-4).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가장 성경적인 가르침을 많이 받은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 중에 가장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금 촛대를 다니시는 이‘ 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1), 이 말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지시고 교회를 세밀하게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골 1:18).  그리고 ‘일곱별’이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주의 종들인 사역자들을 가리키며 ‘일곱 금 촛대’는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세운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계 1:20).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주님께서 교회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시며 또한 교회를 관할하고 치리하시며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16:18).

 

우리는 이것을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한 말을 통해 알 수가 있는데 교회는 인간들이 모여서 “우리 교회를 하나 만듭시다”라고 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마 16: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세운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행 20:28, 히 9:12).  여기서 교회를 피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히 10:29).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동네 반상회 모임이나 라이온스 클럽 모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켜 분열시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심판받을 것을 재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찰스 콜슨은『이것이 교회다』에서 “신앙 안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교회 안에서 더욱 목소리가 높은 법이다. 반대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거의 목소리가 크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도 목소리를 안 높이시는데 감히 누가 주님 앞에서(교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짓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막장국회”처럼 서로 욕설이 오고가고 멱살 잡고 싸우고 경찰들을 동원시키는 것은 참으로 코미디 같은 웃기는 일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두려운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 본문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보일 정도로 열심히 있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계시록 2장 2-3절 사이에 나오는 단어들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행위, 수고, 인내, 참음, 견딤, 게으르지 않음’ 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 말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거나 믿은 것이 아니라 강도 높은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입으로만 믿지 않고 행동으로 신앙의 열매를 나타낸 것입니다(눅 6:46-49).  다른 하나는 거짓 선생인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았던 교회입니다.  즉 사도바울의 마지막 권면을 잘 받아들여(행 20:29-31), 니골라당의 잘못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대적했던 교회였기에(계 2:2, 6),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니골라당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는데 본문에 나와 있는 ‘니골라’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에 한사람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고(행 6:5),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들은 이단으로서 “율법 무용론”을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폐기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지금은 신약시대인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데 구약의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은 성취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고 얼마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를 받으니까 무도덕주의자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죄를 짓든 쾌락을 누리든 마음대로 해도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 한마디로 영지주의적 이단이었습니다(계 2:14-15).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워낙 탁월한 목회자들로부터 정통적인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반 율법적인 교훈은 씨가 먹혀 들어가질 않았고 그들은 이런 반 율법주의적인 엉터리 신앙을 혐오하고 미워했으며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에베소 신자들을 칭찬하시면서 주님도 이런 자들(니골라당)을 미워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계 2:6).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율법은 지금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마 5:17-19).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롬 3:20, 갈 2:16-17, 21),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게 되고(갈 4:24),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되고(롬 3:20),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롬 7:7-12).  그러기 때문에 율법 안에 있는 도덕법만큼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마 26:36-40, 요 14:21).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들의 삶을 전혀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현대판 니골라당”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가 이런 자들을 교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직분을 주고 또 이들이 교회를 떠날까봐 죄를 책망하지 못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반면에 이들은 교회를 마치 여가이용이나 부담이 없는 교제의 장소로 생각을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믿는 자의 길이 있고 삶이 있는데(마 7:13-14), 예를 들어 삭개오처럼 돈에 노예로 살아온 자가 그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듯이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눅 19:8-10).

 

◈ 본문에 ‘내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3).  이 말은 에베소 교회는 인간적인 야망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으로 보일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당시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대접하며 힘써 수고한 흔적이 있고 문제가 생기면 오래 인내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해결해 나가는 지혜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사도인 이단들을 단호하게 대적했는데 아마 그 당시 거짓 선생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대접을 받으며 거짓된 교훈을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자세한 사정은 알 수는 없지만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것들을 밝혀냈고 이러한 일들을 감당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도덕적 순결과 교리적 순결을 위하여 힘쓰던 교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에베소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범적인 교회로 보였지만 실상 내면 깊은 곳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교회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외형상 보기에는 너무나도 신실한 교회요 교인들이었지만 내면을 들추어 보면 과연 여기를 교회라고 불러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를 정도로 곪아 터질 정도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계 2:4).  본문에 ‘처음 사랑’ 이라는 말은 처음 주님을 믿고 회심할 때 가졌던 복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말합니다.  쉬운 말로 말한다면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은혜의 눈물과 뜨거운 기도가 있었는데 복음을 받아 들인지 3-40년 만에 그 뜨거움이 사라지고 주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차가운 얼음처럼 식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오래된 신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식과 제도만 남아있지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없으며 설교를 들으면서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린 지가 수년 아니면 수십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마 5:4).  그리고 주님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한지가 너무나 오래 되어서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살후 5:17).  그래서 말씀을 듣고 회개하거나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없고 자신들은 교회 생활을 착실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롬 3:11).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은 끝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신들은 이미 의인이 되었기에 십자가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바울이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1:15).

 

왜 사람들이 교회 일에 열심을 냅니까?  그렇게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열심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계 3:19), 그 열심이 종교적인 행위에서 하는 것인지 성령이 주시는 힘과 은혜로 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롬 10:2).  많은 사람들이 교회 생활에 익숙하고 모든 것이 제도적이고 기계적이며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 새로 돌아오는 자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정해진 순서와 시간에 의해 장엄하고 엄숙하게 드리지만 뜨거움이 없으며 헌금은 다른 교회들보다 넉넉한 편이고 목회자도 대단히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분이며 교인들 모두가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뜨거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롬 1:16).  왜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그것은 오래된 교회일수록 자신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 계속 자라나야 할 신자들이 이미 다 배운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엡 4:15).  그러나 윤리적인 삶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십자가의 복음에서 옵니다.  이들은 성령의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오랜 신앙생활을 경험삼아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신종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데는 빠른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마 7:1-5).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것이 바로 오래된 교인들의 특징으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직 자기 힘으로 사는 윤리적인 행위만 남은 것입니다.

 

◈ 본문에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라는 말이 나오는데(계 2:5), 이 말의 의미는 왜 복음의 감격과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열정이 식어졌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라는 것입니다(고후 13:5).  즉 “너희들 옛날에 거짓선생인 이단들을 색출한 것처럼 너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라”는 뜻으로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이 교회에 대해 경고하시길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2:5).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 라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가장 성경에 근접한 해석은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말한다면 교회라는 이름과 건물만 있지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제도에 묶인 형식적인 교회로 전락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에 감격이 없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청산하고 처음 신앙을 가지고 뜨겁게 믿던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합니다(계 2:5).  모든 체면과 염치를 불구하고 자기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함께 찾아내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싫어서 계속 자기 체면만을 지키려한다면 그 교회는 성령의 불길이 완전히 꺼지고 말 것입니다.  마치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처음에는 뜨거웠지만 지금은 모든 교회가 전멸하다시피 쇠퇴하고 박물관이나 관광지로 변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는 유럽에 있는 교회들처럼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박제화”된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조지 바나 연구논문에 의하면 최근 목회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오늘 재림하셔서 자신들의 교회를 평가한다면 어떨 것인가?”라는 내용의 설문 조사를 했는데 질문 대상자 주에 0.5퍼센트 미만만이 자신들의 교회가 그 역할을 신실하게 잘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43퍼센트는 성공적은 아닐지라도 남부럽지 않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으며, 53퍼센트는 인간 영혼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평가는 자신들의 교회에 대해서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갤럽 조사에 의하면 이력서 내용의 과장과 세금포탈을 하는 사람들을 조사해본 결과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윤리적 견해나 행동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히 우리는 남들이 갖지 못한 귀한 특권인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며 소유된 백성인데 말입니다(벧전 2:9).  뿐만 아니라 주님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그런데 왜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는 장소와 마케팅 그리고 건물과 프로그램, 교인수와 재정을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열매보다 더 많은 관심과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영적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엡 6:10-13),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 전투에 소집된 영적군사들이라는 것입니다(딤후 2:4).  그러므로 곤궁한 이 땅에 참된 소망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이 지금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영적인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이 모든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며(계 2:7),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을 경고하시는 것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 깨닫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기는 그에게’ 라는 말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하도록 힘써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 믿을 때부터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전쟁입니다(엡 6:10-13).  이렇게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죽음과 질병과 고난이 완전히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데(계 21:1-4), 즉,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확실히 보장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종교적인 의식과 제도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타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윤리나 도덕적인 삶에 있지 않고 무슨 의무감이나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있습니다(빌 4:13). 이 말은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난로만 가진 에베소 교회처럼 정통적이고 교리적인 차갑고 냉랭한 신자가 되지 말고 난로 안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오순절 초대교회처럼 성령의 뜨거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향한 신앙의 온도는 지금 얼마나 됩니까?  한번 측정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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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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