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의사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가끔 아내가 “남자는 여자가 아이 낳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모를 거야”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 당시 아내가 겪었던 고통, 분만 과정에서 얼굴에 실핏줄이 터진 것은 나에게 있어 조금 충격적 있었다.  하와가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여성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좋아했지만 아내처럼 얼굴 전체의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운동을 한 적은 없다.  사실 이러한 예화까지 든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밀려온다.  

가령 아기를 낳아 본 적이 없는 처녀가 마치 아기를 낳아본 경험 있는 여성 같이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황스럽게 늘어놓는다면 어떨까?  이는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과 과장이 심한 사람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인 ‘공상허언증’(Pseudologia Fantastica)에 걸린 중증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신이 주장하는 전체적인 상황이 논리적이지 않다.  둘째는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 극도로 싫어한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사이코패스’와 같다.  한 마디로 이 병은 조현병 시초다.  

그렇다면 방언하지 않는 사람이 방언에 대해 신학적 혹은 성경적으로 이러쿵저러쿵 어떠한 주장을 내세우면 어떠할까?  하지도 않는 방언에 대해 무엇인가 다 아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대는 것 말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이다(딤전 4:2).  아기를 낳는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처녀가 아기를 낳아본 것처럼 죄책감 없이 거짓으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마구 지껄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D. A. Carson 박사는 이런 사람들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며 떠들어 대는 것을 ‘소름 끼치는 허튼소리’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소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중에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자료들을 수집해서 무엇인가 다 아는 것 같이 말하면서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마치 경험해 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때론 그들의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리기도 한다.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나불거린다.  하지만 서울 가 본 놈하고 안 가 본 놈하고 싸우면 서울 안 가 본 놈이 이긴다.  서울 가보지 않는 놈이 오히려 더 그럴듯한 이론이나 과장된 이야기를 통해 서울 갔다 온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하고 고집 센 사람이 우기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은사에 대해 말만 하면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로 병적인 증세를 보인다.  이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Martin Luther가 외쳤던 ‘오직 성경’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성경을 증거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단이 아닌 이상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이단적 사상을 가진 정신 나간 목회자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성령의 은사를 허락해 주셨는데(엡 4:7-12), 왜 그 은사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느냐는 것이다.      

은사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는 교회 창설을 위해 주어진 것이고 사도직과 연결된 모든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것을 지겨울 정도로 강조한다.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믿음의 분량대로 믿기 때문이다(롬 12:3).  이들은 성경 말씀을 엄청 강조하고 줄기차게 증거 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은 진리의 말씀(골 1:5), 즉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벧전 1:23), 분명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야 정상적이다(롬 15:18).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4:12).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복음이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살전 1:5).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표적과 기사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믿는다(히 13:8).  그런데 말씀만을 지독하게 강조하는 교회는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많이 모인다.  공짜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빵만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요 6:26-27).  문제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사에게 종합 진찰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은 육체적으로 건강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검진을 받기 전까지 말이다.  하물며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영적 종합 검진을 받으면 교회 안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 귀신 들린 자, 병든 자가 있어도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다(눅 4:31-37).  그저 죽어 있는 메마른 메시지만을 전한다.  나는 목회자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쫓아내기 전까지는 그 더러운 귀신은 교회 안에 잠복해 있다고 믿는다(눅 4:31-37).  마치 가버나움 회당에 귀신 들린 자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막 1:21-28).  성령의 은사에 적대적인 자들이 이런 사역을 행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Lloyd Jones는 성령을 빼놓고 말씀만을 강조하는 것은 교리적으로는 지극히 정통이라고 말하면서 현대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사데 교회처럼 그 속에 생명력이 없어(계 3:1), 죽은 정통주의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목회자 입으로 선포되는 그 모든 말씀은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볼로처럼 말씀을 폭넓게 연구하고(행 18:24), 본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심지어 아람어 성경을 들먹거리며 신학적으로 탁월한 학문을 소유할지라도 그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성경지식이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한다(고전 4:20).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진리라면 그 살아 있는 말씀 속에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요일 5:7),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살전 2:13).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마 5:1-2), ‘성령의 사역’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 12:28).  주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진리의 말을 가르치셨다(마 4:23).  다 끝난 것인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눅 11:20),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막 1:29-34), 주의 능력으로 행하셨다(눅 5:17).  여기서 주목할 구절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병 고치는 권세를 주신 적이 있었고(마 10:1-15),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도 똑같은 명령을 내리셨다(눅 10:1-20).  또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7-18).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막 16:20). 

사도 바울 역시 바나바와 함께 이고니온에서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고 한다(행 14:3).  사실 고린도에 오기 전부터, 그리고 온 후에 이미 바울은 수많은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했다(행 18:1-17).  빌립보에서는 힘 있게 사역을 시작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대로 거의 황폐화되고 말았다(행 16:16-40).  이와 비슷한 일들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겪었다(행 17:1-15).  아덴에서는 어떠했는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해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행 17:16-34).  요지가 무엇인가?  복음의 능력은 날카로운 지성이나 논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학식과 준비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은 그들의 회심의 역사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다(고전 2:3-5).        

오늘날 교회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에는 열심이 특심이다(행 15:35).  그러나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들에 대해서는(고전 12:7), 바리새인처럼 적대적이다(마 9:34).  다른 것들은 다 주님을 위해 따른다고 나팔을 불어대면서 유독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만약 그 당시 그런 일들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했다면(요 14:12), 현대 교회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벧전 2:2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오직 말씀’이라고 말할 때는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을 말하는 것인지(눅 1:37) 메마른 성경지식이나 죽은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렘 23:29).  ‘믿음’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 있는 믿음(히 11:6)을 말하는 것이지 죽은 믿음이 아니다(약 2:26).  다시 말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진리의 말씀을 강조해도 그 말씀에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으면(막 16:20), 그 가르침과 설교는 죽은 말씀이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 성령의 일을 말해주는 것은 썩은 고기를 먹는 들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다(마 7:6).  구약 율법에 따르면 돼지(레 11:7, 신 14:8)는 불결한 동물로 일편단심 먹는 것만 알지 값비싼 진주를 모른다.  돼지가 진주의 가치를 아는가?  만일 성령께서 깨닫는 마음과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열어주지 않는다면(마 13:1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을 때(요 1:1-18), 바리새인들이 불신의 눈을 가지고 평생 그분을 핍박한 것처럼 대적할 것이다(요 8장).  예수의 이름으로(행 3:6),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행 10:38), 기적이 일어나더라도(요 11:1-44),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지 않는다(눅 12:10).  이런 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복음의 가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경멸하고 돼지처럼 발로 밟고 내던져 버린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자신만이 가장 성경적인 사람으로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고’(고전 4:6),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이런저런 신학적 용어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회 목회자들을 비판하고 정죄한다.  나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약 2:8),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가 된다는 것이다(약 4:11).  하나님의 위상을 찬탈하는 이런 자들에게 야고보는 말한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이런 부류의 사람은 신뢰와 진실보다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보이기를 위해 신앙생활에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는 논쟁(딛 3:9)을 통해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한다.  한 마디로 욕망이 높은 ‘관심종자’다.     

우리는 Jonathan Edwards가 『부흥론』에서 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목사들은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키시는 데 있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사용하시는 다른 목사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기심 때문에 참 성령을 소유한 설교자들을 마치 거짓 영의 영향을 받았거나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가식적인 위장꾼 들이며…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부흥의 흠집을 계속 열거하고 지적함으로써 부흥 속에 있는 선하고 영광스러운 것들보다 결함을 지적하기에 급급하다면 우리는 주의 일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분을 대적해 싸우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성령을 대적하는 죄만큼 인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한 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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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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