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

칭의와 행함

꿈꾸는 사람들 2025. 6. 1. 11:11

대다수의 학자들은 야고보가 예수의 말씀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는 마태복음 12장 37절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는 말로 ‘의롭다 함을 받거나’(디카이오테세) ‘정죄함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미래 시제는 확실히 심판의 날(마 12:26), 즉 인간이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평가를 받게 될 때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즉 예수가 우리가 한 말에 따라 이루어질 미래의 우리의 칭의에 대해 언급하신 것처럼, 야고보도 우리가 행한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미래의 칭의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롬 3:28)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이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거부한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이자(약 2:17, 26), ‘헛된’ 믿음이다.  즉 상응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약 2:14).  이런 믿음이 지닌 결함은 무엇일까?  이러한 믿음은 활력과 생명력과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개념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무언가 동의하는 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믿으면서도 귀신보다 못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약 2:19).

우리는 이것을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살아 있고 능동적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힌다(약 2:15-16).  구원하는 믿음은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함으로 그 믿음의 실재를 입증한다(약 2:18).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약 2:22).  오직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결코 믿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약 2:24).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Timo Laato의 말을 인용하면 ‘선한 행위는 향후 믿음의 생동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약 2:1). 

따라서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것이 된 칭의는 우리의 최종적 영화를 보증하며, 이를 통해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롬 8:30).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에서 모두 믿음과 행위는 절대 불가분 한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논리적으로는 분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행함으로 얻는 칭의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