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성숙해지는 과정과 성령의 새로운 경험을 맛보는 여정에서 자신의 삶 가운데 숨겨져 있던 치유되어야 할 새로운 영역들이 마주치게 되는데 어떤 상처는 하나님의 빛이 조명되는 순간 치유되기도 하지만 어떤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치유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필요한 모든 것은 회심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잖아요. 옛것은 다 지났거든요!”(고후 5:17).  사실 이러한 확신은 두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문제는 말 자체는 맞는 말 같지만 실제의 그들의 삶에서 아직 옛것이 다 지나갔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골 3:1-6), 또한 성경 자체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히 12:4).  다시 말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천사 같은 삶을 산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여러 문제들, 예를 들어 어려움과 역경, 그리고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며 모든 신자들은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고후 5:1),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롬 6:12-13).

 

사실 사탄은 이미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죄의식을 느끼도록 사람들을 유혹하지만(계 12:10), 어떤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발람이나(민 24장), 사울처럼(삼상 19:23), 성령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전혀 없습니다.  즉 죄악에 빠져 들게 된 사역자들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역을 행하도록 허용하실 때가 많은데 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걸음마를 배우다가 넘어졌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내다 버리는 사람은 없듯이 부모는 그 자녀가 결국 걸을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사역자가 넘어졌다고 해서 단번에 진멸해 버리지는 않으시지만(사 42:3, 마 12:20),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실수와 고의적인 반역 행위를 구분하시는 분이시기에(시 9:8, 렘 11:20), 고의적으로 죄에 빠져든 사역자에게는 마땅한 징벌을 내리고(히 10:26), 걸음마를 배우다가 자주 넘어지는 사람에게는 실수 많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크나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 21:15-19).

 

이렇듯 연약한 사역자에게 있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그분과 온전히 친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충만을 통해 능력을 받으셨지만(행 10:38), 그분의 권세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나온 것으로 주님은 몇 시간이든 기도하시는 가운데 아버지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고(막 1:35, 눅 5:16), 또한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일치시키셨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권능이 아니면 어떠한 일도 행치 않으셨습니다(요 5:19, 7:16-18).  우리들 역시 성령충만을 통해 예수님처럼 능력 받을 수는 있지만(막 16:17-20, 눅 24:49, 요 14:12),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역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를 통해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귀신들을 내어 쫓으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충만을 통해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되는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신 것처럼(요 7:16-17),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을 행하셨기 때문에(요 5:30, 8:28), 그 성공률은 백퍼센트였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 차이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 그 뜻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행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관문은 능력을 부여 받는 일이라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즉 우리의 뜻과 그분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기에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는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요 12:49).  사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렘 29:11),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고(눅 4:18), 사랑과 기쁨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끔 사역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막 9:38-40).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이러한 핵심적인 영역들에 대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리라는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도구로서 성령충만하게 사역을 행할 수는 있겠지만(고전 12:11), 일정 시점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역사를 일으킬지에 대해서 아는 일이 그다지 쉬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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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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