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급 목회인가, 자비량 목회인가?”라는 이슈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치열한 논쟁을 일으키는 문제 중에 하나인데, 이때 유급 목회보다는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8장2-3절로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9장12절에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면, 당시 랍비들은 손일을 배우도록 요구되었고 실제로 젊은이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직업 훈련을 받도록 촉구하였는데, 장막을 만드는 기술자인 바울에게 있어 이 기술은 확실한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가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린도에는 여러 종교를 전파하는 선동가(煽動家)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가르치는 선생은 자신의 학생들로부터 후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갈 6:6, 고전 9:4), 자신이 이 권리를 포기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교회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고(고전 9:12), 값없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가 어떤 저의를 지니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고전 9:18).  쉽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해 가르침을 주는 그런 선생과는 다르다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이런 일로 장애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학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바울의 예를 들어가며, 자비량 사역은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을 하기 때문에 교회 부패에 천적이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심각한 ‘돈’ 문제를 없으려면 오늘날에도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바울이 이사야 52장5절을 인용하여 로마서 2장24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불신자에게 모독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현대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성적인 문제와 명예욕)들 중에 하나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딤전 6:5), 교회재정에 대한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유급 담임목사는 로마에 의해 공인된 가톨릭 사제제도에서 나온 것으로 비성경적인 제도일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직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철폐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거나, 오직 자비량 사역만이 오늘날 현대교회에 필요한 것이고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 혼자만의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역자가 따라야 할 ‘집단적인 강령’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비량 사역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조금 특별하거나 성도들에게 짐 지우지 않는 스스로 돈에 깨끗한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바울의 자비량 사역이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목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먼저 베드로전서 2장21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역자들이 따라야 할 원형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성경적으로 살펴보면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버지 요셉에게(마 13:55), 목수 일을 배워 평범한 노동자로서 충실했던 분이셨고(막 6:3), 죄를 인정할 필요가 없었지만(요 8:46, 고후 5:21, 히 4:15, 요일 3:5), 세례요한으로부터 회개를 위한 물세례를 요단강에서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막 1:9), 하나님께서 필수적으로 요구하신 일인 메시야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 4:1).  그리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마 4:13), 고향 나사렛을 떠나(막 1:9, 요 1:46),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온 마음을 쏟으셨습니다(마 4:17, 막 1:15).  한 마디로 목회이외에 다른 활동(목수 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솔직히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러한 목회사역을 말하면 어떠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고, 그러기 때문에 당나귀처럼 쓰임을 받았던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목회사역이 오늘날 모든 사역자에게 있어 유일한 모델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제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이들의 파트너인(눅 5:10),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직업은 ‘어부’였지만(막 1:16-20),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가족과 직업과 재산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를 위해 다른 직업을 일절 갖지 않는 가운데 순교할 때까지 목회에만 전념했습니다(마 4:18-22).  물론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가 주도해서 다른 여섯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적이 있었지만(요 21:3), 이것은 일곱 명의 제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마 28:7),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막 16:7), 그분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은 것입니다.  사실 돈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가룟유다 한 사람만 빼놓고(마 26:14-16, 요 12:6), 제자들 모두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는 가운데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목회에만 전념을 했습니다(막 10:28).  따라서 바울이 아덴에서의 선교사역 실패로 인해(행 17:34), 고린도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어 시작하게 된 자비량 사역을 오늘날 모든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룟유다처럼 돈 때문에 사역하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심과 소명 속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순회사역자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셨던 사역은 지역교회 목회자에게 있어 성경적이기 때문에 유급목회만을 두고 삯군목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판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바울처럼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자비량(선교) 사역자도 필요하지만, 베드로나 안드레처럼 지역교회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역에 전념하는 유급목회자도 필요하기 때문에 자비량 사역만이 성경적이라고 못 박지 말아야 하고 교회에서 정해진 사례를 받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역자나 평신도는 자신이 갖지 않은 다른 은사를 갖고 있는 사역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에 충성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상급과 칭찬이 있겠지만(고전 4:2), 만약 자신이 하는 사역만이 가장 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로마서 14장4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른 사역자를 판단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약 4:11-12).  그러기 때문에 바울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면 바울같이, 베드로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면 베드로같이,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르는 것이 성경적이지(롬 12:3-6), 자비량 사역만이 성경적인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을 장황스럽게 늘어놓으면서 어느 특정 구절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마지막 대변인이 되는 것처럼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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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꿈꾸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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