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농장으로 유명한 South Africa Worcester의 어느 강당에서 Andrew Murray와 함께 사역하던 부목사 J. C. de Vries의 인도로 60여 명의 교회 청년들이 기도 모임을 가졌다.  이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는 동안 갑자기 성령의 불이 임하자 사람들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와 임재를 느끼며 일시에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858년경 남아프리카 공화국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Murray 목사는 다른 예배실에서 저녁설교를 마치고 교회 장로 한 사람을 통해 청년모임에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고 현장으로 갔을 때,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동시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무질서한 상황에서 부목사는 통제할 생각이 없는지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Murray는 청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당부하였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큰소리로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분의 목사입니다. 조용히 하십시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도 호응하지 않고 그들은 계속 기도를 하면서 견딜 수 없는 죄의 무게로 인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몰두해 있었다. 

부목사 역시 하나님이 임재 앞에 거룩함과 경외함으로 계속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다시 Murray는 힘껏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셨지만 결국 화를 내며 예배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여기는 모든 게 엉망이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날도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모임에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무엇보다도 청중들의 자발적인 통성기도가 터져 나올 때마다 신비스러운 천둥소리가 세차게 울리면서 교회 건물 전체를 감쌌다. 

이번에도 Murray 목사는 통로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려고 동분서주할 때, 마침 미국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한 부흥의 현장을 보고 돌아온 무명의 한 성도가 그에게 다가와 “이 교회 목사님이시군요. 당신의 행동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 일어나고 있는 부흥을 목격하고 왔는데 이와 꼭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곳에 주의 영이 역사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후에 Murray는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보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는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과 그동안 성령의 깊은 역사를 방해했던 것을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통회 자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였다. 

이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인 소설이나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눈과 귀에 성령으로 할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막 4:12).  이것은 J. Edwin Orr의 책 『The Fervent Prayer』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Murray는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상 부흥이 임했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인간의 감정의 폭발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부흥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교리 안에 갇힌 신학과 편협한 신앙이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오늘날 Andrew Murray의 깊이 있는 가르침과 저술을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나 역시 Murray가 쓴 모든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여기서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신학자나 목사라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엡 1:17-19),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이 감겨 있는’(마 13:14-15) Murray처럼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고전 2:14). 

이러한 일은 1730년-174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에 있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 때에도 일어났었다.  그 당시 Jonathan Edwards는 미국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사람으로 감정에 치우친 행동과 현상,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사이의 쉽지 않는 차이점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성령의 나타남의 현상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중 『The Great Awakening /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Series, Volume 4』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큰 은혜에 복받치는 것 같았고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아픔을 느끼면서 방안은 통곡과 꺼꾸러짐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부르짖음과 고꾸라짐, 경련과 같은 현상들과 함께 애통함과 기쁨도 방안 가득히 충만했다”라고 말한다.  또한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서는 “어떤 경우는 하나님을 향한 큰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기도 했다. … 때로 그들은 소리 높여 크게 찬양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고 때로 그들은 혼절하기까지 했다”라고 증언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날 때 먼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적 대각성을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열매로 판단할 것과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다섯 가지를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에서 제시하였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일어나는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설사, 그 현상이 눈에 거슬리고 보기에 낯선 것일지라도 이러한 다섯 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만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둘째, 죄를 미워하고 의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가?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  셋째,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는 결과를 낳는가? (성경에 대한 높은 관심).  넷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가?  (건전한 교리와 신학).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그러면서 그는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강조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이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걸림돌 역할을 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서 더 많은 배교와 무서운 범죄를 보게 될 것과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면 또 다른 걸림돌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를뿐더러 그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언적인 말까지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면 바리새인의 비판 정신과 불신앙 때문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Edwards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패역하고 트집을 잡는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을 하실 때마다 물(?) 귀신처럼 물고 늘어졌다(마 12:22-37, 막 3:20-30, 눅 6:43-45, 11:14-23, 12:10, 요 8:1-11).  얼마나 지겹게 물고 늘어졌는지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런 일은 지나간 역사 속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종처럼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쟁을 일삼는 목사들 말이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들이다(막 14:21).  나는 이런 자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고 싶다(마 23:33).  팔레스타인과 시나이 반도에는 독사가 많다.  그러면 한국은 ‘개’(Dog)가 많은데, 예수님이 오시면 이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빌 3:2).

사실 교회사를 보면 참 부흥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 이것을 가장 반대했던 세력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가톨릭이 신앙의 위인들을 이런 이유로 박해했고, 개신교 안에서도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이유로 핍박했던 것이다.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갈 4:29).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상기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된 자들을 핍박하는 것 말이다. 

이들이 핍박을 받은 이유는 제도주의와 전통과 예의, 그리고 질서와 형식과 의식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몇 세기 동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법에 수백 개의 종교적인 전통들을 추가하여 유대인의 각 영역들을 통제하면서 모든 규칙과 의식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무지한 자로 낙인찍었다(막 7장).  Murray 역시 모든 것을 질서대로 통제하려는 것과 위엄 있는 거룩한 종교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한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애즈베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성령에 의한 각성 운동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장난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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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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