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고(출 15:26, 호 7:1), 그분은 인간의 요청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치유하시기에(삼상 2:6, 시 72:18, 103, 3, 136:4), 사도행전에서 스테반(행 6:8)과 빌립(행 8:5-8), 그리고 베드로(행 3:1-10)와 바울(행 14:8-10)이 기적을 행한 것에 대하여 증거 할 때(행 5:12),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리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10:1, 눅 10:1-20).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는 결코 치유자로서 명성을 얻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으며(행 행 3:12), 이것에 대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자주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치유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거나(행 2:43, 5:12), 단지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행하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4:3, 15:12).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병 고치시는 사역(마 4:23-24)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어떤 여건 하에서 치유가 자유롭지 않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요 5:19),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 대한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 3:17)조차도 항상 임의대로 치유하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막 9:7)의 신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막 2:10), 그분에게 질병을 고치는 능력이 과연 필요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성경을 찾아보면 사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마 8:16), 여러 번 “그는 그들 모두를 다 치료하셨다”(마 12:15)라는 말을 우리는 접할 수 있지만(눅 6:19), 유독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삼십 팔년 된 병자 한 사람만을 고치셨습니다(요 5:1-15).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연못가 주변에 있는 다른 병자들을 무시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고치셨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직후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에 개입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5:15-18), 이 논쟁 도중에 예수님은 연못가에서 “왜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그날 연못가에서 한 사람만을 고치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삼십 팔년 된 병자만을 고치시기 원하셨기 때문이고(요 5:30), 만약 아버지께서 그 병자를 치료하시길 원하지 않으셨다면(요 12:49), 아마 예수님 자신도 병자를 고치실 수 없었고(요 14:10),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일을 행하신 적이 없었고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일을 하셨습니다(요 8:28).

 

이렇게 예수님께서 모든 여건 하에서 마음대로 치료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사건이 고향 나사렛에서 일어났는데, 주님은 그곳에서 아무런 권능을 행하시지 않고 소수의 병자만을 고치신 것을 마가는 증거하고 있고(막 6:5), 마태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3:58).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어떤 경우에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아들의 치유사역이 제한하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임의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독립하여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자신의 전능하심(마 8:3)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을 통해 철저히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빌 2:5-11).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행하셨다면 사도들은 더 말할 나이가 없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5:5), 주님은 동일한 것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을 행할 직무를 위임하셨지만(요 5;22), 아들은 자신의 권위에 따라 독자적으로 심판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 8:28).

 

제자들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문’이라는 불리는 성전 문 앞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도록 베드로를 사용하셨을 때(행 3:1-3),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제자들을 바라보았지만(행 3:11),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이 이 치유로 인해 자신들을 높일 것을 두려워하여 병자가 고침 받은 것은 자신들의 사도적 능력이나 거룩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 적이 있었는데(행 3:12), 한 마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결과라는 것입니다(롬 9:16).  이와 동일한 원리가 사도 바울의 삶속에서도 하나의 기적에 의해 예증되는데,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설교를 듣다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서 저자 누가는 바울은 그에게 치료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고침 받았다고 기록합니다(행 14:8-10).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치료받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예수님처럼 그 치유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마 9:27-30).  또 다른 예증은 제자들이 간질병이 든 소년을 고치지 못한 경우인데(마 17:14-21), 이 사건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는 것과 모든 질병에 대한 권세를 받은 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는데(마 10:1), 이것은 치유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누군가 마가복음 16장17-18절과 야고보서 5장 14-16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기도할 때마다 병든 자가 다 고침을 받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치유의 은사는 개인이 임의대로 원하는 장소나 시간에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이 사이비가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신실한 사역자라면 그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날 것인지 혹은 어떤 종류의 지식의 말씀이 치유를 위해 주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19절 말씀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누가 고침 받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시고, 또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의 종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사역자는 누가 치유될 것인가를 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음성(지시)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사역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처럼 간절히 고침(마 15:21-28)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의대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이비 사역자를 찾거나 또는 찾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사도들조차도 임의대로 고칠 수 없었다면 오늘날 치유사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대단한 능력의 종인 것처럼 자랑하거나(고전 1:29), 높이지 말아야 하고(눅 16:15), 만약 누구든지, 언제나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와 오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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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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